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41화 (441/1,009)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들이 행하지 않았던 영지 수호의 의무를 저희 마기마기가 해내 보이겠습니다!”

강렬한 감정이 담긴 선언은 귀기 어린 포효처럼 회의실의 안을 휘어잡았다.

“……흐응.”

다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듣기 싫은 개소리를 가만히 듣던 나도, 이제 저 새끼가 왜 고향을 버리고 이상한 단체를 세워가며 지랄을 하는지 눈치를 깠다.

‘권력욕이군.’

폐쇄적인 픽트 인의 마을엘 갇혀서 실력을 기르고, 바깥에 나와서 꿈을 이룬다.

어떤 의미로는 다나랑도 닮은 생각이었다. 우리 눈나보다 수십 배는 과격하고, 이기적이며, 계획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똑같이 장모님의 제자로 차기 사제장 교육을 받았으면서, 이렇게나 다른 것이었다.

“……본래의 주인이라는 건?”

유약한 영주는 기세에 밀린 것처럼 침묵했다가, 자존심인지 의무감인지로 입을 열었다.

코난드는 방금 전 보여준 귀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웃었다.

“이거 말씀을 드리는 게 늦었군요. 키사르! 오게!”

─슥. 그가 손짓하자 어떤 청년이 걸어나왔다.

청년은 옷이 어색한지 쭈볏 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섰다. 대충 봐도 평생 못 입어본 비싼 예복을 입고 이런 자리에 나서는 게 죽을 맛인 와꾸였는데, 그에 비해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발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영주는 슬슬 지쳐 가는 얼굴로 물었다.

“저 자는 또 누군가?”

“키사르 오르커스. 저들이 점거하고 있는 땅의 원주인이던 인물, ‘오르커스’의 직계 후손입니다.”

“뭐라?”

영주가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보자 키사르라는 놈은 군침을 삼켰다. 하지만 코난드가 쳐다보자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누가 말해준 대사를 읊듯 빼액거렸따.

“그, 그렇습니다! 제 선조이신 오르커스 님께서, 고대 문명 말미에 이 땅에 제대로 된 법치가 세워지기 이전에 북부의 땅 일부를 통치하셨다고 합니다! 아니, 통치 하셨습니다!”

“놈! 그게 정녕 사실인가! 증명할 수는 있나! 혹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이라면 네놈에게 극형의 죄를 물릴 것이야!”

영주의 가신 중 1명이 으름장을 놓았다. 키사르는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코난드를 쳐다봤다.

“염려 마시기를. 증거는 물론 있습니다. 이것이죠.”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액자에 넣은 어떤 낡은 종이를 보여주었다.

나랑 다나는 그걸 보고 숨을 삼켰다. 액자에 붙은 인장이 존나 PTSD를 자극하는 낯익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브리타니아 고고학의 최고봉, 카르미네 대학에서 진위를 확인받은 문서입니다.”

“……확인하게.”

영주는 사람을 불러서 확인을 시켰지만, 그럴 것도 없었다. 저건 100% 진짜다.

유물이나 구 시대의 기록의 진품 가품을 구분하는 것!

그건 내가 연구원생 시절에 했던 주 업무였다. 저 인장은 예르나 년이 찍어서 결재했지만, 인장을 찍기 전까지의 검품 과정은 전부 나랑 다나의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저 문양도 못 알아보겠는가. 진품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진품이 맞습니다.”

역시나 영주의 가신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 그리고 가신들의 눈이 설명을 요구하듯 빛났다. 그에 콘라드는 느릿하게 액자를 쓰다듬었다.

“이건 제가 차기 사제장으로서 마을에 남아 있던 무렵, 저 자리에 앉은 사제장 시로나 님께서 숨겨오던 것을 우연하게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마을에 신물을 내며 떠난 이유이기도 하죠.”

“떠난 이유라고?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이 현실이 믿겨지십니까? 픽트 인들은 이 엄연한 증거물을 수백 년 동안 줄곧 감춰 왔던 것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겠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퍽, 퍽! 코가놈은 비통하게 가슴을 치고선 거기에 붙여둔 해석본을 읽었다.

“문구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Et s'est──”

“──Et s'est escrit que il ert ancore que toz li reaumes, qui jadis fu la terre as Orcus.”

나는 코가놈의 시끄러운 장활설을 끊고 선수를 쳤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코난드의 얼굴에 한 순간 차가운 빛이 서렸다.

“……예. 맞습니다. 고대 고르갈리아 어의 해석본입니다만, 용케 아셨군요?”

“언어학이 특기라서.”

“……말이 좀 짧으십니다?”

