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바보 같은 소리들을 하는군!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
꼰대 아재가 더듬거리면서 와이번의 혓바닥에서 도망치고, 편지를 갖다준 쿠팡-와이던 라이더가 떠나가자 우리는 얼마 안 남은 점심 시간 동안 간단하게 쇼부를 봤다.
“술식은 적어드릴게요. 후원해주시는 분의 시범 예산이 곧 제 통장에 달달하게 꽂힐 테니까, 영수증만 꼭꼭 챙겨주십쇼. 빼돌렸다는 평가를 받으면 서로 힘들어집니다.”
“네, 네. 하지만 저 사람이 들었는데, 그건 괜찮아요?”
“말하고 다녀봤자 남들이 듣기에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악의적인 평가를 다 떼고 말해도 이건 북한이 ‘우리도 달나라에 국기를 꽂을 것임’이라며 외치는 것과 같다. 정말 가능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듣는 사람은 없을 거란 얘기지.
어르신도 이 새끼가 도랐나 하면서도 처음으로 돈 달라고 찡찡대는 거니까 한 번 밀어주신 것이다.
이번 도전이 망하면 내 평가가 수직낙하하고 예산을 타기 전에 실적부터 갖고 와야 하는 꼴이 되겠지만, 뭐 어때. 돈 될 만한 기술 1~2개 정도는 나오겠지.
“그렇게 되면 신경쓸 건 마나 부여 기술의 재료네요.”
클라라는 내가 준 술식을 눈이 찢어져라 보며 말했다.
“술식은……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레시피에 재료가 빠진 것과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시도했던 마나 부여 기술의 연구 자료를 구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겠어요.”
“말했듯 예산은 두둑히 뜯어낼 생각이니까 걱정 마시고, 그 연구 자료란 것도 곧 저희 스폰서가 갖다 드릴 겁니다.”
“……그 스폰서란 게 대체 뭐하시는 분이시길래?”
글쎄? 야당 대표가 된 대기업 회장 쯤 되지 않을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자 반생반사 상태였던 오드리가 용수철 인형처럼 일어났다.
“노르드! 나! 나! 나 그런 자료 정리 잘 할 자신 있어!”
“쉿쉿. 도전정신은 높이 사지만 지분은 안 나눠준다.”
욕심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다.
혼자 먹으려 들어도 절대 소화 못 할 안건이기에 대기업 아르마알스 그룹에다가 타진한 건데, 뺏기지 않기도 벅찬 우리 지분을 손버릇 나쁜 전직 괴도에게 줄 수야 없지.
“필요도 없네요! 성공하면 월급 두둑하게 챙겨주고 해고만 안 시켜주면 돼!”
“종신고용 계약? 나야 상관없지만, 목표가 좀 낮다?”
“뭐든 월 3실버 받는 시골 대장간 잡부보다는 낫지!”
“그건 맞는 말이네.”
얘네들의 목줄─범죄 경력─이라면 내가 꽉 쥐고 있으니까 배반할 염려도 없다. 클라라의 조수론 적당한가.
“아, 클라라 씨도 월급은 챙겨드릴 테니까 당분간은 일반 업무보다는 이쪽을 우선해 주세요. 아예 대장간 임시 휴업을 해 주시면 그게 가장 좋고요.”
“네? 도, 돈까지 주시게요?”
“저더러 열정페이로 사람을 부려먹으라고요? 저를 교수로 만드실 셈입니까?”
“교, 교수?”
“아무튼요.”
클라라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돈을 안 주고 부려먹는 것은 ‘이건 돈 받고 가르쳐야 하는 건데’ 같은 소리를 하는 좆소나 교수들이 할 법한 짓이다. 생각만 해도 혐오감이 든다.
“지금 맡은 일이 끝나면 바로 착수해 주세요. 오늘 저녁에 오시면 제 서명이랑 각서를 넘겨드릴 테니까, 운송 길드로 날아올 실험 재료들 수령하는데 쓰시고. 아, 그대 반지도 갖고 와 주십셔.”
“넵! 잘 부탁드립니다!”
클라라에게 이것저것 맡긴 우리는 홀가분하게 떠났다.
이제 다나의 반지랑 연구원들만 챙겨서 돌아가면 끝인가?
