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70화 (370/1,009)

“저요?”

명예귀족인가.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해 봤다.

그 질문에 가부(可否)를 따지며 왜 가능성이 희박한지 떠드는 건 좀 촌스러운 짓이다.

캐서린이 비슷한 걸 물었을 때는 그냥 그렇게 했지만, 나 강북호는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맥락을 팩트로 끊어버리는 개씹아싸 새끼가 아니잖은가?

‘인싸가 되는 법 100가지’에서도 이럴 때는 그냥 유쾌하게 대답하면 된다고 그랬다고.

‘귀족이라…….’

귀족.

귀족 강북호.

진짜 그렇게 되면 노르드 에트라마 디 라이제르 같은 깐지나는 이름도 생기고 그러려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흐흐. 될 수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일단 귀족 후원자님이 생기더라도 갑을관계…… 어, 그러니까 상하관계가 좀 덜할 테고, 귀족 분들이랑 대화할 때도 편하겠죠.”

“더 노골적으로 말하셔도 되요. 이러나 저러나 기분 잡칠 일이 줄 듯 해서 좋겠다는 얘기죠?”

“넹.”

고작 어제 있던 일이다.

나는 어제 동안 ‘귀족을 상대한다’는 일의 좆 같음을 아주 조금, 그야말로 맛보기로나마 경험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는 인맥을 보여주고 오러 밑장빼기를 벌여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저 귀족들이 나한테 대체 얼마나 더 염병을 떨었을까. 상상만 해도 극한의 빡침이 몰려왔다.

막대한 자금줄을 움켜쥔 헤르마이온 상회조차 그랬다.

그들도 미네르바가 그랬던 것처럼 빠꾸없이 신분 차이로 밀어붙이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엿 먹은 뒤에 있을 보복이 아무리 철두철미해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보다 기분이 좋진 못할 것이었다. 신분 사회가 이렇게 좆 같다.

다시 말해서, 앞일을 생각하면 귀족 직위가 있어서 나쁠 건 없다.

명예 귀족이라면, 그리고 애초에 신분이 외국인인 나라면 로마니아 황제가 국토를 떼 줄 리도 없다. 영지 운영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될 것이었고, 그러면 지금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름 뿐이어도 귀족 타이틀을 달면, 아내가 넷이나 되더라도 좀 덜 미친 새끼로 보일 것 같았다.

‘물론 현실성 없는 얘기지만.’

브라티니아 국적의 키타이 인 노르드가 로마니아의 명예귀족이 된다고? 그게 대체 무슨 개족보란 말인가.

거기다가 그 나르메르-나일의 선발이란 것도 언제 갑자기 끝날지 모른다.

나중에 내 마음이 바뀌어서 거기에 참가할 때까지 유적 답파가 끝나지 않는다면 그만큼 유적이 위험하다는 거고, 그냥 끝나버리면 기회 자체가 없어진다.

솔직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아니, 분명 그렇기는 한데.’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약간 어색해졌다.

티르시의 꿈은 귀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도 종종 말한 적 있듯이, 귀족이랑 결혼하면 티르시도 귀족으로 복권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얘기는 자칫하면──

“──아, 지금 질문, 까딱하면 프로포즈처럼도 들렸겠네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티르시가 선수를 쳤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손을 모으고 가련하게 속삭였다.

“아, 왕자님. 저에게 한 송이 푸른 장미를 가져와 주세요. 그래만 주신다면 티르시는 당신만의 것이 되겠어요──.”

연극처럼 속삭인 티르시는 나를 보며 짖궂게 윙크했다.

“──같은 뜻은 아니니까, 뭐 괜히 지레짐작은 마시구요.”

그렇겠지. 나는 픽 웃었다.

티르시 성격에 ‘내가 귀족이 되고 싶은데 영 힘들더라? 그니까 니가 내 대신 출세해서 나 좀 업어가 주라’ 같은 소리를 할 리 있겠는가. 김치국을 마신 느낌이라 약간 쪽팔렸다.

21세기에선 여자들끼리 잘난 남자한테 시집가는 걸 ‘취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건 농담이거나 질 나쁜 사람들이 하던 말이잖은가. 그래서 나도 그냥 너스레를 떨었다.

“흐흐. 뭐, 로마니아에도 그런 얘기가 있나 보군요?”

“있고 말고요. 물론 요즘 시대에는 푸른 장미야 어디서든 팔지만요.”

나는 픽 웃었다. 프랑한테 프로포즈하면서 선물했던 푸른 장미가 생각나서였다.

