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충실함이나 빡셈을 표현하는 단어로 ‘농밀한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농밀이란 농후한 밀프라는 뜻이 아니다. 흘러간 시간에 비해 좋건 나쁘건 사건사고가 많았다는 비유다.
그런 의미로 호르샤를 쓰러트린 이후로 내 일과는 완만한 하향 곡선을 그렸다. 농밀함이 옅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하루인가 이틀 사이에 도시와 아내의 고향의 존망을 건 혈투가 벌어지던 몇 주 전에 비하면 평온하다는 뜻일 뿐, 딱히 내가 바쁘지 않게 된 건 아니었다.
“이건 제사에 대한 내용이고, 아까 본 건 부족 간의 관계도라고 해도 될 거야. 제사 내용은 상당히 질이 안 좋네. 인신공양이랑 비슷해. 버들나무 가지로 초대형 허수아비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을 넣어서 불을……”
“치워, 치워. 존나 미친 놈들 아냐? 트롤이나 오우거로 변할 만 하네. 그래도 이미 그런 쪽의 폭로는 후세에 맡겼으니까, 괜히 얼스터 인들 이미지 조져지기 전에 내 선에서 처분해야 쓰겠네.”
“그래. 인신공양 메타라니 우상숭배 일직선 아녀.”
발굴되는 유물의 번역은 내 일이다. 나는 질 나쁜 제사의 기록을 다나에게 넘겼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 해석의 진위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번역이나 오감 문자의 사료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나의 파파고 파워를 아는 다나가 아니라면 아무도 안 믿어주겠지.
그래도 다행히 연구소장인 다나는 내 번역을 100% 신뢰했기에 빠른 속도로 유물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소장님이 뭘 믿고 저러나 하던 연구원들도 내가 내뱉는대로 튀어나오는 유물을 보고 물개박수를 쳐댔다.
“소장님 남편 분은 연구소에 취직 안 하세요? 일 빨라지면 소장님도 일찍 퇴근하고 좋잖아요.”
“연구비랑 일감 구해다 주는 게 제 일이라서.”
“충성충성. 베르베이아 소장님 부부께 경례!”
“까불지 말고 일 하십시다.”
“옙.”
유적에도 자기네 말을 알아먹는 후손들에게 유물을 넘겨주려는 분위기라서, 지구인 주제에 날먹으로 해석해내는 놈이 튀어나오자 발굴 속도에도 박차가 가해졌다.
“근데 한 1~2백년 뒤에 우리가 숨겨둔 사료가 발견되면 꽤 볼만 하겠네. 야만인의 마을에서 나온 몬스터의 진실된 역사. 인신공양을 벌이던 사악한 얼스터 인…… 무슨 괴담이야?”
“으이그, 띨빡아. 그니까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유적에서 발견된 문양이랑 사료로 ‘얼스터 인들도 케바케였다’는 얘길 남겨둬야 할 것 아냐. 알았으면 남편은 닥치고 일이나 해.”
“쮸인님이 또 일감을 줬어요. 노비는 자유로운 대학원생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발굴해낸 유적은 어떻게 하냐? 사르가디스 연구소로 옮긴다.
왜냐고? 도난의 위험도 있고 여기서는 연구할 방법도 없어서다.
‘연구소의 장비랑 서적을 싹 옮겨올 바에는 유물을 옮기는 게 안전하고 편하지.’
그리고 그 운송에는 나랑 베로니카, 그리고 몇 명의 픽트 인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추후 바깥 세상과 교류하기에 앞서 밖의 분위기를 찍먹하는 요원들이다. 아는 사람이 중개를 서 주면 편할 것 아닌가. 왔다갔다 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옮겨둔 유적들은 빈 연구소에 두는 것이냐? 위험할 텐데.”
“안 그래도 다나가 고고학계에다 유물경비업체를 요청했다더라. 원래 연구소 자체가 소인원이라 어쩔 수 없지.”
유물경비업체.
