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 프랑은 티르시가 뿜어낸 바람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바닥에 착지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티르시가 받쳐안았다.
피잉─!
마나의 실로 포박당한 이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게 되자, 코뤤투스는 사로잡힌 인질을 해방시켰다.
〈……제기랄!〉
단지, 그의 탄식은 인질을 잃어서가 아니었다. 코뤤투스의 눈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마나 소모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프랑을 쏘아보았다.
저런 계집애가, 마나를 품은 금속을 무(無)에서 창조했다는 말인가? 그것도 부작용이나 대가도 없이?
흑마법의 대가였던 아비두스조차 재료 없이는 나약한 골렘밖에 만들지 못해, 마법으로 만들어낸 골렘들은 흑마법으로 잠시 강화하는데 그쳤는데?
〈……헛소리!〉
─쫘아악!! 코뤤투스가 팔을 휘두르자 골렘의 포박을 피한 3명의 인질이 백토인형을 공격했다. 영주 대리의 지시로 이 투기장을 지키던 경비대장의 칼날이 하얀 금속을 후려쳤다.
챙강─!!
하지만 부숴진 것은 경비대장의 칼이었다.
플래티넘 클래스 수준의 전사로 코뤤투스가 습득한 무예를 펼쳤지만 흠집을 내는데 그쳤다.
안에 사로잡힌 인질에게는 미처 칼날이 스치지도 못했다. 코뤤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 시간 음지에서 〈암회〉를 이끌던 그는 알았다. 저만한 강도는 미스릴 정도가 아니면 찾아보지 못하는 수준이다. 일시적인 마법이라고 해도 그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부술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람들, 피난시킬게…!!”
힘겹게 외친 프랑은 백토인형에 올라타며 인질들을 결계로 피신시켰다. 흙 골렘과는 격이 다른 속도였다.
─쿵쿵쿵쿵!!
그리고 마치 그들과 교대하듯, 선수가 입장하는 문에서 몇 사람의 골렘 조종사들이 골렘과 함께 나타났다.
《지금이다!! 가즈아아아!!!》
《듀나미스 공방을 도와라!! 제압 못한 인질을 포박해!!》
라리루라의 1회전 상대였던 웬조가 얼음 결계를 전개했다. 시합을 보러 왔던 탈락자나 직전의 경기로 골렘이 엉망이던 선수들까지 골렘을 꺼내들고 돌격했다.
코뤤투스가 본성을 드러냈을 때부터, 흑마법사에 맞설 힘을 가진 선수들이 때를 기다리다가 나타났던 것이다.
《제기랄! 씨부랄! 해치워!! 1명이라도 인질을 더 구해내!!》
《……아무 것도 안 하면 저도 공방장도 흑마법사 혐의로 목 매달리게 생겼으니까요.》
《그딴 소리 하지 마아악──!!》
코뤤투스에게 선수 자격을 내준 엘펙스 공방장 하모예드도 눈물을 콸콸 쏟아가며 골렘을 풀었다.
〈하! 생각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몰려드는 적들의 기세는 죽음마저 각오한 듯 결연했지만, 코뤤투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환영했다.
골렘? 선수들?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허술한 적이 상대라면 그의 무기를 늘려줄 뿐이다. 계집애 1명이 마나를 탕진해가며 훔쳐간 도구를 보충할 기회였다.
그의 손가락에서 뻗은 보라색 마나가 선수들의 몸 곳곳에 달라붙었다.
─파직!!
하지만 그때, 하얀 빛이 튀며 마나의 실이 선수들의 몸을 지켰다.
코뤤투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악귀나찰처럼 비틀렸다.
이 광채. 아르마알스 가문으로 잠입했던 그를 축출해냈던 성스러운 마나. 신성력이었다.
《또 그 망할 신성력에, 빛의 마나……!! 어떤 놈이냐!!》
《나다, 이 빌어먹을 흑마법사 자식아!!! 어떻게 수렵신 님의 가호를 빠져나갔는지는 몰라도, 사티스의 사냥개로서 죽는 한이 있어도 너만은 데려가고 말겠다!!》
사티스 교단의 사냥꾼은 분노로 턱을 떨면서 마나의 활을 겨눴다.
