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67화 (367/1,009)

─크흠흠. 나는 헛기침을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는 아내들이 말씀드렸다시피 헨네시스 영애의 의뢰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티르시가 예전 시녀에게 편지를 받았단 것까지만 알고, 나머지는 흔적을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거죠.”

“사태의 원인인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척 건방지겠지만……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건 전부 여러분들 덕분이에요.”

“뭘요. 이래저래 행운이 따른 결과죠.”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감사인사를 군말 없이 받았다.

그만큼 장대한 노력을 했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여기서 겸양을 떠는 게 더 안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여기서 그딴 소릴 해 봤자 피곤한 사람 붙들어 놓고 겸손함을 자랑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건 아무한테도 좋을 게 없는 짓이었다. 우리 사이에 좀 새삼스럽기도 하다.

“하여튼, 그래서 분명…… 어렸을 때 저를 돌봐줬던 분이 편지로 제가 원하던 소식을 보내주셔서, 그것 때문에 로마니아로 돌아왔었어요.”

티르시는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위를 조사하고 준비하던 차에 루크레겐스에서 〈암회〉의 하수인들에게 붙잡혔죠.”

“그런 다음에는 레나폴리스까지 오셨고요?”

“네, 그랬죠. 그때까지만 해도 약혼이 어쩌니 하는 수상쩍기만 한 얘기에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의심이나 경계 정도로는 극복이 안 되는 문제였더라고요.”

한숨을 쉰 티르시는 레나폴리스에 오게 된 과정과,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세세한 설명을 축약하자면, 영주 저택에서 며칠 정도 묵고 있자 디아볼로가 그녀를 별관으로 호출했다는 얘기였다.

“상황이 그랬으니 가지 않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풀어줄 건지 물어볼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작 찾아가 보니 제가 상상하던 것보다 10배는 정신 나간 인간이었어요.”

티르시는 그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이해도 안 되는 자기본위적인 설명만 늘어놓다가 저를 구속하려 하더군요. 그땐 이미 몇 번 정도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였어서, 저도 바로 마법으로 대처하려고 했어요.”

“……그랬군요.”

티르시가 얼마나 막막했을지는 상상이 갔다.

풀컨 디아볼로랑 맞다이로 승산이 있으려면 최소한 오러를 쓸 수 있는 전사나, 그런 전사를 상대로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마법사는 돼야 했다. 티르시는 어느 쪽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티르시는 이 부분이야말로 대목이라는 듯 쿡쿡 거리면서 말했다.

“디아볼로는 ‘어차피 네년의 질 낮은 마나를 빼내야 했는데, 그 작업을 도와주다니 고맙군~’ 같은 소리를 하면서 제가 마법을 쓰는 걸 지켜보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남은 마나를 전부 써서 제 몸을 스스로 얼음 관에 가둬버렸죠.”

“……타뷸라랑 싸웠을 때도 썼던 마법 말입니까?”

얼음관이라. 무슨 마법인지는 알겠다. 예전에 늑대인간 타뷸라가 변신 중일 때, 티르시가 날렸던 얼음 마법이다.

정작 타뷸라는 그 얼음을 부수고 상처 없이 튀어나왔었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이해한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물었다.

“세상에, 그걸 맨몸에 맞았다고요? 그래도 몸이 버텨요?”

티르시가 말하는 걸 보면 그녀는 타뷸라처럼 마법에 내성을 가진 상태였던 것도 아니고, 그냥 깡으로 얼음 관에 자신을 가뒀다는 소리 아닌가. 그러니 나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신을 얼렸다가 상처 없이 해동하는 것.

그건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냉동인간은 SF의 영역이다.

사람의 몸은 구조가 무척 복잡하다. 전자렌지에 땡~ 하고 돌리거나 양념을 묻혀서 상온에 1시간 30분 해동하는 삼겹살이 아닌 것이다.

암만 물리법칙 담당 일찐인 마법이라도 모든 화학 현상과 격절될 수는 없다. 마법이든 액체질소든, 충분한 대비도 없이 온몸이 꽁꽁 얼었다가 살아났는데 어떻게 멀쩡하겠는가!

금붕어를 녹였다가 살려내는 실험에서도, 살려낸 금붕어는 내장이 씹창나서 금방 뒤져버리기 마련!

