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10화 (410/1,009)

에들린의 딜을 승낙한 나는 다나의 연구소로 복귀했다.

“왔군. 생각보다 빨랐구나.”

소식을 듣고 먼저 와 있던 베로니카가 말했다.

빈 연구실 하나를 권력남용으로 획득한 우리는 여기서 디아볼로가 드랍한 〈강림〉 마도서를 해석할 생각이었다.

“그래. 내일 아침부터 여기 주변을 좀 쏘다니게 생겼지만.”

“흠? 또 무슨 일이지? 설명해 보거라.”

나는 에들린과의 딜을 설명해 주었다. 권력 얘기 등은 다들 모여 있을 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하 생략.

“테레사의 부하 동물을 관리할 자를 늘린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구나. 그런데 그 황금 늑대라는 놈은 그대 혼자 수색하고, 사냥할 생각이더냐?”

“아니? 나 혼자 아니면 너랑 둘이서 갈 생각인데?”

─움찔. 베로니카의 어깨가 떨렸다. 차마 못 숨긴 기쁨이 그 얼굴에 한가득 맺혔다.

“……흐흥. 과연, 그렇구나? 목적이 다소 뒤숭숭하다만 이 또한 데이트의 일종이라는 거로군.”

“아니. 뭔 일 나면 텔포해서 복귀 때리게. 이 근처면 사르가디스가 눈에 보일 테니까 원 점프로 돌아올 수 있잖아.”

“과연, 그렇구나. 나는 〈공간이동〉용 매직 아이템이라는 거로군.”

“남편은 좀 더 나을 말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과연, 그렇구나. 나는 〈공간이동〉용 간이 오나홀이라는 거로군.”

“방금 전보다 한없이 더 나쁜 표현이 되지 않았니?”

그것보다 대체 무슨 말이길래 번역이 오나홀로 되는 것.

이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베로니카가 그 성인 물품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엄청나게 문화 컬쳐다. 역시 이 놈의 이세계는 미스테리 투성이야.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섹스의 섹 자도 모르는 착한 노르드는 낯뜨거워서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

“실례할게요, 저 왔어요오오…….”

그렇게 얼탱이도 알맹이도 없는 회화를 나누고 있자, 전서구를 받은 티르시가 비척거리며 나타났다.

“어? 혹시 피곤하신데 제가 억지로 불렀나요?”

같이 연구할 건데 시간이 나면 와 달라고 편지를 때리기는 했다만, 왜 저렇게 힘들어 하는 걸까.

“혹시 무단으로 결석한 것 때문에 길드나 연금술 학파에서 페널티라도 받았습니까?”

나는 걱정이 앞서서 묻자, 티르시는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상당히 골치가 아파 보였다.

“아뇨…… 페널티야 받았지만 그냥 월급이나 진급에 관련한 문제라 큰 부담은 없구요……. 친구가 화가 엄청 나서 일감을 떠맡긴 게 완전히 생각 밖의 업무라서 고생하고 있어요…….”

“어떤 일이길래?”

“네? 네? 그, 그게…….”

피곤하게 대답하던 티르시는 밤에 자다가 꼬리를 밟힌 테레사처럼 깜짝 놀랐다.

“그, 그, 위탁 판매나 상품 제조? 라고 하면 되겠네요!”

“아하. 포션 같은 거군요?”

“네? 아, 네! 마, 맞아요! 포션도 팔죠!”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친구라. 엄청 예전에 봤었던, 그 가벼워 보이는 금발 마법사일까? 귀찮은 업무라면 영애한테 몰래 꼰질러 보면 어떨까. 그럼 몰래 손 써주지 않으려나.

“그, 그러실 것 없어욧!!!”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급속 접근하자, 아주 그냥 발작을 일으키시며 거절하는 우리 마법사님.

“그, 그렇군요.”

나는 시무룩하게 백 스텝을 연타했다. 예전에 하수도에서 여치벌레한테 쫓기던 톤이 그대로 나오는 걸 보면 100% 진심으로 극혐하는 리액션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아, 아뇨 그게! 노르드가 싫다는 뜻이 아니고……!!”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닌 것 같구나. 그만 앉지.”

베로니카는 티르시의 말을 뚝 끊고 들어갔다.

“남의 연구소를 빌린 것 아니더냐. 시간을 너무 낭비하면 다나에게 면목이 없지. 바로 연구에 착수하자꾸나.”

“네, 네…….”

어버버 하고 말을 더듬던 티르시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티르시는 베로니카랑 한참 거리를 두고 앉았다. 지하철의 마주본 의자에서 대각선 양 끝 정도의 거리감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아는 사이라고는 안 여길 거리다.