“……나의 그대여?”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베로니카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날 쳐다봤다. 무슨 사인인지 이해한 나는 걷다 말고 정지했다.
“……오늘 밤에?”
“흐, 흠흠. 그대가 하고 싶다면 거부하진 않으마.”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손에 난 땀을 닦는 베로니카. 우리 여신님이 ‘마 섹스 함 뜨자’ 하고 쿨하게 유혹하는 날은 평생 오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가는 길에 성수 좀 사갈까.”
비아그라도 아니고, 발기하는데 약물이 필요하다니.
이 지옥도를 벗어나려면 한시바삐 의수를 만들어서 저주를 풀러 나르메르-나일에 가야만 했다. 어르신한테는 빚을 만들었다가 후환이 두려워서 안 빌렸지만, 그냥 엘릭서를 받을 걸 그랬나.
아니, 역시 홍보대사가 있는 거랑 없는 건 다르다.
금속에 마나를 부여하는 기술을 크게 홍보하려면 ‘미스릴 클래스가 써도 멀쩡한 강철 의수가 있다?!’ 하고 이미지 메이킹부터 돌리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지 않겠는가.
나는 왠 성수냐며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에게 대충 얼버무려놓고 성수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테레사는 캐서린이 밥을 잘 챙겨주는지 돼지가 되어 가고 있었으며, CCTV에도 수상한 기척은 찍히지 않았다. 덕분에 마음 놓고 침대에서 뒹굴며 발기가 풀리기 전에 베로니카를 뿔잡 들박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헨네시스 영애에게 ‘잠깐 돌아왔는데 다시 또 나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십셔’란 편지를 보내놓은 다음날.
나는 호위+잡무 역할을 맡은 모험가들과 같이 연구원들을 훌두폴크의 유적까지 데려왔다.
***
“킁킁…!! 유적 곰팡내 좀 봐! 외부 공기랑 밀폐된 곳이야!”
“보존 상태 미쳤죠? 올해 학계 저널에 실릴 연구팀의 이름 확정났죠?”
“연구장비! 미발견 유적! 경쟁자 전무! 이것으로 그 누구든 우리의 진급심사를 방해하는 자는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미천한 유물들이여! 발굴해주마! 끼에에에엣──!!”
며칠 쯤 걸려서 데려온 연구원들은 광기에 잠식돼 있었다.
─메다다닥!!
진급 개꿀각을 날카롭게 감지한 월급 루팡들은 눈앞에 던져진 특급 보너스에 눈이 돌아가서는 유적으로 달려갔다. 존나 체력도 좋지. 같이 온 모험가들은 좀 쉬자고 찡찡대고 있는데.
“……다나. 치울 건 다 치웠지?”
“어. 트롤이나 오우거의 유래에 관한 건 마을에 빼돌려놨어. 그래서 발토 진척은 거의 안 됐지만.”
“그거면 됐어. 힘들었지? 이제 뒷짐지고 부려먹기만 해.”
“이중잣대 뭐야. 느그 기준에선 그건 교수짓 아닌가 봐?”
“돈이랑 휴가만 잘 챙겨주면 좋은 상사지 뭐.”
4대 보험에 복지 좋고 돈만 잘 챙겨주면 야근이 좀 있어도 불만은 안 나온다.
의사가 당직 서면서 ‘시발 더러워서 의사 관둔다’ 같은 소리 하는 거 봤는가? 저들도 직업 특성상 야근이랑 노동강도 쯤은 각오하고 들어왔을 테니까, 딴 연구소보다 조금만 더 잘 챙겨주기만 해도 충성심은 쑥쑥 클 걸?
“뭐래. 내가 그럴 돈이 어디서 난다고.”
다나는 으슬으슬한지 지하유적을 비추는 매직 아이템에 두 손을 들이댔다. 빛과 열을 내지만 산소나 유적을 태울 일이 없는 아이템으로, 고고학 탐사팀의 필수품이다.
“내가 사업 성공하면 돈은 대 줄게. 우리 눈나가 얼릉얼릉 승진해야 날 위한 개인 연구소도 차리고 그러지.”
“개새끼. 존나 돌고 돌아서 이기주의 터졌네.”
