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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48화 (448/1,009)

─퍽!!

털복숭이 트롤의 영혼을 후려갈겨서 성불시킨 나는 새끼가 떨군 도끼를 루팅했다.

쌍수 도끼 트롤이지만 내가 팔을 자르며 떨구게 만든 도끼 쪽에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일단 생긴 것 부터가 훨씬 허접해 보였으니까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건 쓸 수 있겠군.’

내가 갑자기 도끼 드루이드로 빌드를 바꾸겠단 게 아니라, 오딘의 눈으로 해석해서 써먹을 생각이었다.

“……100만 볼트!!”

나는 내 손에 들자 큼직하게 느껴지는 도끼를 석판에 우겨넣고 돌아섰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즉시 손바닥에서 번개를 뿜어냈다.

─콰르르릉!!

시퍼런 번개는 애꿎은 벽을 태웠다. 내가 노린 적은 새까만 연기로 변해서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야만스럽군. 말을 걸기도 전에 공격부터 가하는가?]

[고공 3미터에 부유하는데 민간인이겠냐 씨발아! 그보다 이 개새끼, 뭉게뭉게 열매 능력자로군!!]

나는 물 흐르듯 개소리를 읊고 오딘의 눈을 켰다. 어떻게 이런 트롤 새끼가 자연계 최강의 열매인 뭉게뭉게 열매를 쳐먹었다는 말인가?

‘아니, 분신이군.’

창을 겨누며 혀를 찼다.

예르나 년처럼 초 고퀄리티의 분신이 아니라면 날 공격할 수도 없을 거고, 내가 족쳤다고 본체에 데미지가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트롤 주술사의 등장은 이벤트 컷씬 같은 것이었다.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는, 그런 상대 말이다.

[후우……. 억지로 싸우지 말고 성벽을 부쉈으면 도망치라 했건만. 젊은 것들은 피가 끓는 게 문제야.]

트롤 주술사는 내 손에 할로우탄을 맞은 것처럼 대굴빡이 휑 해진 트롤을 보며 착잡한 듯 말했다. 동지의식 정도라면 이 놈들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졸병들은 막 버림패로 쓰는데…… 일제의 신분제도처럼 2등신민 취급인가? 그럼 한층 개새끼로군.

[너그 대장한테 가서 말 좀 전해주라. 병신인 거 티내면서 전사인 척 가오 잡지 말라고. 꼴에 왕이면 부하들만 뒤지게 둘 게 아니라 직접 와서 내 손에 뒤지셔야지.]

나는 옥새를 꺼내서 건들거리며 흔들었다. 트롤 주술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깔이 누래서 보기 좀 역겨웠다.

[우리 친구, 내 말 알아듣지? 안 오면 옥새 부숴버린다?]

[……왕은 바쁘시다. 네까짓 열등종 놈을 상대해주실 시간 따윈 없다는 뜻이다.]

부우우우웅─! 날개짓 하는 수천 마리의 벌레떼를 방불케 하는 소리를 내며, 트롤 주술사는 검은 연기로 바뀌었다.

[내가 보기엔 고민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너로 보이는군. 여기서 죽을 게 번한 열등종들을 버리고 우리한테서 달아나 보거라. 꼬리를 빼고 도망치는 패배자를 쫓지는 않을 터이니.]

휘이이익─!

검은 바람이 된 분신은 개소리를 읊으며 흩어졌다. 아마도 이 새끼가 뒤지기 전에 데려가려고 왔다가, 뒤져서 그냥 튀어버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쫓아가 봤자 분신일 뿐이다. 나는 추격하지 않고 땀에 젖은 앞머리를 넘겼다.

“……트롤 킹 놈은 안 온다 이거지?”

정말 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방금 전의 도발은 ‘함정일지도 모르니까 나가지 말자’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기 때문이다.

‘트롤 킹은 전선에 나오지 않는 게 제일이야.’

그래야만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을 것이니까.

나는 눈을 반개하면서, 엘리트 대갈통으로 승리의 방정식을 세웠다.

***

텔츠즈는 나무 위에서 눈을 떴다.

본체에서 눈을 뜨자 분신과의 링크가 사라졌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왕이 사용하던 장비를 씌운 졸병이 열등종의 손에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광경이었다.

“이겼다!!!”

열등종의 무모한 돌격대를 통솔하던 마법사가 외쳤다.

텔츠즈는 이 땅을 점거한 이들이 사용하는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게 승리의 함성이라는 건 모를 수 없었다. 마치 이걸로 모든 싸움이 끝났다는 듯 웃는 모습에는 실소가 새어나올 정도였다.

[천한 것들이…….]

헛웃음을 짓는 입에서는 그와 달리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께 싸운 전사를 잃고, 왕의 모습을 흉내낸 졸병이 죽는 것을 본 것이다. 뱃속에 분노를 똬리 튼 텔츠즈는 흑무(黑霧)의 주술로 몸을 기체화시켰다.