아니, 그야 베로니카의 처녀 알레르기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시간 낭비라니. 베로니카, 너 아까 나랑은 잘만──”

“일기장은 내가 가져왔다. 가방에 넣고 오면서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상상이 가느냐? 도둑 맞지 않도록 새로 변신해서 날아왔으니, 고생했다고 칭찬해 줘도 된다고?”

“어…… 아, 응. 잘 했어. 역시 우리 베로니카야.”

이건 아가리 쌉쳐의 사인이다. 나는 눈치껏 처신했다.

“〈강림〉 마법의 원리는 간단하다. 단지 과정이 복잡한 게 문제일 뿐이지. 우리끼리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로니카는 벌써 어느 정도 진척된 연구 기록을 펼치면서 말했다.

“이 의식의 재현과 개조가 성공한다면 그대의 걱정도 꽤나 줄어들지 않겠느냐?”

“그래. 우리 중에서 풀컨 티르시급 인재가 1인분만 나와도 그런 습격에 대처하기 쉬워질 테니까.”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제 이름을 척도로 삼는 건 그만둬 주실래요?”

“그렇지. 0.5 티르시, 아니 0.3 티르시만 돼도 든든하구나. 그 정도만 되어도 나보다 마나가 2배는 많아지겠지.”

“무슨 뜻인진 이해했지만 제 이름을 단위로 삼는 건 그만둬 주실래요?”

티르시는 칭얼대다가 중얼거렸다.

“임상실험이라면 제가 자처할게요. 어차피 이 연구 기록에 맞춰서 이미 어느 정도 몸이 조정돼 있을 테고.”

“엘릭서의 에너지를 흘려넣으면서, ‘아르마 슈나스’의 그릇으로써 걸맞게 부숴지는 몸을 수복했으니 말이야. 허나 그걸 재현하려면 커다란 문제가 있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하늘에 니플헤임의 균열을 열어야 한다는 거요?”

티르시의 대답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라면 균열을 작게 하면 문제가 없다. 애초에 그 문은 ‘저승과 이승을 잇는’ 것 뿐이야. 그대들 인간에겐 니플헤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만.”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보고도 부정한다면 마법사를 자칭할 자격이 있겠어요? 다른 문제라면…… 제어권 얘기신가요?”

“그렇다. 표현이 나빠서 미안하다만, ‘신위(神威)의 병기’가 된 너는 자아가 의식 아래로 침체되는 걸로 보이니까.”

“네에, 뭐. 그랬다고 들었어요. 저야 기억에 없지만요.”

그녀들의 대화에 나는 조종당하던 티르시를 떠올렸다.

그땐 반자동 모드라서 그 남아도는 마나를 제대로 활용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디아볼로 새끼가 쓰던 마법대로라면 남이 제어권을 가지지 않고서야 의식은 발동하지 않겠지.

“그거 일기장의 주인이 원래 설계한 방법은 아니지 않아?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없다. 고대 문명이라곤 해도 신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 안 된 시기의 마법이다. 현대의 마법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 그 단점을 메꾸고자 ‘제어권’을 타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베로니카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펼쳐 놓았다.

“이 점을 개조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가장 많은 예산과 재료,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그럴 필요가 있나요? 이미 노르드는 제 의식을 되찾게 만드는 마법을 개발했잖아요?”

티르시가 궁금한 듯 나를 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 그리고 그 덕분에 의식이 50% 정도 망가져서 ‘아르마 슈나스’ 상태에서 풀려났죠.”

“나의 그대의 말이 맞다. 그래서는 〈강림〉 의식을 벌인 의미가 없지.”

딱 잘라 말한 베로니카가 싱긋 웃었다.

“티르시. 네 마음은 오롯이 너의 것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남에게 내주거나 하면 못 쓰지.”

─우뚝.

티르시는 마네킹처럼 굳었다가 눈을 게슴츠레 반개했다.

“……글쎄요? 디아볼로가 귀족가의 재산을 좀먹던 걸 생각하면 완전한 개조보다는 노르드가 저를 위해 만들어준 마법을 더 제게 맞추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의 그대는 딱히 널 위해 만든 건─”

“아! 아니죠, 차라리 이런 건 어때요?”

티르시는 정말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제 몸의 제어권을 노르드에게 넘겼다가, 의식이 끝난 뒤 제게 돌려주는 방식이라면 되지 않겠어요? 저는 노르드라면 믿고 목숨을 맡겨도 좋은걸요?”

“……후후. 그런 말 말거라. 위험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마법을 만드는데 위험은 따르는 법 아닐까요?”

