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22화 (522/1,009)

티르시와의 정사를 마친 다음날.

“나의 그대여. 일이 끝났다. 창을 받아가거라.”

내일 있을 전투를 대비하던 나한테 베로니카가 말했다.

받아가라니, 들고 온 게 아닌 건가? 힐끗 보자 그녀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응? 뭐, 알았어. 어디 있는데?”

“쓸데없이 남는 방에 봉인해 두었다. 그대가 곧 싸울 예정이라고 들어서 무리 좀 했느니라.”

“……봉인?”

“와 보면 안다.”

오라길래 갔다.

베로니카가 데려간 방에는 내 무기인 미스릴 창이 있었다. 단, 마법진에 구속돼서 붉은 스파크를 파직거리면서 말이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룬의 만다라와 거기에 포박당한 익숙한 창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건 또 뭔 일이야? 마물이라도 봉인해 둔 줄 알았네.”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 누굴 닮았는지 도통 말을 들어먹질 않으니.”

베로니카는 다 식은 차를 홀짝였다. 내가 손님으로 불려가거나 했을 때, 맛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찾아내서 선물한 것들이었다. 세트로 구매한 쿠키는 다 먹었는지 부스러기 뿐이다.

─달그락. 그녀가 잔을 내려놓았다.

“결론부터 말하마. 이 창을 그대를 닮아가고 있다.”

“닮아가?”

“구신의 마나를 해치웠을 때 발생하는 마나 계승.”

찻잔을 비운 베로니카는 본론을 치고 들어왔다. 내 눈깔은 멍청하게 동그래졌다.

“분신, 혹은 혼이 깃든 무기라고 부르자꾸나. 그대도 종종 말했었지? 창으로 구신의 마나를 가진 적의 영혼을 부쉈을 때, 마나 계승이 발생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래.”

그걸 의심했기 때문에, 나는 호르샤의 부하를 족칠 때는 의식해서 창 이외의 수단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호르샤의 거처를 알아내고자 성벽을 부쉈던 놈을 죽였을 땐 특히 더 그랬고.’

일단, 내 마나 계승 현상은 순서별로 나누면 3단계가 된다.

1. 구신의 마나를 가진 적을 죽인다.

2. 죽인 놈의 영혼이 사라진다.

3. 그 과정에서 일부의 마나가 흡수된다.

이렇게 세 개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때문에 적을 죽인 다음에도 영혼이 사라지기 전에는 내가 마나를 흡수하지 못하고는 하는데, 나는 그 틈에 영혼을 심문하거나 정보를 빼내곤 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구신의 마나란 룬의 마나나 트롤, 홉 고블린, 유니콘 흑마법사의 골렘과 같이 원래 모습을 잃고서 타락한 이들이 보유한 마나.

혹은 〈편찬대대〉의 <인신>과 그 실패작들의 마나를 전부 아우른다.

그래서 신이 못 되고 하프 오크로 변이돼 버린 타뷸라나, 유니콘 흑마법사의 잡템을 주웠던 홉 고블린을 족쳤을 때는 내 마나통이 늘어났던 것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뜻을 곱씹다가 말했다.

“내 창도 그런 놈들의 마나를 흡수하도록 변해가고 있다는 얘기야?”

“그렇다. 변화의 계기는 그 예르나라는 엘프를 해치웠을 때, 그대가 부러진 창을 복구한 시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대의 마나가 강하게 타통한 것으로 동조가 시작된 거겠지.”

“엥? 그건 너무 오래 전 일 아니냐? 그 무렵에는 전혀 위화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계기라고 했잖느냐. 아마 마지막 원인은 오러를 각성했던 것 때문이겠지. 그대와 창이 하나가 된 시점이니까.”

무협지에서 말하는 신검합일 같은 건가.

‘조금씩 변하던 중에, 내가 흑마법사랑 조디버그의 여왕을 해치우려고 오러를 창에 타통시켰던 게 마지막 계기가 됐다?’

그리 생각하던 나는 혀를 찼다.

답이 나오지도 않을 추측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그렇게 변한 내 창이 어쩌다가 먹물까지 마셔대는 병신이 됐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먹물쟁이긴 하지만 그게 먹물을 벌컥거리며 마신다는 뜻은 아니잖은가.

내 창이 나를 파쿠리해가고 있다 해도, 그건 캐릭터 해석 실수라는 말이지.

베로니카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저었다.

“관계가 왜 없겠느냐? 마나 계승의 원리를 생각해 보거라.”

“마나 계승의 원리? ……어?”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 보자.

마나 계승.

서로 닮은 마나끼리 공명하는 것으로, 어느 한쪽의 마나가 다른 쪽의 마나통으로 흘러들가는 현상.

다시 말하자면.

“……내 몸에서 나온 어둠과 음의 마나니까, 내 창이 그걸 흡수해 버렸다는 얘기야?”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겠더군. 저 창은 다른 이의 마나를 거절하잖느냐.”

