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01화 (501/1,009)

─뚜벅, 뚜벅.

알리씨크의 영주는 공저(公邸)의 홀을 걸으며 말했다.

《신관 분의 기분은 어떠신가?》

《불쾌해 하시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그러한가. 서둘러 대접을 준비하게.》

집사장에게 명령을 내린 영주는 긴장한 심장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노회한 정치인은 그것만으로 수십 년 간 지어온 미소를 100% 재현해낼 수가 있었다.

은퇴해서 유유자적 인생을 즐겨도 될 만한 나이가 되고도 영지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위정자의 의무가 아닌, 영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성욕이나 식욕은 물론 밤잠조차 짧아진 노쇠한 귀족에게, 평생을 들여 가꾼 영지는 치적의 상징이었다. 나이 예순에 이토록 정력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치적에 또 하나 업적을 쌓을 기회가 왔다.

‘희귀금속에 버금가는 소재를 양산하는 기술. 그것만 소화해내면 알리씨크의 역사에 내 이름은 영원토록 남는다!’

수십 년 뒤에 어떤 미련한 후손이 보위를 잇더라도, 그의 동상이 있는 방향에는 오줌조차 갈기지 못할 것이다.

저주의 해소를 자처한 신관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무얼. 수십 년 전부터 해 오 던 일이다. 실수는 없다.

늙은 여우는 미소를 짓고 방에 들어서서── 그리고 턱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흠칫했다.

《앗…… 오, 오셨군요.》

심약해 보이는 눈매의 여인이 의자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두근.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면서 목에 피가 치솟았다. 영주는 그 감각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미소지었다.

《예, 예! 방문 감사하오, 시다나브 님!》

공손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아무리 상대가 종교 교단의 명망 높은 신관이어도, 알리씨크의 영주인 그가 이렇게나 정중하게 굴 의무는 없다.

하지만 이 한순간, 대답한 것은 영주로서의 그가 아니었다.

고개를 번쩍 든 것은 이미 20년도 전에 폭식과 주음으로 죽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의 남심이었다.

‘여신…… 인가?’

침을 삼키는 소리를 죽이고자 목에 힘을 줬다. 잊어버린지 한참 되었던 기분 좋은 긴장감이 손끝을 떨게 했다.

아름답다.

그 키타이 인의 여자들도 상당한 미녀였지만, 저 여신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꿀에 녹인 황금 같은 금발에 심약해 보이는 눈매. 손목을 잡아 이끌면 수줍게 눈을 피할 듯한 순결한 생김새가 남자의 온갖 욕구를 북처럼 거칠게 두들겼다.

투명한 피부는 마치 대리석으로 조각한 예술품 같다. 늘씬한 팔다리는 널널한 옷차림 안에서 꽉 조이는 허리를 간단히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저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은 또 어떤가?

마치 여성미라는 것을 빚어서 사람의 틀에 우겨넣은 듯한 극상의 미녀였다.

《……흐읏.》

그도 모르게 그만 향해 버린 시선에, 옷을 꽁꽁 싸입은 여신관은 빨간 얼굴로 가슴을 싸맸다.

《이, 이거 실례했소. 남의 옷차림을 훑어보다니, 내 그만 무례를 저질렀군.》

《아, 네……. 옷차림, 말이죠?》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음심을 완전히 숨긴 영주의 눈빛에 여신관은 마음을 놓은 듯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이 너무도 달콤할 것 같아 영주는 다시 침을 삼켰다.

《크, 크흠! 다시금 방문을 감사하겠소. 귀하의 집이라 생각하고 며칠이든 편히 있다 가시오.》

《감사합니다. 그, 저기…… 그래서 환자 분은?》

《노르드 경 말이오? 지금은 관광을 나갔소. 낙타를 빌려 피라미드를 보고 오겠다더군.》

말리고 싶었지만, 금방 돌아오겠다는 그를 억지로 만류할 변명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다행스럽다.

그가 남아 있었다면 이 천상의 미모를 가진 여신관도 자기 의무만 얼른 해치우고 도망쳐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이렇게 와준 분께는 미안하나, 며칠 정도 걸릴 것이오. 내 그의 태만한 한유(閑遊)를 막지 못했소. 사과하겠소.》

《아, 아니에요. 저희 나라의 자랑을 보러 가 주신 거라면, 신관으로서 기쁜 일이죠.》

여신관은 헤헤 거리며 웃었다. 그 순박한 미소는 운 좋게, 아니 ‘운 나쁘게’ 뛰어난 자질을 발견당해 종교 교단의 높은 직책을 떠맡겨진 시골 소녀의 비애를 상상케 했다.

‘……세크메트 교단의 여신관에는 어울리지 않군.’

몸에 감은 까만 천은 몹시 얇았기에 그 안의 몸매도 대충 견적이 잡혔다. 영주는 잠깐의 침묵 동안 머리를 굴렸다.

세크메트 교단.

살육의 여신으로 유명한 존재지만, 나르메르-나일의 신앙 체계는 매우 복잡하다. 주신이자 태양신인 ‘라’부터가 복수의 신격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잡스럽게 말하자면, 이 사막국가의 신들은 거의 대부분이 다중인격이다.

때문에 학살 신화를 가득 남긴 세크메트 여신에게도 다른 측면이 있다.

하토르(ḥwt-ḥr).

다산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암소의 여신.

무려 주신인 ‘라’의 딸이기에 세크메트-하토르는 태생부터 격이 높은 신이다.