두 미녀 마법사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먼저 물러선 건 살짝 양심이 찔린 듯 눈을 돌린 티르시였다.

“제가 그렇게 돼도 노르드가 구해주지 않겠어요? 저번의 그 마법만 있어도 방법은 다 갖춰놓은 셈이에요.”

“믿음을 강요하지 말거라. 그것도 강요가 될 수 있다.”

“……본인에게 물어보죠. 노르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나한테 날아온 화살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시작부터 이론의 대립이 첨예하군요. 도전해 보고 생각해 봐야 할 일이지만,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제어권 따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겠습니까?”

“연구란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타협의 연속이에요. 예산과 재료 수급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제어권이라는 안전 장치는 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물고 늘어지는 티르시. 나는 그녀의 제안을 깊게 생각하다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아뇨, 티르시. 제게 있어서 당신의 마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에요.”

“네? ……앗, 으, 에에…?”

정색하고 말하자 티르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의식을 성공하고 함께 웃는 자리에 당신이 그때처럼 무표정으로 있게 된다면, 저는 정말로 슬플 거에요. 알아 주실 거죠?”

“………………네, 네에.”

그녀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누가 옆머리를 밑으로 당긴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좋아. 이해해 줬다면 됐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흐음.”

베로니카는 조용히 있다가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내게 맡겨도 되지 않느냐? 나의 그대는 바쁘니 그쪽이 조율하기도 편할 것이다.”

“가능하시겠어요? 제어권을 돌려주는 마법은 직접 피부를 접촉해야 해요…… 이렇게요.”

티르시는 테이블에 올린 손을 내 쪽으로 움찔했다가, 차마 더 앞으로 가지 못한 것처럼 자기 무릎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다른 손을 베로니카한테 뻗었다.

─슥.

티르시의 손이 자기를 향하자 베로니카는 무심코 몸을 뒤로 뺐다.

뭐가 날아와서 몸을 숙이는 것처럼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으흠, 네. 이렇게 말이에요. 하지만 베로니카 씨는 지금도 보다시피 제 근처로 못 오시는 걸로 아는데요.”

“……참으면 다가갈 수야 있지. 아니면 그대가…… 아니지, 이 얘기는 조금 선을 넘겠군. 미안하다.”

베로니카는 말을 중간에 멈추고 다시 말했다.

“아무튼 내가 조금 참으면 끝날 일이다.”

“……괜찮아요. 친구를 괴롭히는 건 좋지 않은걸요.”

“……그렇구나. 확실히 친구를 괴롭히는 건 좋지 않지.”

두 미녀는 그렇게 말을 멈췄다. 이번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눈을 마주치질 못하고 피한다.

“……조금 차가워진 걸지도 모르겠구나.”

숨이 막힐 정도의 침묵을 찢은 건 베로니카였다. 티르시는 그 말에 흰 서리가 낀 창밖을 쳐다봤다.

“……아뇨, 뭐. 겨울인걸요. 1분 1초라도 온기가 아쉬울 법 하죠. 아마 저라도 그랬을 거에요.”

“피차 비슷한 처지로군. 허나 나도 무심했다. 미안하다.”

눈을 못 마주치고 대화하는 두 사람이었다. 나는 눈깔을 굴려대다가 말했다.

“확실히 날이 약간 춥지? 방이 차가워졌으니 좀 덥힐게.”

나는 룬의 힘으로 마나를 떼어내서 열기를 더하고 천장으로 발사했다.

코피가 터질 듯 혼신을 다해서 집중하면서, 되도록 겉멋이 팍팍 든 형태 변화를 일으켰다.

─파앙!

불꽃은 오히려 서리처럼 쪼개지며 천장을 수놓았다. 그런 뒤에는 차가운 방을 덥히며 화재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따듯한 온도로 연구소의 곳곳을 덥혔다.

말과 고양이의 모습을 한, 불꽃의 서리였다.

“……으음. 어느새 이렇게까지…….”

베로니카가 멍한 표정으로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남편놈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일취월장한 걸 보니까 입이 다물리지 않는 모양이다. 자고로 꼴마초란 3일만 성취를 못 봐도 괄목상대해야 하는 법이지.

“술식을 배우고 개조하는 건 마법의 기초이자 전부야. 고대 문명의 전설적인 마법이라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지.”

나는 시각적 효과로 두 미녀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말했다.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힘을 합치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두 사람 다, 도와줄 거지?”

베로니카와 티르시는 아이 컨택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진심으로 연구에 집중하려는 마법사의 얼굴이었기에 나도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후두둑. 창틀에 붙은 서리가 방을 뎁히는 열기에 떨어져 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