그 항마력의 부가효과 때문에 마법진까지 펼쳐가며 분석한 베로니카는 조금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하지만 한때 어둠과 음의 마나를 한가득 머금었던 이 창이라면, ‘그대의 마나’이면서 ‘어둠과 음의 마나’이기도 한 마나 덩어리를 흡수한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런 거였나?

내가 보유한 마나 계승 능력은 상당한 편식쟁이다. 고기만 쳐먹고 나물은 거들떠도 안 보는 타입이란 말이지.

어쩐지 이세계에는 〈편찬대대〉처럼 내 예비 마나통 후보들이 넘쳐나긴 하지만, 실제로 발동하지 않는 상대한텐 절대 발동하지 않는 입 짧은 능력이다.

‘내 창도 그런 점을 닮았다면?’

그렇다면 이때다 하고 오염된 성수를 흡수했을 만 했다.

이미 폭주 상태에서 먹어보고 맛을 들인 어둠과 음의 마나인데, 거기다 내 몸에서 풀풀 풍기고 있기까지 하다면 이건 먹어도 된다 싶어서 홀라당 빨아먹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 시발, 잠만. 그러면 뭐야? 기껏 빼냈던 마나가 도로 흡수된 건가?”

“그건 다르지. 흡수의 주체는 그대가 아닌 그대의 창이다. 창이 적의 마나를 대신 계승해도 그대의 마나량이 늘더냐?”

“아니, 그렇진 않았는데.”

“창이 흡수한 마나는 창 스스로의 강화에 사용된다. 얼핏 살펴보기로는 자아를 가지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식물이 물을 마시며 성장하는 것과 같을까.”

─하암. 베로니카는 말하다 말고 하품을 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마나를 확인해 보자, 평소보다 확연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자주 보는 사이인만큼 몰라볼 수가 없다. 고맙게도 하룻밤 동안 많은 고생을 해준 모양이었다.

찔끔 난 눈물을 닦으며 베로니카가 말했다.

“으흠. 뭐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눈치군.”

“응. 피곤할 텐데 미안하지만, 혹시 그러면 그 어둠과 음의 마나를 여기에 담으면 창대가 썩거나 그러려나?”

“설마. 그대는 금속이나 창대를 살아있다고 여기느냐?”

“아니, 그렇진 않지만…… 나무는 썩긴 하잖아?”

“바보 같은 소리. 마나의 작용은 물리법칙과 사뭇 다르다. 그대의 말 대로라면 그 유니콘 신족의 흑마법사 녀석은 흑마법으로 골렘을 만들지도 못했을 테지. 흙이나 시체라고 썩지 않는 것도 아닌데.”

“아하.”

그 납득이 가는 결론에 순간적으로 머리에 번개가 스치는 것만 같았다. 직관적인 깨달음이었다.

“어? 그러면 내 신체의 오염을 모조리 창에 몰아넣으면?”

“관두도록. 어떤 결과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제길. 그게 또 그렇게 되나.”

하긴, 뭐든 도가 지나치면 좋을 것 없다.

몸에 좋은 음식도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나지 않는가. 내 창을 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새 나름 애착이랄 게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창으로 흑마법사를 꿰뚫는 걸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대와 달리 마나 계승의 범주가 좁은 만큼, 흡수하지는 않겠지.”

─뚜둑! 마법진에서 창을 뜯어내듯 가져온 베로니카는 그걸 팔찌로 만들어서 내 팔에 채웠다.

“대신, 마나를 계승할 수 있을 법한 적이 상대라면 창으로 영혼을 꿰뚫는 것도 고려해 보도록. 존귀한 이에게는 그에게 어울리는 병장이 필요한 법이니.”

베로니카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한쪽 눈을 감았다.

“……놈들과 싸울 것이냐?”

“응. 우리 아내님들을 대신해서 같이 싸워줄 사람들을 구하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수확을 거두러 가야지.”

“……흥. 이제 와서 말리진 않으마. 몸 성하게 돌아오기나 하도록.”

“당연하지. 근데 누가 들으면 내가 지금 바로 싸우러 가는 줄 알겠어? 안 죽고 돌아올 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려.”

나는 베로니카에게 키스를 하며, 못내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달랬다.

이 나라에서 할 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나는 톨리오를 찾아가서 소식을 전했다.

〈임모르탈리스〉의 끄나풀을 찾아내서 잡으려고 하는데, 협조해줄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맡기고 싶은 건 주로 시민의 피난이었지만 이 새끼는 아주 좋아 죽으면서 수락하더라. 뭐지 시발. 이 새끼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부탁한 내가 다 당황스럽네.

‘잘 풀렸으면 된 건가?’

머리를 긁으면서도 밖으로 나와서 시다나브를 찾았다.

내 몸의 저주를 해소하는 건 아직 이르다. 그녀의 마나가 하루아침에 해소되진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나려고 하는 건, 당연히 그녀가 아닌 그녀의 호위 쪽이었다. 사막국가에 어울리는 정원에서 헤픈 얼굴로 과자 따위를 먹고 있던 시다나브는 내 등장에 손을 흔들었다.

“아, 오셨네요~. 티 타임 같이 하실래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침에 과식을 하고 와서.”

