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73화 (373/1,009)

술식의 이치가 파헤쳐진다.

반지가 어딘가 요사스럽게 빛을 뿜었다. 두통을 무시하며 머리를 굴리자 저주는 어설프게 묶인 실타래처럼 그 실태를 드러냈다. 꼭 실뜨기에서 정답을 풀었을 때 같은 느낌이었다.

수학식의 복잡한 연산기호도 하나하나 풀어헤쳐 보면 여러 페이지 분량의 사칙연산 등으로 정리되곤 했다.

마법도 그것과 같다.

복잡하고 교묘한 술식도 결국은 마나의 움직임에서 원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에 불과하다.

‘……저주가 기존의 마법에 기생해 있군.’

반지를 덮은 술식은 이중으로 엮인 구조였다.

아마 원래 프리모르의 남편이 부여시켰을 마법에, 저주가 기생해서 마나를 빨아먹고 있다.

이 저주 때문에 멀쩡한 매직 아이템이 저주받은 물건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저주의 효과는 2개.’

혈액을 부패시키는 것.

부패된 시체를 흑마법사 코뤤투스의 지배 하에 넣는 것.

이렇게 두 개다.

하지만 코뤤투스의 죽음으로 술식의 흐름에 결함이 생겨나 있었다.

말하자면 수학 공식의 일부가 번져버린 것과 같은 상황!

정직하게 정면에서 공략한다면 해주하기가 힘들겠지만, 이 균열을 넓게 벌리면 저주는 스스로 붕괴되겠지.

그렇다면 내가 공략할 곳이 어딘지도 결정이 난 셈이었다.

스화아아아악……!

술식을 베어가르고 내 마나가 저주 속으로 퍼져갔다.

당연히 멀쩡한 술식은 마나를 거절하지만, 저항이 약하고 내 마나가 간단하게 파고들 수 있는 취약점이 있었다.

‘……이건가.’

반지의 주변에 신기루처럼 일렁거림이 일어났다.

나는 저주의 근원을 고정시키고, 그 신기루를 손가락으로 뜯어냈다.

─찌익!

종이를 찢는 것처럼 반투명한 무언가가 반지에서 뜯겨나와 내 집게손가락에 잡혔다.

〈──끼에에에엑!!〉

술식이 깔끔하게 박살나자, 저주는 부지불식간에 보라색의 마나로 변모해서 꼬리를 잡힌 쥐처럼 버둥거렸다.

아마 내가 원형을 유지하며 부숴버린 탓에 저주가 멀쩡히 추출된 모양이었다.

나는 눈도 꿈쩍 않고 그 저주의 근원을 짓뭉갰다.

─뿌직! 박살난 저주는 손바닥에서 터져나갔다.

〈바, 방금 그게 저주입니까……?〉

앞에 튀어나온 성기사들을 물리며 교구장이 중얼거렸다.

따로 나한테 물어본 것 같진 않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반지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해주했습니다. 쉬웠던 걸 보니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돼 있었나 봅니다. 원래 걸려 있던 마법은 남겼고요.〉

뒤늦게 10초 컷으로 해주해 버린 게 신경 쓰여서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프리모르는 리액션을 해 주지도 않았다. 무시라니 너무하시네.

그녀는 반지를 만지며 차이점을 느껴보려고 한 듯 했는데, 그게 시도한다고 느껴지는 거였으면 손가락을 자를 일도 없었겠지. 손가락이 멈춘 것은 아마 변화를 느끼지 못해서였을 것이었다.

그래도 마치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 멍하니 반지를 만지던 프리모르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등을 돌렸다.

프리모르의 호위들은 착잡함과 놀람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주군의 여인을 뒤쫓아갔다.

내 해주 솜씨에 넋이 나갔던 교구장이 말했다.

〈사정을 다 들은 바는 없으나,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그건 마담 스스로가 정하실 일이죠.〉

내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그는 한 방 먹은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선, 뭐가 웃겼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렇군요! 예, 그렇죠! 이거 저보다 노르드 님께서 더 성직자 같습니다! 하하하하!〉

볼살을 떨며 웃는 교구장에게 나랑 셀레나도 어색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이세계인들 개그 센스는 이해가 안 간다니까.’

교구장은 그 뒤로도 그렇게 나랑 얘기를 나누며 아까 썼던 해주법은 대체 무엇이냐, 그 솜씨로 해주할 수 없다는 아내 분의 저주는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을 퍼부었다.

이것도 인맥의 일환이라는 생각에 나는 적당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바이콘 족의 저주라는 게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지 않은가.

‘그게 아니어도, 해주의 스페셜리스트라면 나 같은 치트 유저랑은 다르게 저주를 찾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겠지.’

그렇게 나는 그와 얘기나 제안 등을 나누다가 식사 자리를 물러났다.

이렇게 우연한 만남도 놓치지 않는 게, 나도 이제 하는 짓만은 이세계인 다 됐다 싶었다.