그게 금붕어보다 복잡한 신체기관이 많은 인간이라면?

결과를 고민하는 게 바보 같다. 100% 죽겠지.

아니, 그래도 티르시는 지금 멀쩡해 보였다. 아마도 뭔가 대책을 세우고서 벌인 짓이었겠지?

내가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자, 티르시는 왠지 입을 다물었다가 픽 웃었다.

“못 버티죠. 사실, 반쯤 죽을 생각으로 한 거였는걸요.”

“……예?”

“살아남아봤자 좋을 꼴을 못 볼 거라면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확 저질러버렸던 거에요. 그래서 솔직히 저도 굉장히 신기하네요. 저, 지금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요?”

진짜 100% 호기심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티르시.

나는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씹, 이 얼법 아가씨는 왜 자기가 자살하려 했다는 얘기를 일케 태연하게 말하냐.

“그리 신기해 할 것 없다. 그건 엘릭서의 힘일 테니까.”

그때였다. 베로니카가 처녀의 장벽을 뚫으며 힘겹게 우리한테로 접근한 것은 말이다.

“……엘릭서요?”

“그렇다. 엘릭서라면 즉흥적인 마법으로 얼어버린 육체를 죽이지 않고 계속 살려둘 수 있었겠지.”

“아하. 그래서 디아볼로가 그렇게나 고품질 엘릭서를 긁어모았던 건가?”

다나는 이해가 갔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로니카의 말은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얼어버린 육체를 녹였다간 삼투압이나 분자구조 변화 같은 현상으로 티르시는 죽어버렸을 것이다.

전신이 얼어버린 순간부터, 그녀의 몸은 열을 가한 단백질처럼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상태였겠지. 그런 상태에서 티르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려면 최고 품질의 회복 포션이 필요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엘릭서다.

예수게이 모드의 내가 보여줬던 끔찍한 화상─열기에 의한 단백질 세포 등의 변형─조차도, 엘릭서라면 고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티르시가 느끼고 있다는 몸의 위화감은 단순히 오랫 동안 얼음에 갇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베로니카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고대의 마법사 ‘아르마 슈나스’의 힘을, 시대를 건너서 그 후손에게 재현하는 의식이다. 좀 더 원활하고 안정적이도록 육체의 조정도 필요했겠지. 얼음에 갇힌 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다행인 얘기네요. 사로잡혔다면 몸에 메스 자국이 1~2개로는 안 끝났겠어요.”

아까부터 섬뜩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티르시였다.

“……얼음 관에 갇힌 저를 엘릭서로 치료해 가면서, 흑마법으로 그 결과를 의식에 맞게 조율한 걸까요?”

“모를 일이지. 그 의식의 내용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에야 탁상공론이다.”

손바닥을 턴 베로니카는 프랑과 다나에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 멀쩡한 우리는 저택 안을 조사하는 자들과 합류하는 게 낫겠구나. 이만한 의식이라면 서책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아뇨, 그러실 건 없겠어요.”

나름 진지하게 말한 베로니카였지만, 티르시는 댓번에 그 말을 부정했다. 삑사리를 낸 것처럼 표정을 부루퉁하게 짓는 베로니카가 존나게 귀여웠다.

“흐응……. 그건 무슨 의미지? 내 생각이 잘못됐나?”

“설마요. 정확하셨어요. 그러니까 멀리 가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티르시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가져와서 테이블에 둔 책들을 가리켰다.

“저 책, 디아볼로가 저를 불렀을 때 보여줬던 장서에요.”

“……그게 사실이더냐?”

놀라며 내 옆구리를 쳐다보는 베로니카. 나는 테이블에서 티르시가 가리키는 걸 집었다.

“이 책 맞아요?”

“네. 틀림없어요.”

자신감 넘치게 자기 기억에 확신을 갖는 티르시였기에, 난 그 책을 긴장하며 펼쳤다.

그리고, 딱딱한 표지를 넘기다가 불쑥 깨달았다.

‘잠만. 이거, 감정사들이 별 가치 없다고 판단해서 넘겨줬던 책이잖아.’

─팔랑팔랑.

낡은 양장본의 표지가 넘어가고, 책의 서두가 드러났다.

[03년 1월 5일. 새로 고용한 주방장이 아침 메뉴로 시뻘건 생선 조림을 내놓았다. 목에 가시가 걸렸기에 해고했다.]