고고학계가 직속으로 운용하는 파견요원들이었다. 현대에서 말하는 보안업체다.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비용이 무척 비싸지만, 다나는 그걸 ‘유물 몇 개 넘겨주고 싶은데 이러다 도둑맞겠음’이라는 야부리로 때웠다. 어차피 학위를 위해서 넘길 예정이었으니까 학계도 적당히 타협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사르가디스에 도착해서 유물을 연구소의 창고에다 쑤셔박고 나면, 여기서도 또 일이다.
나도 존나 일복 터졌어, 진짜.
***
“노르드 씨! 마나 부여에 정제수은을 써 봤어요! 어때요?! 마나 자체는 거의 안정됐는데!”
“어디 봅시다.”
나는 클라라를 찾아가서 연구 결과를 점검했다.
왕자는 진작에 도시를 한 바퀴 둘러보고서 격려를 남기고 떠났다는 모양이다.
나? 나야 바빠서 그때 여기 없었지. 절대 귀찮아지겠다는 생각에 미리미리 피신해 있던 건 아니다.
아무튼 유물을 연구소에 쳐박아두러 올 때마다 클라라의 실험결과를 오딘의 눈으로 분석하고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해 주는 것도 필수 절차였다.
내가 그럴 능력이 되냐고?
안 되도 된다. 엘릭서처럼 마법이 헤엄치고 지나간 포션류라면 몰라도, 유물 도끼나 가공 중인 금속에는 마나랑 술식이 선명하게 남거든. 이 눈은…… 마나가 잘 보인다…….
“흠. 부착은 잘 됐는데 양이 이렇게 적으면 솔직히 안 붙이니만 못하네요. 술식에 어떤 왜곡이 일어났는지 간단히 적어드릴 테니까 표 제작에 참고하시고요.”
“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셨죠! 파이팅하겠습니다!”
클라라는 실패를 반복해가면서 재료마다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표로 정리하고 있다. 이게 쌓이다 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치트 눈깔이 있어도 서두르는 건 금물이지. 암요.
“와이번 쿠팡맨이 갖다준 재료는 다 바닥났나요?”
“쿠팡? 아, 재료라면 이미 다 썼어요. 돈이야 노르드 씨가 풍족하게 주셨지만……”
“새 재료를 구하기가 좀 귀찮겠군요. 시골이라 파는 데가 없을 테니까.”
“아하하…….”
여기서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실감해야 한다니. 지하철 없는 도시에 살던 옛날 친구가 떠오르는군.
사족으로 연구비는 얼마 전 통장에 들어온 돈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금액이 ‘이세계도 결국 빈익빈 부익부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는 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으히히히히. 돈 주고 고급 마법 시약을 구하려고 해 봤자, 사르가디스는 인프라가 영 좋지 못하니까. 누가 됐든 재료를 구해다 줄 녀석은 뺑이 좀 쳐야겠네.”
“역시 그렇지? 알면 됐네. 돈 줄게. 사 와.”
“……네? 누구요? 제가요?”
그럼 오드리 너지 누구야.
그렇게 보물을 한아름 싸들고 날라댕기던 전직 언니 괴도는 경공을 살려 이세계 무림의 택배왕이 되었다.
“대장장이라매! 대장장이라매!”
“초일류 스시 마스터는 새벽부터 수산시장에서 그날 쓸 생선을 구해야 하는 법이지. 장인의 세계에 들어왔다면 10년은 심부름만 하면서 구를 각오를 하도록.”
“젠장, 니 똘기를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건 취업사기야!”
“영수증 떼 오는 거 잊지 말고. 장부 써다 올려야 됨.”
“아아아악─!!”
물론 농담이다. 나는 이런 쉰내 나고 장인 정신을 빙자한 스트레스 해소법엔 관심 없다.
오드리 혼자 옮기는 양은 불 보듯 뻔했기에, 그녀가 죽어라 뜀박질을 하며 며칠 정도 필요 분량을 땜빵해주는 동안 내가 호툴루실을 찾아가서 쇼부를 봤다.
“인간적으로, 아니 엘프적으로 양심이 남아 계시다면 저 좀 도와주시겠읍니까?”
“그러지.”
