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98화 (498/1,009)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빨리 간다.

조금의 방심이나 안도감에 마음이 흐트러지면 시간은 굳게 쥐었던 손바닥에서 싸그리 빠져나가서, 과연 모래로 비유될 만한 개념이라고 뼈져리게 느끼고 만다.

모래모래 열매 능력자는 물로 뭉쳐서 줘패면 된다지만, 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걸 억지로 응고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내 30년 쯤 되는 인생을 통틀어도 군대와 대학원생 시절 밖에 찾아볼 수가 없더라.

“헬로 뻐킹 선샤인.”

그래서였을까. 짧은 크루즈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햇볕이 모친없이 쨍쨍하고 모래알이 빌어먹게 반짝한 항구에서 맹렬한 현타와 더위에 시달리는 미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물론 그게 해피해피하게 빵끗 웃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쨍─!

“태양 존나 눈부시네. 이건 시발 진조도 죽는다.”

코리안 마늘빵을 빠게트 단위로 쳐먹는 흡혈귀들도 여기로 데려오면 10분 안에 미이라로 클래스 체인지를 하겠지. 햇볕 아래에서 걸어다니는 완전생물도 말라 죽겠다.

─줄줄줄.

눈부시게 내려꽂히는 태양은 빛과 열을 동반하며 내 눈을 조지고 땀샘에서 육수를 뽑아냈다.

이곳은 나르메르-나일의 제 2항구, 알리씨크.

신분으로는 외국의 백작위에 준하며 실제 권력은 후작들도 경시할 수 없다는 수준의 대영주가 통치하는 도시다.

“알리씨크는 예술가의 도시라고도 합니다. 창작자는 고통을 줄 수록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데, 그렇다면 저희의 예술감각이 세계에서 알아주는 이유가 있는 셈이죠.”

“웃기 힘든 농담이군요. 환경적으로나, 비유로나.”

더워 뒤지겠는데 자학 개그 블랙 유머 일발 장전을 당해도 반응이 곤란하다.

“그나마 위용 넘치는 겉모습 덕분에 저희 배에 덤비는 해적들이 적은 건 다행이었군요.”

“덤빌 리가 없죠. 그들도 자기들 딴에는 살려고 하는 일이니까요.”

“푸흐흐. 맞는 말씀.”

남의 핏값으로 먹고 사는 일에 익숙해지면 좋은 꼴은 못 볼 테지만 말이다.

나는 정박한 배에서 선원들이 입국절차 등을 처리하는 걸 기다리면서, 손으로 눈을 차양하며 도시를 둘러보았다.

해안가 중에서 수맥을 찾아서 세운 듯한 도시다.

커다란 강 따윈 없지만 무역의 흐름과 심미(審美)의 탐구자들이 모여서 무지막지한 물자를 낳고 있는 거겠지.

아무리 개꼰대라도 이 미친 태양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저들의 생명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막의 전사는 정신력이 강한 게 아니라 머리가 어디 훼까닥 한 거 아니냐?”

선글라스를 쓴 다나가 얼린 물통을 생명줄처럼 붙잡으며 한 말에 100% 공감이 갔다.

여기보다 더 더운 모래지옥을 자기 마나랑 남은 물통만을 의지해서 하염없이 걷는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오래 있고 싶은 나라는 아니긴 하군. 적응하기 힘들겠어.”

여기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군소리를 내뱉는 나였다.

물론 우리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긴 한데, 내륙지방으로 갈 수록 더위지지 않던가? 아니, 반대인가? 시발 지리과학을 접은지 하도 오래되서 기억도 안 나네.

“아직 봄인데 어쩌다 저희는 벌써부터 여름을 선행체험하고 있는 건가요…….”

비슷하게 축 쳐진 라리루라가 괜스레 나한테 질척거리면서 물었다.

솔직히 아무리 귀엽고 야한 19살배기 아내라도 약간 스트레스 지수가 올랐지만, 꾹 참고 전신에 얼음의 마나를 둘러 두었다. 라리루라는 예전에 바이콘족의 섬에 갔을 때처럼 혀를 빼물었다.

“흐아아……. 선배 손 최고……. 사랑해요…….”

“저렴한 사랑이군. 어디 건물 안에 들어갈 게 아니라면 언 발에 오줌 누기야.”