“그거 죄송하네요. 브리타니아 어는 아직 좀 어렵군요. 제 특기는 고문서 번역이지, 미사여구가 아니걸랑요.”

“그러십니까? 그럼 무슨 뜻인지도 해석이 가능하실지요?”

뜬금없이 나서고 든 놈을 증인으로 써먹을 생각인가. 재치 있는 편이라고 해도 되겠군.

물론 바라던 바였다. 나는 차분하게 중역(重譯)된 말을 브리타니아 말로 해석했다.

“──‘그리고 오르쿠스는 돌아오리라. 그들의 옛 영토였던 곳. 그 위에 세워진 영지로’…… 정도겠군요. 맞습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훌륭한 해석이십니다!”

─짝짝짝! 기분 좋게 박수를 친 코난도가 말했다.

“저는 이 문구를 해석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장래에 이곳 북부에 돌아와서 땅의 소유를 주장하리라는 ‘오르쿠스’라는 인물의 존재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땅을 훔쳐서 점거 중인 제 고향의 추악함도!”

─팟! 그는 사이비 교주처럼 팔을 벌렸다.

“저는 고향에 학을 떼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 여기 있는 키사르의 가계도에서 선조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구와 같은 내용이, 알윈 가문의 서재에도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말입니다!”

“그래, 동생아. 내가 확인했다.”

벤자민이 으스대며 말하자 영주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말하자면 그 땅의 실효권만 없을 뿐, 원래 땅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등장한 것과 같았다.

영주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만약 이걸 빌미로 딴 영주들에게 빌붙는다면 영지전(領地戰)의 빌미가 된다.

다른 이들이 ‘남의 땅을 뺏고 돌려주지 않는 알윈 가문은 뒤져랏!’ 하고 맞다이를 걸 수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정치와 전쟁에서는 그런 명목이 중요하다니까.

“하지만! 알윈 가문의 현명한 통치를 겪으며 살아온 저와 키사르 군은 감히 영주님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연히 마기마기도 알윈과 사생결단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겠지. 놈은 바로 꼬리를 말며 주댕이를 놀렸다.

“단지, ‘오르쿠스’의 땅을 불법 점거하고 이기적이게도 이 증서조차 숨겨왔던 저들에게는!”

─척!

코난드는 악인의 치부를 까발리는 듯한 낯짝으로 장모님을 가리켰다.

“──그만한 처벌과 노역이 필요합니다. 아닙니까?”

코난드의 와꾸가 패배자의 심장을 찌르듯 희열에 젖었다.

***

‘……치밀하게 준비했구나, 코난드.’

시로나 네만은 입을 다물고 한때 제자였던 자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알고는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 그 욕심이 많았다는 것 쯤은.

하지만 20년 전, 그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적절한 욕망은 활용하기 나름으로는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했다. 시시때때로 보이는 과격함도 언젠가 장점으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시로나는 20년 간 그를 가르쳤다.

그리고 또 실패를 겪은 것이다.

‘……나는 정말로, 평생토록 누군가를 올바르게 가르치지를 못했구나.’

시로나는 절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원래 픽트 인의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선대의 제자로 교육받을 때부터 들어 왔던, 이어진 픽트의 사제장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외세에 간섭하지 않고, 외세에 간섭받지 않는다.

선조 때부터 이어져오던 ‘에린의 후예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

그게 사제장의 자리를 이은 시로나가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무에 의문을 품었던 것은 딸아이가 가출한 사건이 원인이었다.

시로나는 무심코 곁눈질로 다나를 바라보았다.

20년 전, 말도 없이 가출했던 소중한 딸.

말도 없이 떠나서 연락 한 통 없던 딸아이에게 화를 내던 것도 잠깐이었다. 딸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에 의무도 저버린 것은, 부모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명도 잊고, 외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딸 아이의 행방을 찾아 헤맨 것이 어인 20년이다.

시로나는 가끔씩 마을로 찾아오는 운송 길드의 사람에게 딸의 행방을 묻고,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사람을 시켜가며 수색보를 뿌리고 걱정에 가슴을 졸였다.

처음 2년에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샌 탓에 기우제 중에 기절했던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시로나는 얼마 전까지 딸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20년 간, 친딸인 다나는 그녀에게 단 1통의 편지나 연락조차 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가르치던 방식이 문제였던 걸까.

그래서 딸아이도 고향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차기 사제장을 새롭게 들여야 한다는 족장의 조언을 받은 날, 시로나는 자신이 딸에게 베푼 가르침에 회의감을 품었다.

의문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선대로부터의 교육 방침.

픽트의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던 그녀의 가르침이 딸에게 평생토록 그녀를 떠나버리고 싶을 만큼 잘못됐던 것일까.

