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88화 (388/1,009)

베로니카와의 데이트 날.

데이트를 즐기기에 앞서서, 나는 가장 먼저 마법사 길드에 준 회원증을 내밀고 두루마리를 샀다. 티르시가 알려준 바람 계통의 마법들이었다. 다 해서 9실버 40쿠퍼나 하더라.

중~저위급 마법 3개가 단돈 940만원이라니? 존나 말도 안 되게 비싼 것 같기도 하고, 인터넷 스트리머 방송장비 같은 거랑 비교해 보면 오히려 싼 편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3개나 사 버리니까 그런 것 아니더냐.”

뿔을 변신 마법으로 없앤 베로니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복장은 평소에도 입는 로마니아식 드레스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들이 입을 법한 그거. 거기에 웃옷만 걸쳤다.

우리 아싸 여신님한테 화장은 논외겠고, 데이트인데 따로 꾸며보겠다는 시도는 못 한 걸까. 나도 적당하게 멀끔한 겨울 옷이었기에 따로 지적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이세계 패션의 기발함에 따라가지 못하는 만큼 이 점만은 양해해 줬으면 좋겠다.

존나 이 세상 패션 리더들은 앙드레 킴 패션쇼에 사인지를 필참해 갈 듯한 저세상 감성의 소유자들 뿐이라고. 패션쇼 모델들도 그런 걸 입고 돌아다니라고 하면 알바천국에 새 직업을 찾으러 갈 걸?

아니면 혹시 나름 꾸며보겠다고 고민고민 하다가, 한평생 해 본 적도 없는 시도에 좌절하고 그냥 평소처럼 입고 나와버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평소랑 다를 게 없는 패션이 ‘남편한테 가장 좋은 반응 얻은 베스트 원착’을 선택한 것처럼 보여서 좀 꼴렸다. 사내연애로 사귄 여친이 데이트 날에 정장을 입고 오면 이런 기분이려나.

나는 돌아다닐 동안 방해가 안 되도록 두루마리를 석판에 넣으면서 대답했다.

“뭐 어때. 이젠 나도 이력서에 쓸 스펙에 돈 좀 투자해도 저금액에 부담이 안 될 수준은 됐다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저번에 나와 함께 만들었던 마법을 더 원만하게 발동하고 싶은 것 아니더냐?”

나와 함께 만들었던, 이라.

분명 베로니카 없이는 완성 못 했을 마법이긴 했지만, 은근슬쩍 흘러나온 귀여운 독점욕에 아빠 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리에 손을 얹고 투덜대는 그녀는 해변에 쌓은 모래성을 가리키며 자기가 만든 곳이 어디인지 어필하는 소녀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사랑스럽다.

“그런 것도 있지. 지금까진 돈도 없고, 없이도 어떻게 쓸 순 있을 것 같아서 참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베로니카는 더 불만스러운 듯 눈초리를 매달았다.

“그것이다. 돈이 궁했다면 진작에 내게 말하면 됐을 것을. 내가 그대에게 그깟 은화 몇 닢을 못 내줬을 성 싶으냐?”

과연. 뭐가 불만인가 했더니 그거였나. 나는 픽 웃었다.

내가 요즘 차원이 다른 부자들이랑 어울리긴 했지만, 우리 시종님도 개인 자산이 꽤 충실한 편이시다. 저번에 선지자의 정원섬에 가기 전에 눈치챘던 사실이다.

바이콘들이 다른 종족과 교류를 못한지도 한참 지났다지만, 보석류 등은 인간 사회에서도 통했다. 집을 사고 빈털터리에 가깝던 나보다는 금전적으로 풍족했을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자기한테 필요한 돈을 아내한테 빌리면 쓰나?”

단순하게 1대 1의 부부 관계라면 그래도 된다.

부부 간의 신뢰와 헌신인가. 안 된다고 꼰대짓을 할 일이 아니라, 반대로 기꺼이 권장할 만한 미담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잖은가?

내가 분에 넘치게 우리 아내님들 같은 미인들로 하렘을 꾸릴 수 있던 배경에는, ‘아내를 여럿 먹여살릴 능력이 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내 재력이 딸린다는 이유로 아내들에게 돈을 꿔다 쓰라고?

그래서는 내가 진짜로 기둥서방 겸 아내들 전용 바이오-딜도가 되어 버린다. 이건 내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고, 주지육림 하렘충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대가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다만…….”

“그래,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 그러면 지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제부터는 놀고 먹을 고민만 하자.”

나는 두툼한 지갑을 호기롭게 쳐대며 웃었다.

“길드부터 들린 건 미안하게 됐다. 너랑 데이트하다 보면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게 뻔해서 그랬어. 마법서를 사는 걸 깜빡할 수만도 없잖아?”

“……흐응. 언변은 여전하구나. 우리 주인님은 물에 빠지면 입만 뜨겠어.”

“물론이지. 그니까 안심하셔. 니가 물에 빠져도 인간 튜브 노르드가 구하러 갈 테니까.”

