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할배 존나 쿨하시네. 반해버리겠다.’
─꼴깍. 군침이 목을 넘어갔다. 그만큼 권력과 빽의 맛이란 달콤한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월계수 문양에 손이 가려는 걸 인내했다.
개도 때와 장소를 가리면서 ‘기다려’가 가능한데, 영장류인 인간이 개새끼만도 못할 수는 없었다.
─파르르.
손은 멈췄지만 입꼬리가 희열에 떨렸다. 아내들의 애교를 상대로 웃음을 참고자 해도 이만큼 힘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진정하자. 심호흡해라, 심호흡…….’
코르넬리우스는 이 문양을 건네면서 말했다.
‘자네가 보여준 후의를 탕감하는 날까지’, ‘앵간하면’ 커버쳐 준다고 말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문양을 가지고 선을 넘는 짓을 벌인다면 손절당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였다.
귀족 간의 분쟁 정도라면 책임지고 도와주겠지만, 만약에 로마니아 황족에게 죽빵을 갈기거나 하면 100% 나가리다. 좀 과격한 예시이긴 하지만 조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소리였다. 손주랑 며느리 목숨을 구해줘서 준 보상인데, 그걸로 그녀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해프닝까지 책임져 달라니? 그딴 건 양심 터진 모친실종자나 할 법한 광언이었다.
결국 이건 한계가 명백한 소모성 아이템이다.
‘그러니까 제발 진정 좀 하자, 내 주둥아.’
나는 억지로 냉정해지고자 부정적인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안 했다간 광대가 좋다고 승천할 것 같아서였다.
“후우우…….”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심호흡.
내가 아무리 속으로 가치를 깎아내도 이 문양의 가치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로마니아의 귀족이라지만 존나 원로원의 가문이다. 이 문양의 무게는 외국에서도 통한다.
‘재테크의 기본 이치는 부익부 빈익빈이니까.’
돈이 많은 사람일 수록 돈을 벌 기회가 많다.
원로원 상원의원이라면 헤르마이온 길드처럼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길드에도 대형 스폰서로 있을 게 당연했다.
원래 기업이라는 건 혼자 오롯이 존재하기보다는, 대주주 및 후원자의 지원을 받아가며 유지되는 법!
다 제쳐두고 아르마알스 가문이 마법사 길드랑 모험가 길드 연합에만 후원하고 있어도 얘기 끝이다.
이 문양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할 것이다.
‘……이거, 빽 없는 명예귀족보다 낫겠는데.’
자고로 자기 사촌 중에 중령이 있다고 뻗대는 폐급 선임보다는 할애비가 투스타인 신병이 무섭고, 회사 라인에서 밀려난 과장보다는 회장님 친손자가 더 높은 위치 아닌가.
이름 뿐인 명예귀족보단 뒤에서 원로원이 어흥 하고 있는 평민이 더 위험했다.
아르마알스 가문의 문양은 나 혼자서 맞서기에는 뒷감당이 어려운 귀족이나 악덕 상인을 상대로 효과적이겠지.
이 문양만 받고 떠나도 아르마알스 가문에 찾아온 가치는 있었다.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다행이야.〉
등받이에 등을 기댄 코르넬리우스가 말했다.
〈수혜자의 혜택은 집사장이 계약서로 내줄 걸세. 귀족인 내가 말해주면 듣는 자네도 피곤하겠지.〉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가주님께 노고를 끼쳐드릴 순 없는 노릇이죠. 서류로 받겠습니다.〉
와, 배려심 미쳤다. 난 어쩌다 렇게 멀쩡하게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개처럼 쳐맞은 거냐.
꽉 막힌 꼰대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역시 한 사람의 어엿한 마초였다. 당신에게 꼴마초 2급을 수여합니다.
이건 니 잘못이다, 강북호야. 이렇게 점잖은 어르신이 매를 드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던 거임. 아무튼 그럼.
