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75화 (375/1,009)

응접실에 나랑 자신만 남게 되자, 집주인 대리이자 중재자 역할로 남아있던 셀레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후후후. 저였으면 20골드에 팔았을 거에요.”

당연히 그랬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귀족님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하지만 아무리 현명한 선택이라도 보고만 있자니 아쉬운 마음은 감추기 힘드네요. 고작 10골드로는 저만한 분들의 호감을 살 수는 없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에요!”

그녀는 입가를 가리면서 호쾌하게 웃었다. 존나 찐퉁 부잣집 아가씨의 웃음이었다.

물론 그 얘길 들은 나도 실실 쪼갰다. 이 아가씨도 가만 보면 말솜씨가 끝내준다니까.

‘은혜를 갚는 귀족과의 인맥은 10골드보다 가치가 있지.’

20골드까지 부른 엘릭서를 다시 절반으로 깎은 것.

언뜻 내 손해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어째서냐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된다.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생판 남인 미네르바나 프리모르에게 10골드를 준다고 치자.

그러면 저들이 나랑 지금 같은 신뢰관계를 맺어줬을까?

그 답은 NO였다.

고작 10억으로 돈독한 우정이나 호감을 쌓기에는, 로마니아 갑부 아줌마들은 너무 부자이고, 외골수였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저들에게 10골드를 뜯어냈다면?’

프리모르는 뭐, 반쯤 나에 대한 감사로 엘릭서를 산 듯도 보이니까 어느 정도라면 넘어가 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최소한 미네르바는 내 평가를 하향조정할 거다.

부자여도 돈 낭비는 싫어한다. 100만원을 펑펑 써대는 사람이라도 천원 짜리 붕어빵을 10만원에 사지는 않잖은가.

건강한 인맥을 유지하려면 손해 아닌 손해는 감수하는 게 옳았다.

‘내가 귀족들한테 40골드나 뜯어낸 것도, 따지고 보면 절반 이상이 인맥 빨이잖아?’

돈에 미친 티를 내는 새끼는 어느 세상에서든 호감을 사기 어려운 법이다.

미래를 생각하자. 저 10골드는 독이 든 성배다.

마피아 저택의 금고가 열려 있다고 거기에서 금괴를 들고 내빼면 안 된다. 스릴 넘치는 괴도짓은 1번이면 족했다.

그래서일까? 셀레나는 내가 느끼는 아쉬움을 살살 긁어주며 내 선택의 이익까지 어필해준 것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교묘하게 칭찬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마련!

그런데 셀레나는 그 어려운 짓을 숨 쉬듯 해냈다.

이러니 누군들 호감이 안 쌓이겠는가. 상인답다면 상인다운 칭찬 기술이었다.

아부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실실 웃어댔고, 셀레나는 같이 웃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판매하지 않으려시던 걸 보면 저 엘릭서는 예비용이었던 듯 한데요.”

“아, 그거라면 상관 없습니다. 이게 있거든요.”

주머니에서 돌돌 만 양피지를 꺼내들자 셀레나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양피지네요? 후후, 또 뭘까요? 벌써부터 기대되는걸요?”

눈을 빛내며 즐거운 듯 묻는 셀레나.

이세계에서 양피지로 뭔가를 쓴다는 건 그만큼 가치 있는 글이라는 뜻이다. 종이가 흔한 세상이니까.

그런데 내가 든 양피지는 새것이니, 그만큼 신선한 정보란 이야기다. 저게 대체 뭘까~ 하고 흥미가 자극된 거겠지.

나는 상큼한 훈남 보이스로 말했다.

“엘릭서의 제조법입니다. 내용은 30% 가량 유실됐지만요.”

“……네?”

3초.

2초.

1초.

셀레나는 바보 같은 얼굴로 자기 귀를 의심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 에에, 엘릭서의 제조법이라고요──?!”

“어허.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나는 생각했던 대로의 격한 반응에 멧돼지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손을 휘적였다.

하지만 셀레나는 오히려 빨간 천이 코앞에서 펄럭이는 걸 본 투우처럼 머리를 흔들어댔다.