나를 왕자놈에게 팔아넘겼던─억측이지만 가능성은 높다─ 호툴루실은 사죄의 뜻인지 선뜻 계약을 받아줬다. 지부장의 이름으로 필요한 물건을 발주해 준다는 내용의 서명이다.
자기가 농사짓는 동안 크롬웰을 통해서 갖다놓으면 서류에 결재를 해 주겠다는 모양.
이 새끼 이거 진짜 지 취미 말고는 좆도 관심이 없구만.
그러믄 전업 농부나 하지, 마법사 길드 지부장은 웨 하고 자빠진 것?
“취업비자.”
“아.”
엘프도 벗어날 수 없는 이세계의 개빡센 입출국 사정이란.
외노자 콤비는 그렇게 뜨듯미적지근한 시선을 교류하다가 헤어졌다.
봄인데 무슨 농사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느이 집에다가 양배추를 보내 놓겠댄다. 아니 사시사철 농장 자동사냥 돌리는 거 실화냐고. 농경노예 안 되길 천만다행이지.
그렇게 몇 주 넘도록 여기에 왔다리 저기에 갔다리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자, 드디어 셀레나한테도 편지가 왔다.
〈엘릭서의 제작에 속도를 더하겠어요!! 당신의 팔을 위해서라도요!!〉
자면에서부터 시끄럽네. 그 기차통 목소리가 자동재생된다.
나는 사내 대장부 뺨치는 일필휘지의 편지를 훌훌 읽으며 내가 요청했던 엘릭서 연구 결과를 따로 분류했다.
근데 셀레나네 연구원은 잠 안 재우고 굴리다가 기절하면 다음 타자랑 교대라도 시키나? 왜 옮겨적은 사본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너희 좆뺑이 치게 만드는 건 댁들이 취업한 상회 상사잖아요.
“애먼 나한테 분노의 화살을 돌려놓는 점을 보면 셀레나의 사람 부려먹는 솜씨도 존나 능수능란해.”
나는 투덜거리면서 연구 자료를 정리해서, 엘릭서 제조의 과도기적 연구결과라는 걸 숨기고 클라라한테 갖다줬다.
“무슨 서류인가요?”
“아는 사람이 개발하던 포션의 연구기록입니다. 저희도 돈 물 쓰듯 쓰고 있지만, 그 사람도 만만찮게 썼을 걸요.”
“아, 네. 그런데 이 포션 제작법이 마나 부여 기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연금술의 학파는 분류가 넓습니다. 금속 재련도 약학도 다 같은 연금술이죠. 마나 부여 기술 개발에 공통되는 재료들의 연금반응을 모아와 봤습니다. 기간이랑 예산 단축에 도움이 될 겁니다.”
나보다 오랫 동안, 그것도 전문업자들에게 후원을 받아서 만든 결과니까 말이다.
반대로 셀레나가 가성비 때문에 미루고 있는 시약들은 다 스폰서의 돈으로 우리가 실험하고 기록을 보내주면 된다. 크, 이거 완전 품앗이 아니냐? 한국인의 정에 가슴이 찡해진다.
“오드리 너는 내가 시키는 거 만들고 있지? 아, 자료 정리 잘 한댔으니까 장부도 맡긴다? 구매기록에 빵꾸나면 느그랑 나랑 손 잡고 사이 좋게 좆되는 거야. 일처리 잘 하라고.”
“스테이……. 부려먹을 거면 내 동생만 부려먹어…….”
“월급 받기 싫으면 관두렴. 돈 챙겨주고 휴일도 잘 주는데 뭐가 불만인 것이지? 대학원생이랑 비교하면 천국 그 자체로 보이는걸? 얘가 인생을 날먹하다 와서 그런지 영 빠졌네.”
“진짜 날로 먹는 게 누군데! 나 진짜 일 열심히 하거든?!”
“그르게. 대체 누가 날로 먹고 있담. 나도 준내 바쁘구만.”
“구라까지 마, 이 사기꾼아! 소파에 누워갖고 뭐가 바빠!”
“몸만 쉬면서 머리로는 금속에 마나 채워넣고 있잖아. 텐지이~ 넨 슈~!”
