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에에에엥….”
하드보일드하게 어둠으로 걸어들어간 나는 정확히 5걸음이 되는 순간에 앞으로 나자빠졌다.
─퍽!
“씨뺘아앗!”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빠지자 진탕이 된 내장이 미치도록 아팠다.
“헉, 헉……. 유적이 우리 묘지가 되었다…….”
돌로 만든 단차에 박은 이마보다 배가 더 아팠다. 왼팔로 배를 안고 태아처럼 웅크렸다.
예전에 장염에 걸려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응급실에 실려가기 전까지 느꼈던 고통의 몇 제곱은 되는 것 같았다. 씨발 이러니까 내가 심폐정지술로 배빵을 놔 주면 다들 자지러지지.
아드레날린이 퇴근했는지 씨발 아프지도 않던 잘린 팔까지 뒤지게 아팠다. 사람은 한 번에 2가지 통증을 못 느낀다고들 하는데, 그건 존나 개구라였다. 팔도 아프고 배도 아프다.
이제 확신할 수 있다. 원피스는 조작되었다.
지 팔이 짤렸는데 사고뭉치 잼민이더러 ‘니가 안 다쳤으면 됐다’ 같은 소리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루피가 아니라 10년 후 나미가 상대여도 애미 씨발년아 소리가 턱까지 올라올 듯.
‘애미 터진 하이퍼 리얼리즘.’
깐지나게 엔딩을 쳤으면 슬레이트 딱 치고 편집해서 스탭 롤부터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후일담은 그 뒤에 장면을 전환해서 보여주면 되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그렇게만은 되지 않았다.
보스를 잡고 쿨하게 끝냈어도 이 코 앞 1미터도 보이지를 않는 땅 밑 도시에서 지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마나 한 줌 없이 내장 쉐이크에 팔 장애 상태인데 그게 되나?
거기다 짤린 팔까지 찾아야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고오오오오오옹……!!
존나 완전히 적막에 잠긴 어둠에서, 뒤쪽의 시쳇불만 의지하며 눈을 깜빡이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마나의 덩어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둠을 밝히지 않는 빛이라니 존나 신기했는데, 그건 마치 제 집으로 돌아오듯 내 몸으로 기어들어왔다.
‘아. 호르샤의 마나인가.’
아무래도 호르샤의 영혼이 사라지자 마나 계승이 발생한 듯 했다.
나는 늘어난 마나를 점검하려다가 좆도 의미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새롭게 룬을 습득해봤자 회복 효과를 가진 룬은 드물었고, 그걸 쓸 마나부터가 오링난 상황 아닌가! 이미 말했듯 마나 계승으로 마나통이 늘어나봤자 남은 마나가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짐승에게 안식을 준다나 뭐라나 했었지.’
나는 스톤헨지의 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마나를 흡수하는 상대는 구신의 마나를 쌓은 짐승들─편찬대대 관련자─, 그리고 일부 인간의 영혼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늑대인간이 된 타뷸라나 몸에 비늘이 자라났던 투스타스 상회장도 그쪽 부류였던 것이다.
‘인간에게서 마나를 흡수했던 건 중국산 야매 토르 새끼랑 유니콘 흑마법사가 골렘에 봉인한 영혼들 정도던가.’
아마 영혼을 원큐로 성불시키는 것도 거기에 관계가 있는 거겠지. 오딘은 죽음의 신이기도 하잖은가. 그 후계자로서의 서브 옵션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기능이기는 했다.
“후우…… 후우…….”
누워 있자 회복할 기미는 없고 식은땀만 기분 나쁠 정도로 났다. 겨울의 추위가 스며든 돌바닥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게 무모했던 것일까. 나는 이를 악물고 돌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빛이 없어서야 눈 뜬 리신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운 좋게 멀쩡한 매직 아이템을 찾아냈다. 셈무스 새끼가 주고 간 휴대용 매지컬 횃불이다.
“씨발. 이게 진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하긴 손전등은 사 두면 언제고 쓸 일이 있기는 한다니까. 나는 떨리는 입술로 픽 웃고서 빛을 켰다.
남은 마나는 불빛을 킬 정도도 못 됐지만, 다행이 랜턴은 충전식인 모양이었다. 셈무스가 채워둔 마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숨통이 트인 기분으로 정처없이 나아갔다.
크라피카 교수의 말에 따르면 미궁에서는 오른팔을 벽에다 대고 걸으면 언젠가는 출구에 도착할 수 있다는 모양인데, 이 거주구에 그 논문이 효과적이진 않을 것 같다.
‘넓이도 모르겠군. 괜히 헤매지 말고 얌전히 있을까?’
아내들의 구조, 베로니카와의 연락.
2개의 방법이 떠오르긴 했지만 둘 다 확신은 없었다. 베로니카랑 연락하는 게 제일 빠르고 확실하겠지만 잠들면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다.
얕은 수면으로는 셰이드의 꿈에 못 가고, 꿀잠을 잤다가는 베로니카랑 만나서 유언만 남기게 생겼다.
“씨발, 모르겠다. 일단 걷자.”
의식해서 중얼거리고 렛츠 워킹.
배의 통증을 손으로 누르려고 했더니 손이 하나라서 존나 곤란했다. 팔이 하나면 딸칠 때도 바쁘겠군.
다행히 막대형의 랜턴은 딱히 뜨겁지 않아서 입에 물었다. 조로보다는 샹크스가 입에 검을 무는 게 더 이치에 맞는 게 아닐까? 나는 잡생각에 몰두하며 직선으로 이동했다.
더운 것보단 낫지만 추위도 좋지 않다.
