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루라의 신명난 칼춤 한 사위(물리. 아프다)에 후드러지도록 쳐맞은 나는, 정갈한 복장을 입고 카페를 소환했다.
웃으며 빡친 후배님을 달래고자 달다구리한 디저트로 한 상 거하게 차려놓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커피를 아이스크림에 싸서 드셔보세용.”
“정말 맛있겠네요☆ 그런데 선배랑 언니는 왜 안 드세요? 저희가 기다리는 동안 실컷 드시고 질리셨나요♡?”
“죄송합니다먹을게요.”
“와! 사실 너무 먹고 싶었어!”
우리는 허겁지겁 인절미 빙수를 한 그릇씩 퍼먹으며 빠른 복종심을 드러냈다. 부끄러운 어른의 한심한 작태였다.
‘이게…… 어른……?’
사는 게 수치다. 그야말로 반면교사 그 자체.
─합.
그런 우리를 뚱하게 쳐다보던 라리루라는 호텔 레스토랑의 고오급 아포카토를 재현한 일품 메뉴를 한 입 먹고는 두 눈이 동그래졌다. 시발, 해치웠나?
“……엄청 맛있네요. 언니들이랑 건빵에 물 말아먹으면서 바쁘게 일하다 와서 그런가?”
“케흑.”
일상복으로 돌아온 다나는 사레에 들렸고, 나는 묵언수행을 하듯 빙수를 숟가락으로 후벼팠다. 숟가락 살인마 노르드다.
라리루라는 그런 우리를 뚱하게 쳐다보다가 생긋 웃었다.
“가시 돋힌 말은 이쯤 할게요. 저는 착한 후배니까요☆!”
“용서해줘서 고맙읍니다.”
“딱히 용서한 건 아닌데요?”
라리루라는 표정을 싹 지우며 말했고, 그래서 나는 잔혹한 인절미 빙수 살해자로 돌아왔다.
연하의 아내의 차가운 시선이 두려운 자도, 빙수를 해치울 때만은 그 두려움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선배랑 다나 언니가 기절한지 5~6시간 정도 지났어요.”
라리루라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커피에 휘저으며 말했다. 지금 ‘그거 그냥 떠먹는 게 더 맛있을 텐데’ 같은 꼰대질이나 했다간 두들겨 맞겠지?
“알윈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난장판도 대충 수습이 됐구요.”
“……피해 상황은 어때?”
“사상자는 있지만 치명적이진 않은 것 같아요. 전투가 꽤 짧게 끝났다고 하네요.”
마치 전달받은 말을 떠올리려는 듯 라리루라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음…… 싸우던 중에 갑자기 지휘계통이 엉망이 된 것처럼 보였다고 해요. 그래서 다나 언니네 어머니가 대표로 적군의 총사령관? 을 급습해서 해치웠다는 주장이 통했구요.”
“증거랄 게 별로 없었을 텐데 용케 믿어줬네.”
“뭔가 연루된 사건이 있었나 봐요. 영주네 형이 혼자 도망치려고 마부나 경비대원을 여럿 죽이고 성문에 치명적인 틈을 만들었다던데요? 배신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구요.”
“벤자민 얘기?”
“앗,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라리루라는 그렇게 듣기 좋은 목소리로 전후사정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벤자민은 증거가 많아서 빼박 전시 탈영.
그것도 영지의 승패도 도외시하고 후문을 열어젖히고, 그 방향으로 무장 상태가 좋은 몬스터들이 습격해 왔기에 혹시 자기 목숨을 대가로 이적행위를 벌였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원래 영주로서도 딱히 챙겨주고 싶은 형은 아니었겠지.
그래서일까. 적 마법사에게 마차 째로 웰-던이 돼 버린 건 넘어간 모양이다. 소문을 퍼트릴 만한 일도 아니니까 이대로 ‘전사’라고 짧게 퉁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댄다.
“그래서 리루어쩌구 하는 이상한 이름의 귀여운 여자애가 전투를 앞두고 뒤로 돌아간 것도 죄로 삼지는 않겠대요.”
“니 예명이랑 큰 차이는 없는 것 같…… 죄송합니다. 머리 박겠습니다.”
잠깐 속내를 토로하다가 아가리를 쌉치자 라리루라는 몇 대 더 때릴 걸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말했다.
“다나 언니네 어머니가 절묘한 핑계를 댔거든요.”
라리루라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1. 도주하는 벤자민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듣고 설마 하는 마음에 돌아가 봤더니 성문이 박살났더라.
2. 호위로 같이 갔던 우리 가족+리루아가 기습을 저지하고 윙글링 인을 호출했다.
3. 그대로 적 정예병을 저지하면서 그대로 트롤 주술사를 추격하고 모가지를 따버렸다.
4. 적의 군세는 그 주술사가 주술로 조종하고 있던 거라, 그 놈이 뒈지자 전선이 와해된 것이다.