“앗, 그러셨구나. 오늘은 네페르티티를 보러 오셨나요?”

“예.”

눈치가 빠르다. 사람이 맹탕 같은 거랑 눈치는 별개인가.

시다나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쪽을 가리켰다.

호위라고 하기엔 좀 먼 위치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귀걸이를 한 하늘색 머리카락의 미녀였다.

반 년 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여인은 주저앉아서 뭔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슥. 그녀가 들어올린 손가락에 쬐끄만 전갈이 집게로 매달려서 독침을 찔러댔다.

뭐하고 있는겨, 저 사람은.

푹, 푹─!

당연히 그까짓 전갈의 독침으로 미스릴 클래스의 여전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진 않았지만 웃기는 광경이긴 했다. 생긴 것만 보면 네페르티티도 독침은 커녕 바늘에 찔리기만 해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앓아누울 것 같은데 말이다.

“……누구?”

내가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네페르티티가 머리를 돌렸다. 그 틈을 노려서 집게를 놓은 전갈은 메다닥 도망갔다.

나는 그걸 눈으로 흘기고서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 얼굴, 기억하십니까?”

“……응. 오랜만. 기억 나.”

“그때 다치신 팔은 다 나으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끄덕. 소리도 없이 머릴 끄덕이고 일어나는 네페르티티.

몽유병 환자처럼 멍하니 기운 없는 무표정은 카리스마랄 게 전혀 없었지만,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달인의 기척은 수십 번의 레벨 업을 거친 Z-전사 강북호도 긴장할 만한 것이었다.

‘……뎃?’

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어깨의 힘을 풀었는데, 그녀는 코 앞까지 다가오면서도 발을 멈출 기척이 없었다.

─스슥.

그래서였을까. 내 발은 저절로 문 워크를 밟았다.

─샤샤샥.

그러자 네페르티티도 조용히 쫓아왔다. 우리는 정원을 한 바퀴 돌 기세로 둥글게 둥글게 손을 잡지 않은 채 강강술래를 추었다. 이건 또 뭔데 시발.

네페르티티는 갑자기 멈춰서서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왜 도망쳐? 안 잡아먹어.”

“그러는 네페르티티 씨는 왜 쫓아오십니까?”

“쫓아간 거 아냐. 네가 도망친 거야.”

음, 그게 그거 아니니? 혹시 좀 띨띨하신가?

내가 사차원 사고를 가진 그녀의 남다른 어법에 황망해진 틈에, 네페르티티는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달인의 보법이다.

후퇴하지 못한 나에게 네페르티티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입김은 고사하고 콧김도 닿을 거리다. 내가 재채기를 했다간 입술끼리 부딪혀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는데, 나는 뭐라 말하기 힘든 달인의 위압감에 놀라서 멈칫했다.

“……신기하다.”

─갸웃.

다시 고개를 모로 꼬는 네페르티티.

그녀는 내 얼굴을 뜯어살피다가 티없는 표정으로 가슴이나 어깨를 주물러보기 시작했다. 왜 과일을 만져보는 어린애들 같은 느낌이지. 혹시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노예였던 시절로 돌아왔나?

“네, 네페르티티! 뭐 하시는 거에요! 부럽, 아니 무례하게! 아흑!”

그 꼴을 보던 시다나브가 화들짝 놀라서 달려오다가 넘어지기까지 했지만, 네페르티니는 완전 무시였다. 미동도 없다.

하긴 그녀 쯤 되는 달인이라면 대사제고 뭐고 무시해도 될 법은 했다. 시골 귀족이라지만 헨네시스 영주의 초청마저도 씹고 제 갈 길을 가버렸던 마이페이스 사차원녀가 아니던가.

“응? 으응….”

조물 조물….

집요하리만치 내 상체를 주무르던 네페르티티는 빵 반죽이 부풀어오르는 걸 처음 보는 소녀처럼 신기한 듯 말했다.

“……응. 역시 대단해.”

“뭐가요? 제 근육이?”

“아냐. ……응, 아니. 맞을지도.”

TV에서 늑대의 하울링 소리를 들은 포메라니안처럼 좌로 우로 머리를 비트는 네페르티티.

뭐 대화하는 사람까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네. 그냥 대충 훑어봤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긴 속눈썹이 까딱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더 설명해 주실래요?”

“설명? 설명…….”

입 속에서 내 말을 되새김질하던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알던 너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어.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거야 뭐, 마지막으로 뵌 게 무려 반 년 전입니다만.”

“무려? 아니야. ‘고작’ 반 년. 반 년만에 이렇게 쎄진 사람, 처음 봤어.”

네페르티티는 내 급속 성장에 관심을 가진 듯, 소식으로는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눈부신 성장에 눈을 빛냈다.

“있지.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빨리 강해졌어?”

“……맛있는 음식과 적당한 운동. 그것 뿐입니다.”

B급에서 S급으로 성장할 수 있는 희대의 비결을 읊으면서, 일단 네페르티티의 얼굴을 뒤로 밀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거리감이 없어졌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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