“어허, 아니지. 윈윈으로 다 같이 해피해지자는 거지. 내가 평생 누나만을 위한 대학원생이 돼 줄게.”
“……지금 그거 프로포즈 때보다 설렜음.”
“즈기요 미친년씨.”
내 일은 다나의 옆에서 다정하게 티키타카를 하다가 연구원들이 공 물어온 개처럼 가져온 필기본을 번역해서 발토부터 유물 정리까지 발굴 작업의 윤활유가 돼 주는 것이었다.
얼스터 인들은 문명의 개발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발굴되는 건 대부분 노략질한 무기들, 얼스터 관련한 역사적 유물들 정도다.
‘얼스터 인도 방계가 장난 아니게 많군.’
훌두폴크 인들이 주변 일족의 문양을 기록한 석판 같은 걸 보면, 같은 ‘얼스터’로 싸잡아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모험가들처럼 운반을 돕는 픽트 인들이 흥미진진해 하는 게 이해가 갔다.
“그래도 공통되는 문화 정도는 있는 모양이던걸. 구전되는 지식과 다른 점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아, 사제장님.”
“됐어. 편하게 있으렴.”
장모님 부부도 여기 계셨던 모양이다. 마을 쪽의 일은 다 끝난 걸까?
아니, 족장이 고령이어도 정신적인 지주로서는 두 분보다 더 낫겠지. 19년 만에 만난 딸아이의 직장에 고개를 내밀고 싶어지는 마음은 나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바쁜 건 알지만 실례하마. 지금이 아니면 얘기할 짬이 안 날 것 같다.”
장인어른의 말씀이셨다. ─털썩. 두 분은 내가 앉아 있던 곳에 편히 앉으셨다.
다시 봐도 장모님 쪽은 우리 눈나랑 판박이다. 가슴만 빼고.
‘유전자의 힘이란 신비하군. 나중에 다나가 딸을 낳았는데 자기보다 가슴이 커지면 눈나는 기분이 어떨려나.’
기뻐할 것 같기도 하고, 자괴감에 죽고 싶어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흥미로운 상상을 멈추고 펜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먼저 일어났던 다나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셨군요. 어떻게, 오해는 잘 풀렸습니까?”
“그랬지. 알고 나니 더 허망하더군.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심려가 많으셨겠습니다.”
우리는 내 잘린 팔에 대한 이모저모나, 감사와 사죄 등을 주고받았다. 뻔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잊기도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찾아오신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본론은 아마 이게 아닐 것이다.
장모님 부부는 고심 끝네 말을 털어놓으셨다.
“……우리 부부는, 20년만에 다시 만난 우리 딸을 아직도 10살 배기 아이 때와 똑같이 여기고 있던던 모양이야.”
장인어른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진두지휘에 애쓰는 우리 개털머리 아내님이 계셨다.
다른 아내들도 열심히 돕고 있지만, 발굴을 총괄하는 것은 연구소장인 우리 누나다.
“거기 모험가 씨! 석판 무겁다고 대충 옮기지 마세요! 허세 부리면서 지게로 옮기려 들지 말고 수레에 실어요! 맥켄지! 한 번만 더 약 쳐둔 장판 위로 넘어다니면 죽는 수가 있어요!”
“으헉.”
“죄, 죄송합니다! 소장님!”
“수잔, 당신도에요. 시굴이랑 도면 스케치 귀찮다고 자꾸 맥켄지한테 짬처리할 거에요? 허리 핑계 대지 말고 발굴계획 세우기 전에 바닥에 팔분법으로 선부터 그어요. 발토하다 부숴먹고 복원하느라 집에 안 들어가려고요?”
“바, 바로 시작할게요!”
뒷짐만 지고 지휘만 하라고 한 건 나지만, 실제로 현장에 찾아와서 계획을 수립해가는 지금은 발굴팀장이 제일로 바쁠 시기다. 대충 괜찮겄지~ 하고 넘긴 오차 하나로 발굴 예정이 1달에서 3년까지 막 왔다리 갔다리 하거든.
“그 회의실에서 말하는 걸 보고 피부로 실감이 갔어.”
목 아파라 소리를 지르는 다나를 보던 장모님이 픽 웃었다.
