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작은 기적입니다.》
알리씨크의 영주는 뒷짐을 지며 흐뭇하게 말했다.
그의 움푹 파인 눈은 제일 크게 그려진 벽화보다는, 그걸 장식하는 그밖의 그림들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태양신께 축복받은 나르메르-나일도 작금은 죽음에 가장 가까운 땅이죠. 과거의 예술이 향락의 일부였다면, 알리씨크에서는 눈물과 피로 그린 시대의 초상화입니다.》
《모든 예술은 사람의 삶에 의거합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자만이 예술을 논할 수 있는 법이죠.》
적당히 한 술 더 떠서 호응해주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떽떽 거리는 고집쟁이 노인한테 정치적 신념에 맞장구를 쳐 줘도 저렇게 절절한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때문에 저는 같은 그림을 어떻게 보느냐로, 사람의 인생과 인품을 볼 수 있다고 믿죠.》
나는 선글라스를 도로 밀어냈다.
이세계에는 차안경 문화가 없기에 눈을 가릴 수가 있다는 점은 꽤 좋다.
벗지 않아도 실례라고 꼽을 줄 만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동공의 지진을 숨길 수 있다.
‘이 시발…… 지금 나더러 자기가 그린 그림의 담긴 철학을 해석해 보라는 거야?’
사막에는 고집쟁이가 많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 대빵인 영주부터가 유사과학 신봉자라니.
진학을 위해서 이공계 고등학교를 골랐을 때부터 미술이랑 담 쌓은지 오래인데, 첫 시험부터 너무 과도한 것 아닌가. 난 중학생 때 이후로 4B 연필이나 붓을 만져본 적이 없어요.
‘그치만 그 정도로는 자소서와 리포트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며 성장한 K-대학생을 엿먹일 수 없지.’
나는 엘리트 대갈통을 굴려서 그럴싸한 개소리를 주워섬겨보았다.
5만원 주고 간 미술관에서 좆도 모르겠는 현대미술을 보며 고개를 젓던 나다.
사이어인 강북호에게 이 되다 만 크로마키는 전위적인 맛이 한참 부족했다. 내게 있어선 이세계의 예술 전부가 풋내기로밖에 보이지 않아.
《진취적인 예술이군요. 배움이 부족한 저라도 알겠습니다. 평범한 정물화에서 벗어나, 인파가 많은 바다와 피라미드를 구태여 한 곳에 배치한다……》
아방가르드한 인터네이션을 의식하며 한 마디.
《……마치 고향에 대한 마음을 커다란 캔버스에 당당하게 담아놓은 듯 합니다.》
《……과연, 재밌는 해석이십니다. 허면 그게 도대체 어떤 바람이겠습니까?》
흥미를 가졌나. 적당한 해석이었는데 틀리진 않았나 보다.
‘딱 봐도 그림의 채도부터 존나 높은데, 보여지는 느낌과의 모순을 노린 게 아니라면 부정적인 그림일 리가 없지.’
이과식 분석법과 문과식 야부리를 동시에 펼친다!
나는 궁예처럼 관심법을 쓰며 그림을 재해석했다.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피라미드는 내륙이나 강변에서밖에 볼 수 없지만, 그걸 해변에 배치했지요. 거기에 국민 분들의 웃는 얼굴과 평화로운 정경이 합치면…… 영주님께서 꿈꾸시는 평화로운 나르메르-나일의 미래상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저의 그림을 칭찬한 이들은 많았으나, 그림에 담은 마음까지 알려고 한 사람은 없었죠.》
이 벽화를 그린 알리씨크의 영주는 눈을 빛냈다.
