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르가 눈물을 그쳤을 때, 나는 어떻게 그녀의 임신을 눈치챘는지 알려주었다.
〈으흠! 그러한가.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이 일에 대해서는 후일 보상하겠네.〉
내가 말해줘도 되는 부분만 골라서 대충 설명을 해 주자, 코르넬리우스는 그렇게 지껄이고 닷지했다.
─메다닥!
지팡이에 칼을 꼽고 눈썹이 휘날려라 마차로 튀는 노친네.
프리모르는 그 한심하다면 한심한 꼬락서니에 놀란 건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 말고 내게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사죄해 달라고 얘기를…….〉
〈아뇨. 안 그려셔도 됩니다. 보상해 주신다지 않습니까.〉
나는 프리모르의 말을 저지하며 그냥 웃었다.
‘말로만 감사하지 말고 현물로 달라고.’
밑바닥 모험가들처럼 좆거지 새끼도 아니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 아닌가.
쓸데없이 가오 상하게 부하들이 가득한 곳에서 사죄받는 건 악수였다.
‘괜히 자존심 건들면 내 깽값까지 줄어들라.’
손님이 진상을 부려도 깽값이 수백 만원 값이라면 받아줄만 한 법!
항의하더라도 현물을 받아본 뒤에 하면 될 일이었다.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있자 성기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힐을 걸어주었다.
그들은 성표를 보니까 야누스 교단의 신도듯 했는데, 진짜 성기사는 아니겠지.
아마 헨네시스 영애처럼 수녀─혹은 사제─ 자격을 딴 아르마알스 가문의 기사가 아닐까.
저번에 흑마법사한테 살해당한 성기사 씨도 비슷한 경우인 모양.
하지만 야누스 신자(信者)가 힐까지 걸다니. 이건 거의 뭐 보디빌더가 판검사 자격까지 가진 수준의 유능함 아닌가?
이런 사람들을 호위로 쓴다면, 저 빤쓰런 노친네의 권력이 그만큼 개쩔기는 한 것 같았다.
이거 보수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데?
“저, 저기…….”
그렇게 상처를 치료받고 어깨를 돌리고 있는데, 티르시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저도 죄송해요…… 도와드려야 했는데…….”
“예? 아아,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제가 오해할 만한 말투를 쓰긴 했던 모양이니.”
아내들까지 혼란 상태였을 정도다.
이 이상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중혼에 너그러운 이세계라도 좆 간수를 못 하는 건 좀 다른 얘기니까.’
능력이 되서 아내를 들이는 거랑, 앞뒤 안 재고 손을 댄 뒤 아내로 삼는 건 평가가 천지차이다.
‘프리모르는 남편을 잃은지 1~2달도 안 된 국무총리의 딸 쯤 되는데, 그걸 덮쳐서 임신시켰다면 경멸받을 만 하지.’
아내들도 전부 임신을 삼가는 상황에 미망인을 덮쳐서 첫 아이를 싸지르는 새끼라. 그거라면 좀 맞아도 된다.
오해가 풀렸다면 더는 이 얘기로 떠들 건 없었다.
“히─ 히히힝! (일하기 싫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과나 용서를 주고받고 있자, 마차에 묶인 말들이 정렬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대로 레나폴리스를 떠나서 아르마알스 가문의 영지로 직행하는 건가.
안면을 튼 사람들이랑 작별인사를 해 두길 잘 했군.
“사업의 진척도는 차차 편지로 보내드릴게요!”
셀레나가 배웅을 나와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건강 조심하십셔! 셀레나 양의 건강이 제 돈줄입니다!”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겠어요!!! 아─ 핫핫핫핫!!!”
기운차게 웃으며 그녀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디스뮤크도 거의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였고, 우리는 조따 큰 마차에 올라타서 다시 여정을 떠났다.
***
“테에엥…….”
마차가 레나폴리스의 정문을 나선 순간, 나는 거침없이 내 옆자리에 앉은 베로니카의 무릎에 머리를 던졌다.
─말캉.
상호 합의도 없는 무릎베개 시도!
하지만 베로니카는 뭐 별 일 있냐는 듯 읽던 서책을 살짝 높이 들기만 했다.
반대쪽 좌석의 프랑도 싫어하지 않고 내 발을 슬쩍 들어서 자기 다리에 올렸다. 귀족 부럽지 않은 호사로군. 내 퓨어한 양심이 좀 찔릴 정도인데 그래.
“으와……. 이 선배 점점 거침없이 굴기 시작했어요…….”
건너편에 앉은 라리루라가 기가 찬 듯이 입을 벌렸지만, 그 말에 베로니카가 픽 웃었다.
“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서 그렇겠지.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이러지 않더구나.”
“네? 어, 잠시만요? 그러면 선배, 제 앞에서는 일부러 사양하고 있던 거에요?”
“응. 노르도 만약 티르시 씨가 다른 마차에 타지 않았다면 얌전히 앉아 있었을 걸.”