내 웃음에 이끌린 듯 티르시도 웃었다.

“노르드. 기억나세요? 노르드가 제가 몰락 귀족이라는 걸 처음 아셨을 때, 저는 당신의 질문에 제 과거는 전부 끝났다고 대답했었죠.”

“기억납니다. 헨네시스 영애와 처음 대화를 나눈 것도 그때였죠.”

“네. 그리고 제가 그때 한 대답은 지금도 변함 없어요. 저희 가문은 권모술수에 의해서 무너졌지만, 제가 귀족이 되려는 건 그 일에 대한 복수 때문이 아니에요”

예전이라면 예전이고, 얼마 전이라면 얼마 전의 일이다.

축하연이 있던 날, 나는 티르시에게 당신의 과거는 다 끝났냐고 물었다. 티르시는 그것에 ‘그렇다’고 대답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티르시의 목적을 반쯤 들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복수를 하고 싶어서 귀족이 되려는 거라면, 그 과거를 끝났다곤 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말이다.

“철이 없을 때는 복수를 이유로 살아갈 때도 있었지만, 결국 할아버님께서도 무고하진 않으셨다는 걸 알았거든요. 솔직히 가족의 원한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홀몸이라 제 멋대로 살아도 화낼 사람도 없어요.”

그녀가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진 않아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때때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 같을 때가 있는 이세계다. 한 나라의 권력 중추를 쥐고 흔들던 사람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을 가능성은 없었다. 정치란 전쟁보다 살벌하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의문을 잊은 채로 살아가는 건, 미지를 탐구하는 마법사의 태도가 아니죠.”

티르시는 이제 완전히 떠오른 해를 등지고 눈을 감았다.

“저는 귀족이 되서, 알고 싶어요. 누가 그랬는지가 아니라, 왜 그랬는지. 정당한 복수였는지…… 아니면 할아버님이 그러셨듯이, 이윤을 위한 분쟁이었는지. 단지 그것 뿐이에요.”

나는 그때 간신히 티르시의 행보가 이해가 갔다.

아르마슈나스 가문이 사라져야 했던 진짜 이유를 찾는 것.

그게 바로 티르시의 꿈이었다. 귀족으로서 권위를 되찾아, 다른 사람들이 덮어놓고 쉬쉬 하는 진실을 파헤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법사 길드나 모험가 길드의 인맥과, 뛰어난 전투력도 꼭 필요하겠지. 일의 원흉이 티르시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니까.

그 가시밭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염병할 교수에게 모욕을 받고 노예로 부려지는 것도 참을 수 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부표(浮漂)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티르시한테는, 그 목표만이 삶의 목표이자 나침반이었기에.

지구에서의 삶이 그리워지지 않을 만큼 성공한 내가, 지금까지도 지구로의 복귀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앗, 하지만 이거 마리아한테는 비밀이에요?”

그렇게 말한 티르시는 눈을 뜨고서 픽 웃었다. 마치 그런 따분하기만 한 개인 사정에 얼마나 의미가 있냐는 듯이.

“그 애, 제 본심을 알면 신랑감을 골라올지도 몰라요. 정작 자기도 스물 다섯이 되도록 미혼이면서.”

“어허. 그런 말씀은 아직 이르지 않아요? 듣는 평민놈 오싹하네요. 귀족 모욕은 귀족이 되고 나서 해 주십셔.”

“후후. 제가 귀족이 되면, 저를 놀리던 노르드도 귀족 모욕죄가 적용되는데요?”

“그거 큰일이네요. 저도 귀족이나 해야겠어요.”

넋두리 같은 농담을 뱉자 티르시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실실 쪼개면서 그녀랑 같이 웃었다.

나는 그렇게 몇 분 정도를 웃다가, 완전히 떠오른 태양을 등지며 말했다.

“자, 슬슬 들어갑시다. 오늘은 병실보다 좋은 침대에서 쉬어야죠.”

티르시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를 따라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길 잘 했군.’

나는 앞장 서서 걸으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티르시의 숨김 없는 진심을 들었으니 말이다.

***

노르드가 돌아선 뒤, 티르시는 얕고 깊게 호흡을 골랐다.

‘……안 들켰겠지? 그렇겠지?’

노르드의 등을 엿보며 티르시는 자신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탓일까. 방금 막 온 힘을 다해서 평온을 가장한 얼굴에 다시 핏기가 올라왔다. 잘 익은 토마토를 끓는 물에 데쳐도 이렇게 뜨겁고 흐물거리진 않을 것이다.