《예, 맞습니다.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쓸데없이 넓을 뿐인 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나 가진 잠재력을 전부 발휘하는 조국의 미래. 이것은 그를 꿈꾸며 그린 벽화입니다.》
그렇군요. 인체를 존나 못 그리셨는데 건축가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예술가의 거리를 세우고 자기 그림을 그 제일 가는 자리에 박아넣다니. 성공한 덕후로군. 나는 그 쓴웃음을 예의 바른 미소로 치환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숭고한 꿈을 방해하는 이들이 이 넓은 토지에 산적해 있다니, 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혹여 괜찮으시다면 제가 영주님의 목표에 한 손 보태드려도 되겠습니까?》
《……흐음? 귀공이 조국의 기사가 되겠다면 파라오께서 발 벗고 나서고도 남을 터입니다만.》
당연하다. 이 강북호가 셀프-내려치기의 달인이긴 하지만 몸값을 후려쳐가면서 고용당할 생각은 없다.
축구선수도 자기 가치를 못 알아주면 팀을 옮기는데, 이 개큰 나라의 국방 문제를 해소해줄 떡밥을 꽁으로 주겠냐고.
《제가 고향에 살 적에 듣기로, ‘한 손이 열 손을 못 막는다’는 말이 있더랍니다. 지금 귀국에는 어설픈 기둥 하나보다는 많은 지지대가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습니까?》
《골렘 말씀이시군요.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미처 제 공저(公邸)에서 기다리지 못한 점은 사죄드립니다.》
《하하하. 덕분에 멋진 그림을 보고 영주님의 뜻도 들을 수 있었으니, 이 역시 하나의 운명이 아니었겠습니까.》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댁이 사람 올 때마다 여기로 튀어서 위아래를 정해놓으려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수다.
《개인적인 용무도 몇 개 있었습니다만, 이 훌륭한 거리의 정경을 먼저 보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설마 예술가의 거리를 가꾸신 분은 만나뵙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만…》
당연히 립 서비스, 다시 말해서 구라다.
나는 예술에 일가견이 없다. 이 남자가 여기에 있다는 걸 도시에 지나다니는 쥐들에게 듣고 왔다.
그렇기에, 이건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전부 설계다.
영지에서 쥐를 박멸하지 못한 댁의 업보려니 하셔.
《나르메르-나일 어가 현지인들 못지 않으시군요. 혹여 이 나라에 오신 게 첫 방문이 아니신지요?》
흑인과 백인의 쿼터, 혹은 그 이상으로 옅은 혼혈인 듯한 노인은 흥미로워하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하하. 만약 그랬다면 여기까지 헤매다 흘러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론 행운이었습니다만.》
《아하, 이거 그러셨군요.》
‘1번이라도 이 나라에 와 봤으면 당연히 이 영지에도 관광하러 왔을 텐데, 설마 길을 헤맸겠음?’ 이라는 무언의 칭찬에 로마니아의 하수인을 경계하던 영주의 얼굴에도 끝내 미소가 꽃피었다.
아르마알스 가문에서 나를 보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일단 경계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만큼 아부가 중요하다. 사회생활의 반은 아부와 아부 같지 않은 칭찬으로 완성되니까. 딸랑딸랑.
‘원래 대부분의 미술가는 ‘뭘 좀 아는’ 사람의 호평을 제일 좋아하는 법이지.’
아마추어 그림쟁이 치고 칭찬 싫어하는 사람 없다.
이 남자는 예술에 가진 관심과 심미안에 비해 자기 자신의 솜씨는 3류라고 들었다.
‘미술평론가 = 예술가는 아니지만, 원래는 자신의 이름을 미술계에 남기고 싶었겠지.’
나는 호기를 잡았음을 눈치챘다. 선원들과 딱지겜을 하며 현지의 정보를 이것저것 주워들은 보람이 있군.
《허면 관세를 내고 골렘을 가져오셨는지요?》
흐뭇하게 웃던 그는 드디어 먼저 떡밥을 물었다.
이 몸이 자기가 한 발 물러나서 상대해야 하는 몸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늦었다. 루어를 물어놓고 내 낚싯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걸랑.
《아니오. 시제품 단계에서 합의해가며 만들 생각입니다. 이 나르메르-나일은 곳곳마다 지역색이 강하니까요.》
《그렇군요.》
예민한 감각이 찰나의 실망감을 캐치했다.
