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번 년도의 명예귀족 선발에 참여할 생각이었어요.”
……명예귀족 선발?
선뜻 꺼낸 말에 나는 스턴에 걸린 것처럼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말씀드리기 죄송한데, 뽑힐 가능성이 있었습니까?”
어찌저찌 당황을 숨기고 그렇게 물어봤다.
다시 말하지만, ‘명예귀족’ 제도는 명목 상의 사다리였다. 평민이 올라가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다.
게다가 티르시는 몰락 귀족 아닌가. 차라리 흙수저가 골판지 상자에 앉아서 공부해갖고 판검사가 되서 서울 전셋집을 구한다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로마니아에서 선출한다면 절대 불가능하죠.”
티르시는 그런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안다는 것처럼 말했다.
“올해는 10년을 주기로 돌아오는 특수한 케이스에요. 외국에서 로마니아의 명예 귀족을 뽑죠.”
“외국에서요? 어떻게? 아니, 왜요?”
머리가 못 따라가서 고개를 모로 꼬는 나였다.
티르시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나르메르-나일에서 선발한 명예귀족은 로마니아에서도 인정받는다는 거다.
하지만 그게 왜, 어떻게 가능한지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고대 문명 시대의 로마니아 황제는 나르메르-나일의 파라오와 깊은 연이 있었다고 하죠. 그때의 문화와 정책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거에요.”
“……아, 그 얘기라면 저도 들어 봤습니다.”
─퐁! 머릿속에서 고고학 지식이 전등처럼 켜졌다.
실효 정책까지는 몰랐지만, 저 내용은 내가 배운 역사서에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보면서 ‘카이사르랑 클레오파트라 얘기 같구만’ 하고 생각했더랬지. 딱히 그립진 않은 추억이다.
그때 새벽이 끝나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해 주던 티르시는 눈이 부신 듯 손바닥으로 아침 햇살을 가렸다.
“정책이 유지되는 이유는 따분한 정치사정이니까 넘어가죠. 하여튼, 당대의 파라오는 올해의 명예귀족 계급을 ‘어떤 유적’을 돌파하는 자에게 선물하기로 했다더라구요.”
“……그 소식을 듣고 로마니아로 왔던 거고요?”
“네. 탐험대가 있다고 해서요. 거기 합류해 보려고 했는데, 벌써 1달은 지났다면서요? 진작에 떠나버렸겠네요.”
“……저희한테도 도와달라고 얘기해 보시지. 섭섭하네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만약 티르시가 우리한테 같이 가 달라고 했었다면, 우리도 미래의 명예귀족님이랑 쌰바쌰바 해 보려고 도우는 척이라도 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걸 무모하게 혼자 도전하려다가 이런 꼴을 겪다니?
고생한 사람한테 하기에는 좀 매정한 소리였지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후우.”
티르시는 몹시 복잡한 감정을 담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네. 노르드가 말한 대로에요. 염치 불구하고 또 여러분께 신세를 지러 가는 게 차라리 현명했겠죠.”
“이건 여쭙기 좀 죄송한데, 왜 그렇게 안 하셨어요?”
약간 따지는 말투가 되는 걸 감수하고 물었지만, 티르시는 이번에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요? 왜였을까요?”
“아니, 저기요?”
“죄송해요. 그, 스스로도 설명이 잘 안 되서…… 로마니아 어로 말할게요?”
능숙하긴 해도 외국어로 말하는 것보단 고향 말이 더 편한 건지, 티르시는 미간을 찡그리다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도움을 받지 못해서 위험해 지는 것보다…… 부탁을 거절당하는 게 더 싫었어요.〉
……부탁을 거절 당하는 게 싫었다고?
나는 이 사람한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을 알려줘야 할지 생각했는데, 티르시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는 것처럼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잠시만요. 저희한테 미움을 받는 게 로마니아에 혈혈단신으로 가는 것보다 싫었다구요? 제가 이해한 게 맞아요?〉
〈네. 자기 생각만 하고, 귀찮은 일이나 부탁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여자라고 생각당하기 싫었어요. 아니, 무서웠어요.〉
〈아니, 허?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그게 저희한테 아무 말 않고 간 것보다 더 섭섭한데요?〉
나는 정말 오랜만에 서운함이라는 걸 느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입을 열어도 말이 목끝에 걸려서 입밖에 나오질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한테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다니?
