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이 텐트처럼 생긴 천막이 세워져가는 영주 저택으로 돌아가서,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드랍템을 보관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물론 디아볼로와 싸우면서 거하게 솜씨를 피로(披露)했던 탓인지, 가는 길에 말을 거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기…… 노르드 님? 거인들의 가죽이 너무 질겨서 그런데요, 벗기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없으신데요.〉
싸울 때는 한 것도 없이 있다가 잡일마저 N빵하자는 양심 터진 새끼들을 싹 다 쫓아내고, 파밍한 아이템들을 감정하는 현장으로 직행.
─웅성웅성.
천막에 들어가자 피난하다가 불려온 감정사나 마법사 길드원이 신변의 안전을 대가로 무료 감정쑈를 펼치던 중이었다.
디아볼로가 인벤토리에서 쏟아낸 것들이랑, 저택 안에 있던 것들 중에서 영주 소유가 아닌 것들을 모아놓은 모양.
이 씨발맞은 귀족 새끼들은 자기들 목숨이 걸렸을 때는 뭔 퇴근 30분 전의 공무원처럼 늦장을 부리더니, 돈이 걸리니까 세상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더라.
디아볼로한테 회유됐던 사병들이나 도망치던 집사를 잡아 체포하고, 저택을 털어버리는 게 거의 뭐 도적떼랑 다를 게 없었다. 그 꼬락서니를 관람하던 미네르바가 한숨을 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커흠흠! 오셨소?〉
짬이 딸리는 귀족은 호위를 시키지도 않고 무려 직접 내게 말을 거셨다.
천룡인들처럼 대가리에 산소 마스크를 쓴 것도 아닌데, 나 같은 외국인 평민한테 대범하기도 하셔라.
〈그, 분배율에 대해서 상의하고 싶소만.〉
〈제 몫은 전부 다 현찰로 주시면 충분합니다. 제가 잡은 거인의 가죽만 제 소유로 돌려놔 주십시오.〉
나는 생각해뒀던 제안을 바로 던졌다.
‘알아서 챙겨가라고 해라. 벡안으로 보니까 별 거 없더만.’
이 오딘의 눈깔은 매직 아이템이 상대라면 현직 감정가가 무색할 만큼 정확하게 그 성능이나 가치를 판별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능력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벡안으로 확인하자, 디아볼로는 실력에 비해 가진 물건은 대단한 게 없었다.
그나마 검 정도가 통짜 미스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드랍템을 현금가로 치환해서 우리 몫의 돈만 가져갈 생각이었다. 저딴 똥유물 누가 챙기는지, 하하.
〈그, 그래 주시겠소?〉
〈예. 저는 물건의 감정가와 현찰만 합당한 수준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군요. 아직 저택에서 회수 못 한 물건들은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고요.〉
요컨대 감정이나 회수 작업에서 밑장빼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대놓고 못을 박아놓자 대표로 말을 걸었던 귀족은 울컥한 것처럼 부들부들 거렸다. 꼴에 자존심은 있는 모양.
─흠칫!
하지만 그는 나랑 눈이 마주치차 놀라면서 척추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다, 당연한 소릴 하시는구려! 우리들은 귀족이오! 푼돈에 집착해서 품위를 잃지는 않소!〉
이 새낀 입이랑 뒷구녕을 샘블즈 당했나. 주댕이에서 별 말 같지도 않은 개쌉소리가 다 나오네.
나는 그런 본심을 예의 바르게 포장해서 몇 마디 해주고 자리를 뜨고자 했다.
솔직히 유물이고 뭐고 챙겨봤자 돈으로 바꾸는 게 더 힘들 것이다.
미네르바랑 프리모르가 있으니까 자리에 없어도 눈 뜨고 코 베이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느그들도 얼른 끝내고 이 닦고 발 씻고 자렴. 야근 하긴 싫자너?
〈아, 잠시 기다리게.〉
그런데 내가 나가려고 하자 귀족 중에 좀 야비해 보이는 언놈이 그렇게 제동을 걸었다.