〈그렇게 하게. 그런데 자네는 고고학자라고 했는데, 주로 연구하는 분야는 어디인가?〉
〈……언어 해석이 대학에서의 주 전공이었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현장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구 내용이라고 해도 장차 차원이동에 관한 연구로 넘어가겠다는 대략적인 목표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궁한 것도 사실이었다.
코르넬리우스는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모험가로서 유적을 탐사하는 학자로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으면서, 세상에 잠든 유물을 찾아다니는.〉
〈예. 바로 맞추셨습니다.〉
〈내가 후원 중인 이들 중에서도 그런 모험가와 학자들이 제법 있지. 성과를 낸 수혜자도 많고.〉
그는 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연구 중에 예산이나 지원이 필요하다면 심사를 거치게. 가문의 휘하 사무관들이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내 책상까지 결재가 올라올 걸세.〉
〈……감사합니다.〉
나는 예산이란 얘기에 엘릭서 사업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보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셀레나랑 상의도 없이 일을 벌이기는 좀.’
상대는 원로원 가문이다. 자칫하면 사업이 통째로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사업 진척을 보면서 예산이 후달린다고 하면 얘기나 꺼내 보자. 그게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다.
〈이로써 후원자 얘기는 대강 마무리가 되었군. 그럼 다른 얘기로 넘어가지.〉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다른 얘기라고 하시면?〉
〈방금 선물과 가문의 후원은 우리 며느리가 자네에게 한 약조였잖은가? 당연히 나랑도 얘기를 나눠야지. 설마 자네는 우리 가문에 손님으로 초청받아놓고 빈손으로 돌아갈 셈인가?〉
와 씨발, 이걸 또 기념품까지 챙겨준다고?
나는 백수가 딸딸이 치듯이 자연스러운 플렉스에 감동마저 느꼈다. 이게 진짜 부자구나. 돈을 물처럼 쓰네.
〈해봤자 한두 푼 정도 되는 정도일세. 챙겨가게나. 명색이 남자라면 가끔씩은 아내들 앞에서 유능한 면모도 보여주고 하면서 어깨에 힘 좀 주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게야.〉
내가 돈다발에 맞아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자, 어르신은 한없이 쿨하게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어른이 주면 그냥 고맙게 받아가면 되는 걸세. 개의치 말게. 자네 쯤 되는 대장부라면 평소에도 아내들에게 무시당할 걱정은 없을 듯 하네만.〉
〈크, 크흠. 감사합니다, 가주 어르신.〉
나는 겸허하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했다. 손바닥이 저절로 비벼질 만큼 존경심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인재들에게 침을 발라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남한테 침을 발려진 경험이라고는 아내들한테 물리적으로 챱챱 당해본 경험밖에 없는 척척따리 석사따한테는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푼돈이란 것도 이 사람 입장에서 푼돈이지,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거금일 거 아냐.’
출세했구나, 북호야. 아딱이 의뢰비 3쿠퍼에 열불을 올리던 시절이 거짓말 같다.
지구에서도 진짜 돈 쓸 데가 부족할 정도의 부자들은 이렇게 푼돈을 쪼개서 여기저기에 후원을 해주곤 한다는데, 내가 그 수혜자가 되니까 가슴에서 거짓없는 감동이 넘쳐났다.
존나 능력을 인정받아서 백경대에 들어간 기분이다. 이래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는구나. 앞으로는 어르신이 부르면 대륙간 텔레포트로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자, 그럼…… 혹여 갖고 싶은 물건이라도 있나? 창고에 있는 것이라면 바로 내 주겠네.〉
나는 어르신의 말씀에 잠깐 고민했다.
필요한 물건이라.
〈……모험가가 쓸 법한 장비도 있습니까?〉
〈무구 말인가? 당연히 있지. 하지만 추천은 않겠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어째서냐고 물어봐도 될지 잘 모르겠어서였다.