“응접실은 방음이 철저하니까 아무런 문제 없답니다!!!!!!! 그것보다 정말인가요?! 정말로 정말로 그게!!!!!!!”

“예. 제조법입니다. 근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실된 부분도 있어요.”

나는 양피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제조법은 디아볼로의 소유물이었던 장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기장하고 비슷하게 암호화된 책이었지.’

어쩌면 고대문명 시기에 유행하던 암호법일지도 몰랐다.

원래 그 시대의 최첨단이라는 것은 한 가지 방법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어지간한 라멘집에서 다 시판 소스를 사다가 붓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 엘릭서가 양산되던 것도 고대 문명 시대였다.

그 무렵에 이런 암호화 붐이 불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시죠?! 저는 지금 목덜미와 척추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답니다!!!!!!”

“흐흐. 저도 어제까진 그랬습니다.”

도무지 다시 앉지를 못하는 셀레나에게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헤르마이온 길드로 디아볼로의 서책들이 굴러들어온 날.

나는 아내들이랑 일기장의 연구 계획을 세우면서, 혹시 이 책들에도 뭔가 대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진짜로 대박을 건졌지.’

암호화 되어 있어서 아무도 몰랐던 서책 속의 레세피!

이 양피지의 글은 그 해독된 내용을 베껴쓴 거였다. 나는 여유를 부리며 어깨를 폈다.

“하지만 이제부터 거래를 제시하려는 사람이, 자기 상품의 가치에 흥분해서 씩씩대면 좀 꼴사납지 않겠습니까?”

“──거래, 라고 하셨나요?”

눈 깜짝할 사이에 분위기가 격변하는 셀레나였다.

마치 길에서 강아지랑 놀다가 기습을 당한 전사처럼 멋진 표변(豹變)이다.

이 돈 낳는 거위가 단순히 남의 일이 아니게 되자 등장한, 상인다운 집중력. 그녀도 어떠한 경지의 달인인 것이다.

“예. 저 혼자 먹으면 탈 날 사업 아닙니까? 이런 건 제가 아는 가장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분과 나눠야죠.”

나는 100% 악의 없는 선량한 사람처럼 말했다.

디아볼로가 이 제조법을 가지고도 엘릭서에 집착한 이유가 뭐겠는가.

1. 유실된 제조법을 복구하기 어려워서.

2. 필요한 설비를 갖추려면 눈에 띄어서.

3. 티르시가 셀프 냉동인간이 된 게 예상 밖이어서.

셋 중 하나냐고?

아니, 전부 다 정답이다.

아마 그 새끼는 귀족 사회에 녹아들어서 이 제조법을 사업으로 삼고, 흑마법에 곱창난 자기 몸을 치료하려고 했겠지.

‘엘릭서를 양산해서 〈임모르탈리스〉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했을지도 모르고.’

유니콘 흑마법사만 해도 그랬잖은가?

그 새끼는 지저의 탑에서 엘릭서를 몇 개 챙기겠다고 그딴 난장판을 일으킨 걸로 추정된다. 네페르티티를 골렘의 동력원으로 만드는 것도 목적이었겠지만, 뭐 아무튼.

그렇듯 고급 포션은 몸이 산 채로 썩고 벌레 먹히는 흑마법사에게 꼭 필요한 생명수다.

엘릭서 부자가 된다면 조직 내에서 학교에 닌텐도를 들고 온 새끼처럼 하루 아침에 씹인싸가 되는 것도 손쉽겠지.

“아주…… 아주 멋진 판단이세요.”

아무튼 그건 그거고, 셀레나는 내가 공동사업을 제안하자 낮게 속삭이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존나 등골이 오싹해지는 미소다.

불길하거나 무서운 건 아닌데, 꼭 군침 도는 먹이를 발견하고서 희열에 찬 육식짐승 같은 느낌.

“역시 제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요. 노르드 씨라면 언젠가 이런 큰 건을 물어와 주실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셀레나의 눈이 웃는 여우처럼 길게 찢어졌다.

젊은 상인은 그렇게 요염하면서도 음흉한 눈빛을 뿜었다. 뭔데 약간 야한 것 같지.

