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존재와의 우연한 해후를 마치고서, 우리는 픽트 인 마을로 돌아왔다.
몸을 청결하게 닦고 왔지만 서둘렀기에 밤은 늦지 않았다. 입구를 지키는 여전사에게 아까 전의 멍청이들을 쫓아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와 그의 남편이 만들었다는 말린 과일─까지 받으며, 우리는 장인어른의 집으로 돌아갔다.
“왔군. 볼 일은 끝마쳤나?”
돌아와 보자 장인어른은 첫인상과 비슷한 분위기셨다.
다나랑 대화해서 충분히 회포를 푸셨던 걸까. 아니면 나를 조금 인정해 주시기로 마음 먹으신 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븅딱 대가리 귀족과 친구들의 영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면,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는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래 사용법이랑은 속담의 뜻이 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예. 그런데 그, 좀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질문? 듣지.”
“이 지방에 정말로 신이나 정령 같은 게 존재합니까?”
“……뭔가 겪었나 보지? 자세하게 설명해 보게.”
나는 그 이상한 소녀에 대한 얘기를 했다. 마지막에 남긴 노래는 가사를 기억하지 못해서 프랑이 조금 도와줬다.
“낡은 동요로군. 트롤의 정체를 묻는 퀴즈야.”
“퀴즈요? 아니, 트롤이요?”
그럼 그 꼬맹이가 트롤이라고?
노래 가사의 발음 상으로는 분명 ‘트롤(Troll)’이었다.
단지 내 귀에는 ‘괴물’이라는 뜻으로 들렸는데, 그건 내가 가진 대갈통 속 파파고의 자동 번역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뉘앙스는 몬스터보다는 정령. 정령보다는 요정이나 악마라는 느낌이었다.
내 고향 한국의 말을 쓰자면, 괴력난신(怪力亂神) 정도?
장인어른은 약간 어색한 브리타니아 억양으로 말씀하셨다.
“바깥 세상에서는 트롤이 상처가 빠르게 낫는 몬스터만을 가리키는 말이라더군. 하지만 원래 ‘트롤’이란 단어는 신화 속 온갖 괴물과 이형의 생물들을 일컫는 단어야.”
“신화 속 괴물…….”
프랑이 중얼거렸다. 아마 소녀가 불렀던 이상한 노래의 가사를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그 신화 속 괴물이라는 말에 아즈테카의 식인종들이 숭배하는 ‘우신’을 떠올렸다.
아즈테카의 신들은 사실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는 비현실적으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그야말로 신화에서 신과 싸울 정도로 강력한 존재.
하늘을 가르고 땅을 부수는, 그야말로 레이드 보스몹 같은 야생 몬스터들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인류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사람을 먹이감으로만 바라보는 몬스터다.
하지만 신이라는 게 어디 ‘두루미목 뜸부기과’ 같이 생물학으로 분류해서 명명되는 것이던가.
신이란 인간이 숭배하는 존재다.
본질이 몬스터라고 해도, 신과 비교되는 힘을 가지고 인간에게 떠받들어지며 숭상받는다면, 그것이 그밖의 신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아즈테카의 신들이 우신(偶神)─── 그러니까 ‘어리석은 신’이라고 불리는 건 그래서였다.
오딘이나 로마니아의 신들처럼 인간에게 호의적인 것도 아닌데다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기에 인류의 시점에서는 악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들이지만 말이다.
“대지의 달 흐룽니르나 선지자의 사랑하는 추종자라는 건 신화에 나오는 어떤 괴물의 힌트지. 원래는 저 먼 이방에서 요정인지 뭔지가 영웅담의 주인공에게 냈던 수수께끼라는 얘기가 있다.”
“……그 ‘선지자’라는 이름은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없군.”
“그럼 그 ‘선지자의 사랑하는 추종자’라는 괴물도요?”
“그것도 없다. 윙글링 인들의 동요의 구절로서 들어보았을 뿐이야.”
선지자.
게르마니아 신화의 바이콘인 아스토리아 마기도라의 칭호였지만, 사실 꼭 그녀만이 선지자인 건 아니다. 그녀는 마지막 선지자였을 뿐이니까.
‘선지자의 사랑하는 추종자’라는 건 그녀 이전의 어떤 ‘예언자’랑 쌰바쌰바하던 괴물이겠지.
“궁금한가 보군. 하지만 알아봤자 의미 없을 것이다. 그건 지나간 시대의 멸망한 괴물들이니까.”
“예? 의미가 없다뇨. 저희는 직접 마주치기도 했는데요.”
“정말로 그랬다면 나랑 대화하고 있는 자네는 유령인가? 아니면 그 신화 속 존재를 해치운 대영웅일 수도 있겠군.”
“끙.”
내가 답답해 하자, 장인어른은 턱수염도 없으시면서 턱을 쓸어내렸다.