어르신은 눈치 빠르게 내 속내에 대답해 주었다.
〈자네는 고고학자잖나. 고대문명의 유물에 비하면 작금에 만들어진 매직 아이템들은 전투에 걸맞지 않다네.〉
〈예?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현대의 매직 아이템이 구리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렇게 되묻자, 어르신은 뒤편에서 석상처럼 호위를 하고 있는 기사단장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 친구의 갑옷도 그렇지. 이건 미스릴 갑옷에 방어 마법을 부여하고, 착용자가 지치지 않게 체력이 샘솟도록 만든 물건이야. 사흘 밤낮을 내리 싸워도 피곤해지지 않는다더군.〉
〈훌륭한 보물이군요.〉
말만 들어도 억 소리 나오는 갑옷이다. 황금 람보르기니가 아니라 점보 제트기였네.
근데 저게 전투에 맞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지? 스태미너 회복이 달린 갑옷이면 쓸모가 많을 건데.
〈이 갑옷은 내가 후원해주는 니다벨리르의 공방에서 선물해 준 물건일세. 헌데 나는 그들이 처음 보내줬던 갑옷은 반려해야 했어. 어째서라고 생각하는가?〉
모루겟소요.
내가 어색하게만 웃고 대답을 못하자, 그도 픽 웃었다.
〈갑옷에 강력한 공격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일세. 황제 폐하께서는 공격 마법이 부여된 매직 아이템의 보유 갯수나, 위력에 제한을 걸어두셨거든.〉
〈매직 아이템을……? 위험성 때문입니까?〉
〈바로 봤네. 공격 마법이 깃든 매직 아이템은, 마나만 보급 가능하다면 누가 들어도 위력이 동일하니까.〉
어르신은 나를 매타작한 지팡이 칼을 뽑아서 보여주었다.
혹시 저 검도 매직 아이템일까? 대화 중에 오딘의 눈을 쓸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마나는 따로 안 느껴졌지만, 지팡이에 숨겨놨다가 꺼내서 쓰는 칼이다. 흘러나오는 마나 정도는 은닉 처리를 했겠지. 돈 깨나 들었을 법한 호신 무기로군.
〈유적에서 찾아낸 유물까지 간섭할 수는 없다만, 로마니아의 귀족들은 보유한 공격용 매직 아이템의 갯수, 유통, 제작까지 간섭을 받는다네. 더럽게 깐깐한 문관 놈들이 감사를 나올 때도 있지.〉
〈그, 그렇군요.〉
아니, 우리 어르신이 보는 사람이 없으면 표현이 좀 적나라해지실 때가 있네.
정말 어릴 적부터 가주 교육을 받아온 사람 맞나? 돈 많은 상인이나 길드장이랑 얘기하는 느낌이다.
〈원로원에서도 대대로 악법이라며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올라오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네.〉
─스릉. 칼을 다시 지팡이에 넣는 어르신.
〈해서, 미안한 일이게도 자네에게 강력한 무기를 주는 건 어려운 일이야.〉
〈이해했습니다. 가문이 보유한 무기도 적을 뿐더러,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힘 쓸 일에 모험가를 고용해서 쓸 수도 있기 때문에 유통이나 선물에도 규제가 걸린다는 말씀이시군요.〉
저 방식을 허용하면 암튼 얘랑 나는 남남임, 얘는 내 부하 아님~ 하면서 가문 밖에 배치한 자기 수하들에게 존나게 쎈 무기를 뿌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귀족들이 보유한 마법 무기의 갯수가 법률 이상로 정해놓은 갯수 이상으로 늘어나 버리겠지.
〈그렇지. 젊은 친구가 아주 현명하군.〉
흐뭇하게 웃는 어르신. 이런 얘기는 서민들의 일반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기에 나도 오늘 처음 들었지만, 그렇게 듣고 보면 꽤 납득이 가는 면이 있었다.
