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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61화 (461/1,009)

“……교수 슬레이어?”

내 안에서 태어난 환상이자, 내가 품은 분노를 해방하라며 충동질하던 또다른 나였다.

물론 저 그림자가 정말로 실재하는 존재는 아니다.

저 하얀 불꽃의 정체는 구신의 마나였으며, 나는 그걸 쌓는 과정에서 승화하지 못한 분노를 저런 형태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저건 내가 가장 원하는 충동이 구현화된 나의 분신이었다.

스스스스……!!

내가 자아를 되찾자 나를 침식하던 어둠은 아쉬워하듯 꿈틀거리며 자리를 물러났다.

꿈과 현실의 구분은 아직도 되지 않는다.

내 시야에서는 이 풍경이 구릉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광경으로 보였다. 그런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세계에 교수 슬레이어는 하얗게 타오르며 언제까지고 서 있었다.

변화가 발생한 건 그때였다.

나는 교수 슬레이어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구신의 마나의 덩어리에 불과했을 존재가, 명백하게 자아를 가진 눈빛으로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아, 그래. 죽기 전의 주마등인지, 꿈인지. 그런 건가.”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입을 열 체력도 없는 내가 이렇게 말을 내뱉은 것도 생사의 경계에서 영면에 들기 직전인 거라면 설명이 될 것이었다.

“노르드.”

교수 슬레이어는 눈밖에 존재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만 쉬고 싶은 거라면…… 더 힘내달라고 말하지는 않을게.”

“이게 쉬고 싶어서 누워 있는 걸로 보이면 눈이 심각하게 삔 건데. 강제로 휴식 당하고 있는 걸로는 안 보이냐?”

“그렇게 보여. 하지만, 억지로 힘내려고 하지 않아도 돼. 네 의지를 억지로 북돋을 자격은 누구한테도 없는걸.”

“그것도 틀렸어. 나더러 힘내라고 채근해도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최소 4명 있걸랑.”

물론 거기에 이 녀석은 안 들어가지만 말이다.

나는 현실성이 없이 녹아드는 세계에서 의식을 부여잡았다.

상처는 메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타르과 살점이 융합해서 간신히 내장을 밀어넣고 겉에 랩을 씌운 것만 같았다. 아마 그 어둠이 침식하며 무언가를 시도하다 실패한 흔적이겠지.

잘 된 일이다.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터질 듯한 느낌인데, 그래도 이 꿈에서 깨면 움직일 순 있을 것이었다.

나는 스톤헨지에 기대서 물었다.

“……지구는 너희가 만든 거냐?”

“응.”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는 즉답이었다.

“정확하게는, 끝이 오기 전에 다른 녀석들과 힘을 합쳐서 땅과 물을 둥글게 빚어냈지.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서, 그걸 세계수의 뒷면에 곂치듯 포갰어.”

교수 슬레이어는 나무의 형상과 지구의 형상을 만들어서, 그 형상을 살포시 곂쳤다.

“말하자면 수면에 비친 달이지. 그래서 너희의 역사는 우리 세계의 역사와 많이 닮은 거야.”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해버리는 생명이니까?”

“이제는 신처럼 말하는구나. 비슷해. 우리가 창조한 인류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난 새로운 인류. 가장 완전무결한 혼돈의 총아…….”

그녀는 말하다 말고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나는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 언동을 보면 우리 세상과는 상당히 달라졌을 거야. 역사라는 건 반복되는 듯 하면서도 완전한 되풀이는 될 수 없거든.”

“지금 고고학자한테 역사를 설명하는 거냐?”

“아는 건 내가 너보다 더 많을 걸. 예를 들면 우라노스가 죽기 전에 남긴 소소한 안배가, 너희 세상에서 몇 세대나마 우리의 대타 노릇을 했을 거라든가?”

“아, 그 새끼들? 깽판만 오지게 치고 강간 신화를 쌓다가 갔어.”

“엣, 거짓말. 진짜? 그 노땅의 자식인데? 어쩌다?”

“모르지 나야.”

그리스 신화가 어디까지 진짜일지 알 게 뭔가.

지구에만 존재하는 신화 체계라는 게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지만, 지구로 돌아간 뒤에 우리 아내들한테 찝적대는 게 아니라면 알 바가 아니었다. 살아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나는 픽 웃고서 말했다.

“……지켜보고 있다더니, 이런 식이었냐?”

“우연이야. 우연. 꿈 속에서, 남의 존재를 빌려서밖에 나타날 수 없다고 했잖아. 네가 마침 이상한 분신을 만들어놨길래 이거 좋네 하고 들러붙은 거지. 덕분에 싸울 때 만이라도 옆에서 구경할 순 있어서 좋았지만.”