그러면 뭐야. 아까는 나더러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면서 충격을 받아놓곤, 정작 자긴 우리가 본인한테 실망하면 손절부터 할 줄 알았다는 뜻인가?
〈……하아. 티르시. 솔직히 말할게요.〉
나는 아침의 추위에 입김을 뱉고서 진심으로 얘기했다.
〈분명 그렇게 부탁받으면 100% 도와줬을 거라고는 말 못 해요. 거절했을 수도 있죠.〉
〈네, 그럴 거에요. 무리한 부탁인데 당연하죠.〉
〈그치만!〉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여대는 티르시가 약간 열받아서, 나는 낮게 소리쳤다.
〈그치만 만약 거절했어도요, 그런 부탁 1~2번만 가지고 티르시를 나쁘게 보거나 거리를 두진 않았을 거에요. 저희가 이해득실로만 관계를 판단해야 하는 사이도 아닌데,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와 씨발, 말하다 보니까 진짜 되게 서운하네.
나는 존나 꼴불견일 걸 알면서도 입술이 튀어나오는 걸 막기 힘들었다. 친하게 여기던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낀 건 대체 얼마만일까. 남에게 분노하거나 기분이 더러웠던 적은 많지만 말이다.
우리 아내들과는 서운할 일이 별로 없다 보니까─그녀들이 어떨지는 몰라도 일단 나는 불만이 없었다─, 유독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은 친밀감과 정(情)에서부터 나온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서운하려면, 무엇보다 그만큼 상대를 친밀하게 여기고── 그런 친밀함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했다.
좆 같은 새끼 때문에 화가 날 일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건 그냥 빡침이나 경멸으로 느껴질 뿐이다. 서운함은 그런 거랑은 좀 다르다.
조금 아쉽고 불만스럽지만, 그걸 표출해서 어색해지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괜히 진지하게 따져서 이 관계에 금이 갈 바에야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고 싶고.
그래서 그냥저냥 입술 좀 내밀고 눈치 좀 주는 걸로 원래 지내던 사이로 돌아가고 싶은, 그런 감정.
그럴 때 사람들은 서운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지금 다른 귀족이 나더러 ‘이게 느그 보수니까 받고 썩 꺼져’ 하고 1쿠퍼를 던져주면, 나는 그 씹새끼를 죽이지 않고 엿 먹일 방법을 양면 A4용지 3장으로 작성할 수 있다.
그치만 미네르바나 프리모르가 그렇게 군다면?
뭔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면서도, 속으로는 좀 아쉽고 애석할 것이다.
물론, 그런 취급을 받아도 티르시가 우리를 믿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 서운하진 않았겠지.
〈프랑이 저희더러 티르시랑 거리 좀 두자고 할까 봐 그러셨어요? 아니면 라리루라랑 마법사 길드에서 마주쳐도 걔가 인사도 없이 무시하고 지나갈까 봐?〉
나도 모르게 말이 빠르고, 많아졌다. 마초답지 않은 느낌에 자제하려고 했는데도 이 꼴이다.
내 말투에서 존나 티가 많이 났던 모양인지, 티르시는 수영하다가 나온 멍멍이처럼 고개를 쉐이킷 해댔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아내분들이 절 그렇게 대하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고……?〉
─우뚝.
본인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진심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듯 하던 티르시는, 마치 누가 갑자기 폐 속의 공기를 훔쳐가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입을 꾹 닫아버렸다.
조용해진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며 혼잣말을 했다.
〈어, 저기, 그 분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싫기는 하지만, 무서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서……〉
난제를 앞에 둔 수학자처럼 굴던 티르시와 눈이 맞았다.
1월의 강추위 때문일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얼음 마법사께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헤으?〉
티르시는 그렇게 눈사람처럼 굳어버렸다.
〈……티르시?〉
〈네헷?〉
누가 들으면 내가 배라도 꾹 누른 줄 알겠네.
이상한 소리로 대답한 티르시는 어버버 거리면서 발을 굴러댔다.
무슨 맨발로 눈밭에 던져진 사람 같았는데, 그녀의 신발은 로마니아의 겨울 추위를 잘 아는 사람답게 두껍고 따뜻했다.
〈……추워서 그래요? 건물 안에 들어갈까요?〉
〈아뇨?! 오히려 더울 정도에요! 아─! 덥다─! 저 혹시 땀 나나요─?!〉
─파닥파닥!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티르시.
