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도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알리씨크의 투기장.
친교가 깊은 로마니아의 도움을 받아 세워진 정품 콜로세움에는 이 더위에도 불굴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요 2주 사이에 거창하게도 홍보한 기술 경연대회 덕분이었다.
《망할. 바로 어제 예선을 통과했는데 바로 본선이라니.》
엘펙스 공방의 하모예드는 이를 갈며 말했다. 벌써 몇 번째일지도 모를 불평에 공방의 주철장은 눈을 반개했다.
《자기가 제비뽑기 운이 그렇게 좋다면서 소매를 걷을 땐 언제고.》
《아, 거 안 닥치냐? 오늘 바로 대전이 잡힌 건 아니니까 됐지.》
《말씀이 1분 전하고 다르시잖아요.》
《시꺼. 휴식을 포함해서 1회전을 1시간 정도로 잡아보면 우리 차례가 오기 전에 오늘 일정이 끝날 거라고.》
만약 시합 하나가 순식간에 끝난다면 그들이 남은 시간을 채우고자 끌려나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어제 큰 돈을 주고 고용했던 골렘 조종사도 ‘예선을 넘은 놈들은 하나같이 외국인인 나도 들어봤던 걸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모예드는 치열한 접전을 직감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흑마법사들을 멸망시켜 버려요──!!!》
경쟁 후보의 실력을 보고자 일부러 대기실을 나와서 관객석에 앉았기 때문일까. 대회 시작에 앞서 영주의 아들과 함께 훈사를 나온 사내에게 쏟아지는 환성이 귀가 아플 지경이다.
하모예드는 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저게 그 브리타니아의 흑마법사 사냥꾼인가? 뭐야, 생각보다 그렇게 노랗진 않네.》
《그거 인종차별이에요. 아, 그래도 저 사람, 확실히 이런 대규모의 공식석상에 나선 건 처음이라더군요.》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냐, 새끼야. 아무튼 그러면 지금 소리치는 사람들도 다 처음 본다는 뜻이네?》
외국인의 얼굴을 구분하는 건 어렵다. 옷차림도 평소부터 입을 듯한 옷이 아니라 예복이었기에, 하모예드는 저 유명한 전사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눈을 부릅떴다.
대회 시작일 때부터 부재였던 영주는 이 자리에도 나오질 않았다. 건강이 안 좋다는 소문이 진짜인 걸까.
《……우승 보수는 제대로 줄 수 있는 거겠지?》
하모예드가 인상을 쓰는 사이에도 노르드의 훈화와 격려는 이어져, 몇 분 지나지 않아 끝났다.
《감사합니다, 관객 여러분! 틸리오 영주 대리님과 노르드 님께서도 열렬한 환성에 감격스러우시다고 합니다!》
사회자를 맡은 남자가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그러면 바로 시작할까요?! 본선 첫 대전은 신생 듀나미스 공방의…… 어, 리, ‘링링이 6호’!! 그리고 스타라야 공방의 ‘아크 프로토타입 커스텀’입니다!!》
잠깐 기이한 참가자명에 당황한 듯 하던 사회자는 숙련된 말솜씨로 관객의 열광을 지속시켰다.
하모예드와 주철장은 눈빛을 교환했다.
《……듀나미스 측의 상대가 너무 노골적인데?》
《대전표가 조작된 걸지도 모르죠.》
스타라야 공방은 본선 참가자 중에서도 한 끗발이 모자란 공방이었다.
시드 참가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룰로 본선 진출을 부여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첫 대전 상대가 참가자 중 최약체라니? 다른 공방과 길드의 관찰자들도 썩 우스울 것이다.
하지만 하모예드는 차라리 잘 됐다며 웃었다.
《후보의 둘이 헛바람 든 놈들이라. 이거 잘 됐군.》
《대진표 상 저들이랑 다음에 붙는 게 우리니까요?》
《크흐흐. 그렇지. 이거 승리 1번을 공짜로 줍겠군. 어때, 내가 대진표 운이 좋긴 하지?》
《예이, 어련하십니까.》
그들은 긴장을 풀고 대회장을 바라보았다. 두 공방의 참가자들이 각자 골렘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하모예드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나스타 성벽’의 웬조라. 개자식들, 돈 좀 썼군.》
남부 영지의 나스타를 습격한 몬스터의 군대를 골렘 3체로 반나절 넘도록 지체하고, 지원군이 찾아올 시간을 벌었다는 10년 전의 영웅이다.
모험가가 아니라 모 캐러밴의 직속 호위였지만, 개인적인 솜씨로도 최소 플래티넘 급은 될 거라는 마법사였다. 골렘의 퀄리티에 따르겠지만 범상치 않은 상대인 것이다.