회의감을 져버리지 못한 시로나는 차기 사제장을 자처했던 코난드를 제자로 들여, 딸에게 가르치려던 모든 주술과 마법들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베풀었다.

그 과정에서 엿보인 코난드의 흠을 지적하는 것은, 친딸을 엄하게 대한 끝에 잃었던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다나에게 행했던 엄한 교육의 끝에 코난드 역시 반발하고 떠나버린다면, 시로나는 더 이상 견딜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이나 쇠약은 구전으로만 이어지는 픽트의 지식과 역사가 끊기는 것을 의미했다.

더 이상의 실패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로나는 제자의 흠을 간과했다.

‘그 교육 방식의 결과가 이것이라면, 이것 역시 내 잘못이 부른 결과일지도 모르지.’

─질끈. 시로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그릇된 교육을 받았기에, 소중한 딸과 제자는 길을 엇나가 버렸던 것 아니겠는가.

과거에 제자였던 아이가 악의를 갖고 그녀가 태어난 땅을 빼앗으려고 한들, 그를 그렇게 길러낸 시로나에게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코난드의 주장은 족장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온 시로나가 넘겨들어선 안 되는 궤변이었다.

저 주장을 수긍한다면, 장차 그녀의 고향과 마을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니까.

“……읏.”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제자가 훔쳐갔던 저 문구에는 조금 더 남은 글귀가 있었다.

그런데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평생 믿어오던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바깥의 에상은 너무나도 넓었던 것이다.

“──아, 잠깐 괜찮습니까?”

그래서였을까. 무척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시로나는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머리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의의 주제에 무관한 의견이라서 대충 흘러들으려 했습니다만, 고고학자로서 넘어가기 힘든 착각이 있으시네요.”

그녀의 사위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제자의 궤변을 부정했다.

본인으로부터 이름을 들은 것도 아니고, 딸의 소식을 가져왔던 사제에게 어떤 사람인지 대략 들었을 뿐인 청년.

그녀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악명을 떨치는 흑마법사들을 몇 명이나 해치우고, 이 나라에 점점 이름을 알려가고 있다는 딸아이의 남편이었다.

“……고고학자? 아니, 착각이라고요?”

“넹.”

당황하는 제자에게, 그녀의 사위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고대 로마니아 어에 근간한 ‘오르쿠스’라는 명사는 인명이 아니걸랑요. 아. 인명이 무슨 뜻인지는 알죠? 사람의 이름이 아니란 뜻인데, 얼스터 말로 해 줄까요?”

“……뭐, 뭐?”

“음…… 이해가 많이 굼뜨시네요. 저기 서 있는 양반의 선조가 무슨 이름으로 살다가 가셨던 간에, 그 양반이 과거의 북부를 통치한 사람이라는 건 착각이란 뜻인데요.”

─톡톡.

따분한 듯 테이블을 두들기는 청년의 말투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의 실수를 대충 수정해 주는 듯 해서, 고작 방금 전까지 큰 목소리로 열변하던 코난드를 한낱 멍청이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심드렁함은 청년의 말에 설득력을 더해주기까지 했다.

만약 노리고 한 것이라면, 사람의 심리를 휘어잡는 것에서 코난드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코난드와 그의 후원자인 벤자민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영주는 그들이 소란을 피우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고고학자, 말해 주게. ‘오르쿠스’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길래 그런가?”

“흐음……. 죄송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 제가 브리타니아 말이 조금 서툴러서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자세한 설명은 저희 베르베이아 박사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그는 조금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말로 자리를 물렸다.

하지만 그걸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그의 아내에게 쏠렸다.

시로나의 딸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패스에 입을 벌렸다가, 금방 못 말리겠다는 듯한 미소를 띄웠다.

“자네도 고고학자인가? 반응을 보니 답을 아는 듯 하군.”

“네. ‘오르쿠스’란 어떤 몬스터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식인종, 사람을 먹는 괴물, 지저의 악마의 이름이죠.”

─드르륵.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남편 만큼은 아니어도 고고학 박사위를 따며 고대 문명의 기록을 질리도록 읽은 그녀다. 한 발 늦긴 했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하려는 이야기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것이었다.

“그 ‘오르쿠스’라는 건, ‘오우거’를 뜻하는 고어(古語)에요.”

다나는 고향을 배신한 후배를 한심하다는 듯 보며 말했다.

“댁이 액자에 애지중지 장식해 둔 문구는요, 지금 알윈을 습격하는 몬스터의 군세를 암시하는 예언이었나 보네요. 이 대가리에 빵꾸 난 새끼야.”

걸쭉한 욕을 섞은 말에, 회의실이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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