자연을 상대로 좆간 1마리가 깝쳐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죽으려 하는 걸 보며 베임이 싹싹하게 웃었다.

“더위를 극복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지요. 사막의 기후에 맞는 옷을 구매하시는 방법도 있고요.”

“그거 좋네요……. 무희 옷 같은 거 입어보고 싶어요…….”

“오, 그건 나도 찬성.”

“하하하. 화상 입습니다. 매직 아이템이라면 모를까.”

“흐에……. 선배애, 매직 아이템 사 주세요…….”

“응? 그래, 하나 사자.”

순식간에 목돈을 써버리려는 우리 부부의 추태에 베임은 좀 얼탱이가 나간 듯 보였다.

시발 어쩌라구요. 전문적인 매직 아이템은 아무리 나라도 만들기 힘들다고. 난 야매 프로그래머란 말이지.

“……그런 거라면 대여하는 곳도 있습니다. 대신 도시 안에서만 빌릴 수 있거나, 신분이 아주 확실해야 합니다만.”

“문제 없겠군요. 영수증은 가주님 앞에 달아놔 주십셔.”

어르신도 내가 미치는 꼴 보기 싫으실 테니 이 정도는 해 주기를 바라자.

‘근데 설마 그 능구렁이 양반, 자기가 이 더운 나라로 가기 싫다고 내 등을 떠민 건 아니겠지?’

평가가 NC 주식처럼 변동하는 어르신을 속으로 씹어가며, 우리는 열을 빼내 준다는 매직 아이템을 대여했다.

“무희 옷이 예쁘긴 한데, 입고 다니긴 좀 남사스럽네요!”

빨리도 기운을 차린 라리루라는 노출도가 많은 옷에 로브 한 겹을 덮어쓰고 만족했다. 나는 팔찌 형태의 매직 아이템을 창 반대편 팔에 차고 한숨을 쉬었다. 어째 장신구만 느는군.

“으으…… 예쁘긴 하지만, 나는 포기할래. 키가 작아서 안 어울릴 거야.”

아내들과 티르시는 제각각 사양하며 옷을 거절했다.

그나마 늘씬해서 잘 어울릴 듯한 고학력 빈유 듀오는 가슴살의 부재로 정색하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국 구매한 건 라리루라와 오드리 뿐이었다.

“오드리 너는 왜.”

“이거 입으면 적당히 이 동네 늙은 부자라도 홀릴 수 있지 않을까?”

꿈도 크군. 돈 많은 노인이 이상형이라니, 그 무슨 죽음의 신데렐라인지.

“쉴 곳으로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오, 잠시만요. 이 근처 좀 돌아보고 쉬도록 합시다.”

일은 할 때 귀찮아도 몰아서 해치우는 게 제일이다.

나는 변신마법으로 만든 선글라스로 눈을 지키며 트렌디한 시티 피플처럼 예술가의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

‘사막국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많다.

피라미드. 스핑크스. 딱정벌레. 미이라. 투탕카멘. 이모텝. 딱정벌레. 듀얼디스크. 무희. 알리바바. 딱정벌레. 요정 지니. 하늘을 나는 양탄자. 아낙수나문….

하여튼 많은 이미지가 뒤섞여 있는 국가지만, 실제로 내가 보게 된 알리씨크의 정경은 지중해를 닮은 느낌이었다.

건물에 긴 봉을 꽂아서 태양열을 반쯤 막은, 나무 아래의 그늘처럼 어두우면서도 밝은 시장 거리.

소란스러운 장사통에 소매치기와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관광객이 돌아다니며 싸구려 장식품을 파는 노점상들의 세치 혀에 구워삶아져 가랑비에 옷 젖듯 여비를 빼앗겼다.

“벽에 갈긴 낙서는 뭐지? 예술성을 주체 못한 흔적인가.”

“전통적인 벽화 문화의 변주래. 후후. 예쁘긴 하다.”

돈 주고 산 팜플렛을 읽던 프랑이 해맑게 웃었다.

“그래, 우리 프랑은 좋은 것만 보고 그래야지. ”

나는 프랑의 머리라도 쓰다듬으려다, 너무 애 취급 같다는 생각에 등만 토닥였다.

솔직히 저 돌에다 그려댄 그래피티가 프랑의 심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만…… 드문드문 예쁜 곳이 있긴 하군. 느긋하게 관광하겠다고 베임을 후방에 빼 놓기를 잘 했다.

