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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한 직후, 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 일단 나쁘게 돌아가는 느낌은 아니야.’
나는 태연한 얼굴로 눈깔을 고정하고 좌중을 살폈다.
이 긴장감은 성적표를 뿌리기 얼마 안 남았을 때의 바로 그 분위기를 닮았다.
그리고 그 긴장감의 대상은 나다.
마치 저들이 내 ‘채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
내가 직감만 갖고 대충 지레짐작을 한 걸까?
아니다. 예민하게 가다듬어진 오감은 사교에 익숙할 귀족들에게서 보일 리 없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붙잡고 있었다.
‘뭔가 있긴 하군.’
마치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들끼리 ‘왜 우리가 을의 입장인가’에 대해 실컷 떠들고 있던 느낌.
누워서 떡 먹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지만, 이러다 그 떡 때문에 나까지 목이 멕혀 깨꼬닥하게 생겼다.
《담소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아무래도 신변잡기에 앞서 궁금하신 사항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회장에 가득한 긴장감에 되려 나까지 초조해졌지만, 나는 차분하게 대처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임기응변만 믿고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경직된 분위기라도 환기시킬 겸 가져온 선물부터 나눠드랄까 합니다만, 받아 주시겠습니까?》
《……선물이라? 그거 기대되는 말씀이시오.》
덩치 큰 마초남이 말했다.
미리 알아둔 인상착의에 따르면, 그가 이 마할을 다스리는 영주일 것이다. 나는 눈알을 고정한 상태로 그를 스캔하면서 사람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순수한 호의일 뿐, 타의는 없습니다. ──어이. 가져 와.》
라리루라와 베로니카에게 적당히 손짓을 했다. 누가 봐도 ‘이 새끼는 아내들한테 애정이 없구나~. 아내들로 협박해도 안 통하겠구나~’ 싶도록 말이다.
미리 언질을 들은 두 사람은 기분이 상한 기색도 없이, 저 문앞에서 트레이를 끌고 왔다.
─드르르륵.
─덜컥.
사막의 여행복으로 몸을 꽁꽁 싸맨 라리루라가 경매물품을 보여주듯 좌중을 향해 케이스를 열었다.
명품 상자처럼 까리하게 깎은 흑단 나무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있던 은괴가 드러났다. 나는 손을 벌리며 웃었다.
《약 777베카의 가공 미스릴 주괴입니다. 보편적인 단위로 말하자면 10kg 쯤 되겠군요.》
《칠백…… 이라 하셨소?》
‘베카’란 나르메르-나일에서 금속을 세는 단위다. 귀족들의 경악을 피부로 느끼면서 나는 대범하게 웃었다.
《하하. 옮겨오느라 제 아내들이 고생 좀 했습니다. 파티가 끝날 무렵에 종자들을 시켜서 받아가시지요. 초대객 여러분 전원 몫 만큼 준비해 왔습니다.》
《저, 전원? 대표 몇 명이 아니고 전원?》
《물론입니다. 일개 평민의 부름에 응해 주신 분들에 대한 제 소소한 성의라고 여겨주십시오.》
1kg짜리 미스릴 주괴 10덩이.
초대객은 10명이기 때문에 약 0.1톤 가량의 ‘선물’ 되시겠다.
돈 다발 싸대기가 턱에 개쎄게 들어가자 귀족들의 눈에서 신분에 근거한 오만함이 싹 사라졌다. 아주 좋은 흐름이다.
‘넹~ 기분 굿~.’
돈 지랄이란 어설픈 부자들을 상대로 할 때가 제일 기분이 째지는 것이다. 이게 돈싸대기의 참맛인가? 기분 째지네.
참고로 전부 수제이기 때문에, 구매가 1실버짜리 실버 바 대금이 제작비의 전부다. 내가 부여한 마나를 제작비에서 빼 놓고 계산하면 대충 그렇게 되겠지.
초대객 10명 당 10개씩 배부했으니 대충 1골드.
‘노르드 환율에 따라 원화로 1억원 쯤 되려나.’
국가 레벨 사업을 뚫는데 드는 로비 비용으로는 존나 저렴한 수준이었다.
은괴는 전부 현지에서 사들인 물건에, 제작에 걸린 시간도 며칠 안 된다. 이게 진짜 누워서 떡 먹기지.
《……노르드 경. 한 가지 묻겠소.》
휘황찬란한 미스릴 주괴에서 눈을 뗀 마할의 영주는 내가 뿌린 미스릴 주화를 내밀었다.
《이 주화와 저 많은 주괴로 추측컨대, 그대들 로마니아는 금속에 마나를 부여하는 기술을 개발한 듯 하군. 맞소?》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이 기술은 전적으로 듀나미스 공방의 소유입니다. 후원자이신 코르넬리우스 가주님께는 유통과 그밖의 문제를 도맡아 주시도록 청했을 따름입니다.》
《……이 기술이 그대의 것이라고?》
《공방장이 공방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 합니다. 일단 로마니아의 기술이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조금 슬프긴 하겠습니다.》
능청맞게 말하며 나는 연설하듯 설명을 뱉었다.
