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에 얼굴을 들이밀듯이 암호문을 탐독했다.
내 번역 치트에는 무미건조한 문체의 내용이 이중으로 읽혀졌다. 뜻이 보이니 문자 자체의 구조는 상관이 없었다.
대충 비유하자면 ‘일햣긔 싫땨. 쥡애 꽈꼬 싶땨’라는 글이 ‘일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로 저절로 읽히는 느낌.
[우리가 입을 모아서 아르마를 설득하자, 그녀는 못내 우리들의 제안을 받아주었다.]
[세월을 뛰어넘어서 후손들에게 그녀의 마나를 계승한다. 그 일의 장점은 아르마도 깊이 이해하고, 또 공감했다.]
[당대 황제의 폭정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로마니아는 벌써 망조가 들었다. 신들께서 떠나버린 세상에서, 가장 먼저 멸망하는 인간의 국가는 나의 조국일 듯한 예감조차 들었다.]
‘……이 시팔, 이건 또 뭔 소리야?’
아마도 글을 읽을수록 내 표정이 썩창이 됐던 모양이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내용을 궁금해 하던 다나나 베로니카도 내게 미처 뭘 묻지 못하고 어물거렸으니까.
나는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이 의식을 〈강림(Descensus)〉이라고 부르자.]
[의식이 성공한다면 후손들은 몇십 번이라도 아르마의 버금가는 마나를 얻을 수 있으리라. 마나의 양은 〈강림〉을 받을 인물의 자질에 의해 달라지겠지.]
[부디 현명한 후손이 아르마의 힘을 이어받기를.]
거기까지가 도입부였다. 나머지는 의식의 발동법이다.
우선, 서로 다른 가문의 피를 이은 4명의 후손이 모인다.
아르마알스 가문에서만 4명을 모아서 의식 개시, 같은 건 안 된다. 이 마법을 설계하는데 협력한 4명의 초대 원로원의 가문에서 각기 1명씩 모여야 한다. 이거 생각보다 민주주의적인데 그래.
그리고 4명이 모인 곳에서, 몸의 조정을 끝마친 〈강림〉 대상자가 의식을 시전한다.
그걸로 고대의 대마법사 ‘아르마 슈나스’가 죽기 전에 남긴 마나가 명계에서부터 대상자의 몸에 내려온다는 모양이다.
의식의 자세한 구조는 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딘의 눈도 글로 적힌 마법의 해석까지 도와주진 않았다. 이 새끼는 직접 본 마법에밖에 효과가 없었다.
나는 책에서 고개를 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책의 내용은 디아볼로가 벌인 의식이 맞아. 〈강림〉이라고 한다는데? 어떻게 쓰는 마법인지도 적혀져 있어.”
“그게 사실이라면 후유증의 수습에 도움이 되겠다만…… 표정은 왜 그렇게 안 좋으냐?”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아가리를 쌉쳤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적어도 옛날에 이 의식마법을 만든 작자는 후손의 인권을 무시하고 전쟁병기로 만드는 마법을 꿈꾸던 건 아니었다고 하면 되나?
아니면 그때 당시의 황제가 워낙 지랄맞아서 구상한 마법이라고 말할까? 이 얘기는 잘못 흘러가면 황족모독죄 같은데?
하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에 나는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별 거 아냐. 그치만 이 책은 잃어버리면 우리 인생이 좀 파란만장해지겠다. 다들 비밀로 해 줘. 티르시도요.”
파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중대함은 모두들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특히 우리 아내들은 더 그랬다.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의식이라니?
〈편찬대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황제를 욕하는 내용을 빼놓고서도 남에게 보여줄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혀를 찼다.
‘어쩌면…… 이 의식마법이 흐르고 흘러서 〈편찬대대〉가 ‘신좌’에 개입하는데 쓰는 마법이 된 걸지도 모르겠군.’
만약 그러면 이 일기장의 주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충분히 상상이 갔다.