프랑까지 합세해서 대답하자 라리루라는 어깨를 떨궜다.
“……왠~ 지 쇼크인데요? 평소부터 저한테만 거리를 두고 계셨던 거에요?”
“뭘 또 그래. 눈치껏 그냥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 뿐인데.”
“그래요~? 뭐, 좋아요. 선배가 이제는 저를 꾸밈없이 대할 만큼 가깝게 느끼신다는 걸로 받아들일게요♡!”
“받아들이고 말고, 그게 팩트 맞는데?”
나는 베로니카의 허벅지 감촉을 만끽하며 대답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라리루라한테는 더 무지막지한 비밀을 숨겨 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집에 돌아가면 라리루라한테도 내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걸 얘기해야겠지.’
티르시 구출 전후로는 타이밍이나 분위기를 종잡기가 어려워서 치일피일 미뤄왔었다.
그치만 우리의 러브 홈으로 돌아간다면 얘기는 별개다.
‘왜 자기한테만 비밀로 했냐면서 삐지거나 화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슈르르르르.
내 몸속을 움직이는 마나를 찾았다.
발견 자체는 더럽게 쉽다. 수준 파악이 어려운 거지.
‘오러를 분출하려면 카테터가 얼만큼 튼튼해야 하는 거야?’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오러를 다루는 요령은 알았다.
하지만 대책없이 깝치다간 좆 되는 수가 있었다.
마나-카테터도 신체에 기반한 기관이다
몸이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혹사시키면 파멸 뿐이다.
자칫 근파열이나 횡문근융해증 같은 증세가 일어나서 내가 마나 고자가 된다면 보통 큰 일이 아니다.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게 최우선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머리를 쥐어짜는 나였지만, 마나-카테터를 느끼는 것은 존나게 어려웠다.
그냥 집중만 해서는 있는가 없는가 정도밖에 모르겠다.
자기 몸 속의 혈관 위치를 찾는 것과 같다.
맥이나 심장을 짚어서 맥동을 느낄 수는 있어도, 정확하게 자기 피가 어딜 어떻게 흐르는지는 알지 못하잖은가.
‘씨발. 고지가 눈에 보이는데 못 올라간다고? 지랄맞네.’
나는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바심 내지 말자. 뛰지도 못하는 놈이 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오러로 시오후키를 해도 좆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실해지면, 그때부터는 진짜 시간 문제다.’
당장 오러 뽑아서 싸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풀발해봤자 무슨 의미란 말인가.
프리모르를 치료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 부터가 우연인데, 더 이상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길에서 5만원을 줍고도 아직 돈이 부족하다면서 찡찡대는 건 너무나도 한심했다.
‘새나라의 착한 꼴마초라면 주어진 행운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지.’
내가 생각했지만 좋은 말이다.
생각을 바꾸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나중에 자서전을 쓰면 저것도 써넣어야지.
“히힝 흥 프루힝─. (배고파 씨발─.)”
─다그닥, 다그닥.
재벌집 마차는 서스펜션도 개쩔어서, 그렇게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아르마알스 가문의 영지는 에투르 라스나라는 이름이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이 재벌 가문은 황제한테서 국토을 상당히 뜯어냈기에, 자기 관할의 곡창지대와 대도시를 몇 개씩 갖고 있다고 한다. 땅부자라니 부러워서 배알 꼴린다.
에투르 라스나는 그중에서도 코르넬리우스의 저택이 있는 장소였고, 그만큼 크고 사람이 많은 대도시였다.
〈무슨 축제가 열리고 있는 건가요?〉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입니다.〉
나는 마차 밖의 기사단장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가 찍 소리도 못하고 아가리를 싸물어야 했다.
‘맞다 씨발. 프리모르 남편의 장례식이 있었댔지.’
근데 그거 아직도 안 끝났어?
내가 궁금해 하는 걸 눈치챈 걸까.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단장이 말했다.
〈장례는 끝나고 절차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엘리시움으로 떠난 도련님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군요.〉
혹시 억지로 조의시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약간 미심쩍게 마차의 창문 밖으로 시민들의 표정을 훔쳐봤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로마니아만의 예절인 걸까? 그들은 슬퍼하기보단 웃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복장만은 다 통일한 것처럼 흰 옷이었다.
다행히 영주 아들의 죽음에 조의를 강요당한 듯이 보이진 않았다. 그 가정폭력에 최적화된 노친네도 생각보다는 선정을 펼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것보다, 그런 사람이라면 보수를 떼먹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에 안도했다.
〈시민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 하군요. 도련님께서 어떤 분이셨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도 분명 높은 곳에서 기뻐하시겠죠.〉
축제라고 지껄인 걸 수습하고자 적당히 입을 털자, 며칠간 안면을 튼 기사단장이 웃는 듯 대답했다.
왜 추측형이냐면, 이 남자는 며칠 동안 갑옷의 투구조차도 거의 벗질 않았기 때문이다.
‘삐까뻔쩍하네.’