‘스타라야 놈들, 모자란 기술력을 커버하려고 유명한 놈을 고용했나.’
쿠웅, 콰앙…!
마법사답지 않게 근육질인 웬조와 그에게 맞춰 커스텀을 한 대형 골렘이 회장에 올라왔다. 골렘의 오른팔에 붙은 커다란 말뚝이 인상적이었다.
‘참가자는 대장장이 길드의 기술 검사를 통과한다. 투자할 수 있는 재료의 레벨은 제한되어 있어.’
하모예드는 눈을 크게 떴다. 저런 커다란 골렘은 그만큼의 코어가 없다면 둔중해질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역전할 수가 있다고 봐야 하겠지. 관객들도 숨을 죽이며 대회장에 주목했다.
─사박.
그에 맞서는 이는 누가 봐도 가녀린 여인이었다.
사막의 무희가 밀행할 때처럼 몸을 가렸지만 소녀라고 봐도 무방할 체격이다.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무섭게 생긴 골렘도 크기는 작지 않았지만, 웬조의 골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끝날 싸움을 예상했다.
《……그게 소문으로 듣던 신형인가, 아가씨.》
하지만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는 웬조 본인도 속해 있었다.
《이야기는 의뢰주에게 들었다. 아스트레완 연맹의 영주들에게 배포했다는 인공 미스릴. 꼭두각시의 제작 재료에 그런 고급 소재는 쓸 수 없게 되어 있지만, 보통의 ‘은’임을 입증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라리루라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물론 답변이 돌아오건 말건, 웬조는 임전태세로 손가락을 힘껏 쥐었다. 그 손가락보다 굵은 마나의 실이 대형 골렘의 몸에 파고들면서 골렘의 눈에 빛을 켰다.
사회자는 양자가 준비를 마쳤다는 걸 깨닫고 목청을 높여 시작을 고했다.
《시합을!!!! 시작합니다!!!!》
데에에엥─!!
콜로세움의 벨이 크게 울린 순간, 골렘의 관절부에서 냉각 가스가 뿜어졌다.
《대회에 앞서서 인공 미스릴의 현물을 넘겨준 건, 네 고용주의 실수였다!》
골렘의 기능을 조작하자 무대가 냉각 가스로 뒤덮혔다.
상대 골렘 외의 대상을 공격하는 건 룰 위반이지만, 그럴 걱정은 없었다. 골렘 시리즈 ‘아크’는 장기전을 상정하고 만든 지휘관 기체다. 마나의 미세한 조작은 기본 기능이었다.
《너희들만이 골렘에 인공 미스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1주일만에 완성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사업을 진행한 노르드의 미스다.
웬조는 냉각 필드를 전개하며 골렘을 전진시켰다. 반응도 하지 못한 소녀의 골렘은 수분을 포함한 눈보라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물이 없는 곳에서 저 정도의 얼음 마법을!》
하모예드는 눈앞의 전투에 경악했다. 조종사의 마나, 혹은 룰 위반의 고급 소재를 쓴 골렘인가?
높은 곳에 위치한 심사위원석을 보면 그런 듯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타나야 공방은 사전에 검증받은 재료로 저런 출력을 냈단 말인가?
냉각의 어려움은 양산품의 골렘에게 중대 문제다. 만약에 저 기체가 지휘관기로 보급된다면, 저 냉각 필드 안에서만은 일반 골렘들도 어렵지 않게 태양 아래에서 장기전이 가능할 것이었다.
《원망은 너를 배려하지 못한 네 남자에게 하거라!!》
웬조의 골렘이 말뚝을 찔러넣었다.
얼어버린 적을 박살낼 미스릴 말뚝이었다. 충격파 마법의 술식을 복층으로 쌓아둔 말뚝이 코어의 마나를 모아서 링링이 6호의 가슴을 쳤다.
─콰앙!!
얼음이 박살나며 흰 냉증기가 피어올랐다.
《후우…….》
어린 아이의 장난감을 부순 듯한 미미한 최책감을 느끼며 웬조는 골렘을 후방으로 물렸다.
일격으로 끝냈을까? 설마. 아무리 노르드가 달인급의 전사라도 골렘 간의 싸움을 그렇게 얕봤을까.
반격의 공세를 예측한 웬조는 필드의 냉각 기능을 기체에 돌렸다.
─후욱!
하지만 냉증기가 가라앉았을 때, 그곳에서 생채기 1개 없이 번쩍이는 상대의 모습에는 웬조 역시 기함하고 말았다.
《……지금 걸 장갑의 방어력만으로 막았다고?》
《음. 미안해요. 저, 이 나라 말 잘 몰라요?》
어색하게 나르메르 어를 내뱉은 소녀가 골무를 낀 검지를 앞뒤로 까딱했다.