《제가 황금시대의 기술을 복원해서 손에 넣은 것은, 일반적인 금속에서 ‘마나 반발력’을 제거하고 매직 아이템의 소재로도 유용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미스릴을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어휴, 잘 아시네. 라인만 증설되면 미스릴 탄광 2~3개 쯤 되는 생산량은 떡을 치고도 남습죠.
이건 말하자면 석유재벌 정도는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저 일부 귀족들이 물고 태어나는 미스릴 수저를 노오오오력으로 손에 넣은 수준 되시겠다. 역시 사람은 능력이 되면 사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다 실토할 정도로 빡대가리는 아니기에, 나는 겸손한 웃음만 지었다.
《해 보기 전까지는 과신할 수 없는 일이죠. 단, 한계점도 있습니다. 천연 미스릴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지더랍니다.》
이 점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아니면 나중에 사기를 친 걸로 몰려서 쌩돈만 뜯기는 수가 있다.
《흐음……. 그건 큰 문제는 아니겠군.》
《그렇소. 그만큼 더 많은 양을 쓰면 해결될 일이니.》
《하하. 이거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엘리트 지능을 가진 눈치 빠른 일부 영주들은 바로 그 속뜻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길 바란다.
금은 은보다 비싸지만, 금 1덩이보다는 은 100덩이가 더 비싸다.
같은 이치로 고품질 미스릴을 좀 섞은 싸구려 장비나 골렘보다는, 이 인공 미스릴을 통짜로 도배한 장비가 훨씬 낫다. 새뱃돈도 만 원짜리 10장이 5만원권 1장보다 좋잖아?
‘그래서 이 사업에 묵직한 뒷배가 필요했던 거지만.’
세상에, 미스릴 프랜차이즈라니? 탄광만 믿고 배짱 장사나 하던 기존 미스릴 수저들이 얼마나 빡치고 펄쩍 뛰겠는가.
양구와 논산에 프랜차이즈 음식점 빌딩이 들어서는 것보다 더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며, 그걸 막으려면 나랏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어르신에게 나눠먹자고 딜을 건 이유다.
또 욕심에 눈이 멀어서 너무 많이 팔면 시세가 떨어진다.
그 왜, 중간유통 상인들이 시세 낮추기 싫다고 괜히 남는 계란이나 과일을 묻어버리거나 하지 않던가.
‘존나 우리는 그 놈들이랑 비교하면 선녀 아니냐?’
차라리 고품질 소량생산 명품백에 비교해다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다이아몬드처럼 시장에 나도는 물량과 시세 간의 조율도 해야 하고, 나 혼자는 무리가 많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어르신이랑 노나먹어도 내가 배 터질 만큼의 돈을 벌어들이게 된단 소리지만…….’
일단 그건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손가락을 세웠다.
《우선, 저희 듀나미스 공방이 최우선적으로 수출 계약을 맺고 싶은 상대는 나르메르-나일입니다.》
《호. 그거 참 기쁜 소식이오. 노르드 경, 그대는 물론이고 후원자이신 코르넬리우스 원로의 배려에 감사해야겠어.》
흐음. 해석하자, 해석.
정치적 수사는 왜 파파고가 안 통하는 건지 한탄하면서, 난 국어 1등급의 독해력으로 마할의 영주가 내뱉은 말을 열심히 사람의 언어로다가 치환했다.
대충…… ‘느그 후원자네 나라에다 먼저 안 뿌려도 되냐? 뭔가 이유가 있지?’ 정도로 해석하면 되나?
로마니아에 먼저 상로(商路)를 틀지 않는 이유라.
나는 순식간에 고민을 끝내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몰라레후.’
씨이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씹새야.
난 그저 어르신이 가서 거래처 좀 뚫고 오라 해서 출장온 영업맨에 불과한데.
일단 똥 마려운 놈이 휴지 찾듯 급한 놈들한테 가는 게 더 득이 될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는 건 알겠지만, 귀족들의 저 암투에 쫓아가려다간 내 야들야들한 가랑이가 황새 가라아게 만들듯 찢어지고 토막나 버릴 것이었다.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넘길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터였다.
‘……아니, 역시 그건 아니야.’
놓치면 안 될 개이득 찬스가 있다면 어르신이 언질을 줬을 거다.
만약 일부러 말을 안 했다면 이 기회를 붙잡느냐 아니냐로 내 맞짱 솜씨 외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후자라고 생각하니까 시발 갑자기 배알이 존나 꼴리네.
‘젠장, 모르겠다. 일단 꼴박해 보고 생각하자.’
여기서 그냥 넘어갔다가 떼먹히는 것보다는 낫지.
나는 내 턱을 쓰다듬다가, 의식해서 속내를 토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탄없이 말씀드리자면, 나르메르-나일을 거래 대상으로 낙점한 데에는 제 의견── 아니, ‘신념’ 문제가 컸습니다.》
《신념?》
《──흑마법사 말입니다.》
나는 씹어내뱉듯이 말했다.
나 스스로도 그들의 공포를 뒤늦게 깨달을 만큼, 거짓 없는 분노가 아랫배에서 거칠게 날뛰었다. 한 음절 한 음절에 스며나오는 억눌린 살의에 귀족들이 크게 흠칫했다.
좋아, 반응 좋고.
원래 거짓말에는 일말의 진실을 섞어야 하는 법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