나는 그의 갑옷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세계에서 철 갑옷은 마나 버프를 못 받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 내가 거인들 가죽에 집착했던 이유다.
그런데 원로원 가문의 기사단장이 금속 갑옷을 입는다?
100% 통짜 미스릴이겠지. 금으로 맹근 스포츠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쓰벌. 누군 무기랑 반지에 좀 쓴 게 전부인데.
‘최소 미스릴 클래스는 넘는 전사에, 미스릴 갑옷이라.’
이거 시발, 내가 진짜 실력을 들켰다가는 보상은 둘째치고 후원 얘기는 없던 게 되는 거 아냐?
이만한 전사를 고용하는 노친네다.
나는 오롯이 개인의 능력만 평가하면 플래티넘을 넘을지도 의문인데, 오러가 뻥카였다는 걸 들키면 내 평가가 비트코인을 방불케 하는 하락세에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저택에 도착하고 노친네에게 호출됐을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갔다.
〈어서 오게.〉
코르넬리우스는 교장실 의자 같은 곳에 앉아서 손짓했다.
여기가 집무실일까. 나는 그가 손짓하는대로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베로니카의 무릎 베개에 버금가게 푹신푹신했다. 인류 기술력의 최첨단이라는 뜻이다.
〈자네와 대화하고 싶어서 불렀네만, 혹 불편하진 않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깽값 주러고 불렀는데 싫다고 안 나올 이유가 있나.
내가 가식적으로 웃자 코르넬리우스도 따라서 웃었다.
그 뒤로는 그와의 따분한 잡담이었다.
─환영 파티를 열까 하는데, 전원 참석할 수 있겠나?
─우리 요리사의 솜씨가 썩 훌륭하지. 식단에 고집하는 게 있다면 말해도 좋네. 미리 준비시키지.
─고고학계의 석사라고 들었네만, 대학은 어딜 나왔나?
그런 면접 같은 느낌의 대화였다. 상세한 내용은 지루하니 생략하겠다.
〈잘 알겠네.〉
대학에서 배운 학자 풍의 예의가 눈에 찬 걸까. 노친네는 인상을 찌푸리는 일 없이 본론 전의 예열을 마쳤다.
〈비록 본의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며칠 전의 불미스러운 오해에 관해서는 나로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다네.〉
─딸랑딸랑.
코르넬리우스가 핸드벨을 흔들자, 연로한 집사가 비싸 보이는 함궤를 가져왔다.
〈며느리와 손주의 은인인 자네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다간, 로마니아의 대귀족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셈이겠지.〉
그의 근엄한 와꾸에 나는 웃음을 참았다.
이 모가지 빳빳한 노친네, 끝까지 사과하진 않는군.
‘그것도 귀족답다면 귀족답지만 말이지.’
죄없는 사람을 패버린 건 ‘불미스러운 오해’라는 단어로 싹 뭉개버렸다.
이 보상도 어디까지나 프리모르를 구해준 것─아들의 원수를 갚아줬다는 사실은 모르니까─에 대한 보답일 뿐.
물론 자기가 잘못한 만큼 보상에 웃돈을 얹기는 했겠지만, 자신의 죄목은 일어반구도 없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어휘라니. 시발, 정치에 닳고 닳은 원로원 늙다리 어디 안 가네.
‘아니, 사과의 말은 사실 중요하지 않지.’
무슨 고객을 좆으로 아는 대기업의 사과문 같은 말투는 좀 좆 같았지만, 아직 섣불리 결론짓기는 일렀다.
아직 보수로 뭘 가져왔는지 본 것도 아니니까.
사죄의 마음은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에 드러난다.
〈자네에게 줄 만한 선물을 심사숙고해 왔다네.〉
─달칵.
노친네의 말을 기다린 것처럼, 나보다 3배는 더 살았을 것 같은 집사가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파란색 월계수가 시공의 폭풍처럼 양각된 뱃지가 들어 있었다. 손바닥 정도의 사이즈감이다.
〈자네가 보여준 후의를 탕감하는 날까지, 아르마알스는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부(代父)로서 조력하겠네.〉
〈……조력해 주시겠다뇨?〉
나는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테이블 아래에 감춰진 다리가 덜덜 떨렸다.
공포심 따위가 아닌, 복권의 숫자가 맞아들어가는 걸 보는 듯한 감각이었다.
‘씨발…… 이거 혹시, 이 가문의 문양 아냐?’
티나지 않게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은 귀족들이 학자나 모험가를 후원해 줄 때, 이런 걸 내주지는 않는다. 내가 이 문양을 내세우며 뭔가를 벌였다간 그 책임소재가 아르마알스 가문으로 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문양을 준다는 건…… 혹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코르넬리우스는 손을 저으며 하인들을 전부 내보냈다.
그렇게 기사단장 한 명만이 방에 남자, 그는 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좆 같은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팔게. 앵간하면 커버쳐 주겠네.〉
아따, 씨이발!! 이 행님 존나 화끈하시네!!
동네 사람들!! 제가 따거를 못 알아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