옛날에, 나는 내가 차원이동 같은 굉장한 기술을 완성하면 날 죽여서라도 그 성과를 빼앗으려는 새끼들이 나올 거라며 걱정했었다. 그게 내가 귀족 후원자를 찾아 헤매는 이유였고 말이다.
혹시 이 일기를 쓴 사람은 내가 걱정했던 그대로의 결말을 맞이한 게 아닐까?
천재 과학자가 빌런들에게 잡혀가서, 사악하고 비인도적인 병기를 개발해주고 팽 당하는 것!
너무 뻔하고, 또 뻔한 만큼 좆 같고 씁쓸해지는 얘기였다.
어쩌다가 이게 디아볼로의 손에 떨어진 건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후두둑.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콧물이 몇 방울 쯤 책 위로 떨어지려고 하길래, 나는 손바닥으로 책 위를 받쳤다.
콧물로 책이 더러워지지 않게 할 생각이었는데, 손바닥에 떨어진 건 새빨간 액체였다. 라리루라가 깜짝 놀랐다.
“선배! 코피 나요!”
“응. 생중계 고맙다. 좀 피곤해서 그래.”
뇌섹남 강북호가 머리가 안 굴러갈 정도니까 말 다 했다.
다나는 인상을 팍팍 쓰면서 내 코에 힐을 걸고 심장 박동을 체크했다.
“아오, 진짜. 이 새끼가 치료해 주는 년 있다고 몸 존나게 막 굴리네.”
“사실 눈나는 옆에서 숨만 쉬어도 내 마음의 안식이 됨.”
“오늘치 지랄은 아까 충분히 했으니까, 고만 좀 하자?”
존나 사고뭉치 아들이 무릎이 까져서 돌아온 걸 보는 듯한 눈빛이다. 아니 씹, 이 여편네가 남편놈 자존심 까지게. 다나는 못 살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나 과용이네. 니도 티르시 씨 옆에 누워서 쉬어.”
“그렇게 막 아프진 않은데?”
“씨발, 그럼 옥새가 그만큼 개쩌는 템인가 보지. 완충재도 없이 자기 마나량의 몇 배나 되는 마나를 받아들였어 봐. 니 또 엎어져서 나랑 다른 애들 펑펑 울렸을 거다, 개새끼야.”
“옙. 죄송합니다. 다나 님 만세, 만세, 만만세.”
다나가 으르렁대자 나는 만세를 삼창하고 침대에 누웠다.
존나 남편의 권위는 좆도 없군. 이게… 꼴마초…?
“부부 사이가 돈독하시네요.”
티르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공처가 노르드의 가계생활을 지켜보았고, 우리 아내님들은 어디 가지도 않고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남편놈의 수치 플레이에 몰두했다. 존나 쪽팔리네.
나는 찍 소리도 못하고 이불을 덮었다.
“……잠깐 눈만 붙일게. 뭔 일 있으면 깨워줘.”
“응, 그럴게. 알았으니까 노르도 빨리 자.”
우리 프랑이 저렇게나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이건 꽤 놀랍군.
눈빛만 봐도 나를 절대 깨우지 않고 침대맡에서 망부석이 될 듯한 프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물론 눈을 감아도 디아볼로 새끼가 남긴 책은 내게 온갖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강림〉 마법이 가짜 토르 같은 <인신>을 만드는 마법의 원조라면, 나도 비슷한 일이 가능할까? 아니, 내가 이 마법을 분석하려면 실제로 실행해 보지 않으면 안 되려나?
티르시에게 걸려 있던 마법은 하늘의 균열이 닫히고, 디아볼로가 뻗어서 해제됐었지. 다시 발동하는 건 에반데.
그리고 〈강림〉 마법에 앞서서 4명이 모여야 한다는 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오늘은 분명 3명밖에 없었지 않았나?
