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사르가디스에 도착한 나는 집에 들리지도 않고 가장 먼저 연구소를 찾았다.
등짝에 커다란 도끼를 매고 달려온 미친 놈의 등장에 요란법석을 떨어대던 연구원들은 내가 트롤 놈이 쓰던 쌍도끼와 다나의 자필편지를 보여주자 후끈 달아올랐다.
“발견된 적이 없는 유적이요?”
“출장! 발령 후 첫 출장이다!”
“끼에에에에엑!!!”
자타공인 월급 루팡인 그들도 실적 = 내년 월급의 상승 = 보너스까지 겹쳐지자 의욕을 드러냈다.
하긴, 출장이 싫으면 보통 고고학자 같은 거 못 하지.
“최소 1달 이상의 장기 외근이 될 겁니다. 가족 분들께도 말을 전할 시간은 드리겠습니다. 단, 바로 내일 출발할 예정이므로 곤란하신 분은 지금──”
“곤란할 사람 없습니다! 그렇지?!”
“그냥 지금 바로 출발하면 안 돼요?”
“……저도 일정이 있어서요. 하하.”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누가 여러분 실적 안 뺏어갑니다.
다나가 맡은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부랴부랴 연구 중이었던 물건을 정리하네, 이거 보관이나 도둑질 대비가 어쩌네, 내일 출발할 여정에 모험가 팀을 불러야겠네, 하면서 법석을 떨어댔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서 몰래 빠져나왔다.
“꽤나 열정이 있어 보이는군. 정말로 게으른 학자들 맞나?”
짝팔맨 샹크스의 호위 겸 텔레포트 머신으로 온 우리 여신님은 따분하게 기다리다가 픽 웃었다.
“게으름이란 상대적인 거지. 좋아하는 일에까지 게으름을 부리는 사람은 진짜 드물 걸.”
저들이 좋아하는 게 연구가 아니라 실적이라는 건 학계의 입장에서는 웃기 힘들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입신양명을 위한 직업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나는 팔을 돌리며 물었다.
“다음에는 마법사 길드에 들르죠.”
“으윽.”
말을 건 대상은 같이 온 마지막 일행인 티르시였다.
사실 오늘 아침부터 어색한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의식해서 말을 걸고 있는 나였다. 솔직히 미녀에게 대딸까지 받은 사내놈이 그걸 싫다고는 말 못하는 것도 팩트 아닌가.
우리 마법사님께 날 의식해서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된다고 어필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흐으…… 길드에 가는 건 조금 나중이어도 되는데요…….”
노력한 보람은 있어서, 티르시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일은 없었다. 티르시는 무단 결석의 연속에 돌아가기가 싫은 듯 떨기 시작했다. 괜히 나까지 미안해지는군.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어제의 일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한 태도도 별로 좋지는 않다.
서로 의식하되, 뻘쭘하지 않게.
이 미묘한 거리 조절의 어려움이란. 말하면 입만 아프다.
‘근데 잘못해 놓고 사과를 늦장부리는 게 더 안 좋지 않나?’
군바리 시절에서 휴가 중의 보고를 개판으로 하는 병사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면, ‘진작 돌아왔는데 딴짓을 하다 왔다’는 평가는 피하는 게 제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티르시가 싫다는데 ‘햣하! 무단결근한 출근충 놈! 인실좆 맛 좀 쬐끔만 봐라!’하면서 끌고가는 건 나 같은 퓨어하고도 다정한 마음씨의 소유자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단 클라라의 대장간에 먼저 들렀고.
“어멋 시발.”
영업 시간을 한참 넘었는데도 문을 닫은 가게를 보고 그만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이게 머선…… 머선 일이고?”
“흠. 일시 휴업인가 보군.”
한순간 ‘장사가 안 되서 기어이 망해부럿어야? 근데 그럼 내 반지는?’ 하고 스턴 상태에 빠졌던 나를 대신하여, 베로니카가 문짝에 걸린 판떼기를 읽었다.
일시 휴업? 한겨울에도 일하던 아줌마가?
베로니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판떼기를 잡고 읽었다.
“어디 보자…… ‘대장장이 길드에서 업무 지원 요청이 온 탓에 며칠간 자리를 비웁니다. 당 대장간에 용무가 있으신 분들은 길드로 찾아와 주신다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라는군.”
“개인 영세업자까지 동원한다고? 먼 일 났나?”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금속 마스터 클라라 아지매는 금속 외의 대장장이 아이템을 만지면 두드러기가 나는 중증의 철충이시다. 그리고 그런 클라라가 일감을 수락했다는 건 야금 쪽 일이라는 거겠고.
하지만 여기서 주지의 사실 한 가지.
‘이세계에서 금속류는 마나를 품은 희귀금속을 빼면 취급이 좋지 않은데?’
아무리 일대 장인이라도 도장 파 주는 가게의 주인을 부를 만한 일은 없지 않을까.
왠만하면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할 것이다. 진짜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박박 긁어모아야 할 정도로 급하고 양 많은 일감이라도 온 걸까? 초봄에 어디서 그럴 일이 생겼담.