예민한 전사의 감각에 포착되지 않도록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며, 티르시는 새빨개진 얼굴을 다급하게 진정시켰다.

‘이 바보! 멍청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대체!’

귀족이 될 생각은 없냐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잠시 미쳤던 게 틀림없다. 아니,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도망친 디아볼로가 텔레파시로 잠깐 자신의 몸을 조종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입이 저렇게 멋대로 움직일 리가 없다.

대체 그런 걸 물어봐서 어쩌겠다고 저런 질문을 했던 걸까. 티르시는 자괴감과 수치심에 소리없이 아우성을 쳤다.

입에 담을 때까지만 해도 ‘이야기의 흐름 상 화제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고작 10분 전의 자신을 다시 얼음 관에 쳐박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지금은 어찌저찌 넘어갔지만, 그가 나중에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하면 어떡하지? 그가 나를 거북해 하기 시작하면?

아니지. 거북해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그렇게 막, 질색할 만큼 못난 건 아니지 않나?

그치만 그의 아내들과 나란히 선 자신을 상상해보면 조금 자신이 없어지긴 했다. 그야 다들 좋은 사람에, 미인이잖아. 가슴도 하나같이 크고. 다나 씨는 예외지만.

‘흐으으으……!’

티르시의 머릿속은 마치 요리 초심자가 어설프게 끓여놓은 스튜처럼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졌다.

“선배~?”

그리고 그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진정시킨 건 간이 병동의 입구에서 나온 소녀였다. 잠자리가 나빴는지 핑크색 머리에 까치집을 세운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들을 발견했다.

“앗, 여기 계셨어요♡?”

라리루라는 뻗친 머리를 열심히 다듬으며 달려왔다. 작은 보폭의 종종걸음은 같은 여성인 티르시가 봐도 사랑스러웠다.

“정말~ 뭐에요? 일어났는데 옆에 없으셔서 애 떨어질 뻔 했잖아요. 선배가 티르시 언니를 납치해 간 줄 알았다구요?”

“얘가 뜬금없이 무서운 소릴 하네. 것보다 내가 티르시를 납치해서 어디로 데려간다고 그래?”

“랩실요.”

“……쓰읍. 잠깐 혹했다? 이 새끼 쫌 치네.”

〈강림〉 마법을 분석하는 데는 티르시의 협력도 필요했다. 랩실까지는 농담이어도, 그와 베로니카, 티르시가 같이 연구할 시간은 만들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슥슥.

노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처 정리되지 못한 라리루라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여자들이 세팅된 머리를 헤집는 손을 싫어하는 것은 만국 공통이지만, 자다 깨서 뻗친 새집을 원숙한 손길로 정리해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라리루라는 헤프게 웃었다.

“에헤♡ 선배 손 따듯해서 기분 좋아요.”

“이 오빠가 미용 좀 한단다. 내 손은 분무기, 고데기, 드라이어, 가위를 섭렵하는 멀티툴임.”

뻗친 머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평소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자기 머리를 앞뒤로 만져보던 라리루라는 그 그럴싸한 완성도에 감탄하다가 질문했다.

“그래서, 둘이서 뭐 하셨어요?”

“잠깐 이것저것 얘기하다 왔지. 나도 깨 보니까 티르시가 없길래 따라나왔었거든.”

“흐음……? 둘이서요?”

라리루라는 그때까지 아무 말 않던 티르시와 노르드를 1초 간격으로 차례차례 관찰했다.

티르시는 그게 어째선지 부모님들의 분위기를 살피는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안일한 생각은 고작 10초도 가지 않았다.

“……과연, 대충 알았어요.”

딱 그렇게만 말한 라리루라가, 마치 티르시더러 보란 듯이 노르드의 품에 안겨들었기 때문이다.

라리루라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티르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티르시는 그만 심장이 덜컥했지만, 등에 눈이 달리지 않은 노르드는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 했다.

설마 그에게 보이는 각도까지 계산한 걸까. 티르시는 입을 멍하니 벌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갑자기 왜 이래? 귀엽게. 잠이라도 덜 깼어?”

노르드는 키 차이 때문에 라리루라가 티르시를 바라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등에 팔을 둘렀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퉁명스럽다고 해도 좋을 말투였지만, 그도 싫은 것만은 아닌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새삼, 사회생활에 능숙한 사람이다. 자기 매력을 어필하고 저런 리액션을 돌려받는데 기분 나빠할 여성이 어디 있을까. 어설프게 말로 칭찬하거나 기뻐하는 것보단 훨씬 보기 좋은 반응이었다.