키이이이잉─!! 외부에서 들릴 정도의 코어 회전률이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꼭두각시 인형을 달리게 했다.
짐승의 턱처럼 손을 오므린 꼭두각시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분홍색의 마나를 뿜어냈다. 〈마법의 화살(Magic Missile)〉을 사출하는 기관을 사용한 마나의 전기톱이었다. 웬조는 말뚝으로 공격을 막았다.
증기와 마나의 폭발이 터져나왔다.
인공 미스릴은 과연 적기의 공격에 견뎠다. 하지만 수량이 한정된 만큼 말뚝에 코팅한 미스릴은 적었고, 기체 내부까지 돌린 미스릴은 그보다 더 적었다.
논할 것도 못 되는 출력 차이에 손톱을 막은 골렘의 오른팔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1합만에 출력 저하라고?!》
〈에잇, 에잇.〉
라리루라가 꼭두각시에 연결한 한 손을 휘저었다. 말뚝을 눌러서 기체를 제압한 링링이 6호가 다른 손으로 커다랗게 원무를 그렸다. 미스릴 말뚝을 연결한 팔이 잘려나갔다.
《얼어라!》
웬조는 적이 피하지 못할 틈을 노려서 냉각 필드를 최소한으로 좁혔다. 다시 한 번 시합 초반처럼 냉기가 꼭두각시를 휘감아서 얼음 기둥으로 만들었다.
‘아까 전을 보면 자기 힘으로 빙결 상태를 빠져나올 수는 없었어! 얼린 채로 말뚝으로 손톱 병기를 부순다!’
대형 골렘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으로 떨어진 팔을 걷어찼다.
잘려나간 팔과 함께 튀어오른 말뚝을 다른 손으로 잡아서 손목을 후려쳤다. 관절이 많은 만큼 코어를 덮은 가슴과 비교하면 방어력이 취약할 것이었다.
키이이이잉─!!
말뚝이 닿기 직전에 꼭두각시의 코어가 마나를 터트렸다. 얼음 덩이를 부수며 기체의 어깨와 허리, 손목이 열렸다.
〈전탄발사♡ 멋진 단어네요.〉
라리루라가 속삭이자 꼭두각시 인형의 전신에서 충격포의 광선이 뿜어졌다. 지척까지 다가온 웬조의 골렘에겐 피해낼 틈도 없었다. 8줄기나 되는 레이저가 골렘을 덮쳤다.
콰아앙─!!
웬조의 머리 옆을 날아간 스타나야 공방의 걸작은 관객석 쪽의 보호 결계에 부딪히며 팔다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머리를 보호한 투구의 옆을 사선(射線)이 지나갔다.
《어헉!》
왕가 직속 기사의 갑옷만큼 단단할 골렘의 외장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공격이 눈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자, 당당하게 섰던 웬조는 무릎에 힘이 풀렸다.
─휘오오오오!! 골렘이 날아가며 일으킨 바람의 휘말린 그 역시 무대의 밖으로 나자빠졌다.
시합이 개시하고 곧바로 적을 압도하는 듯 하던 스타나야 측의 골렘이 순식간에 역전패를 당하자, 황망해진 관객들은 환호성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사회자는 어떻게든 그들보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시, 시합 종료! 골렘이 파괴되었으므로, 승자는 듀나미스 공방의 링링이 6호! 링링이 6호입니다!!》
《와, 와아아아아!!》
얼떨떨해 하던 관객들은 뒤늦게라도 환호성을 올렸다. 좀 기세가 부족한 박수와 환성이 투기장에 울렸다.
엘펙스 공방의 주철장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방장. 저희 조종사 불러 올게요.》
《……그래. 오늘 우리 시합까지 치르겠다.》
그리고 다음 상대가 ‘저거’라면, 아마 오늘 시합이 그들의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엘펙스 공방의 두 사람은 며칠 뒤의 패배를 벌써부터 직감한 듯 고개를 떨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승부를 끝낸 라리루라는 얼굴을 가린 채 손 키스를 날려주며 익숙하게 무대에서 퇴장했다.
“음. 시작 좋고.”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좆밥들 싸움이라면, 그 다음으로 재밌는 건 엔터테인먼트가 포함된 일방적인 압살이다.
VIP석의 노르드는 딸이 참석한 스포츠 대회를 보는 아버지처럼 박수를 쳤다.
“장하다, 라리루라. 대회를 네 손으로 멸망시켜 버리렴.”
토너먼트 형식의 대회는 순살이 국룰이지.
원래 이런 건 질질 끌면 재미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