“나라도 그런 초월적인 정령이나 신이 존재한다고는 믿기 힘들어. 백일몽이라도 꾼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어쩌면 자네는 정말 그 신대의 트롤의 ‘흔적’이랄 걸 발견한 걸지도.”
“분신이나 뭐 그런 거 말씀이십니까?”
어쩌면 그건 내 꿈에 나왔던 오딘처럼, 이미 힘과 목숨을 잃고 이 세상에 희미하게 남은 신대의 흔적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엄청난 존재감에 비해서 위압감이 없었던 건 설명이 되는 듯 했다.
영화관에서 보는 호러 영화가 암만 무서워도,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잖은가.
“그래. 모든 트롤이 사악한 것은 아니지. 자네에게 경고를 해줬단 건, 그 트롤은 과거 우리 에린의 조상을 돌보던 존재였을지도 몰라. 그래서 자신을 볼 수 있을 듯한 인간, 즉 자네들을 찾아간 거고.”
“그럴까요? 정작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던 눈치던데요.”
“트롤은 이름을 들키면 힘을 잃는다. 육신이 죽고 이름까지 빼앗겼다면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지. 자네가 느꼈다는 위압감은, 말하자면 몬스터의 발자국을 보고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이었지 않겠나? 하지만 그래도 액땜은 해야겠군.”
장인어른은 사제장의 남편 분답게 해박하게 설명하시더니, 창고에서 뭔가를 가져오셨다.
형형색색한 실로 예쁘게 짠 뜨개질 그림 같은 느낌이인데, 꼭 어디 여행지에서 관광 상품으로 팔처럼 예뻤다. 손바닥만한 카펫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험한 풀을 염색하고 3일 밤낮을 엮어서 만든 부적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 믿지 않는다지만, 잘 챙겨둬.”
“아,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시시한 일에 일일이 감사할 것 없어. 잦은 감사는 말에서 값어치와 무게를 빼앗는다.”
어쩐지 마초의 향기가 느껴지는 멘트시군. 나는 마음에 썩 들어서 픽 웃었다.
확실히 부적에서 마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단 챙겨는 뒀다.
미신이 미신이 아닌 세상이다. 마나가 깃들지 않았으니까 매직 아이템은 아니지만, 혹시 또 누가 아는가? 이 지방에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사람이라고 황금에 마나가 깃들어 있어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어, 뭐야? 남편이랑 프랑 돌아왔었네?”
그때 다나가 집 문을 열며 말했다. 대화 소리를 듣고 나온 모양이었다.
“왜 밖에서 떠들고 있어. 추운데 안에서 하지.”
“아니, 잠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랬어. 이제 들어가야지.”
나랑 프랑은 피식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푹 쉬자.
내일은 싸울 준비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
다음날, 우리는 가볍게 아침을 먹고 마을을 출발했다. 우리 3명이 픽트 인 마을의 대표로서 베르세르크들과 쇼부를 봐도 된다는 합의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차피 수틀리면 다시 힘을 써서 제압하면 그만. 싸움에서 이기면 뭐가 됐든 납득하고 물러갈 인종이라 그렇다나.
그리고 그런 살벌한 설명 때문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윙글링 인이라는 사람들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머리에 모히칸을 기른 미치광이 배틀 정키 생물군’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그런 예상은 속절없이 빗나갔다. 마을 근처에서 처음 만난 베르세르크가 그만큼 특이했기 때문이다.
[누구냐? 침입자냐?]
그렇게 말을 걸어온 건 나무 위에 고양이처럼 웅크린 남자였다. 나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솔직히 동물의 귀, 꼬리가 자란 사람들이라길래 호기심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처음 마주친 베르세르크는 고양이 귀에 고양이 장갑을 낀 40대 아저씨 같은 인간이었다.
트위터를 하는 여자 그림쟁이가 그린 그림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한 비쥬얼이었는데, 페티쉬라는 게 언제나 그랬듯이 이성의 시선으로 보면 역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나는 픽트 인 마을의 대표로 온 다나 베르베이아야. 너희 마을의 수장을 만날 수 있겠어?]
내가 아가리를 싸물고 말할 기색이 없자 다나가 말을 했다.
프랑은 얼스터 어를 쓰지도 듣지도 못했기에 가만히 내게 달라붙어서 침묵했다.
[수장? 어머니는 마을 한가운데에 낮잠 잘 시간이다. 가서 직접 깨워라.]
여기 오기 전에 들은 바로는, ‘어머니’라는 건 윙글링 인들이 족장 겸 촌장을 부르는 방식이랜다.
다나가 약간 곤혹스럽게 말했다.
[……낮잠? 아니, 아무튼 안내해 줬으면 좋겠는데.]
[낯선 냄새가 나면 내버려 둬도 깰 거다. 이제 가 봐라. 난 잘 거다.]
고양이 아재는 그걸로 관심이 꺼졌다는 듯 다시 팔을 베고 나무 위에서 잠들었다.