그래서 절대천공영역 같은 이름을 붙이셨다? 영화에 직접 난입하는 타입의 관객이시군 그래.

나는 웃음을 지우고 질문했다.

“그럼,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그것도 저번에 말한 얘기네. 내 본의는 아니었어. 두 세계가 이만큼 딱 붙어 있으면 우연히 연결되는 때가 있는 듯 하더라고. 저승과 이승도 연결되기 쉬워지는 날이 있는데, 같은 이승끼리야 뭐…… 막을 방법도 없지.”

“과연. 그만한 우연이면 운명이라고 해도 되겠군.”

“……그러니까, 포기한다면 말리지 않겠다고 말한 거야.”

교수 슬레이어는 미안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중간 가지】로 넘어와 버린 사람들에게 로두르의 축복이 내리기는 하지만, 그것도 개가 언젠가 세계수와 너희 세상이 연결될 때를 대비한 안배였어. 네가 여기 찾아온 건 솔직히 내 책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쓰읍……. 이거 지혜의 신이라는 분이 왜 이렇게 헛다리만 짚으실까 몰라.”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일어났다. 교수 슬레이어는 놀란 듯 후퇴하려다 발을 헛디뎠다.

“내 인생에 좆 같은 일이 많기는 했고, 이세계에 떨어진 게 그 중 하나였던 건 맞아.”

노예로 잡혀가서 랩실에서 고생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아니, 사실은 카르미네 대학을 나서며 무모한 포부를 갖고 맨땅에 해딩을 했을 때까지도 나는 이 세상이 좆 같았다.

논문을 빼앗기거나 하는 지옥체험도 결국 이세계에 왔기에 벌어진 일 아닌가.

계속 지구에서만 살았어 봐라. 그딴 고생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도이치 짝눈신이 어쩌니 하면서 좋게 좋게 불러줬던 적이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농담처럼 찡찡대던 무렵은 이제 끝났어. 나한테 이 세상은 여전히 좆 같고 짜증날 때가 있지만, 여기 오지 않았으면 아내들이랑 다른 사람들과도 만나지 못했을 거 아니냐.”

결과가 좋다고 의도가 용서받는 건 아니겠지만, 이 녀석의 말로는 지가 의도한 것도 아니라지 않은가.

그러니까 더 이상 원망하고 툴툴댈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야, 그런 건 꼴마초답지 않으니까.

“……그런 이유로 용서해 주는 거야? 마음이 넓구나.”

“용서 씩이나 할 게 있나. 마찬가지로 감사도 안 할 거야. 그냥 전부 우연일 뿐이었어. 내가 여기 온 것도, 무슨 거창한 수식어에 자꾸 휘말리는 것도, 너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만난 것도. 그냥 다 시시한 우연이었던 거지.”

나는 가볍게 윙크를 했다.

이 모든 사건의 흐름이 전부 다 우연의 산물이라면, 그녀한테는 충분한 공양이 될 것이었다.

운명으로 좆망한 자신의 후임이 우연으로 정해진다니, 그 무슨 유쾌한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녀도 내 뜻을 이해한 것일까. 한쪽 눈밖에 없는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전부 우연이라면 나도 감사할 것 없겠어.”

“거기서 쿨한 건 좀 추한데.”

“신학 공부를 덜 했구나? 난 원래 치졸한 신이야. 그래도 이렇게 대화할 기회는 얼마 없는데, 뭐라도 더 물어보지?”

“흠……. 그럼 아까 그건 뭐야? 거무죽죽한 그거.”

내 몸을 침식했던 어둠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조금 말을 고르다가 설명했다.

“관여하지 않는 게 제일이지만 그렇게 되지도 않겠네. 음…… 그게 말이야? 나는 분노의 신이고 지혜의 신이며, 마법의 신이면서 또 죽음과 폭풍의 신이였어. 그만큼 여러 신격을 가졌었지.”

그녀는 자신의 외안의 반대편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생전의 나는 단 한 순간도, ‘광기의 신’이던 적은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니, 또 수수께끼냐고. 시원하게 좀 말해주지.”

“너라면 알 거라고 생각해서. 앗? 생각해 보면 이 내용도 저번에 했던 말이네. 그때 나, ‘우리의 것이 아닌 광기에 지배당해선 안 돼’ 라고 힌트를 주지 않았었나?”

“했었지. 사실 이건 확인 절차야.”

“아항. 믿음직스러운 후임이로군. 그치만 가끔씩은 이렇게 싸우다가 드르렁 드러눕고 그래도 돼.”