〈예.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음, 그렇다네.〉
그는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기품 있게 떠들었다.
〈자네 직업이 고고학자라지 않았는가? 우리들끼리 상의해 보았는데, 자네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찾아낸 서책은 전부 기증하기로 했네. 자네 몫과는 별개로 말이야.〉
나는 그 의외의 호의에 잠깐 고개를 모로 꼬았다가, 얼마 안 가서 진의를 깨닫고 어이 없어져서 픽 웃었다.
〈그거 정말로 감사한 일이군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손이 부족해서요.〉
〈헤르마이온 길드 앞으로 보내주지. 어떤가?〉
〈그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러면 놈이 공간 마법으로 들고 다니던 것들만 지금 챙겨가겠습니다.〉
대답은 겸손하게 했지만, 나는 속으로는 혀를 찼다.
‘하여간 씨팔 새끼들. 흑마법사가 던져준 책을 처분하는 건 귀찮고 힘드니까, 지들이 도맡기는 싫다 이거지?’
나는 물론 남들의 눈에도 해석조차 안 되는 책이다.
저런 건 갖고 있어도 득 볼 구석이 없다. 자칫 흑마법사로 몰리거나 처분비용만 까일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책들은 이미 감정을 끝낸 모양이었다. 아마 디아볼로가 소유하던 책들도 마법사 길드의 감정사가 보기엔 별로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십중팔구 내가 없는 사이에 ‘이 책은 돈도 안 되는데 원쁠원 에누리가에 넘겨버리지 않을래요?’ 하는 물밑 교류가 있었던 듯 했다. 하필 그 짬처리 대상이 나였고 말이다.
‘……아니, 짬처리는 아니지. 나는 손해 보는 게 아니니까.’
표지의 글부터가 해석이 안 되는 책을 집어드는 나.
내 번역능력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문자는 처음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아무 의미도 없는 낙서의 나열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문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건 확실히 뒷맛이 찝찝하다는 게 본심이었다.
귀족들의 잔꾀가 없었어도 나중에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바로 챙겨가면 ‘이 새끼 혹시?’ 하는 무의미한 의심을 살까 봐 참았을 뿐이지.
〈제가 마법사 길드의 고명한 분을 알고 있으니, 그 분께 상담을 드려 보죠.〉
─툭툭. 나는 흑마법사의 책을 치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 처분비도 제 분배율에 감안해 주시겠죠?〉
〈……크흠. 그리 하지.〉
OK. 어차피 가져가야 했던 책으로 꽁돈 얻었고,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나는 디아볼로 새끼의 책을 챙겨갖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허리춤의 묵직한 종이의 무게가 괜찮은 거래를 성사시킨 증거 같아서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디아볼로 새끼가 살아나면 복수하려 들려나?’
옆구리 낀 책을 쳐다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그 치명상에서 벗어나면 복수하겠다고 설쳐댈 가능성은 컸다.
마나빨이긴 했지만 저렇게 좆발려 놓고 혼자 덤빌 것 같진 않다. 누구 같이 싸워줄 사람을 데려올지도 모른다.
‘우에엥 느그에몽~ 하고 즈그들 대장한테 가서 찡찡대려나.’
나중에 복수한다고 찾아오면 큰일인데.
우리 집에도 세스코 좀 깔아야 하나. 마피아 영화만 봐도 범죄자 새끼들은 엿 먹으면 이 악물고 피의 복수를 하더만.
막 애마(愛馬)의 모가지를 잘라다가 잠자는 사람 베개맡에 두고 간다던가, 그런 식으로 말이다. 베로니카가 대핀치로군.
─저벅, 저벅.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간이 병동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난지도 3시간이 넘었기에, 영주 저택은 부상자들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영주부터가 오늘내일을 하고 있으니까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마땅한 귀결이었다.