머리에 난 고양이 귀 때문일까. 그 꼬락서니가 마치 중년 페티시 여자들을 겨눈 화보의 컨셉샷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애1미.’
고양이 귀 아저씨라니! 대체 누구 좋으라는 디자인이지. 이 미친 세상의 신들은 또라이밖에 없나?
나는 그렇게 속으로 베르세르크라는 인종을 만든 이름조차 모를 신을 씹어댔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돌담으로 둘러싼 마을로 들어가자 방금 전의 아저씨랑 별 차이도 없는 남자들이 어슬렁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포켓몬도 아닐 텐데 다들 동물 파츠가 제각각이라서 테마파크에라도 온 기분이다.
다들 우리를 힐끔 쳐다보다가 관심 없는 듯 거리를 두면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동물원 우리에 사육사가 먹이 없이 들어왔을 때의 사자들 같은 리액션이군 그래.
딱히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환상 속 생물 같은 동물 귀 미녀는 없었다.
아니, 어딘가엔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눈에 띄는 곳에는 없었다.
뭔가 투명인간이 돼서 여탕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어차피 여탕에 들어가봤자 아줌마랑 할머니들밖에 없음’ 하고 현실을 지적당한 좌절감이었다.
“나 지금 약간 환상이 부숴졌어.”
“……동물 귀가 좋은 거면 나중에 우리가 해 줄게.”
프랑의 위로가 가슴에 스며든다.
그래. 고양이 귀 미소녀가 대수냐. 내 말 한 마디면 엉덩이 구멍에 강아지 꼬리 플러그도 넣어주는 아내가 있는데.
아무튼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마을 중앙으로 걸어갔다.
윙글링 인의 마을은 상당히 특이한 곳이었다.
건성으로 세운 집들이 신기해서? 아니다. 그보다는 이 마을에서는 분업이 이뤄지지 않은 듯 해서였다.
우리 개도국 브리타니아의 시골 마을도 여관이나 빵 가게 정도는 있다. 하다 못해서 얼스터 인들의 군락에서도 사제랑 전사, 대장장이 등으로 분업 정도는 했다.
그치만 이들은 다들 비슷한 집에서 살았고, 행색도 거의 다 비슷했다. 그야말로 수렵사회라는 느낌이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 픽트 인의 친구야?]
그렇게 약간 관광 온 듯한 기분으로 걷고 있자, 한참 높은 곳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세워진 무식하게 큰 바위에서 누군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어머니’, 그러니까 이 마을의 대빵이라는 걸 눈치깠다.
다나는 역광이 눈부신지 눈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네. 여러분이 저희 마을과 일으키는 분쟁을 멈춰주셨으면 해서 왔어요.]
[왜? 싸워서 이기고 먹이를 가져갈 뿐인데. 너희 친구들도 죽은 애는 없잖아? 우리도 너희랑 죽도록 싸우긴 싫어.]
야생동물 그 자체인 사고관이었다.
별 것 아닌 듯 들리면서도 ‘쓰벌 이건 대화가 안 통하겠다’ 하는 느낌이 드는 말투였는데, 다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인지 말을 꺼냈다.
[식량을 저축하거나 값이 나가는 물건을 팔아서 사 오시면 어떠세요? 싸워서 쟁탈하시는 것보단 편할 거에요.]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애들은 마을에서 나갔어. 그래서 여긴 그렇게 살기 싫은 애들만 남았고.]
아니 씨발, 무슨 청년층이 싹 다 수도권으로 탈주한 시골 마을이냐고. 왜 이렇게 나이 지긋한 틀딱 수인들만 있나 했네.
이 사람들한텐 사냥이나 약탈이 낚시나 등산 같은 거겠지. 인명 피해가 없으니까 봐줄 만은 하겠지만, 꼰대들을 상대로 취미나 기존의 방식을 바꾸라고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후우……. 네. 맨입으로 멈춰달라고는 않을게요.]
우리 눈나도 꼰대 교수들에게 시달리며 그걸 충분히 배운 식자였기에, 다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한 판 붙읍시다. 저희가 이기면 부탁을 들어주시죠.]
[영역싸움이야? 좋아.]
─팟. 소리도 없이 5층 건물은 될 높이에서 뛴 ‘어머니’는 마찬가지로 무음으로 땅에 착지했다.
착지까지 네 발로 하는 게 동물답다면 동물다웠지만, 나는 그 신체능력보다는 그녀의 생김새에 입이 딱 벌어졌다.
풍성한 금발에 쫑긋 솟은 동물귀. 프랑보다 작은 키에 그 키만큼 작은 팔과 다리가 앙증맞다.
[사냥이랑 싸움은 언제든 환영이야. 그게 우리 특기니까.]
소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했다.
윙글링 인 마을의 ‘어머니’는, 겉보기로는 10살이나 됐을지 모를 어린 여자아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