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59화 (359/1,009)

티르시의 발치에서 안개가 피어났다.

그건 죽음 그 자체인 것처럼 차갑고 시꺼맸으며, 그림자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것처럼 느리게 넘실거렸다.

─스멀.

망자의 손처럼 손가락을 펼치며 어둠의 안개가 뻗어왔다. 가장 먼저 노려진 건 선두에 있던 시냐티오였다.

〈……어둠과 음(陰)의 마나? 아니, 조금 다르군요.〉

시냐티오는 물러나지도 않고 오러를 감은 십자가로 공격을 받아쳤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그건 받아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십자가는 어둠의 안개에 닿자마자, 용광로에 빠진 얼음처럼 증발해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징벌집행관이 무기로 쓸 만큼 뛰어난 재질의 십자가에 무려 오러까지 감았는데 말이다. 눈을 부릅뜬 시냐티오는 처음으로 고함을 터트렸다.

〈여러분, 피하십시오!!〉

본인은 말한대로 실천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실드 마법 등으로 몸을 지키던 이들은 반응이 늦어졌다.

미네르바는 마법사의 실드를 유령처럼 파고드는 어둠의 안개에 숨을 들이켰다.

─슈확!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라리루라가 마나를 뻗었다.

〈꼭두극〉의 실이 미네르바와 위험권에 있던 부하 2명을 낚아채듯 구해냈다.

스즈즈즈…….

미네르바가 서있던 땅에는 어둠의 안개가 파고들었는데, 그 매끈한 단면을 보면 피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는 대충 상상이 갔다. 씨발, 무슨 기술인진 모르겠지만 존나게 위험하네.

목숨을 건진 미네르바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서커스만이 아니라 싸움에도 능하군.〉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미네르바의 말에 찔리는 게 있는 라리루라는 가성을 냈다.

며칠 전까지도 우리 후배님을 찾던 미네르바는 쓴웃음을 그 오리발에 띄웠다가, 표정을 다잡았다.

〈크흐하하! 평생 사교계에 연이라곤 없었던 몰락 귀족가의 계집이다! 너희도 명색이 귀족이라면 댄스를 추는 법이라도 알려주지 그래!〉

디아볼로는 줄행랑을 치는 우리를 비웃으면서 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병신이 우리 보고 쪼개놓고 자기도 튀고 지랄이네. 나는 걍 그렇게만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품위도 버리고 도망치던 귀족들은 그 도발에 넘어가서 분개했다.

〈거기 서라! 이 미천하고 비겁한 놈아!〉

〈시냐티오 경! 저 자를 쫓아가 주십시오!〉

그들의 악바리에도 시냐티오는 묵묵무답으로 벌집 피자가 된 자기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부웅!

그리고 티르시에게 씹창난 무기를 겨누면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일을 저지르고 도망친 흑마법사보다 저쪽이 훨씬 더 위험할 것 같군요.〉

〈아니, 그러니까 너는 저 자를 쫓아가야 한다.〉

〈적이 위험하다면 더더욱 디아볼로를 놓쳐선 안 됩니다.〉

나랑 미네르바의 말이 겹쳤다.

우리는 0.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놈이 계획한 바가 아니다. 정녕 유리했다면 물러날 게 아니라 계속 몰아붙였어야 해.〉

〈저 친구 표정 멕아리 없는 것 보십쇼.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디아볼로가 저 친구를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면 저희한테 승산은 없습니다.〉

시냐티오는 우리의 말에 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인상을 썼다.

〈……이해했습니다. 저 여성을 멈추는 법을 듣고 오죠.〉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시냐티오.

감정적이 되니까 표정에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나왔다. 저래서 평소에 무표정을 짓고 다니나 보다.

〈네 목숨을 우선하도록. 네가 죽으면 하늘의 균열을 닫을 사람이 없다.〉

〈그렇게 하죠.〉

시냐티오는 대충 대답하고 디아볼로를 뒤쫓아서 뛰어갔다. 어택땅 찍은 벌쳐처럼 존나게 빠른 속도였다.

나도 기분 같아선 내가 직접 디아볼로 그 좆부랄럼을 족치고 심문해버리고 싶었다. 그게 내 짜증도 풀리고 결과도 확실하겠지. 하지만 그 방법은 문제가 많다.

맞다이에서 내가 많이 후달릴 것 같다는 점 말고도, 머리가 훼까닥한 티르시를 두고 갔다가 호위랑 같이 따라온 귀족들이 뒤져나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랬다간 기껏 구해냈는데 티르시가 귀족살해죄를 뒤집어쓸지도 모를 일이었다.

뭣보다, 디아볼로 새끼를 방치한다면 그런 태평한 걱정은 할 수도 없게 되겠지만 말이다.

〈전투병, 산개! 적의 공격을 막으려 들지 마라!〉

미네르바의 지시에 그녀의 병사들이 흩어졌다.