티르시, 레나폴리스의 영주, 시냐티오 말고 또 누가 있었지? 프리모르는 아닐 텐데…… 씨발, 설마?
존나 아니길 빌어야 쓰겄다. 자칫하면 은혜고 후원자고 다 없던 얘기가 되거나, 프리모르랑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염병, 유도심문에 넘어가면 안 됐는데.
대충 그런 잡스러운 생각의 연쇄가 내 엘리트 대갈통을 어지럽혔다.
침대에 누워서 몸이 좀 편해졌다고 머리가 일을 하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보통 잠자리에서 가지는 상상이란 결국 수면제로 전락하는 법 아니던가.
머리가 복잡한 것보다 몸이 피곤한 게 더했는지,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판타지 요소를 빼고 말하면, 꿈이란 건 뇌에서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듯 하다.
그래서 뒤지게 피곤하면 진짜 전원이 꺼지듯 잠에 들어서 꿈도 꾸지 않는다던가. 그게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그날밤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고 새벽이 되서야 눈을 떴다.
내가 잠에 든 시간이 점심을 조금 지나서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거의 18시간은 잔 것이었다.
내 몸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부턴 이렇게까지 피곤했던 적이 따로 없었는데, 진짜 다나 말대로 무리를 했던 모양이다.
“……머고?”
아무튼 그렇게 일어난 나는, 내 침대 주변에서 잠이 든 아내들과 텅 빈 티르시의 침대를 발견했다.
다행히 이 얼법 아가씨가 슈퍼마리오의 피치 공주처럼 또 납치된 건 아니었다.
티르시의 침대엔 종이가 한 장 올려져 있었다. 잠깐 밖에 나가 있다가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슬쩍.
나는 아내들이 깨지 않게 조심해서 간이 병동 밖으로 빠져나왔다.
티르시는 바깥에서 혼자 새벽 이슬을 맞으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 또 나쁜 사람이 납치해 가면 어쩌려고 혼자 계세요?”
내가 그렇게 말을 걸자, 티르시는 내가 나오는 걸 눈치도 못 챘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아…… 그러게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따로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또 납치되시면 저보다는 헨네시스 영애가 불 같이 화를 낼 걸요.”
“후후. 마리아한테도 못쓸 짓을 했네요.”
그렇게 대답하며 웃는 티르시의 얼굴이 무슨 녹기 직전의 얼음 조각상처럼 흐릿해 보여서, 나는 무심코 질문했다.
“……아쉬우십니까?”
“네?”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주먹만 하게 키우는 티르시.
그녀는 정말로 상처받은 것처럼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설마 노르드는 제가 디아볼로의 여자가 못 되서, 아니면 그 과분한 마나를 잃어버려서서 아쉬워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제가 못난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긴 했지만, 노르드가 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많이 쇼크인데요.”
“그거 말고요. 귀족이 될 기회가 있어서 로마니아까지 왔던 것 아닙니까?”
시무룩해 하던 티르시는 이번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제게 질문하실 때도 로마니아에 오게 된 이유는 묻질 않으시더니, 다 알고 계셨던 거에요?”
“그냥 감이었어요. 그게 아니면 이 먼 데까지 혼자 떠나실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티르시는 내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노르드. 리터 계급이라는 게 뭔지 아시나요?”
“며칠 전에 어쩌다가 알았어요. 디아볼로의 이름에도 들어 있으니까요.”
이반 리터 폰 디아볼로였나. 아마 이 새끼 이름도 일주일 쯤 지나면 까먹을 듯 하다.
토종 한국인에게 이세계 사람들 이름은 외우기 힘들다고. 막 김복덕, 강팔춘, 도엽철 같은 이름이면 얼마나 좋아. 존나 그런 식이면 10년 쯤 지나도 기억나겠네.
어쨌든 내가 아는 체를 하자 티르시는 설명을 생략하고서 결론부터 말했다.
“저, 이번 년도의 명예귀족 선발에 참여할 생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