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20화 (420/1,009)

이세계의 봄바람은 따스하다.

시적인 멘트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따땃하다. 이세계의 에어컨은 숫자도 적고, 마나로 움직이기에 저 아름다운 푸른 하늘의 오존-처녀막을 프레온 가스로 메차쿠차 뿌지직 해 버릴 일도 없기 때문이다.

내 2번째 고향에 있어서 봄이란 추웠던 날이 조금 풀려가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물론 마나 좆밥들이 가볍게 입고 나갔다간 얼어뒤지기 딱 좋지만, 그거야 뭐 걔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아무튼 그렇게 2월을 넘어가는 계절에 나는 사르가디스에 해 두고 갈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하이로메인의 논문은 어제 아침 다나네 연구소에 도착했다.

‘다행히 좆 같은 도둑놈들한테 안 뺏기고 왔네.’

이 망할 이세계에선 본을 여럿 만들어서 순차적으로 보내는 방식도 신용하기 어렵다. 도둑맞은 논문을 누군지도 모를 현장직 학자가 우연히 주워서 입 싹 닦고 지 명의로 학계에 올려버리면 일만 귀찮아진다.

앵간히 빠꾸 없이 사는 병신이 아니면 그러지는 않겠지만, 이게 또 병신이라는 게 제대로 된 생각머리가 있으면 될 수 없는 유니크한 직업이라서 문제다. 절대 없는 일이라곤 말 못 한다. 선례도 있고 말이다.

예를 들면 성추행 무고죄 선빵 고소 같은 느낌.

100% 이길 수 있겠지만 재판 출석, 증거 수집 등으로 일 하기가 좆 같아지겠지.

하이로메인이 보낸 논문의 경우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 다행인 게 맞았다.

아무튼 우리 눈나는 그렇게 받은 논문을 레퍼런스 삼아서 자기만의 논문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학계에 등록된 논문이 아니니까 순수하게 우리 눈나의 성과로 인정이 되겠지.

얼스터의 역사는 다나의 전공이기도 했으니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자기 색이 녹아들도록 하는 건 힘들겠지만 말이다.

도와주고 싶었는데, 논문을 보강하면서 연구소의 실적으로 쓰겠다고 해서 나는 손을 대지 못했다. 부외자니까.

그래서 그 동안 나는 나대로 뭘 하고 있었느냐면, 바쁘게 일하는 아내들─과 티르시─의 모습을 본받아서 다른 일감을 진척시키는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무슨 일감이냐고? 혹시 예전에 지저의 탑에서 루팅했었던 고대 문명 시대의 지도를 기억하는가?

거기 표기된 고대 문명의 전선 기지 위치를 복구하는 작업이다.

‘나름 진행은 돼 있네.’

─팔랑. 나는 우리집 지하 창고에서 종이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랑 필로 토크 중에 대충 인수인계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까지는 별 결과물이 안 나왔다고 한다.

이유는 좀 허무하다. 위치를 알아낸 유적을 조사해 보니까 이미 공략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 곳도 아니고 무려 두 곳이나 그랬다.

이렇게 된 이유는 수천 년의 세월이 낳은 정보의 괴리가 원인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이 세상 모든 유적을 전부 알 수도 없는 판국이니까, 똥볼을 찰 확률은 더 오를 수밖에.

‘로마니아랑 수메르니아 쪽은 이미 발견된 유적이었군. 이 유적의 이름이 밝혀진 건 나름 업적이지만, 학계에다 지도를 제출할 수야 없으니 캐리어 인정은 안 될 것 같네.’

다나가 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연금 용액을 조합했다.

으음. 믹스 커피를 타는 것처럼 익숙한 이 손맛. 무척이나 좆 같군요.

사족이지만 그 수수께끼의 해독 불가능한 서적도 여기에다 뒀다.

처음에는 혹시 GPS 같은 걸까 봐 딴 데에 두려고 했는데, 염병 어디에 두려고 해도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소거법으로 지하 창고에 방치했다.

냅다 버리기에도 찝찝하고. 씨발 천암비서 같은 새끼.

그렇게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다가 보면 집에서까지 철야를 하는 다나랑 야밤 중에 불쑥 마주치기도 했다. 고향에 가기 전까지 논문을 야리끼리 하고자 꽤 무리하는 중인 듯 했다.

우리 부부가 철야 좀 한다고 죽는 줮밥이 아니지만 야밤에 야식을 만들다가 마주치면 여기가 대학 부지인지 우리 집인지 구분이 잘 안 갈 때도 있다.

존나 우리 나와바리에 누가 쉬를 싸갈겨서 영역 표시를 한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다. PTSD의 향기가 솔솔 피어난다.

그리고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프랑이랑 둘이서 대장장이 길드로 갔다.

〈자! 어디 평가해 보시지!〉

1달 넘도록 주말에 출근한 대학원생 같은 와꾸로 오드리는 호언장담을 했다.

거인 가죽으로 만든 가죽 갑옷.

프랑에게 줄 의상이 먼저 완성된 것이었다. 참고로 멘트는 내가 중간에서 해석해 주었다. 통역사 노르드다.

프랑은 오드리가 완성한 외투를 점잖게 받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다. 그녀가 나를 존중해주듯 나도 우리 프랑의 전문 분야에서는 아가리를 싸물었기에, 좀 불편한 침묵이 있었다.

이리 뒤집고 저리 펼치고 하며 박음질 하나까지 점검하던 프랑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응. 솜씨가 대단하네. 이 질긴 가죽을 어떻게 이렇게 많이 꿰맸어?”

〈영업 비밀이거든? 어때! 불만이라고 말하진 않겠지!〉

“안 그래. 갑옷 만드는 건 나보다 훨씬 대단한 걸?”