새침을 떼기는 했지만 베로니카도 딱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우리 아내님들은 칭찬에 너무 약해서 큰일이라니까.

“가자. 이 못난 남편놈이 우리 아내님께서 좋아하실 법한 곳을 이리저리 찾아봤거든.”

“그건 조금 기대가 되는구나. 물론 그대가 헛다리를 짚어도 가능한 한 기쁜 척 해 볼 터이니 걱정은 말거라.”

“그건 듣고 넘어가기 힘든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던가. 이런 기회 또 없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베로니카의 손을 정중하게 잡아끌었다.

이건 사족이지만, 에투르 라스나의 지리는 어제 하급 기사 친구들을 줘패면서 청취한 것이었다.

그래서 출처는 숨길 생각이다. 감자와 고구마를 주먹으로 두들겨가며 데이트 코스를 설계했으니 자랑스럽게 말하기는 좀 그랬다. 무드가 없잖아, 무드가.

─꼬옥.

내가 부드럽게 손을 잡아끌자 베로니카의 얼굴에도 핏기가 몰렸다.

이미 나랑 볼 장도 다 본 주제에 손 좀 잡았다고 이러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베로니카는 이런 간단한 스킨쉽이나 썸 단계를 싹 다 건너뛰고 너! 내 아내가 되라! 하는 식으로 결혼한 몸 아닌가. 딱히 이상한 반응도 아니었다.

“바, 바보 녀석아! 놓아라!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런 건 라리루라한테나 하면 되잖느냐!”

가만히 있던 라리루라는 왜 때리는 것? 나는 미안해 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고. 내 생각도 좀 해 주라.”

“……그대 생각?”

“그래. 자, 봐 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돌려서 길을 향하게 했다. 왁자지껄한 인파가 마법사 길드 앞쪽의 거리에 몰려다녔다.

“사람이 저렇게 많잖아. 기껏 우리 둘이서만 있는 귀중한 시간인데, 우리 여보야가 저 사람들 사이에서 끙끙 거렸다간 남편놈 마음이 어떻겠어?”

“……으음.”

베로니카는 반박하지 못했다. 우리 여신님의 저주는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저런 인파는 레고를 덮은 양탄자 위를 맨발로 걷는 수준의 고행일 것이다.

─만지작.

일단 베로니카도 손으로 내 손가락 마디를 비비적거리는 걸 보면, 정말로 싫었다기보단 부끄러웠을 뿐인 모양이다.

“숲속에서 피크닉을 가는 것도 생각해 보긴 했는데, 그건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될 거고.”

나는 희미해진 저항을 완전히 무너트리듯 다른쪽 손도 붙잡았다. 괜히 결혼반지가 느껴지지 않게 조심하는 건 필수다.

“게다가 우리 베로니카는 숲이라면 질리도록 봤을 거 아냐? 풀하고 나무만 가득해서 놀 것도 없을 텐데, 놀러 나와서 내 얼굴만 구경하려고?”

“나, 나는 딱히 그대 얼굴만 쳐다본 적은 없다만?”

“그으래? 쓸쓸하네. 나는 지금 너만 보려고 노력 중인데.”

공주님 다루듯 쥔 오른손을 들어올리면서 미소 일발 장전. 내가 웃는 낯을 가까이하자 베로니카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얼굴을 피했다.

하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서는 피할 공간이 나올 리도 없고, 결국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건 치사하구나.”

“사랑에 빠진 남자는 쪼잔해지기 마련이지.”

시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물론 베로니카는 사람이 아니라 신족이긴 한데, 정신적으로는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이 살아오며 옛적에 숙지한 사실이다.

상대가 신체 접촉에 거부감만 없다면,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스킨쉽이 더 설득에 도움이 된다던가.

말은 흘려버리면 그만이어도, 사람의 온기는 저항하지 않는 한 피부에 스며들기 때문이라는 모양이다. 아마 이세계에선 여신님도 사회적 동물인가 보다.

─사락. 나는 촉감이 남도록 천천히 손을 놓았다.

딴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지, 베로니카의 손은 반쯤 본능적으로 내 손을 쫓다가 정신을 차린 듯 멈칫했다. 귀엽긴.

“나랑 이러고 있으면 저주도 덜 하지 않아?”

슥─ 하고 미끄러지면서 베로니카의 허리를 감고 옆쪽에서 껴안는 나.

손등 키스라도 해 볼까 했는데, 베로니카가 사람의 눈을 신경쓴다면 역효과일 듯도 해서 참았다. 공개 프로포즈는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잖은가.

“어때? 싫어? 그냥 떨어져서 걸을까?”

나는 스윗한 목소리를 내며 짖궂게 굴었다. 물론 우리 베로니카 여신님께서는 ‘공부만 한 찐따 특) 서투른 분야에서는 아무 말 못함’의 전형례였다.

“……………….”

…도리도리.

그녀는 조용히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고, 나랑 밀착해 있던 탓에 마치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듯한 동작이 되었다.

아이고, 이 깜찍한 아싸 여신님을 어쩌면 좋냐. 깨물어주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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