나는 그쯤에서 생각하길 때려쳤다.
“잘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나갈 만큼 바쁜 일이라면, 지금 찾아가 봤자 기다려야 하겠군요. 클라라 씨한텐 점심 무렵에 간다고 치고…… 흠. 죄송하게 됐습니다, 티르시.”
“에헤, 헤헤헤헤…….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안……”
잠시라도 무단결근의 뒷감당을 미루려던 티르시는 현실이 직접 자기 쪽으로 달려오자 멘탈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럽고 미안하지만, 도망쳐서 도달한 곳에 파라다이스는 없는 법. 그렇게 나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낯빛의 티르시와 베로니카를 데리고 마법사 길드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지부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단지 여기서도 사람들은 우리 파티를 가만히 두지 않으니, 이 어찌 세상 민심의 각박해지기 그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하여튼 시발 이 놈의 이세계는 정이 없어요, 정이.
나는 꺼벙해졌던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지부장 말씀이십니까? 크롬웰 씨가 아니라?”
“예.”
“……티르시도 같이 오라고 하셨구요?”
“예.”
안내원 씨의 단답은 ‘미안한데 나한테 묻지 마쇼’ 하는 느낌이었다.
그건 그녀가 태만하다기보다는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인상이 컸다.
말하자면, 거의 만난 적도 없어서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는 상사랑 얽히기는 곤란하다는 느낌.
그나저나 지부장이라니. 나는 조금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마법사 길드의 대표로 대외활동을 하는 인물은 ‘소서러’라는 직책을 가진 회색 머리카락의 마법사, 버즈루드 크롬웰이다. 지부장이라는 작자는 어떤 사람인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저번에 〈동물 회화〉 마법을 구할 때 처음 ‘바빠서 따로 부르기는 힘들다’는 투의 얘기를 들어본 게 전부 아닌가?
“그, 지부장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도 먼 발치에서 뵌 적이 있는 정도라서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인지 신경이 쓰여서 물어봤지만 이번에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게 전부였다.
하긴, 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도 카르미네 대학 시절에 느그 학장은 뭐하는 양반이냐 하고 물어봤으면 몰라레후로 일관했을 것이니까. 이건 이 안내원의 잘못이 아니었다.
─덜덜덜덜덜덜.
그리고 티르시는 이제 빤스만 입고 사자 우리에 던져진 검투사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어디 구멍가게 같은 한적한 지부에 발령나서 평생 동네 할배할매들 무좀약 포션이나 만들며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느낌이다. 그럴 만한 상황이긴 하다.
“어서 오십시오. 저번에 뵙고 또 뵙는군요.”
안내받은 곳으로 들어가자 크롬웰이 번듯하게 차려입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 긴장감은 빡 치솟았는데, 왜냐하면 인생 시발 뭐 있냐는 듯 매일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던 양반이 돈 좀 쓴 듯한 로브를 챙겨입고 있어서였다.
그것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의자 뒤쪽에 서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즉, 여긴 공적인 자리라는 뜻이다.
나는 으리으리한 상석을 곁눈질로 보았다.
‘2개?’
일단 의자 하나는 지부장 몫이겠지.
‘그러면 다른 하나는 누구 몫이지?’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최근 들어서 뭐 잘한 게 있던 것도 아니잖은가. 알윈에서의 일대 사건도 내가 기절한 동안 아내들이 훈장이며 뭐며 대충 챙길 건 챙겼다고 들었다. 얘네가 챙겨줄 일도 아니고 말이다.
‘결정적인 건 크롬웰이 서 있는 방향의 의자가 상대적으로 검소하다는 거야.’
다시 말하자면, 이건 지부장 이상으로 권위를 가진 귀빈이 찾아온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게 귀빈이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부장의 개인적인 성품이 어쨌건, 마법사 길드의 위신도 있다. 그런데 외국인 출신 모험가를 상석에 앉히고 모신다? 흠, 글쎄? 솔직히 킹능성은 낮은 편 아닌가?
말이 안 되진 않겠지만 솔직히 내가 스펙에 비해 사회적인 명성은 낮은 편이니까.
“어깨의 그건 〈동물 회화〉 마법으로 사귄 사역마십니까?”
다행히 나를 사회적으로 처형하고자 부른 건 아닌지, 나의 어깨를 가리키며 친근하게 묻는 크롬웰이었다.
참고로 그가 가리킨 ‘그거’란 새로 변신한 베로니카다.
신분증이 없다는 문제가 여기까지 트롤링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웃는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맛 시발 조땠네.’
크롬웰이나 지부장이라는 놈한테 들키는 건 아니겠지?
옘병. 나라고 설마 티르시를 배웅해 주고 아이템 몇 개 사려고 온 길드에서 크롬웰이나 그 윗선의 마법사랑 쌰바쌰바 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심장 쫄리게시리.
“흐흐, 예. 뭐 비슷합니다. 애완동물 같은 놈이죠. 얼마나 새침하고 귀여운지 모릅니다.”
“하하하! 그래 보이는군요. 저도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어…… 크흠, 네. 죄송합니다.”