그녀는 안대 쪽으로 마녀 모자를 눌러쓰며 속삭였다.

“너무 완벽한 후계자를 얻었다가 안심해서 성불해 버리면 나도 손해잖아? 그리고, 원래 여자를 홀리는 남자는 자고로 난폭한 맛이 좀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모자를 눌러쓴 그녀는 빛의 조각이 되서 흩어졌다.

“……아, 그러셔. 아무튼 뜬금없는 등장 고마웠다.”

사라질 때 하늘로 휙 날아가는 건 신들 사이의 유행일까. 나는 이제 올려다보는 것도 귀찮아져서, 고개를 정면에 두고 발을 내딛으면서 대답했다.

“덕분에 잠이 싹 다 달아났어, 오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어디까지가 꿈이었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을까.

흐릿했던 시야와 멈춘 듯한 시간 감각이 돌아왔을 때, 난 스톤헨지의 앞에 서서 구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호르샤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나보다는 네가 더 ‘짐승’으로 보이는군. 불사신이라도 되나?]

[울프헤딘이란 게 그런 놈인 모양이지. 너도 다시 트롤로 돌아가면 어떠냐?]

[농담거리도 안 되는 군. 죽었다 살아나도 말재간은 늘지 않는 모양이야.]

미동도 없는 반라의 전사에게 나는 비웃음을 날렸다.

[안타깝게도 유머는 선별 기준이 아닌 모양이더라고. 신을 만나지 못하는 놈은 싸움 중에 지는 게 무서워서 뒤로 빼는 찐따쉑 정도가 아닐까 하는데.]

[……재미있군. 확실히 여기서 비겁하게 이긴다고 해서, 내 망설임이 떨쳐지는 건 아니겠어.]

후두두둑─! 호르샤는 쿨하게 구릉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도중에 덤벼들어도 됐겠지만, 마초이즘을 보여준 놈을 상대로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호르샤의 몸에는 생채기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마나는 꽤 줄었지만 아까까지랑은 달리 나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 상태였기에 당당하게 내려왔다고 하면 좀 찌질해 보이지만.

─스윽.

나는 배를 감싸고 우반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팔은 샹크스 상태고, 창은 없다.

기교를 부려봤자 모든 부분에서 후달리는만큼 패배는 확연하다.

아까까지와 같은 방식이라면 말이다.

호르샤는 대검의 날에 가려지지 않은 눈썹을 꿈틀했다.

[후련해 보이는군. 생사를 헤매다가 미련이라도 버렸나?]

[호기심이 쌓이면 일이 손에 안 잡히는 타입이거든. 근데 이제 궁금하던 게 거의 다 풀렸어.]

어드밴스드 원숭이건, 신의 손이 닿지 않은 신인류건 같다.

카카로트건 손오공이건 같은 뜻 아니던가.

그러니까 혹시, 죄악으로 손을 더럽히지만 않으면── 저 교수들과 대학원생도 본질적으로 같을지도 모른다.

‘전혀 달라 보이지만, 모두 하나다.’

그 점은 마나도 마찬가지였다.

야수회귀도 【게르튀르】도 마법도 다 마나에서 시작해서 마나로 끝나지 않는가.

힌트는 이렇게나 많았다.

아마 진리라는 건 세상의 곳곳에서 자길 찾아주길 바라는 어린 아이처럼 숨어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자에겐 감사의 선물을 주는 모양이었다.

[스으으으으으…….]

나는 호흡을 폐부로 빨아들여 몸의 마나-카테터에 충분히 둘렀다.

야수회귀로, 【게르튀르】로 하던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그야말로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이다.

몸에 마나를 두르고, 뿜어내는 것.

그게 내가 무엇보다도 잘 하는 마나의 사용법이었으니까.

그렇게 깊은 호흡의 끝에 눈을 떴을 때.

[──변신.]

쿠위이이이이이잉──!!!

──내 몸을 찬란한 형광색 오러가 뒤덮었다.

망국의 유적을 덮은 심연을 형광색의 마나가 몰아낸다!

[이건……!! 네놈이 어떻게!!]

경악하는 호르샤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오러의 프레셔에 휘날렸다. 바닥을 보이던 내 마나통은 핵융합을 방불케 하며 명멸했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짧을 것이다.

상관없다.

승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줄었을 뿐이다.

나는 뇌성벽력처럼 고함을 터트렸다.

[오러권──!! 4배다──!!!!]

온몸에 거칠게 타오르는 오러를 감고, 나는 녹색의 유성이 되어 대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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