최소한 티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라리루라와 같은 마음으로 비슷한 행동을 취한다면, 저 웃음만큼 기쁜 반응은 또 없을 것이었다.

“아핫♡? 그게 있죠~? 사실 저, 이제부터라도 선배랑 스킨십을 더 늘려갈까~ 생각해서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라리루라는 티르시가 생각한 것처럼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웃었다.

그녀는 티르시한테서 눈을 돌리고서 노르드와 손가락을 깍지 꼈다. 촘촘하게 맞물린 소녀의 손가락이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을 쓰다듬고, 만지작거렸다.

체온의 교환이란 애정의 교류와 확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행위다.

그건 친구 사이의 악수일 때도 있고, 부모자식 간의 어깨 안마나 포옹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생물은 다른 생물과 체온을 교류할 때 포근함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라리루라가 그런 건실하고 플라토닉한 감정을 갖고 행동했을 가능성은 0%였다. 저건 100% 애정표현이다. 그것도 몹시 능숙한.

하지만 손가락이라니! 손가락이라니!

보란 듯이 손을 들어서 깍지를 끼고, 그걸 만지작거리면서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인다니! 티르시는 영문 모를 기분에 괜히 발뒤꿈치가 들썩거렸다.

물론 저것만 갖고는 딱히 음란하거나 낯뜨거운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것은 절대 음란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범상치 않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은연 중에 보여주는 고도의 연애 테크닉이었다.

스킨십을 통해서 애정을 어필하고 있는데도, 그 눈빛과 몸가짐이 저토록 청초해 보일 수가 있을 줄이야.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고단수였다. 치밀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심계(心計)다. 남심의 지배자다.

그 직설적인 어필에 노르드의 얼굴에서도 힘이 풀렸다.

“이건 또 갑작스럽네. 나야 좋긴 하지만, 갑자기 왜?”

“네에~? 왜긴요. 저는 이유가 없으면 선배랑 얼레리 꼴레리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며 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 하는 라리루라였다.

요망하다.

괘씸하다.

뭐가 괘씸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말로 괘씸하다. 티르시는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면서 무심코 울컥했다.

티르시가 울컥하는 소리를 들은 노르드는 고개를 뒤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타이밍에 라리루라가 다시 그의 품에 안겨서 얼굴을 비비적댔고, 노르드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라리루라한테로 돌아왔다.

노르드의 품에서 교태를 부리는 라리루라의 일거수일투족은 지극히 교묘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티르시조차도 방금 건 우연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버릴 정도였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선배~? 언니들이 놀라기 전에 얼른 돌아가요~? 몰래 돌아다니면 다나 언니한테 또 혼난다구요♡?”

“어? 아, 그래. 그래야지.”

맞는 말이었기에 노르드는 팔짱을 낀 라리루라에게 이끌려갔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이긴 했으니까.

그리고 라리루라는 그런 그를 데리고 떠나면서 티르시에게 가볍게 볼을 부풀려 보였다.

사랑하는 소녀답게 독점욕과 질투가 섞인, 자그마한 투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본 티르시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볼을 부풀려? 왜? 뭐가 불만이어서? 지금 제일 불만스러운 건 나 아닐까?

아니 그치만, 따지고 보면 사실 지금 내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도 웃긴 건가?

그래, 티르시. 불만은 무슨 불만?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 불평을 하겠다고? 네가 저 사람의 뭐길래?

“우으으으…….”

티르시는 자기혐오와 자괴감과, 또 어떤 감정인지도 모를 감정들에 시달리며 번민했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은 턱까지 차올랐다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걸려버렸고,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발은 그렇게 해도 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인들끼리 사랑을 나누겠다는데, 거기에 제 3자가 끼어들 자격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아, 정말……!!”

속에서 꾸물거리는 감정을 해소할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있더라도 티르시는 알지 못했다. 25살 인생을 연구실에서 보낸 그녀는 이 ‘미지’ 앞에서 더없이 무력했다.

그래서 티르시는 그냥 그렇게, 보물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하염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

떠오르는 아침 해가 그런 티르시를 위로하듯이 쨍한 햇살을 비추었다. 겨울철 치곤 포근한 햇빛이었다.

그녀가 얼음 관에서 잠든 채로 보냈던 겨울도, 얼마 있으면 끝난다.

자연현상이란 건 그런 법이었다. 사람들이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언젠가는 끝나고, 또 찾아온다.

하지만 그래도, 때는 아직 1월 중순.

봄날이 찾아오기엔, 한참은 이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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