얼음에 갇혀 있으면서 체질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정말로 얼굴에서 땀을 막 흘려대고 있었다.
이 혹한에도 저렇게 땀을 흘리다니. 티르시가 러시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인가? 다음부턴 다치면 엘릭서보단 보드카를 뿌려주는 게 더 효과적이겠는걸.
병째로 술을 마시고 크어어 뻑예 하는 티르시라. 존나 꼭 봐보고 싶네.
그러고 보면 나, 이 사람 취한 거 본 적 없지?
〈크흠! 에흠! 으흠헴흠!〉
디바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숨어서 목을 가다듬는 것처럼 에브베벱 거리던 티르시는 당황을 숨기며 말했다.
〈이 얘긴 여기까지 하지요! 서운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제 실수였다는 걸로 매듭지어 주시길 바라겠어요!〉
〈예? 어…… 알겠습니다?〉
〈양해해 주셨군요! 감사하와요!!〉
……감사하와요? 쬐까 이상한 말투인 것이와요.
나는 티르시가 갑자기 말투부터 성조까지 바꿔가며 외치자 기세에 밀려서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논쟁은 큰 목소리로 억지를 쓰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던가. 쇼펜하우어, 당신이 옳았어. 이상한 말투로 스턴 걸고 밀어붙이니까 그냥 쭉쭉 밀려나네. 존나 전직 귀족다운 정치력이다.
〈아으헤?〉
그런데 이제 보니 말투를 바꾼 게 본의는 아니었던 건지, 티르시도 그 사실을 눈치채곤 집에 술이 떨어진 러시아 사람처럼 버퍼링이 걸려버렸다.
〈이, 이건, 어릴 적의! 어릴 적의 말버릇이여요! 기억 안 나셔요?! 전에 마리아랑 담소할 때도 이런 식이었지요?!〉
언제 얘기지? 아, 예전에 내가 프랑한테 프로포즈한 날에 저거 비슷한 말투를 썼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그냥 브리타니아 말로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저도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다음부터는 무슨 일 있으면 상담하러 오기에요?”
“……그, 노르드 말투도 아까 전부터 좀 이상한데요.”
“눈치 채셨사와요? 실은 티르시 말투를 흉내내 보고 있었사와요.”
티르시는 주먹을 부들거리며 자신의 공격 마법 위력이 얼만큼 늘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분위기를 냈다. 그래서 나는 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 선발, 지금이라도 도전해 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좀 늦어지긴 했어도, 나르메르-나일의 유적이라면 벌써 공략이 끝나진 않았을 가능성이 큰데요.”
나르메르-나일의 파라오가 명예귀족 선발권을 걸 만한 유적이라면, 역시 ‘왕의 능묘’밖에 없다.
신대부터 고대까지 이어진 나르메르-나일의 ‘능묘’ 문화.
특히 그중에서도 역대 파라오의 능묘는 도굴꾼들을 막고자 당대의 기술력을 총 동원해서 철저하게 설계한 유적이었다.
존나 뒤지게 철저해서 그런지, 위치 기록을 분실한 현대의 나르메르-나일에게도 처치 곤란한 물건이 됐다.
그래서 결계를 뚫고 숨겨진 능묘가 발견될 때마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모험가나 고고학자한테 공략을 맡길 정도다.
걔들이라면 탐사하다가 뒤져도 국력을 깎아먹진 않거든.
“아뇨, 그만둘래요.”
티르시는 이미 생각해 뒀던 얘긴지 0.1초만에 대답했다.
“여러 분들께 이렇게 폐만 잔뜩 끼쳐놓고 포기를 못 하는 건, 조금 한심하니까요.”
“그게 티르시의 선택이라면 저희는 존중하겠습니다.”
물론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다음 10년 뒤의 선발에서 외국 사람에게 그 명예귀족위를 줄 확률은 무척 적었다.
이런 건 자기 나라의 충신들에게 로마니아 외교권이나 포상을 주는 느낌으로 뿌리는 게 가장 이득이 크니까.
그래도 우리 파티는 티르시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까지가 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티르시는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또 뭔 일이지.
티르시는 정말 지극히 평탄한── 옷가게 점원이 옷을 권하기라도 하듯, 완벽하게 무난한 말투로 물었다.
“……노르드는 관심 없나요? 귀족 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