“내가 딸을 키웠던 시간보다…… 저 아이가 바깥 세상에서 혼자 자라난 시간이 2배는 길다는 걸.”
“……어릴 적의 기억은 어른이 되서도 성격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줍니다. 두 분 덕분에 지금의 다나가 있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걸 말한다면 자네도 똑같지 않나.”
장인어른은 내 손을 잡더니 고개를 숙이셨다.
“……미안했다, 사위. 자네를 고깝게 보고 난폭하게 대했던 것. 부디 용서해주게.”
“예? 아. 이, 이러지 마십셔. 괜히 더 불편합니다.”
“불편하기는. 잘못한 쪽이 사과하는 건 얼스터든 바깥이든 마찬가지일 것 아닌가.”
내가 허겁지겁 만류했지만 장인어른은 요지부동이셨다.
“다나는 우리 없이도 20년을 잘 살아왔어. 하지만 사위가 없으니 고작 며칠도 못 참고 한숨을 푹푹 쉬더군.”
내가 기절해 있던 동안의 얘기일까.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다면 다나의 일거수일투족은 눈에 확 띄었을 것이다. 내가 할 말을 찾아서 혀를 굴리자 장모님이 담백하게 말씀하셨다.
“보는 눈이 없는 나라도 알겠더라. 미련한 부모들 대신에, 네가 다나의 가족으로서 저 애를 지탱해준 거야.”
사제장이라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무릎에 두 손을 얹고 다소곳하게 앉은 장모님은 훨씬 앳돼 보였다.
그렇게 말하고 보면, 그 점도 다나와 무척 비슷했다.
자기 원래 성격을 겉으로 드러내는 말투나 태도로 숨기려 한다는 점이 말이다.
“힐끗 봤어. 딸아이에게 반지를 줬더구나.”
싱긋 웃은 장모님은 농담하듯 말씀하셨다.
“허락하고 말고 할 자격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딸, 잘 부탁할게.”
“……옙. 여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저 얘기를 하러 오셨던 모양이다.
웃기는 좀 그랬지만, 잘 된 일이라고 치자. 이만한 유적을 찾고 미스릴 클래스가 된 것에 이어서, 우리 눈나를 아내로 들여도 된다는 장인어른 부부의 허가까지 떨어진 거니까.
“남편!! 이리 좀 와 봐!! 황금시대 시절의 의복들이 아직도 남아 있대!!”
그때 화장품 반값 세일 간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메다닥 달려오는 우리 눈나.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게 또 귀엽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사료도 남아 있어!! 훌두폴크 인들이 후손한테 문화를 전해주려고 만들었나 봐!! 에린 인들이라고 사시사철 알몸뚱이로 있던 게 아니라, 축제나 의식에는 옷을── 응?”
재잘거리던 다나는 한 발 늦게 남편이랑 대화하던 자기네 엄마아빠를 발견하고 얼굴이 빨개졌다.
“──아, 진짜! 왜 또 왔어!! 내가 일하는데 오지 말랬지!!”
“흠흠. 그건 경비를 안일하게 한 네 잘못 아니니? 들어가 봐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슥 통과시켜 주던데?”
“엄마가 나랑 쏙 빼닮은 얼굴을 들이미는데 누가 막겠어!! 아빠! 또 우리 남편한테 괜한 헛바람 불어넣은 건 아니지?!”
“내, 내가 뭘. 그냥 사위놈이랑 얘기나 좀 했다.”
파천황의 기세로 크와왕 거리며 장인어른 부모를 몰아내는 우리 눈나. 그렇게 부모를 뚫고 들어와선 내 손을 턱 잡으니 나야 뭐 어쩌겠는가. 하는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나는 질질 끌려가면서 장모님께 말했다.
“보이십니까? 제가 이렇게 잡혀삽니다.”
“쿡쿡. 마법보단 지아비를 공경하는 예절부터 가르쳤어야 했나?”
장모님이 입을 가리며 여성스럽게 웃자─우리 눈나한테는 바라지 못할 숙녀의 소양이다─ 다나가 인상을 팍 썼다.
“누가 누구한테. 엄마가 남들더러 남편을 존중하라고 말할 처지야?”
“……그건 그렇긴 해.”
“……후후후. 당신?”
“나,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했다고!”