열등종들과의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줄어들었다.

“──피해라!!!”

텔츠즈의 습격에 반응할 수 있었던 건 코난드가 유일했다. 전투의 여운에서 벗어난 그는 지시를 내리며 바람처럼 뒤로 피했지만, 그가 데려온 부하들은 그러지 못했다.

“끄아아아아악?!”

“버, 벌레가!! 벌레가 몸을── 꾸르르륵!!”

주술로 만든 벌레떼가 부하들의 몸에 파고들었다.

산 채로 잡아먹히는 이들의 비명은 끔찍하게 처참했지만, 단 2명을 뺀 나머지 특공대는 고통에 몸부림 치기도 바빴기에 그런 감흥을 품을 틈도 없었다.

“히이이익!! 뭐, 뭐냐!! 뭐냐 이거어어언!!!!”

벤자민은 새된 비명을 짜내며 바닥을 기었다. 스스로 자기 몸을 지킨 코난드를 빼면 살아남은 건 그 뿐이었다.

물론 우연은 아니다. 텔츠즈의 주술은 그에게로 날아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 열등종 마법사들. 마법에 쓸 마나는 충분히 남았나? 불측의 사태에도 대비할 지능이 있기를 바라지.]

기능성이 부족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열등종을 주시하며 텔츠즈가 말했다.

‘이, 이 트롤은 또 뭐야? 아니, 트롤이 맞기는 한 건가?’

코난드는 부하의 시체를 보며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쓰러트린 트롤 킹은 전성기의 육체를 가졌던 무장한 트롤이었다. 코난드는 몇 마리 정도 트롤을 쓰러트려 봤지만 그중에서 이토록 강한 트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만한 강적을 쓰러트린 직후에, 그보다 몇 배는 더 강해 보이는 트롤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코난드는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확인하며 안색을 파랗게 했다.

그가 데려온 마기마기의 전투 요원은 강한 편은 아니었다.

실력을 보고 계약한 이들은 그만큼 몸값이 무거웠기에 계약했을 때부터 조건이 가벼웠고, 강제성이 없는 계약이었기에 이 특공에 협력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부에서 활약하던 모험가 마법사는 빠르게 코난드의 실패를 눈치채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 도주했다. 얼스터 인 전사처럼 위약금을 감내하고 계약을 파기한 이들도 있었다.

이곳에 남은 것은 마기마기의 흥쇠에 목숨을 배팅했거나, 혹은 셀틱처럼 코난드와 창립 당시부터 함께했던 이들 뿐.

말하자면 마기마기의 중책이자, 그가 사제장 시로나에게서 훔치다시피 배워온 모사 마법을 공유한 마법사들이었다.

‘저 놈들도 방어 마법은 걸고 있었어! 그런데 이렇게 손도 못 쓰고 몇십 초 만에 전멸했다고?’

코난드의 두뇌는 스승을 배신할 계획을 세울 때만큼 필사적으로 생각을 짜냈다.

“……죽을까 보냐!!”

그렇게 못 이긴다는 결론을 낸 순간, 코난드는 벤자민조차 내버리고 도주했다.

“코, 코난드!! 어딜 가는 거냐!! 나를, 나를 지켜라아아아!!!”

다리에 힘이 풀린 벤자민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초라하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코난드는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발을 빠르게 만드는 마법까지 발동하며 달렸다.

영지 방향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 성벽에서는 그가 영주의 형을 버리고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성벽 안에 돌아가봤자 처형당하는 미래 밖에 없다.

‘상관없어! 어차피 그 망할 키타이 놈이 움직이면 브리타니아에서 만든 기반은 끝장이다!’

로마니아든 어디든 좋다. 다른 곳에서 시작하면 될 일이다.

[살아만 있으면……!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있다!]

[그렇지, 그렇지. 마음에 쏙 드는 마음가짐이군.]

도주하는 코난드의 앞을 텔츠즈가 가로막았다. 바람보다도 빠른 도망이었지만, 검은 바람이 되서 달려나가는 텔츠즈보다 빠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덥썩!

앙상하게 말라붙고도 인간의 2배는 두꺼운 손이 코난드의 머리를 붙잡았다.

[아그가가가가가가각──!!!]

자신을 낚아챈 팔에다가 마법을 퍼부으려던 코난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격통에 머리가 잘린 닭처럼 발버둥을 쳤다. 손바닥에 붙잡힌 머리에서 혈관이 부풀며 일그러졌다.

“흐어억, 허어어억……!!! …흡!!!”

벤자민은 나이도 잊고 오줌을 지리며 공포에 떨다가, 트롤 주술사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틀어막았다.

사자 우리에 던져진 아이처럼 떠는 그에게 트롤 주술사가 붙잡은 코난드를 내밀었다.

“흡……!!! 흡……!!!! 크흑……!!!!”