〈흐흐흐. 으흐흐헤헤헤!〉

내가 사이에 껴서 전해준 해석에 세상 신나게 웃는 오드리였다.

오명을 씻은 게 그리도 기쁜 걸까? 꼭 무슨 프로한테 선킬을 따낸 프로게이머 지망생 같아서 좀 웃겼다. 이렇게 건실하게 살 수 있으면 괴도 짓 같은 건 왜 한 건지 모르겠다.

〈성능 테스트도 해 보자고. 여기 입혀 봐.〉

오드리는 외투를 실험용 허수아비 같은 것에 입혀놓고, 그 가슴팍을 주워온 칼로 세게 베어들었다. 이제부터 우리한테 팔아 치우려는 상품에 하는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카가각─!!

“……오?”

하지만 이 물건도 과연 널려 있는 철검에 긁히거나 갈라질 만큼 무른 가죽은 아니다. 오드리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봐 봐. 쓸만해 보이지? 당신한테 받은 예산으로 가죽을 가공하면서, 여기 길드 사람한테 흙 속성의 부가 효과를 좀 넣어뒀어. 방어력이 단단해지고 흙 마법의 효과도 오를 걸?〉

─카각, 카각.

오드리는 설명하고 다시 칼로 외투를 긁었다. 펄럭이던 그 가죽은 압력을 받을 때마다 형상기억 합금처럼 단단해지는 것처럼 무쇠 소리를 냈다. 감탄스러운 방어력이었다.

〈쓰벌. 그런 게 된다고? 내 건 그냥 깡 가죽 갑옷인데?〉

〈으히히. 마법 부여가 필요해지면 또 오던가. 그게 다 내 성과금으로 연결되니까.〉

쓰벌, 무슨 다단계냐? 존나 알뜰살뜰한 년.

그래도 돈 좀 벌었으니까, 아내들 능력에 맞춰서 장비도 좀 강화해 주고 그럴 생각이다. 아껴둔 돈으로 메소 익스플로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모험가에겐 장비에 드는 투자가 재테크인 것이다.

─콰르르륵.

내가 혀를 내두르고 있자 외투를 걸쳐본 프랑이 골렘 코어 나이프를 들고 마법을 사용했다.

“응, 응!”

흙이 피어나는 기세가 마음에 든 걸까. 프랑은 밝게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노르, 노르. 나 어때? 봐 줄 만 해?”

─파앗! 팔을 펼치는 프랑.

그 얼굴은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했다. 타이타닉이 아닌, 십자가에 매달리러 가는 구세주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표정을 엄하게 지어봤자 작고 귀염뽀짝한 프랑은 깜찍할 따름이었지만, 갑옷처럼 두텁게 완성된 겉옷까지 깜찍한 것은 아니었다. 단아한 기품 넘치는 검정색 가죽은 프랑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에 무척 잘 어울렸다.

“에고, 우리 프랑 이거 이렇게 잘 어울려서 어떡해? 같은 옷을 입은 내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

나는 그냥 재롱 피우는 딸을 끌어안듯 안아버렸다.

사실 무진장 귀여웠지만 차마 본심대로는 말 못했다. 외투를 밀어올리는 우리의 브리타니아 제일 찌찌 때문도 있는데, 전투 장비인데 귀엽다고 칭찬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헤헤. 듣고 보면 노르랑 깔맞춤이네. 그치만 노르도 멋져.”

내 닭살 돋는 멘트가 우리 부부 사이에 딱 맞는는 칭찬이었던 걸까. 프랑은 헤실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해맑은 미소 때문에 넘어가서 프랑의 뺨에 키스를 퍼붓다가, 오드리에게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야, 멍청한 신혼 놈들. 남의 직장에서 뻘짓 말고 너희들 집으로 꺼져. 물고 빨고 할 거면 사람 없는데서 해.〉

〈추하구나, 오드리야. 그렇게 질투하지 않아도 성실하게만 살면 느그 인생에도 언젠가 봄이 올 거란다.〉

〈내가 너희를 질투해? 왜? 나랑 동생은 금괴로 산을 쌓을 만큼 돈 많고 늙은 부자가 아니면 결혼 안 해.〉

〈상또라이년들 아냐 이거.〉

오늘 내일 하는 할배랑 허니문 해서 뭐 하게. 커피에 락스 같은 걸 타나?

아니, 존버해서 유산 분배 받는 날을 기다린다는 뜻인가? 농담이겠지만 어려서부터 담벼락을 넘던 신데렐라 쌍둥이의 농담은 웃어 넘기기 어렵군.

〈아 맞다. 니 동생은 어딨냐? 같이 묵는 여관에 없던대.〉

〈내 동생 여관에는 왜 찾아갔어 더러운 놈아. 아내만 넷 있다더니만 그걸론 모자라든?〉

〈방음성 좆 쩌는 밀실에서 저랑 저희 아내한테 둘러싸인 본인 걱정은 안 되시는가 보군요. 안면 모의고사 성적이 개판났다는 자각은 있으신 듯 해서 천만 다행입니다.〉

〈큭, 비열한 놈!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허나 내 몸은 더렵혀도, 이 마음까지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덜그럭. 나는 테이블에 있던 망치를 들었다.

오드리는 두 손을 공손하게 배꼽에 모았다.

〈저희 동생은 주점에 갔습니다. 거리의 분위기나 느낌을 감 잡는데는 주점이 제격이라고 하네요.〉

〈주점 어디?〉

〈매일 바뀌는데, 오늘은 그…… 뭐라더라? 샘의 일터? 에 갔을 거에요.〉

〈샘의 쉼터겠지.〉

샘의 일터라니. 존나 노가다판 같은 작명법이군.

‘그나저나 다 아는 여관이로구만.’

뭐, 이 동네 술집이 얼마 없기는 하지. 나는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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