그러나 파라오라는 살아 있는 신이 통치하는 이 나라에서 교단의 위엄은 크지 않다.

세크메트 교단이 모험가 길드 같은 천한 단체를 설립하며 타국에서 돈과 영향력을 벌어들이고 있는 이유다.

‘돈, 돈…… 돈이라.’

황금이라면 썩어넘치도록 있다.

알리씨크의 영주는 나르메르-나일의 제일 가는 부호는 아니었지만, 그의 남은 여생을 전부 들여도 전부 못 쓸 정도로는 재산을 쌓고 또 쌓아왔다.

하물며 죽어서 그 돈을 싸들고 갈 것도 아니잖은가?

그는 입을 가린 손 아래에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저 젊을 적에 첫사랑을 만나던 무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노르드 경과 친분이 있으시오? 교단 차원에서 연을 맺어두고 싶으시다면 사람을 보내겠소.》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대답해도 보내기만 할 뿐, 오히려 더 늦게 돌아오도록 종용할 것이다.

다행히 여신관은 깜짝 놀라서는 고개를 막 저었다. 그녀의 가슴은 옷 안쪽에 걸친 것이 없는지 손으로 감싸안아도 크게 흔들리며 풍만하게 출렁거렸다.

《저, 저 자신이랑은 따로 만나뵌 적이 없으실 거에요. 아, 하지만 교단에서는 친분을 맺고 오라고 들었……》

《시다나브 님.》

옆에서 호위인지 감시역인지 모를 여자가 한 마디 경고를 던졌다. 금발의 여신관은 힉 하고 몸을 움츠렸다.

과연, 미인계로군. 저만한 미녀라면 어떤 남자인들 낚이지 않을까. 영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그러면 내가 조금 도와드리지. 나도 며칠이나마 노드르 경과 분과 긴밀하게 지냈으니 그 분의 성품이나 취향 정도라면 조언해 드릴 수 있을 것이오.》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하하, 그러실 것 없소.. 귀하의 교단이 세간에는 용맹함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으나, 은의를 잊지는 않는다 들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내 아들놈이 전술에 소질이 없어서 교단의 지부를 설치할까 고민 중이었지.》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다. 고민하던 후보에 세크메트 교단이 없기는 했지만, 까짓거 지금부터 추가하면 그만이었다.

혹여 그 자신도 미인계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뭐 어떤가.

꽃뱀이건 방울뱀이건, 꼴랑 뱀에게 몇 번 물린 것 가지고 죽지 않을 정도로는 영지의 덩치를 불려왔을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러한 간교에 서투른지 여신관은 일어나서 열심히 고개를 숙여댔다.

영주의 입가에 손녀를 보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독사 중의 독사 같던 키타이 인에 비하면, 이 얼마나 귀여운가.

아마 침대에서도 꾀꼬리처럼 귀엽게 울어주겠지.

당연한 일이다. 다산을 관장하는 암소신을 섬기는 그녀가 어떤 ‘예배’를 맡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교단의 지부를 설치하겠다는 그가 예배를 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말이다.

《편하게 쉬시오. 저녁에 다시 뵙지.》

영주는 그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그의 노골적으로 기대에 찬 발걸음에, 여자의 눈으로 대충 속내를 읽어낸 여신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흐으으으…… 설마 또? 싫다, 정말…….》

《정말 싫으신 것 맞습니까?》

호위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여신관은 눈물을 그렁거렸다. 그 아이 같은 모습은 앳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바보. 진짜 싫단 말야. 왜 안 믿어 주는 거야……?》

《그랬습니까? 노르드 경의 소식을 듣자마자 쭈뼛거리면서 해주(解呪) 역을 자처하시기에 그만 착각했군요. 문란하다는 비아냥으로 들렸다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냥 아예 못 들은 걸로 할래.》

여신관은 후드를 쓰고 테이블에 공벌레처럼 엎어졌다.

도저히 몇 년 만에 세크메트 교단의 중추를 꿰찬 팜므파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노르드라는 분, 어떤 사람일까?》

후드를 꼭 붙잡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기대감이 묻어나오는 ‘대신관’의 말에 감시역은 못 말린단 뜻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소문 만으로는 모르죠. 얘기만 들었을 때는 저 영주님도 여자를 돌 보듯 한댔는걸요?》

《여색에 관심 없다는 남자 치고 나한테 예배를 신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걸. 그런 건 다 거짓말이야. 남자는 전부 고기만 보면 침을 흘리는 나쁜 늑대란 말야.》

《그건 대신관님이…… 후우, 말해서 뭣합니까.》

깜찍한 절세의 미녀가 옷자락 틈새에서 작은 볼을 부풀리며 자신을 쏘아봤지만, 그녀의 미모에도 익숙해진 감시역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어땠나요? 그 분이랑 만나봤댔잖아요.》

《…………?》

알현실의 햇빛에 비춰진 먼지를 신기한 것이라도 되는 듯 보던 여인은, 물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똑하고, 멋있어.》

그리고 물어본 사람이 되려 넌덜머리가 나도록 오랫 동안 생각을 거듭하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쫑긋. 엎드려 있던 여신관이 귀를 크게 세웠다.

《그치만, 싸울 땐 많이 시끄러웠어. 갸오─.》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에요, 네페르티티.》

감시역의 여성은 머리를 젖히며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이 개성적인 일행과의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반드시 장기 휴가를 받아내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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