다른 귀족들은 그걸 흉내내지도 못하고─호위를 산개하면 자기가 위험해지니까─ 어영부영 거렸다. 나는 그 꼬라지에 열이 뻗쳐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귀족 분들은 다치지 않게 1명씩만 데리고 후방으로 피해 계십시오! 전투는 여러분의 호위와 저희가 맡겠습니다!〉

물론 입 밖으로 나온 건 타산적인 계산을 거친 표현이었다.

쟤들한테 발목 잡지 말라고 해 봤자 좆이나 그러겠다. 쓸데없이 일 커지게 하지 말고 멀리 꺼졌으면 좋겠네.

〈아, 알겠네!〉

〈병사들, 미안해요!〉

걸음나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는 귀족들!

경매나 즐기러 온 귀족들에게 강단성이나 전투력을 바랄 순 없었다. 예외라고 해 봤자 미네르바와 다른 1명 정도겠지.

퓨퓨퓨퓽─!

그 다른 1명의 화살이 5발 정도 곡선을 그리면서 티르시의 다리를 노렸다.

티르시는 변함없이 자다 깬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서 공격을 맞았다. 하지만 햇빛에 드러난 그녀의 매끈한 다리에는 생채기 1개 나지 않았다.

〈……안 통하네요.〉

중얼거린 프리모르는 자기한테로 뻗어오는 죽음의 손길을 피해냈다. 자기한테 공격이 날아왔는데도 그거면 충분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목은 분산시킬 수 있겠어요. 궁수를 더 많이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거라면 저희도 도와드릴 수 있죠.〉

─휙! 촤아아악!

여도적과 한스가 동시에 연막 포션병을, 참격을 날렸다.

티르시는 주의가 그들로 향해 있던 만큼 이번에는 죽음의 손길을 여러 개 모아서 날아온 공격을 지워버렸다.

프리모르의 무표정을 본 여도적은 혀를 내둘렀다.

〈어째 마님이랑 분위기가 닮지 않았어? 그럼 저 아가씨가 티르시 아르마슈나스겠네.〉

〈그런가 보군요. 다른 분들께 살려서 제압해 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어요. 저희만이라도 노력해 봅시다.〉

마법사가 주문을 빚으며 말했고, 티르시는 그렇게 공격을 대비하는 그들에게서 다시 눈길을 거뒀다.

─일렁.

굶주린 망령처럼 움직인 손바닥은 다른 사람을 노리거나, 공격을 막거나 했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움직임을 취하지는 않았다. 저 위력이라면 얼마든지 공세를 취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냥 넋이 나간 얼굴로 단촐한 공방을 계속할 뿐.

휴식 없이 72시간 생방송을 하던 하꼬 스트리머한테 슈팅 게임을 시켜도 저렇게 영혼 없이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키잉.

나는 마법이 등장할 때마다 그랬듯 오딘의 눈을 켰다.

저 어둠의 안개는 이 눈으로도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좀 시간을 두고 봐야 할 것 같았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내가 보려던 건 애초부터 티르시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조종당하고 있군.’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대충 어떤 마법인진 알았다.

흑마법이냐고? 아니다. 그렇다고 부작용이나 실패인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저 상황을 설계한 개발자한테 있어서는 티르시의 저 모습이 올바른 결과물일 것이었다.

사람의 자아와 존엄을 무시하는 애미 뒤진 짓을 올바르다고 말하면 말본새가 좀 많이 좆 같으니까, ‘계산대로’라고 하는 게 맞을까.

나는 어둠의 안개를 피하며 눈을 찌푸렸다.

존나 스치지도 않았는데 뼈까지 시려운 냉기였다. 그것도 그냥 냉기라기보단 오한이나 소름이 돋았을 때 느껴지는 생리적인 추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러를 감은 무기도 지워버리는 마법 아닌가.

저거에 닿으면 야수회귀의 방어력도 얄짤없다.

‘이게 초대 원로원 가문이 황제와 대적한 힘인가?’

당연히 무슨 전설의 검이나 존나 뒤지게 쎈 골렘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사람을 존나 쎈 인형으로 만들어서 조종하는 거였다니!

닿기만 해도 증발해버리는 검은 안개? 그런 건 저 힘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저렇게 된 아르마 뭐시기 가문 사람은 말 그대로 전쟁병기였다.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일국을 상대로 배 째라식 협상도 시도해 볼만 했다.

‘하지만 티르시한테서 구신의 마나는 느껴지지 않아.’

그게〈편찬대대〉랑은 다른 점이었다. 착안점이나 원리는 비슷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새끼들의 시조가 초대 원로원과 연관이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집중력의 분산을 막고자 눈깔에 힘을 더 주었다.

이 마법인지 유산인지를 후손에게 남긴 새끼가 천하의 호구 상병신 빡대가리가 아니라면, 저 상태의 티르시를 아무나 조종할 수 있게 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아마 아르마 뭐시기 가문의 혈족만 다룰 수 있다던가, 그런 거겠지.’

디아볼로는 그 제한을 어떠한 방법으로 우회하려 들 거다.