***

아무튼, 그렇게 그럴싸하게만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바로 다음날. 나는 꼭두새벽부터 또 뜻밖의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노르드! 레나폴리스의 영웅, 고고학자 노르드는 있나!!〉

헤르마이온 저택의 정문 앞.

깜빡 잘못 보면 드워프로 착각할 만큼 쥐방울만한 꼬마는 귀족답게 말쑥한 차림으로 외쳤다.

〈나의 사랑하는 그대, 미네르바의 오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다!! 부디 내게 엘릭서를 팔아다오!!〉

─쿠르릉! 울려퍼지는 고함소리.

저택은 물론이고 주변 주택단지에까지 쩌렁거리며 울리는 성량이었다.

“……아주 아침 댓바람부터 로맨티스트 납셨네요.”

자다 깬 라리루라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들린 도시인데 왤케 날 찾는 사람이 많어, 씨부랄.

“기다리고 있으면 셀레나 씨가 어떻게든 하겠죠. 선배, 그 동안 저랑 뒹굴뒹굴 안 할래요~?”

“얘가 요즘 들어 사람 유혹할 줄 아네. 근데 내가 저 양반 앞에 불려가게 생겼으니, 난 지금부터라도 씻어야 쓰겄다.”

“……그럼 같이 씻으실래요♡?”

“……쓰읍. 그것까지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렇게 나랑 라리루라는 아침부터 눈빛을 나누었다.

티르시도 구해냈고, 당장 급한 불은 껐다 보니까 최근에는 뭣만 하면 이렇게 된다.

예전처럼 우리 후배님 앞에서만은 자제하던 때랑은 달리, 이제는 오른쪽을 봐도 아내님이고 왼쪽을 봐도 아내님이다. 신혼 부부의 주책맞은 꽁냥거림을 19금으로 벌여대는 수준.

그러자 자제하라는 듯 내 귀를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베로니카였다.

“갔다 와서 하거라, 갔다 와서. 씻으면서 부비적대다가 눈 맞을 게 불 보듯 뻔하지 않느냐.”

“아, 왜. 안 맞을 수도 있지.”

“그래요, 언니! 어떻게 확신하시는데요!”

“헛소리 말거라. 안 맞게 생겼느냐? 라리루라가 유혹하면 요즘 근심걱정도 없는 우리 주인님이 퍽이나 사양하겠군.”

나는 그 말에 베로니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항, 알았다. 나는 유혹 안 하니까, 씻을 거면 나랑 같이 씻어라 이거지?”

그럴 생각이 아니어도 그럴 생각인 걸로 하자. 나는 냉큼 베로니카를 들춰안았다.

베로니카는 뒷덜미를 잡힌 새끼 고양이처럼 눈이 주먹만해 졌다.

“……뭐? 어? 아니, 잠,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거라!”

“에헤이. 빼지 마. 뭔 뜻인지 알아들었다니까?”

바둥거리는 다리에 맞으면서 샤워실로 렛츠 고.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 꼬락서니를 구경하던 라리루라는 정신을 차린 듯 울상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언니들!! 베로니카 언니가 또 치사하게 새치기해요!! …… 언니들?”

라리루라가 울먹거리며 소리쳤지만, 프랑이나 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고? 우리 행동 빠른 아내님들은 어느새 샤워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흠.”

내 황당한 눈빛에 다나는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야, 씻으려고 했더니 갑자기 들이닥치기냐?”

“누나 아까까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어?”

“아닌데? 니 증거도 없이 사람 모함하고 그러면 못 쓴다?”

“헤헤. 만약 그게 진짜여두, 우리가 먼저 들어왔잖아?”

─찰칵.

프랑은 샤워실 문을 잠그며 말했고, 그 0.1초 뒤에 라리루라가 문고리를 잡고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아아앗!! 이거 열어요!! 언니들 이러시기 있기에요?! 저도 들어갈래요!! 먼저 말 꺼낸 건 저잖아요──!!”

“푸흐흐. 누가 씻지 말래? 근데 5명이 쓰기엔 좀 좁더라.”

“이따가 혼자 느긋하게 씻어. 욕조도 넓게 쓰구 좋겠다.”

“흐꺄아아아악!! 부숴버릴 거에요! 문 부숴버릴 거라구요!!”

“응~ 이미 마법으로 보강했어~.”

우리 아내님들 사이가 참 좋네. 나는 그녀들의 꽁트에 픽 웃으면서 베로니카한테 물었다.

“그래서? 안 씻을 거야?”

우리 시종님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가, 같이 씻으마.”

그래. 솔직하니까 얼마나 좋아.

***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메이드를 따라서 응접실로 갔다.

진짜 딱 씻기만 했지만 세상 서럽게 울어대는 라리루라를 달래고 왔기에 좀 늦은 감이 있었다.

되도록 서둘렀지만 이미 늦었는지, 응접실에는 셀레나와 그 고성방가 꼬맹이가 착석해 있었다.

〈왔군!! 반갑다!!〉

새벽부터 시끄럽게 떠들던 꼬맹이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물론 그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내 안의 언데드 유교 드래곤은 어딜 내 인생의 반도 못 산 것 같은 꼬맹이 새끼가 반말을 찍찍 싸느냐며 포효했다.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하찮은 고고학자, 노르드입니다.〉

물론 나는 유교 드래곤의 포효를 무시했다.