티르시도 지금은 거기에 누워 있었다. 현재는 이곳이 힐이 가능한 사제가 제일 많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남편 왔다~.”
나는 책을 몇 권 들고서 병실의 한 곳으로 들어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잠들어 있던 티르시가 깨어나 있던 것이다.
아내들도 전부 거기 있었다. 단지, 왜인진 몰라도 베로니카 혼자서만 방 모서리에 등을 비벼대고 있었다.
얘는 또 왜 이러나 해며 고개를 모로 꼬던 나는, 얼마 안 가서 저 반응이 티르시 때문이라는 걸 눈치깠다.
“베로니카 언니~? 왜 그러세요~?”
하지만 나와 같은 결론에 생각이 못 미쳤는지, 라리루라는 그냥 대놓고 물어보고 말았다. 베로니카는 그녀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좀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저주 때문에 티르시와 가까이 있으니 힘들구나. 진찰할 때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만, 그 탓에 지금은 평소보다 더 접근하기가 어렵다.”
“……앗.”
무슨 뜻인지 이해한 라리루라는 입을 다물었고, 침상에서 막 깨어난 듯한 티르시도 얼굴을 붉혔다. 간만에 발동한 바이콘식 처녀 레이더는 오늘도 사람들 낯을 뜨겁게 만들었다.
뭐, 부끄럽기는 하겠지만 해코지 당하지 않았다는 걸 위안 삼아 줬으면 좋겠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말했다.
“일어나셨군요. 몸은 좀 어떻습니까? 아픈 곳은요?”
내뱉고 나서 질문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르시는 자기 손을 쥐락펴락 하다가 대답했다.
“아픈 곳은 없어요. 하지만 제 몸이 제 것 같지가 않네요. 이상한 기분이에요.”
“구체적으로는 어떻지?”
베로니카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한테서 5미터 이상 떨어져서 진찰하는 의사라니, 조금 우스꽝스러운 느낌이었다.
“일단 전 원래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하게 몸에 마나가 흐르는 것 같아요. 또 마나량도……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꽤 늘어났고요.”
“신체의 강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강이든 넓어지면 바다로 이어지기 마련. 그만한 마나가 몸을 돌아다니고, 안착했는데 몸 속에 마나가 다닐 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렇게 베로니카는 몇 마디를 나눠보거나 하면서 티르시의 용태를 파악했다.
직접 몸을 만져보거나 하지 않았지만, 자기 증세를 말하는 티르시도 어엿한 마법사였다.
의사가 의사를 진찰하는 격이라서 큰 어려움은 없었는지, 베로니카는 대충 말만으로도 알아들은 듯 했다.
“이해했다. 그 의식 상태── ‘아르마 슈나스’라는 고대의 마법사가 가진 마나를 완전히 이어받지는 못했구나.”
안심 반 아쉬움 반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베로니카.
“그리고 적어도 지금은 큰 후유증도 없어 보이고.”
“마나량만 늘어난 거라면 마법사로서 호재이긴 하네요.”
“실 없는 소리 마세요. 저세상 문턱까지 가 놓구.”
프랑이 핀잔을 주자 티르시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우리 아내님의 말에 동감이었지만, 너무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더 자세한 진찰은 나중에 포모나 교단의 사제들에게 받읍시다.”
나는 아르마알스 가문의 마님께서 우리를 초청했고, 가는 김에 티르시의 용태도 봐 준다는 얘기를 했다.
“아르마알스, 인가요.”
티르시는 아르마알스라는 이름에 생각하는 바가 있는 건지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따로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나는 할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티르시만 괜찮으시다면 며칠 쉬시다가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하는데요.”
트라우마 체험을 하고 방금 깨어난 그녀에게 당장 사정을 청취할 순 없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는데, 티르시는 자긴 괜찮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바로 말씀드려도 상관 없어요. 안 그래도 머릿속이 뿌얘서, 더 오래 있으면 기억에 혼선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그러시다면야 뭐.”
─크흠흠. 나는 헛기침을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