베이지색의 벽에 수없이 그려진 그래피티 벽화는 무척이나 색다른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던 나르메르-나일의 이미지와 일치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게 이 알리씨크의 특색이겠지.

아무튼 나름의 풍취는 있었다. 더위를 한결 물리친 우리는 시장에 지나치게 눈길을 빼앗기지 않고 전망대로 올라가는 흰 벽의 계단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점점 마나가 늘어나는 걸까. 뒤에서 걷던 티르시는 마법을 써서 식힌 공기를 뿜어대며, 그 광경을 재밌어했다.

“꼭 미로 같군요. 던전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답다…… 고 하면 실례일까요?”

“성공과 기회의 황금향이란 칭찬이 어디가 실례겠습니까? 그래도 옆으로 빠지는 길이 많으니 조심하시길. 미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걸작들도 있습니다만.”

“안내역 없이 돌아다니다가 조난당할 듯 하군.”

“하하.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이죠.”

베로니카가 고개를 젓자 베임은 손가락으로 전망대 언덕의 등대를 가리켰다.

“저 낡은 등대는 그것 때문이죠. 조난자를 찾아내기 위해 허물지 않고 남겼다고 합니다.”

한 귀로 듣던 나는 발치에 한 마리 쥐가 다가오는 것을 슥 피했다.

사막의 쥐들은 머리가 좋다. 도시 안에서 사는 녀석들조차 그랬다.

치즈를 손가락 마디만큼 던져주자, 놈은 주둥이로 등대를 가리켰다. 나는 한 덩이를 더 던져주고 말했다.

“베임 씨. 저 등대는 출입 금지입니까?”

“아니오. 저곳도 관광지의 일종입니다. 가 보시렵니까?”

“예, 부디.”

베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티르시의 미로 같다는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전망대 쪽으로 향하는 길은 개미굴처럼 여기저기로 길이 나 있고, 그 벽벽마다 전부 누군가의 집이거나 해서 도무지 앞도 뒤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가이드인 베임조차 이정표로 삼을 그림들을 부숴버리거나 지우면 헷갈릴 거라며 웃을 정도였다.

《출입하고 싶다면 입장료를 내도록.》

언덕을 다 올라오자, 등대 주변부터 관광지로 개조를 가해 놨는지 벌써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장사 한 번 잘 하는군.

《요금은 이 영지 재정원에 달아놔 주세여.》

《음? ……음? 어억! 조, 좋은 구경 되십쇼!》

아르마알스 가문의 문양을 보여주면서 서명하자 경비병은 빡세게 경례를 했다. 로마니아랑 나르메르-나일이 예로부터 그렇게 교류가 많다더니, 진짜인 모양.

그대서 나도 법인 카드를 긁는 마음으로 전원의 입장료를 긁었다.

이거 갖고 아니꼬워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기엔 우리 뒷배께서 돈이 너무나 많아서 걱정도 안 된다.

“일행들한테 관광지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화장실 좀 다녀오죠.”

베임에게 일을 맡긴 나는 유유자적 빠져나왔다.

근처의 제일 큰 벽─가장 눈에 띄는 곳─에 바닷가에 놓인 피라미드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채색까지 깔끔하게 된 게 완성도는 준수하지만, 박력이 모자라고 어딘가 어색하다.

‘이건 그거군. 미술학원의 미대 합격자 그림.’

딱 그 정도의 느낌이다. 순수한 실력으로 이 명당을 잡을 만한 화백의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그 그림은.》

그렇게 구경하고 있자 누군가가 내 등에 말을 걸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내리며 돌아보았다가 빙긋 웃었다. 하얀 수염을 기른, 흑갈색 피부의 노인이다.

바로 나오는군. 하긴, 내가 눈에 띄는 생김새이긴 하지.

《썩 훌륭합니다, 알리씨크 영주님.》

생김새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늙은 남성은 껄껄 거리며 웃었다.

도저히 선원들이 ‘독사’라느니 ‘미친 몽구스’라며 외경하던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허허. 갈 날만 기다리는 노인이 이 시대의 영웅님을 다 뵙고. 오늘은 참 운수 좋은 날이군요.》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조금 다른 표현은 없나요.

할배나 나나 둘 중 하나는 골로 갈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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