어딜 혼란을 틈타서 남의 아내를 성희롱하려고. 팍 씨.
다행히 눈치 못 챈 모양이니까 봐 준다. 알고 그러는 거였으면 야매 드루이드의 힘을 풀발(풀로 발휘)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뻔 했자너.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지부장님께서도 마침 계시니 직접 들으시는 편이 빠를 듯 하군요. 오늘은 저도 비서 신분으로 온 터라.”
시발 귀띔이라도 주지.
아니, 아닌가? 큰 일이라면 진짜 귀띔을 먼저 줬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예 손절각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큰 건일 수도 있지만, 그만한 일에 얽힐 가능성은 없을 것 같고.
─똑똑.
엘리트 대갈통으로 생각하고 있자 누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겠나.”
“예. 노르드 씨도 오셨습니다.”
크롬웰의 대답에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목소리에 앉지도 못한 채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는데, 그렇게 등장한 사람은 나도 안면이 있는 엘프였다.
“호툴루실 씨?”
“오랜만이군. 결혼식에는 못 가서 미안했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엘프는 실내인데도 실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조씨도 일 때문에 불려왔어요?’ 하고 물을 뻔 했는데, 천만다행히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건 내 시선이 그의 가려진 변발을 확인한 뒤에 복색을 둘러봤기 때문이었다.
‘뎃?’
흰색 천을 까리하게 장식한 로브였다. 누가 봐도 마법사라는 느낌이 들면서, 쉽게 더러워질 듯한 옷이다.
이세계에서 더러워지기 쉬운 옷은 자기 권위를 암시하는 색 중 하나다. 세탁을 맡길 사람이 있다거나 마법 등으로 후딱 해치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입는 경향이 은근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물이 튈 것 같아서 라면도 맘 놓고 못 먹을 듯한, 고급진 느낌의 하얀색 로브라니?
티르시처럼 저가형 로브라면 몰라도, 조금 땅 많은 농부한테는 잘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그리고 그가 자연스럽게 크롬웰이 서 있는 자리에 가 갖고 착석했을 때, 나는 앞으로는 처음 보는 이세계인은 다짜고짜 신분부터 의심해야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긴 했다.
호툴루실은 엘프다.
나이도 많아 보이니 저 넓은 농경지의 경작을 혼자 커버칠 정도의 실력이 있는 마법사인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세상 농부들이 마법 하나로 농업의 비료나 해충을 전부 해결해 버리면, 티르시와 같은 포션 연금술사는 어따가 포션을 팔아먹겠는가.
아직 내 기억에는 농경지에 지력을 회복하는 마법을 비처럼 뿌려대던 그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리고 그만큼 실력이 있는 엘프 마법사가 사르가디스처럼 애매한 곳에 정착했다는 건, 아무 이유 없이는 좀 어색하다.
능력이 되면 돈을 더 들여서 사람을 고용하고 훨씬 큰 농경지를 경작할 수도 있겠지. 잘난 사장 혼자서 원맨쇼를 하는 기업보다는 부하 직원이 많은 기업이 더 상장하기 쉬운 법이 아니던가.
정말 농사를 취미로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호툴루실은 사르가디스에 남아 있을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정답은 양쪽 다.
내게 〈구름 소환〉 마법을 줬을 때 말했듯이 농사는 그의 취미이고, 사르가디스에 사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유니콘 흑마법사의 토벌에 나서지 않은 건, 영지와 농지의 방어를 위해서였을까. 하긴 모든 전력을 도시 밖으로 유출시키는 것도 못할 짓이긴 했다.
“마법사 길드 사르가디스 지부장, 호툴루실 차르테진이다.”
모자를 벗어서 빛나리 대가리를 드러낸 호툴루실은 시크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쁘군. 아직도 농사엔 흥미 없나?”
“하, 하하…… 그렇죠 뭐.”
나는 혼란을 수습하면서, 그가 대충 가리키는대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티르시는 나는 어쩌지 하는 느낌으로 우물쭈물하다가 호툴루실이 눈썹을 슥 들자 얼른 착석했다. 전직 귀족의 권위는 어디에도 없군. 은근 귀여운 사람이야.
“으음……. 저는 여기 앉으면 되나요?”
그때였다. 호툴루실이 열고 들어온 문을 닫으면서, 심약해 보이면서도 편집증적인 느낌이 드는…… 까놓고 말하자면 방 안에서 악보를 쓰는 게 어울리는 음악사 같은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평범한 복색을 한 그는 대충 2~30대로 보였다. 현대에서 봤다면 예술에 심취한 아르바이터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호툴루실의 의자보다 더 삐까하며 뻔쩍한 의자에 앉으며 나를 들여다봤을 때, 나는 저 변발 엘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진심으로 감사해야만 했다.
만약 호툴루실이 한 발 앞서 등장해서 내게 표정근을 다잡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헤 벌린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을지도 모르니까.
“아, 저도 소개를 해야죠.”
물감 냄새가 나면 무척 어울릴 듯한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했다.
“조지 그라나다 어니스트 브리타니아입니다. 조지라고 불러주세요.”
애미 씨발. 왕자님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