‘그러니까 나는 시냐티오가 디아볼로 새끼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이 눈깔로 티르시의 정신을 구속하는 마법을 분석하면 돼!’

구조만 알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왜인지는 몰라도 티르시는 저 소멸의 안개를 광범위로 살포하는 짓은 하지 않고 있다.

사람 머릿수도 되겠다, 건성으로 싸우는 티르시를 상대로 시간을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그런 생각에 어그로를 끌고자 빼액댔다.

〈당신을 제네바 협약 위반으로 체포한닷!! 죄목은 독가스 살포 및 타국 병사, 장성에 대한 선제공격이닷!!〉

─으르르 컹컹! 어그로가 효과가 있었는지 티르시의 고개가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어 씨발, 혹시 화났어요? 그럼 취소.〉

티르시는 내 말에 눈을 사백안으로 뜨며 삐거덕거렸다.

─툭.

실이 끊겨서 힘이 빠진 인형처럼, 그녀의 턱이 밑으로 내려갔다.

〈──GriMn.〉

멍하게 한 마디를 내뱉은 티르시는 그 이상한 표정 그대로 갑자기 맹공을 퍼부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맹공이란 어둠의 안개가 미친 듯이 양을 불렸다는 걸 의미했다.

〈아니 뭔 씨팔?!〉

제네바 협약이란 말에 반응이라도 한 걸까?

아니, 그건 좀 개소리 같은데? 그 고대문명 시대의 존나 짱쎈 마법사의 영혼이 티르시에게 씌인 건 아닐 테고, 그랬다고 해도 수천 년 전 사람이 제네바 협약을 어케 알어.

〈갸아아아악──?!〉

아무튼 나는 기겁을 하면서 그 손길의 쓰나미를 회피했다.

안개는 여전히 손 모양으로 뭉쳐서 쏟아졌지만, 아까까지랑은 그 숫자가 차원이 달랐다!

마치 유명 아이돌 그룹이 위문공연을 왔을 때의 군바리들과 같은 무수한 악수의 신청!!

〈이 씨발! 개씨발! 애미씨팔!! 그만두게, 티르시 군! 내가 차도 대접해 주지 않았는가!!〉

나는 눈물을 쫙쫙 뽑아내면서 바닥을 굴렀다.

진짜 뒈질 각오로 필사적으로 피하긴 했다만, 안 그래도 안개의 양이 늘어났는데 그게 싸그리 나 한 사람에게만 집중된 것이다.

그리 교묘하지 않은 움직임이어도 금방 피해내기가 곤란해졌다. 아까 다 같이 N빵할 때는 할 만 했는데! 우리 탱커는 뭐하냐아아악!!

〈축하해요, 티르씨발!! 댁이 내 인생 최대 핀치 랭킹 1위 갱신했어!〉

티르시한테서 느껴지는 막대한 마나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내가 싸워본 적들과 비교해도, 비벼볼 만한 건 망령도시의 오리할콘 발전기를 탈취한 예르나의 분신 정도다. 랭킹 2위인 짭 토르도 마나량이나 공격력만 놓고 보면 한참 후달렸다.

마나량에서부터 밀리는데 노쿨 노딜레이로 날아오는 즉사 탄막이라니? 이건 오딘이 와도 뒤진다!

무너진 밸런스가 캐시템 수요를 만든다고? 인정할 수 없어!

〈……개씹좆망!!〉

나는 아내들한테서 떨어져서 구르기를 연발한 끝에 궁지에 몰렸다. 앞뒤로 안개에 포위당한 것이다.

예전에 나랑 도적단 소탕하러 갔을 때 보여줬던 마마무가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걸까? 근데 그걸 가르쳐준 스승을 같은 기술로 죽이려 드는 건 너무 사파스러운 발상 아닐까요?

─화악!

어둠의 안개가 성추행범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진짜 거짓말 좆도 안 하고 주마등이 스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나한테 변신 마법으로 빅찌찌로 변해 달라고 부탁해 볼 걸.’

아내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마음을 받아준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라리루라에 대한 후회가 내 머리를 채웠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륵!!

새빨간 불꽃이 죽음으로 초대하는 손길을 한 번에 소탕해버렸다.

어둠의 안개는 캠프파이어의 빛에 물러나는 그림자처럼 속절없이 밀려나다가 사라졌다. 어떤 물질이든 닿자마자 없애버리던 위력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녹아버린 것이었다.

〈──역시 공간 마법이었군.〉

불꽃을 뿜어내서 나를 지켜준 것은 다름아닌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표정변화도 없이 자길 쳐다보는 티르시에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정신 좀 차리거라. 저번에 만났을 때는 지금보다는 봐줄만 한 얼굴이었거늘.〉

─훅.

베로니카의 지팡이 끝에 불꽃을 피어났다.

뿔을 감춘 애시르 신족의 여신은 그 불꽃을 겨누며 자애롭게 미소지었다.

〈여신 씩이나 된 자가, 못난 남자한테 코가 꿰이면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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