혀가 목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듯한 공포와 함께 벤자민은 몸서리를 쳤다.

코난드의 눈두덩이에는 이끼와 비슷한 색의 살덩이가 피어올라 있었다. 흰자위를 뒤집으며 혀를 길게 빼문 마법사는 사막에서 건져올린 익사체를 닮은 듯 했다.

그때였다.

“너, 는. 저 성의 우두, 머리냐?”

코난드의 입이 광대들의 복화술 인형처럼 뻐끔거리면서 벤자민에게 말을 걸었다.

죽음의 위기에 극한까지 상승된 직감 덕분일까. 벤자민은 그게 저 트롤이 코난드의 입을 조종해서 브리타니아 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벤자민은 축축해진 바지도 잊고 무릎을 꿇었다.

“그, 그렇, 그렇다! 내, 내가 저 성의 주인이다!! 협력하자!! 제, 제안, 제안이 있다!!”

“제, 안?”

시체의 턱이 덜그럭거리는 듯한 코난드의 얼굴에 벤자민은 눈물콧물을 흘리며 끄덕였다.

“맞아!! 제안이다!! 나를 살려주면 내 영지는 너희에게 따르겠다! 인간! 인간이 필요하진 않나?! 매주마다 너희가 원하는 성별과 나이의 인간을 넘겨주마!!”

“호, 오? 인간, 을?”

“그래!! 그, 그것만이 아니다!! 인간의 무기도 주마!! 다른 영주들을 속여넘기면 너희들 트롤이 지금보다 좋은 무기로 무장하는 것도 가능해!! 나만이 가능한 일이다!! 우린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어!!”

“협력, 자, 인가……?”

─까득까득. 파드드득.

코난드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며 떨렸다.

벤자민은 한 순간 공포에 질렸다가, 그게 웃음이라고 눈치챘다. 코난드의 목을 들이미는 트롤이 로브의 그늘 아래에서 소름 끼치게 큭큭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왜 웃지? 왜?”

“너희, 는. 불구대천의, 원수, 와…… 친분을, 맺나?”

텔츠즈는 따분해진 것처럼 쥐고 있던 코난드를 내던졌다. 벤자민은 뭐라도 말해보고자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걱! 억! 커거거걱……!!”

그의 눈코입과 귀에서 흰 에너지가 뽑혀나왔다. 텔츠즈가 사용한 주술의 효과였다. 아주 단편적이지만, 벤자민의 기억에서부터 원하는 정보를 일부 캐낼 생각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혼백을 빼앗기고서 백치가 될 벤자민의 몸뚱이에는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

[……호오. 영주의 친형인가.]

단지, 혼을 들이마시던 텔츠즈는 중간에 주술을 해제했다.

턱을 쓰다듬던 텔츠즈는 싱글거리며 정신이 나간 벤자민의 허리에서 날이 무딘 장검을 뽑아냈다. 인간의 장검도 그의 손에 들리자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손에 든 장검을 건성으로 휘둘렀다.

─서걱!!

“으갸아아아아악!! 크햐아아아아아악──?!”

벤자민의 팔이 어깨죽지에서 떨어졌다. 단번에 정신이 돌아온 그는 단면을 움켜쥐며 몸을 밟힌 방아깨비처럼 기었다.

“가서, 네, 동생에게. 전해라.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왕, 의 군세가. 네 영지, 를, 무너트리, 러 가겠다고.”

텔츠즈는 아직 명줄이 붙어 있는 코난드를 들어올렸다. 그 턱이 달그락거리며 말을 자아냈다.

“살고 싶다, 면. 그 전에 도망, 쳐라. 알겠, 나?”

─끄덕끄덕!!

노인처럼 폭삭 늙은 벤자민은 입을 열지도 못하고 고개를 거칠게 끄덕였다. 공포와 고통과 혼의 일부를 빼앗긴 것으로 그의 머리카락은 하얘지다 못해서 우수수 뽑혀나갔다.

“알아들었, 으면!!! 가라!!!!”

“흐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텔츠즈가 목을 잡고 들춰세우자, 벤자민은 돌에 걸리고 넘어져가며 성벽으로 도주했다.

그의 몸에 암시와 황금색의 마나를 불어넣었던 텔츠즈는 그 뒷모습을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가, 색색 거리며 피부가 누리끼리하게 변색돼 가는 코난드를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흠. 아직도 살아있군. 에린의 피 덕분인가.]

텔츠즈는 턱을 매만졌다. 좋으나 나쁘나 이런 귀찮고 복잡한 작전을 짜야 할 만큼 갑작스러운 개전(開戰)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 귀중한 전사 1명이 목숨을 잃은 뒤가 아니던가. 가능성은 낮지만 시험해 볼 만 했다.

텔츠즈는 눈을 빛내며 코난드를 움켜쥐고서, 검은 연기가 되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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