장인어른 허둥대시는 것 봐라.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눈빛 한 번에 남편을 침묵시킨 장모님은 다나에게 말했다. 얼굴에는 빵긋거리는 미소가 한가득이시다.
“얘, 다나야. 그래서 식은 언제 치를 거니?”
“……몰라. 얘기도 아직 안 해 봤는데 어떻게 내가 알아?”
다나가 나를 힐끔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픽 웃었다.
“사르가디스에서 할래? 장모님 장인어른도 초대해서.”
“싫어. 니 또 인맥이다 뭐다 다 불러놓고 바빠할 거 아냐. 화려한 것도 좋다지만,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될 바에야 그냥 조촐하고 오순도순하게 치르고 말련다.”
아니 이 시발. 갑자기 남편 기 죽이기 있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일에 미쳐서 결혼식 날까지 신부를 방치해두는 개쓰레기 새끼 같잖아.
그래도 프랑이랑 결혼했을 때는 후딱 해치우고 프랑 옆에 붙어 있었다고.
“기왕 온 거, 우리 마을에서 치루고 가자. 전통의례대로.”
다나는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는 듯 말했다. 그러자 장모님이 입을 작게 벌렸다.
“……그래 주겠니?”
“마침 우리 엄마가 사제장이잖아. 돈 주고 부른 사제보단 열심히 기도해 주겠지.”
다나는 새침떼듯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허례허식은 나랑 잘 안 맞아. 오랫동안 잊고 살긴 했지만, 픽트는 내 뿌리이기도 하고.”
“……그래? 그럼 옷을 사야겠네? 우리 딸 안 부끄럽게.”
“왜? 이제부터라도 옷 입고 살려고?”
“응. 그럴려고. 나중에 손녀딸이 할머닐 보러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홀라당 벗고 있으면 얼마나 부끄럽겠니?”
이번에는 다나가 놀랄 차례였다. 나도 눈을 껌뻑이자 장인어른은 이미 다 얘기가 끝났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픽트도 슬슬 고리타분한 전통을 관둘 때가 되기는 했지. 윙글링 녀석들처럼 젊은 애들 다 달아날라.”
“그 놈의 전통이니 의무니 떠들다가 딸이랑 20년을 떨어져 살았잖니. 암만 고집불통 할망구라도 마음이 바뀔 법 하지? 마을 사람들도 우리가 설득하니까 괜찮다고 하더라.”
“……마, 맘대로 하던가!”
다나는 흐물거리는 얼굴을 억지로 뾰루퉁하게 만들면서 홱 떠나버렸다.
웃으면서 우리를 배웅하는 장인어른 부부는 떠나는 다나의 표정을 보실 수 없었겠지만, 손목을 잡힌 나는 그 새빨개진 얼굴에 약간 기쁨의 눈물이 고인 걸 볼 수 있었다.
“……넌 또 뭘 쪼개는데, 팍 씨.”
“흐흐흐.”
내가 쳐다보는 걸 눈치챈 듯 눈가를 비빈 다나가 부끄러운 걸 얼버무리듯 주먹질을 날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연구원들이 발견했다는 얼스터의 전통 의복들에 눈을 돌렸다.
원시적인 신전처럼 생긴 건물의 안쪽에, 웨딩 드레스와도 무척 닮은 옷들이 몇 벌 보였다.
사람들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다고, 디즈니 영화의 공주들이나 입을 듯한 드레스들은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차고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세월을 견디고도 풍화되지 않을 걸 보자면 보통 흔한 소재도 아닐 것이고 말이다.
야만인이라고는 하지만, 고대문명의 황금시대라고 하면 이 세상 역사에서 가장 문명이 발전했던 시기다.
현대 지구의 웨딩 드레스도 결국 각국의 전통의상에서 시작해서 발전한 거라고 생각하면, 이 드레스가 평범하게 근사해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게 잠시 둘러보자, 마치 오늘 짠 것처럼 빛나는 순백의 드레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귀만 빨개져 있었기에, 나는 우리 욕쟁이 공주님에게 큭큭거리며 말했다.
“딱 공주님 같은 곳이네? 누가 어릴 적에 꿈꾸던 것처럼.”
“……시끄러.”
부끄러워 하기는. 자기가 신나서 불러와 놓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