5. 그니까 우린 탈영한 거 아님. 오히려 갱킹 존나 잘 한 것. 지분율 인정합니까?
6. 그래서 우리 포상 어디? 일단 내 자식이랑 사위 힐부터 걸어 주싈?
“그치만 트롤 킹에 관한 얘기는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냥 제자였던 사람이 해치운 트롤이 진짜 트롤 킹이었던 걸로 넘어가게 됐대요.”
라리루라는 목이 말랐는지 옆에 있던 딸기 쉐이크를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마셨다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밝게 웃는 걸 보면 역시 맘에 드는가 보군. 핑크색이라 바로 집어들 줄 알았지.
“그 트롤 킹을 잡았다는 사람들은 전부 죽었으니까, 저희 공적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고 하시더라구요. 저야 잘 모르겠어서 말씀하신대로 전해드리는 거지만요.”
“장모님이 잘 생각하셨네. 너도 남 일인데 용케 전부 이해하고 와 줘서 고맙고.”
“남 일은요. 현장에 없었다 뿐이지, 선배나 언니들이 얽힌 일은 제 일인걸요?”
라리루라는 약간 낯뜨거운 듯 헤실거렸다.
이렇게 착할 수가. 나는 감동과 죄책감에 흙탕물이 돼 버린 인절미 빙수를 마녀가 가마솥을 휘젓듯 저었다. 육체적인 폭력보다도 이런 정신 공격이 더 마음이 아프군.
“아무튼 그래서, 선배랑 언니가 일어날 때까지는 당분간은 대기 상태네요☆!”
“우리만 일어나면 돼?”
다나가 묻자 라리루라는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럴 걸요? 티르시 언니는 일도 내팽개치고 왔는데 자기 걱정은 안 하고 울고만 계시던데, 돌아가면 선배는 잘 지내고 계시더라고 전해드릴게요♡?”
“오히려 내가 1달 쯤 안 일어나면 화도 가라앉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빡침을 덮어버리는 것이지.”
“제가 매일밤 선배 위에서 으쌰으쌰해서 꿈에 난입해버릴 거에요?”
“면간 멈춰~!”
존나 그거 성폭력 아니냐?
하긴 남말할 처지가 아니긴 하군.
“그러니까 베로니카 언니가 만약 셰이드의 꿈? 이라는 걸 꾸고 계시면 멈추라고 하셨어요.”
할 말이 거의 끝난 걸까. 라리루라는 약간 아쉬운 것처럼 디저트를 한 입씩 맛봤다. 나중에 얘도 여기 데려와야 하나. 한 명씩 번걸아가면서 데려오던가 하는 게 낫나?
“한 번 들어가면 의식의 유지 시간이 끝나도 계속 꿈속에 있을 수는 있는데, 심력을 낭비하면 현실의 회복이 늦어진다시네요. 아, 선배 팔은 주워서 썩지 않게 마법을 걸어달라고 마법사 길드에 맡겼어요.”
“알았어. 후딱 일어날게.”
현실의 우리 몸은 기절한 상황이다. 잠깐 눈 감았다 뜨면 깨어날 텐데 기다리는 사람들을 냅두고 놀 수도 없지 않은가.
“아, 그러면 라리루라. 베로니카나 우리 엄마한테 내 말 좀 전해줄래?”
다나도 설마 딴짓하다가 들킨 상황에서 싫다는 소리는 못 하겠는지,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 말했다.
“우리가 갔던 트롤 킹의 은신처는 계속 숨겨 줘. 안쪽에 큰 유적이 있으니까 거길 뒤져볼 건데, 유출되면 귀찮아지잖아. 이 멍청이 팔 짤린 거 붙이는데 돈도 들 거고.”
“………………아…… 네….”
내 귓볼을 잡아당기면서 말하는 다나. 그런데 라리루라는 몇 박자 늦게 멍하니 대답했다.
그 크게 뜨인 눈은 다나의 왼손에 가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기에 낀 결혼 반지에 말이다.
“……아, 이거? 아니 그게 있지~? 나는 딱히 서두를 건 없다고 그랬는데, 얘가 꿈에서라도 좋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주고 싶다고 하도 보채는 거야.”
다나도 그걸 깨달은 걸까. 손가락에 낀 미스릴 반지는 샐쭉 웃으며 쓰다듬었다.
아니 씹, 자기가 재촉해 놓고 뻔뻔하게 구는 것 보게? 내 눈빛을 씹으며 다나는 느긋하게 턱을 괬따.
“현실에서도 실물도 거의 완성됐다니까 그냥 받기로 했어. 그래도 어차피 볼 장도 다 본 사이에 반지 하나 갖고 그렇게 연연할 건 없지 않아? 그치?”
“네덕식 기만 무엇.”