내가 누군가? 죽음의 신, 오딘의 후계자 씩이나 되는 전사 아니던가. 뒤지다 만 유교 탈레반의 잔재 따윈 무시다.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악수를 받고, 착석.

응접실에는 프리모르도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의 흐트러진 모습이 거짓말처럼 품위 있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근데 씨발 또 차야? 귀족들은 찻물만 마시다가 배 불러서 밥도 못 먹겠네. 또 녹차면 내가 존나 테이블 뒤집는다.

‘그나저나 이렇게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아녔나?’

나는 셀레나의 눈치부터 살폈다.

저번부터 나랑 내가 데려온 손님들 때문에 귀족들이 예약도 없이 들이닥쳤잖은가.

기분이 나빠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될 수밖에.

〈디스뮤크. 노르드 씨에게도 차를.〉

〈예, 아가씨.〉

물론 셀레나는 딱히 화난 눈치는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진짜로 빡쳤으면 몰래 눈치라도 줬을 것이다.

나는 안심하면서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먹었다.

신뢰관계란 건 자꾸 흔들어제끼면 무너지기 마련이거든.

〈나는 마르셀로 쿨라피우스다. 미네르바의 남편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요 쬐끄만 녀석이 그 여장부님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놀랄 만도 한데, 내 마음은 평정 그 자체였다.

라면 국물에 3일은 방치한 것처럼 불어터진 영애가 잘생긴 남편을 3~4명씩 데리고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세계 귀족들의 결혼생활에 모든 상식을 버렸다.

꼬맹이는 오만하지 않을 정도의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만, 나는 네가 가진 엘릭서를 구매하고 싶다.〉

〈그건 몹시 기쁜 제안입니다만…….〉

〈기다려다오. 마저 말하겠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꼬맹이는 손을 들어서 저지했다.

〈더 비싸게 팔기 위해서 다음 경매를 노릴 수도 있다는 점, 잘 안다. 그러니까 2배다! 여기 이 여자가 구매하겠다는 금액의 두 배로 사겠다!〉

〈……흐음. 제가 대체 얼마에 사실 줄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프리모르가 찻잔에서 입을 떼며 말하자 꼬맹이는 눈을 부라렸다.

〈얼마든 상관없다! 미네르바의 원수에게 엘릭서 한 방울이라도 줄 성 싶으냐!〉

〈저는 한 모금 정도면 충분해요. 적당한 타협점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거절한다!〉

꼬맹이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일갈했다.

단호하다 못해서 약간 갑갑한 스탠스였는데, 왜인지는 안다.

‘미네르바랑 아르마알스 가문 사이에 뭔 문제가 있었댔나?’

자세한 사항은 모르고, 또 사실 별로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나였어도 〈임모르탈리스〉 같은 놈들이 우리 아내님들의 팔다리를 잘라내놓고 자기 상처를 치료할 엘릭서를 나눠달라고 하면 빡칠 것이다.

오히려 이 꼬맹이는 나이에 비해서는 잘 참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타협점은 없으시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프리모르는 눈을 반개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2배라는 허황된 소리는 마시고, 1대 1의 경매로 정하죠.〉

〈……경매라고?〉

〈예. 저도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엘릭서에 집착할 생각은 없었지만…… 귀족이 몇 번이나 말을 번복하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죠. 이 나라에 남은 마지막 1병, 놓칠 생각은 없습니다.〉

프리모르와 미네르바의 남편이 공중에서 눈을 부딪혔다.

이 나이에 미네르바의 남편감이 됐다면, 요 꼬맹이도 나름 부유하고 잘 나가는 가문 출신일 것이다. 아르마알스 가문의 마님을 상대로도 돈으로 꿀리지는 않겠지.

즉, 이것은 그야말로 귀족과 귀족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다.

─꿀꺽.

셀레나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침을 삼켰다.

귀족과 귀족.

아내의 상처를 치료하려는 남편과, 죽은 그이가 남긴 반지를 끼고자 하는 아내.

서로의 재산과 자존심을 건 두 사람의 남녀가, 단 1병의 엘릭서를 쟁취하고자 하는 희대의 대결이 시작──

〈──대체 언제부터 엘릭서가 1병 뿐이라고 착각하신 겁니까?〉

──되지 않았다.

나는 챙겨왔던 엘릭서를 2병,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일이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가진 엘릭서를 다 가져온 것이다.

1대 1 경매고 뭐고, 미네르바나 프리모르나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다. 적당히 뇌물 주는 느낌으로 합당한 가격에 파는 게 나을 것이었다.

‘……엘릭서를 수급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 ‘방법’은 이들에게 엘릭서를 팔아치운 다음의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품위도 잊고 입을 벌린 그들에게, 존나 다정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얼른 사 갖고 꺼지렴.

이 엉님도 울던 아내 달래주러 돌아가 봐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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