몸이 노곤하고 피가 모자라자 무슨 심해를 걷는 잠수부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건물이 폐가처럼 흉흉한, 심해인들의 비키니 시티!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추위와 고요함 뿐이었다. 랜턴의 불빛이 닿지 않은 높은 어둠에서는 당장 태산만한 스폰지밥이 게살버거 뒤집개를 뻗어올 것만 같았다.
아마 저 골목길에선 보이지 않는 유령보트를 탄 어인맨과 조개소년이 수백 년 만에 뺑소니로 사람을 사살하는 손맛을 즐기고자 스탠바이 하고 있겠지.
나는 우주선에서 스카이 콩콩을 타다가 튕겨나온 우주원과 같은 기분으로 턱의 땀을 닦았다.
…욱씬.
얼려서 괴사시킨 팔이 녹아내렸는데 통증은 희미해져갔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를 만큼 이동했을 때였다.
난 한참 먼 곳에서 어둠에 잠긴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서, 처음엔 벽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저 벽 어딘가에 계단 입구 같은 게 있을 것이라고, 거기로 가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고오오오오.
그래서 그 거대한 ‘벽’이 시큰둥한 느낌으로 이쪽을 돌아본 순간에도, ‘개꿈이네’ 하고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단적으로 잘라 말하면, 그 벽의 정체는 표피에 서리가 낀 물의 거인이었다.
거인의 피부에는 러시아 인들이 빙어 낚시를 하다 빠질 만큼 얇은 성에가 껴 있었는데, 그 덩치가 얼마나 큰지 바다를 퍼 올린 것처럼 안에 독자적인 생태계까지 있었다.
눈으로는 신장을 추측하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생물이다. 하지만 서리가 낀 물 속을 돌아다닌다니, 저 물고기들도 존나 근성 있는 새끼들이로군.
“어머 씨발 애미 씨발. 존나 놀랐잖니.”
아마 또 눈 뜨고 꿈을 꾸는 모양이다.
나는 내가 상당히 오락가락 하는 상태라는 걸 눈치깠다. 의식이 흐릿해져서 죽으나 사나 하니까 선 채로 꿈이라도 보는 거겠지. 육체의 나약함이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것이었다.
거인은 헤어진 전 남친이 집앞까지 찾아온 여고생처럼 팍 기분이 상한 투로 말했다.
【왜 왔나, 오딘. 남은 눈을 바쳐도 지금보다 더한 지혜는 줄 수 없다.】
예민한 말투랑에 비하면 존나 현명함이 충만한 미성이다. 사기꾼이나 선동자로 활동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종교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중후한 보이스로군.
【알아. 그토록 매몰차게 거절당해 놓고 벌써 잊었겠어? 내가 집에 돌아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들으면 놀랄 걸.】
─통.
‘나’는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어느덧 깨닫고 보자, 이곳은 청명한 하늘색 빛이 뿜어지는 어떠한 수면의 위였다. 씨발 또 이런 식이네. 이젠 꿈 꾸는 게 귀찮아질 것 같다. 자각몽도 통제가 안 되면 좋은 것만은 아니로군.
【염치를 불구하고, 헤어질 때의 제안을 다시금 하러 왔어. 미미르. 네가 아스가르드로 와 줬으면 해.】
【용작(傭作)이라면 거부하겠다. 네 곁에는 이미 회니르가 있을 터. 조언자를 둘이나 필요로 하는 일인가?】
【……응.】
‘나’, 그러니까 오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왠지 내가 만났던 자유분방한 탐구자답지 않은 면모였다.
【……무슨 일이 있었군. 운명을 엿보았나?】
거인도 그런 분위기를 느낀 듯 몸을 낮췄다.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거구가 표범처럼 준민하게 움직이자, 마치 63빌딩이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물어오는 것만 같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어. 세계는…… 정말 넓더라.】
‘나’는 거기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그 거구에서 나오는 위압감보다는 책망하는 눈빛에 더 면목이 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미미르라고 불린 서리 낀 물의 거인은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몸을 펴며 탄식했다.
【진리를 구도하는 것은 창칼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예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좋으나, 갈음질이 지나쳐서는 부러질 뿐이라고 충고했건만…….】
【……미안해.】
【사과는 됐다. 나의 우물을 찾은 것이다. 너와 너의 벗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겠지.】
【……응, 그것도 맞아.】
【그럼 좋다. 허언이라면 내가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다. 네 영지로 가지. 이야기는 가면서 듣겠다.】
쿠오오오오오…….
거인이 수면을 딛고 일어서자 그의 가벼운 동작에 휘말린 물보라가 쓰나미처럼 거칠게 일어났다.
날뛰는 수류는 ‘나’에게도 쏟아졌지만, 물보라는 시원찮게 주눅든 여신을 두려워하듯 그녀를 피해갔다. 옷자락에도 닿지 않았다.
거인은 원근감이 이상해질 정도로 긴 팔을 뻗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뻗어나와 물 웅덩이를 들이마시던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그 손에 붙잡혔다.
【하품하는 심연(Ginnungagap)을 넘는 건 오랜만이군. 잘 되지 않는다면 네가 도와라.】
【아니야. 더 이상 그쪽으로는 가면 안 돼.】
【뭐라?】
뭐든지 알고 있을 듯한 거인이 처음으로 당혹한 듯 묻자, ‘나’는 어둠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혼돈의 골에서는, 해신(海神)이 보고 있을 거야.】
2명의 신들이 함께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별의 바다는 두 신들보다 광활한 덩치로 만물을 굽어보듯 반짝거리는 듯 했다.
‘……엥?’
아니, 아니었다.
진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수면보다 더 존귀해 보이는 물방울이 내 빰에 떨어졌다. 뿔이 솟은 작은 머리카락과 도도한 눈매가 눈물을 쏟아내며 쓰러진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 우리 여신님은 우는 얼굴도 예쁘네.’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헤 웃다가,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혼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