그렇겠지. 라인을 뚫으러 와 놓고 상품도 없이 빈손으로 온 것 아닌가. 나였어도 어이가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허명만 믿고 알아서 잘 풀리겠거니~ 하는 심보로 설렁설렁 찾아온 어리석은 놈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
하지만 오만함이란 건 성공과 결과에 의해서는 자신감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방심이란 그 찰나의 낙차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보여드릴 만한 물건은 몇 가지 있지요.》
─뚜둑. 나는 오른팔을 잡아뜯었다.
기습적인 퍼포먼스에 알리씨크의 영주는 떡 벌어진 자신의 턱을 급하게 닫아야만 했다.
《그, 그건?》
《마나 금속으로 만든 의수입니다. 아, 변신마법을 걸어 놨으니 겉보기로는 평범한 팔로 보였겠군요. 실례했습니다.》
나는 은색으로 되돌린 의수를 한손에 쥔 채로 조작했다.
─까딱까딱. 쇳소리도 없이 스무스하게 움직이는 오른팔.
《나무 의수의 단점은 마나를 균등하게 분배하지 못하면 부분부분 열화가 일어난다는 점이죠. 반면 금속은 다릅니다. 싸구려 잡철도 마나의 허용량이 높고, 그렇기에 같은 비용으로 훨씬 고품질의 물건이 생산됩니다.》
《금속에 마나를…… 말입니까?》
오, 대단하군. 사전정보도 없었을 텐데 말도 안 더듬고.
나는 그 팔을 도로 붙이며 씨익 웃었다.
마나 부여 기술은 황금시대의 로스트 테크놀로지다.
허황되다 못해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남을 꿈 속의 꿈 같은 얘기란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금속 의수라는 증거물도 있다.
그의 기분으로는 제 3국가의 개도국 레슬러가 화성에 갈 수 있는 기술이라도 갖고 온 듯한 충격일 것이었다.
《여건 상 현지에 장인을 보내진 못하겠습니다만…… 가공 완료된 부품을 운송해 드리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과연…… 과연. 부품이라…… 마나 금속이라!》
여러 정보를 가지고 주판을 두들겨대던 영주는 나를 따라 웃었다.
《그거 정말 멋진 제안이로군요. 이 저희 나라의 영웅께서 사업에도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분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시기에 시류에 탑승할 수 있는 법이죠.》
《예, 정말 그렇습니다. 허나 저 역시 독재자는 아니기에, 제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다른 이들과 상의가 필요합니다.》
나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간 좀 보시겠다 이건가?
이 아저씨가 누가 아쉬운지 감이 안 잡혔구만.
《아, 어떤 문제인지 이해합니다. 상의를 끝내시기 전에는 알리씨크로 돌아오죠.》
‘나중에 딴 영지에도 들를 건데? 첫 빠따 놓칠려고?’ 라는 암시였다.
딱히 당신만 이 나라에서 잘 사는 부자는 아니잖아? 우리 어르신이 뽑은 후보는 댁 말고도 몇 명 더 있는데?
《……노르드 님께서 시민들과 길드를 설득하는 일을 도와주신다면, 현지에서 하신다는 ‘개인적인 일’에도 조력해드릴 수 있을 듯 하군요.》
─질끈.
알리씨크의 영주는 손가락을 잘라내듯 두 눈을 감았다.
《어떠십니까? 새로 발견된 ‘제 17호 피라미드’나 현지의 종교인들과도 친분이 있습니다만.》
《……호, 그건 듣던 중에 반가운 소식입니다?》
즉, 성능을 어필하는 프레젠테이션이다.
자신의 의구심을 여타 상회나 길드, 시민의 알 권리로 포장해버리는 언변은 훌륭했다. 대가로 내 사적인 일을 도와주겠다는 기브 앤 테이크의 정신도 아주 훌륭하다.