[억울하다고? 억울한 건 나다. 비린내 나는 해물로 소스를 만드는 것까진 참아줄 수 있었다. 안 먹으면 되니까.]

[하지만 저 빌어먹을 건어물에다 그 소스를 붓고 요리라고 칭하는 건 넘어가 줄 수 없었다. 3일 전에도 돌덩이 같은 닭 튀김을 내놓더니, 이번에도 용서받을 줄 알았나 보지.]

아니 씨발, 책 잘못 가져온 것 같은데.

나는 떨떠름하게 다나에게 책을 보여줬고,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어봤을 다나도 안색이 굳었다.

“……이거, 고대 문명 시대의 귀족이 쓴 일기장 같은데요?”

“……네? 아, 아뇨. 그럴 리가!”

책을 받은 티르시는 10년 전에 실종된 남편이 내연녀를 데리고 돌아온 걸 본 유부녀처럼 현실을 부정하며 페이지를 계속 넘여대다가, 얼마 못 가서 포기한 듯 고개를 떨궜다.

“맞네요, 일기장……. 제 기억이 잘못됐었나 봐요.”

나는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전까지도 얼음에 갇혀서 죽나 사나 하던 처지였지 않은가.

지금은 쌩쌩하지만, 그건 엘릭서로 치료 중이었던 몸이 의식이 시작되자 고밀도의 마나로 채워지면서 얼음의 마나를 막아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등장할 때도 상처 없이 얼음 관을 부수고 튀어나왔던 거겠지.

하지만 그 가사상태 중에서 기억이 손실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다.

엘릭서를 들이부엇어도 기억에 혼선이 생길 수는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하진 않았다.

‘것보다 피곤해서 더 이상 머리가 안 돌아가, 씨발.’

지금이라면 아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이불과 침대를 끌어안고 뒹굴며 격렬한 불륜 3P를 저지를지도 몰랐다. 이렇게 잠 오는 건 카르미네 대학에서 탈주하고 처음인걸.

“……저기, 티르시 언니? 티르시 언니가 기억하기로는, 이 책이 그때 디아볼로가 들고 있던 책이었던 거죠?”

돌고 돌아서 일기장을 건네받은 라리루라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물었다.

티르시는 확신이 없는 것처럼 주저하며 대답했다.

“제 기억으론 그랬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네요. 그 인간이 아무리 정신이 이상해도 그렇지, 설마 저를 불러놓고 옛날 사람들 일기장이나 읽고 있었겠어요?”

“흐으으으음……?”

고민하던 라리루나는 왠지는 몰라도 내 얼굴을 슬쩍 훔쳐보고서는, 조금 부끄러운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반대?”

“네~. 티르시 언니의 기억이 다 맞다는 전제를 깔면요~? 이 일기장이 ‘그때도 읽을 만한 내용’이라는 뜻이잖아요?”

우리 후배님은 재기발랄하게 웃으며 책을 훌훌 넘겼다.

“로지컬하게 접근하자면요? 그만큼 가치 있는 내용을 옛날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전부 적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때요~? 명탐정 라리루라의 추리랍니다♡!”

“얘가 누구 흉내를 내는겨.”

“아핫♡! 선배지, 누구겠어요?”

나는 웃으며 말하는 라리루라의 대답에 얘가 언제까지 날 선배라고 부를 생각인가 싶었지만, 어느새 나도 저 호칭이 꽤 맘에 든 모양이었다. 나를 다르게 부르는 라리루라가 상상이 잘 안 갔으니까.

“그래서요, 그래서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읽었는데, 중간부터 일기의 내용이 점점 생동감이 없어지더라구요! 가끔씩 조금 재밌는 얘기가 껴 있긴 한데, 필체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많이 달라요☆!”

“글의 분위기가 변한다고? 어디부터?”

“네, 여기요♡!”

라리루라는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하면서 펼친 책을 내밀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읽으려다가, 내 눈보다 빠르게 발동하는 번역 능력에 눈을 크게 떴다.

“……쓰벌, 암호문(暗號文)이네?”

옛날 사람의 일기장인 줄로만 알았던 고문서(古文書).

그 내용은, 책의 중간쯤 와서부터 무미건조한 필체에 진짜 뜻을 숨긴 치환암호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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