‘마나 포션도 비슷한 처지니까.’
예전에도 말했는데, 이세계의 포션에 중독 현상이 없다면 마나를 회복시키는 포션은 시중에 유통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실력 있는 마법사가 마나 포션을 사재기해서 계속 빨아대면 파이어볼 무한연타 같은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마나는 석유에 가깝지. 사용하기 나름으론 군사용품이야.’
망령도시의 오리할콘 기둥도 까놓고 말해서 전쟁통에 쓰던 마나 발전기 아니었던가.
이세계 문명의 무안단물인 마나는 화약이자 석유이고, 전기였다.
내가 마나 포션을 물탱크만큼 모아놓고서 절대천공영역을 수십 번 씩 쓴다고 생각해 봐라. 존나 인간 폭풍 노르드다. 로마니아가 로마니아였던 폐허가 될지도 모른다.
그거랑 비슷하게 공격 마법을 뿜는 무기를 수백 개 모아서 농민들한테 쥐어준다? 매지컬☆농민봉기 씹쌉가능이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이세계 국가들이 마나나 매직 아이템의 관리에 안일한 게 이상할 정도다. 몬스터나 던전이 없는 세상이었다면 절대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겠지.
〈그, 여쭤봐도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국가는 사정이 좀 다릅니까?〉
〈나라에서 철저히 제재하는 곳은 내가 알기로 우리 조국 뿐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 대충 알 것 같아서였다.
‘……초대 원로원이 아르마 슈나스의 힘으로 권력을 분할시켰으니까. 그 일의 재현을 방지하려는 건가.’
아르마의 ‘병기’와 비슷한 무기가 태어나지 않게 말이다.
‘과연. 그러고 보면 공격 마법이 걸린 매직 아이템은 본 적 없는 것 같아.’
인상미채의 가면, 날아다니는 투척 나이프 같은 건 봤어도 판타지의 정석인 불 뿜는 마검 같은 건 듣도 보도 못 했다.
그 이유가 로마니아의 정책 때문이라면 말이 됐다.
‘이세계 마법의 총본산인 마법사 길드가 로마니아에 속한 길드니까. 황제 눈밖에 나기 싫으면 외국 지부도 공격용 매직 아이템은 생산 안 하겠지.’
게르마니아나 니다벨리르에서는 그런 무기를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건 튼튼한 검이나 갑옷이 고작일세. 하지만 이제와서 우리 비검(飛劍) 기사단의 제식 장비가 자네 수준의 전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어르신은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처럼 말했다.
맞는 말이다. 기사단장의 갑옷 같은 물건은 줄 수도 없고, 뻔뻔하게 내놓으라고 하기에도 너무 비싼 장비다. 그렇다고 리아스가 쓰는 장비 같은 걸 받아봤자 우리 파티의 물리딜러는 나밖에 없다.
‘어설픈 장비보다는 차라리 다른 걸로 받는 게 낫겠어.’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가공된 미스릴 주괴와, 작은 부탁을 한 가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미스릴이라……. 홀타레스 가문을 쓸어버렸을 때 회수한 주괴가 몇 개 쯤 남았었지.〉
듣는 사람이 은근히 오싹해지는 중얼거림을 흘린 어르신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덩이 내 주지. 부탁이란 것도 말해보게.〉
〈훈련── 아니,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가르침? 자네가?〉
〈예.〉
나는 청빈한 전사 같은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거기 계신 기사단장님께 말입니다.〉
휘하에 기사단을 둘 정도라면 제대로 된 무술이나, 마나를 단련하는 법도 갖춰져 있을 것이다.
설명이 서툴던 얼스터 군락의 스텔라 전사장이랑은 달리, 체계적인 훈련으로 미스릴 클래스에 오른 전사다.
그의 무술과 훈련법을, 달인의 무예를 읽어내고 간파하는 이 눈으로 견학할 수 있다면?
그 진수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