‘70% 정도 따낸 셈인가. 뒷배가 있으니 일이 편하군.’
평민 대 귀족이었으면 이렇게 편하게는 안 풀렸겠지. 나는 티 안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원로원을 빽으로 둔 흑마법사 슬레이어 VS 나르메르-나일 영주라는 구도였기에, 내가 상대의 명줄을 늘려줄 수단으로 확실하게 갑의 자리를 낚아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
《크흠. 그렇다면 어떤 방식을 원하십니까? 데려오신 기술 장인은 몇 명 정도신지?》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이번에는 내 방심을 역으로 찔러들어오는 알리씨크의 영주.
하지만 나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달인은 호흡이 벅차 보여도 반격할 여유 정도는 남겨두는 법이랍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결국 저희가 제공할 병사용 골렘은 학습능력이나 코어를 뺀 부품이니── 중요한 부분은 마나 금속 프레임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역시 그렇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실례.》
나는 고개를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미리 정해둔 사인이다.
휘리리릭─! 착!
그러자 예술가의 거리의 언덕을 구경하던 한 명의 서커스 걸이 건물 위를 파쿠르 하듯 넘으며 내 옆에 착지했다. 등장 타이밍에 동반하는 공중제비 3연발은 서비스다.
─꾸벅.
무희처럼 차려입은 라리루라는 바짓단을 집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낮췄다.
당연하지만 우리 후배님은 이 나라 말을 모르기에. 멍하니 넋이 나간 영주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건 내 몫이다.
《소개 드리죠. 저희 아내인 라리루라입니다. 실력 있는 꼭두각시 술사이기도 하고요.》
《……크흠! 그 꼭두각시라는 게, 혹시?》
《예. 저희 회사── 아니, 길드가 황금시대의 유실기술로 총력을 다해 제작한, 최신예 프로토타입 MN입니다.》
MN. 다시 말해서 마리오네트(MarioNette).
골렘의 일종인 꼭두각시 인형을 가리키는 단어다. 당연히 원래 있던 말인데, 보고서를 쓸 때마다 자꾸 오타가 나는 게 빡쳐서 길드 안에서 이 말을 쓰기로 합의를 봤다.
‘원래 골렘 팔아먹던 제작자들한테서 일감이랑 뽀찌를 뺏어가려면, 우선 그 양반들 주둥이부터 꿰매놔야 할 것 아냐.’
결국 이건 기존 시장과의 밥그릇 싸움이다.
하지만 질 생각은 없다. 여론전으로 민주주의 국가 출신의 Z-용사에게 깝치다니 2천년은 이르다.
뉴스에서 보던 대기업의 하이에나 짓을 몇 개 흉내내다가 부품 조립의 외주를 맡겨보는 것도 좋다.
차차 현지에 자회사 공장을 세워두면 기존 시장을 상추에 쌈 싸먹듯 잡아먹을 수 있을 듯 했다.
내가 어디 판돈이 후달리는 것도 아니고…… 일이 그렇게만 되면 나르메르-나일에 끼칠 수 있는 듀나미스 길드와 어르신의 영향력도 존나 개떡상을 하지 않을까?
《다른 분들을 설득할 재료가 필요하다 하셨습니까? 일이 그러시다면 기존에 골렘을 공급하던 업체들과 골렘의 스펙을 겨룰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 막내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싱긋 웃었다. 라리루라도 대충 일 돌아가는 꼴을 눈치채고 따라서 웃었다.
현지 시장님이 자기 쌈짓돈을 써서 홍보 이벤트를 마련해 준다고? 시발, 공짜 마케팅은 못 참지.
이걸 써먹지 못 하면 싸장님 관두는 게 맞다.
《어디 보여드리겠습니다. 듀나미스 길드의 MN의 성능이라는 것을.》
우가우가 뗀석기 골렘 친구들은 간판 들고 일렬로 서시오. 차례대로 깨부숴 드릴게.
이세계에도 철기시대의 막이 올랐다, 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