“하지만…… 어머나? 마침 바로 어제, 저가 노르드 씨에게 계약서를 쓰는 방법을 알려드렸네요?”

셀레나는 턱에 검지를 대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이걸 이렇게 들킨다고? 눈치 한 번 존나게 빠르네.

“후후, 이거 저도 눈 뜨고 코 베인 셈인가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다. 제가 날도둑도 아니고.”

나는 실실대며 능청을 떨었다.

애초에 나라고 그 시점에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40골드를 받고서 돌아와 보니까 책이 배달와 있었고, 그걸 찾아보다가 알아낸 거다. 나도 노리고 한 건 아니었다.

“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죠. 엘릭서 공방 사업! 이 얼마나 멋진 단어일까요!! 반드시 성사시키겠어요!!!”

셀레나는 허식을 섞은 따윈 스킵해 버리고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안 어울리긴 하지?

“그러면 저희, 제조법의 거래에 관해서 계약서를 쓰죠!!!!! 원하는 바를 적어서!!!! 서로의 바람을 조율하고 합쳐가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계약서를 만들어요!!!!”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응접실에서 계약서를 끼적거리는 동안, 셀레나는 번개처럼 달려나가서는 1시간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응접실 밖에서 사람들을 불러서 작전회의라도 하는 걸까.

이렇게 상대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는 건 내 목을 조르는 셈이었지만, 나는 전혀 쫄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인맥은 중요하지만, 친구 사이에서도 돈이 오가는 약속은 철두철미 해야지.’

셀레나가 나를 높게 평가한다지만 손해 보는 계약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작투 타듯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최고로 이윤을 뽑아낼 계약을 작성하겠지.

로마니아 전역을 무대로 삼는 대상인의 친딸이잖은가. 그 정도는 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밀리지만은 않을 수 있게 생각을 짜 왔다.

‘오늘의 진짜 거래는 엘릭서의 판매가 아니라 이쪽이니까.’

뭐, 1시간 넘도록 코를 훌쩍이면서 기다리고 있을 라리루라한테는 미안하긴 했다.

그래도 거래 하나는 10분만에 끝냈단다. 이 남편놈의 진심 어린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래?

1시간이나 기다리다 보니까 시간이 남아서 미네르바가 쓴 편지도 읽었다.

그녀답게 본론만 가득한 편지였다. 무려 양면으로 딸랑 1장이다.

─팔랑.

그래도 편지의 내용 자체는 버릴 데 없이 깔끔했다. 나는 그 글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티르시는 무죄방면이라. 뭐, 당연하지.’

지구는 물론, 이세계의 상식으로도 당연했다.

그녀가 뭐 사람을 죽였는가, 피해를 입혔는가.

‘내가 몸소 몸을 던져서 딜탱을 다 해갖고 다친 사람도 안 나왔자너?’

귀족의 피해가 없던 것과, 주된 피해자인 영주가 사정을 다 듣고 용서해 준 게 가장 컸다.

디아볼로가 살아있던 것도 이유의 일환이었으며, 그 새낄 격퇴한 내가 티르시의 베프라는 걸 듣고 ‘그럼…… 재판하지 말자……’ 하는 느낌으로 끝난 된 모양.

‘따지고 보면 티르시도 영주도 똑같은 피해자니까.’

그래서 그도 재판으로 넘어갈 것 없이 합의를 봐 준 걸까.

그밖에는 뒷면 절반이 미네르바의 작별인사였다.

만나지 못하고 헤어질 걸 염두했는지 무뚝뚝한 인삿말과, 할 일이 없어지면 자기 밑으로 오라는 권유가 가득했다.

‘안 가요 시발.’

아줌마 밑에서 일했다간 개씹 FM 특전사 군생활처럼 탈모 올 듯.

그렇게 내가 편지를 접어서 도로 챙겼을 때, 셀레나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좋은 계약서를 짜왔는지, 그녀는 커다란 문을 호방하게 열어젖히며 만개한 미소로 외쳤다.

“즐겁디 즐거운, 상담(商談)의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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