이 영롱한 롱소드의 디테일을 봐. 시험작인데 이렇게 존나 근사하게 만들다니. 월드 클래스급 클라라, 줄여서 월클클이 멀지 않은 미래로 보이잖아?
“망할……. 한 번 뒤통수 맞고 또 넘어간 게 죄지…….”
울상을 짓던 오드리는 내 언변에 엉덩이를 차인 듯 업무를 처리하러 갔다.
“이게 사회의 어려움이다 애-송이.”
참고로 사회는 나한테도 어렵고 냉정했다.
나도 일을 하는 짬짬이 티르시가 혼자 연구한 〈강림〉 마법을 베로니카와 보러 가 주거나 하고, 헨네시스 영애가 팔 짤렸다던데 얼굴 좀 보자고 부르고, 하여튼 존나 바빴다.
잔뜩 밀린 일 덕분에 눈이 돌아갈 것 같다는 게 본심이긴 했지만, 그만큼 건전하고 충실한 시간이었다
일 열심히 하는 남편이 된 기분이라서 쵸큼 자랑스러운걸.
“근데 이게 어딜 봐서 환자죠 시발.”
“그러게요! 선배 요즘 팔이 멀쩡하셨을 때보다 성실하세요!”
링링이로 유적지의 땅을 파던 라리루라가 지나가면서 한 방 팩폭을 날리고 갔다. 맨날 집에서 탱자탱자 쳐 놀다가 가끔 쌈박질해서 돈이나 땡겨오던 남편은 웁니다.
팔 없는 남편을 혓바닥으로 갈기고 간 라리루라는 프랑과 함께 유물 파밍에 몰두 중이다.
“저…… 프란체스카 씨? 이 유물, 어제 분량까지 한 곳에 모아두신 건가요?”
“네? 아뇨, 오늘 치인데…… 뭐, 뭔가 문제라도 있었나요?”
“……유물 3개를 손상 없이 이만큼 복원했다구요? 오늘 일 시작하고 반나절도 안 됐는데요?!”
프랑의 손재주야 말할 것도 없고, 라리루라도 링링이를 막 굴리면서 굴착기처럼 파대고 있다.
주로 뭐가 묻히거나 하지 않은 곳을 뚫거나, 조각내놓은 땅 부분을 두부 썰어서 들어올리듯 집어 뽑는 일이다. 큐브 스테이크처럼 쑥쑥 뽑히는 암반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 기세라면 몇 달까지 갈 것도 없이, 3월 중에 발굴/발토 자체는 끝나고도 남겠는걸.
“하암…….”
나는 짝팔로 들고 있던 서류를 놓고 하품을 했다.
여기도 넓은 지하도시지만 1달 쯤 되면 해석이 불가능한 글 같은 것도 거의 바닥난다. 이제는 사르가디스에서 하는 일이 더 주 업무고, 여기서는 휴식을 취하는 기분.
몸 쓰는 일이라도 하려 했더니 다들 만류하더라.
양팔 다 없어도 남들만큼은 일할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또 다들 쉬라는데 억지로 일을 할 만큼 성실하지는 못해서.
그렇게 1달 반 정도의 시간을 빡세게 움직인 결과.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어느덧 완연한 봄이 찾아온 어느날이었다.
“완성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고용주 녀석아.”
“오.”
한가했는지, 아니면 발굴되는 유물이 줄어서 내가 자기를 찾아오질 않아서였는지, 이세계 택배왕께서 친히 물건을 주러 알윈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네가 주문한대로 튼튼하게만 만든 의수야. 마법은 클라라 아줌마가 부여했고.”
─펄럭! 포장을 벗기자 은은하게 번쩍거리는 무쇠 팔이 내 앞에 모습을 뽐냈다.
무광 처리를 한 새끈한 은색의 은팔에, 마나가 부여되도록 새겨진 빨간색 무늬는 그야말로……
“……버키?”
“버키란 놈이 누구야?”
이런 쓰벌, 존나 아쉽네. 이왕 잘릴 팔이면 겨울에 잘리지.
스프링 솔져는 너무 없어 보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