할 거면 혼자 했으면 좋겠다. 정면에서 도발 커맨드를 연발하는데 왜 나까지 스플 범위에 휘말리는 것이지.
“……………….”
그렇게 나는 부들부들 떠는 라리루라의 어깨를 발견하고 빡 긴장했는데, 그 녀석은 홱 일어서서는 울음을 터트렸다.
“선배 나빴어! 흐앙──!!”
눈물을 터트린 라리루라는 그렇게 카페에서 뛰쳐나갔다.
아마 저 상태로 현실에서 깨어나겠지. 삐진 걸 달래려면 또 한참을 걸릴 듯한 예감에 눈앞이 아찔했다.
“아니 이 누나야. 남편 엿 먹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음?”
“니가 먼저 이상한 짓으로 실컷 골려먹었잖아. 제 값을 치뤘다고 생각하셔.”
다나는 내가 째려봐도 킥킥 웃으며 자기 반지를 만졌다.
“깨어나면 이 반지랑도 잠깐 작별이네. 괜히 아쉽게.”
“가능한 빨리 갖다줄 테니까 아쉬워 마시고요. 라리루라를 달랠 멘트나 같이 생각해 주시죠?”
“푸흐흐흐. 베로니카 걱정은 안 되나 보네? 베로니카한테 일러바쳐야지~.”
“아니 차도살인지계 뭐냐고. 남편 집 못 돌아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밤에 내 방 창문 열어둘게. 거기로 들어와. 어때? 존나게 고맙지?”
“야발련아.”
제대로 보복당한 나는 부아가 치민 나머지 뺨이라도 잡아당겨 보고자 손을 홱 뻗었지만, 다나는 그마저도 잽싸게 피하고서는 혀를 내밀었다.
“먼저 깨 있을게! 아마 내가 너보단 일찍 일어날 테니까, 넌 일어나서 내가 조사한 고대문자를 해석할 준비나 하셔!”
“마!! 니 이리 안 오나!!”
“응~ 늦었어~.”
다나는 그딴 소리를 들고 퍽이나 멈추겠다는 듯 깔깔대며 내 시야에서 도망쳤다.
아마도 현실 쪽에서 혼절한 상태로 돌아가겠지. 이제 몸의 피로가 풀리는대로 일어날 거고, 그러면 나보다 먼저 깨어나 유적 탐사를 간소하게라도 진행시켜 둘 것이다. 자동사냥 모드다.
“쓰벌.”
순식간에 혼자가 된 나는 괜히 흙탕물처럼 변한 빙수를 더 괴롭히다가 일어났다. 나도 일어날 채비나 해야겠다.
─우뚝.
그렇게 나는 어딘가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하는 익숙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등을 돌리고 나서려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흔한 인테리어다.
“……음.”
하지만.
이렇게 보면 조금 믿겨지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오감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는 꿈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나?’
여기서 맞는다고 현실의 내가 다치지는 않겠지만, 만약 이 꿈에 존재하는 나의 의식이 ‘영혼’ 같은 거라면── 여기서 휙 뒤져버리면 현실의 나는 식물인간이나 껍데기 뿐인 몸이 되는 건 아닐까.
의식이 없는 상태로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면 그건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키잉!
나는 오딘의 눈을 켰다.
꿈 속의 광경은 마법적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발동한 눈을 끄지 않고 매만졌다.
‘……호접지몽이라고 하던가.’
이 눈을 얻은 건, 내가 평소와 어딘가 달랐던 셰이드의 꿈 속에서 외눈의 노마법사를 해치운 뒤였다.
오딘과는 반대쪽에 안대를 찼던 노인.
그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나를 죽이려 했을까.
그리고, 만약 내가 그때 그놈에게 당했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딘에게 물어볼 걸 그랬군.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어.’
나는 원래 건망증이 심한 인간이다.
괜히 내가 노트에 뭘 적고 다니고, 사람 이름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바쁜 와중에 이런 것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건, 아쉽기는 해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혼자가 된 순간, 꿈은 자신의 추억을 반추할 뿐인 공간이 된다.
생각이 깊어졌다. 라그나로크라는 역사의 진실을 들은 순간부터 의문으로 생각하던 ‘어떤 모순’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 의문의 답과 오딘의 기억을 짜맞추면 어떤 가설이 세워지긴 하지만, 딱히 긍정적인 예상은 아니었다.
“……뭐, 됐나.”
신들의 역사.
회니르가 타락한 이유.
〈편찬대대〉와 〈인신〉의 목적.
그것들은 모두 이세계의 비사(秘史)에 해답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언젠간 알게 되겠지.’
세상에 밝혀지지 않는 비밀은 없으니까.
호르샤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쿵.
혼자서 고민하던 나는 오딘의 눈을 끄고 침대를 하나 소환했다.
그리고 그 위에 벌러덩 나자빠졌다.
“드르렁-.”
얼리버드 수면.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