그의 신성력으로 만든 화살에 맞은 선수들은 외부의 마나를 튕겨냈다. 사제가 가진 항마의 마나였다.
〈사, 살아 계셨어요?〉
라리루라는 어벙하게 입을 벌렸다. 저 사람이 노르드가 이 투기장에 배치한 흑마법사 탐지원일 것이었다. 설마 아직도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맞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눈치챘어야 했는데, 저따위 인간 말종이 사모님의 대전 상대로 숨어드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다니……!!〉
〈사, 사모님?〉
어안이 벙벙해진 라리루라. 투기장에 배치됐었던 사티스의 사냥개는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책했다.
흑마법사 사냥에 여생을 건 사람답게 내버려 두면 자신을 탓하며 자살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그의 그런 모습에 라리루라의 뇌리에 깨달음이 스쳤다.
〈……아뇨, 아니에요! 자책 마세요! 덕분에 놓치고 있던 걸 눈치챘거든요!〉
〈……예?〉
코뤤투스가 작전의 모든 개요를 알고 탐지를 막아냈던 게 아니었다면, 그가 흑마법사를 감지하는 이들의 탐지 능력에서 벗어났던 이유가 뭐였겠는가.
거기에도 마땅한 인과관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승산도 약간 높아졌다. 라리루라는 6호의 등에서 내렸다.
〈무대 난입도 이쯤 되면 그럭저럭 볼 만 하네요.〉
─휘오오! 바람을 타고 그녀의 곁에 티르시가 착지했다. 찬 공기가 사막의 열을 걷어냈다.
티르시는 완드를 들며 말했다.
〈이 싸움, 저도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오히려 안 도와주셨으면 선배한테 이르려 했어요☆!〉
〈어머. 바로 오길 다행이었네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티르시는 라리루라와 나란히 섰다. 그녀의 완드에서 냉기가 넘쳐흘렀다.
〈아르마슈나스의 몰락 영애신가.〉
코뤤투스는 인질을 조종하기를 포기한 듯, 실을 전부 끊고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디아볼로 놈에게 잡혀갔다더니, 그 놈이 준 마나로 잘도 그리 자랑스럽게 내 앞에 서셨군. 귀족이길 포기하더니 부끄러움마저 잊었나?〉
〈안타깝지만 이 마나는 당신 친구 분이 준 게 아니에요. 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운 좋게 남은 힘이죠.〉
티르시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힘 자체에는 고귀함도 천박함도 없다. 애시당초 〈강림〉 마법에 제대로 성공했다면 그녀의 마나랄 것은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부 ‘아르마 슈나스’라는 디아볼로의 무기가 돼 버렸을 테니.
꿀릴 게 없던 티르시는 되려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그렇지만…… 귀족이 되고 싶어서 애를 쓰던 분의 말씀은 과연 무게감이 남다르네요. 혹시 피차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사람끼리라고 해서 친밀감이라도 가지셨다면, 좀 불쾌한데요?〉
─빠득.
꼬리를 물며 성질을 건드리는 일이 연속된 탓일까. 코뤤투스는 이를 갈았다.
〈……좋다. 하긴, 말 따윌 나누려 온 것도 아니었으니.〉
꾸드드득…!!
코뤤투스의 팔에서 솟아난 보라색 마나의 실이 피부를 다 가리며 갑옷처럼 덮었다. 한때 그가 사용했던, 혈액의 갑옷을 순수한 마나로 재현하는 마법이었다.
〈흐응. 헤엥. 역시 그랬군요?〉
이제 확실해졌다. 라리루라는 싱글벙글 웃었다.
〈당신, 이제 흑마법 못 쓰죠?〉
갑옷으로 얼굴을 가린 코뤤투스는 묵묵히 신체를 강화할 뿐,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마나의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건 암묵적이며 본의 아닌 긍정이었다.
티르시는 고개를 모로 꼬다가 픽 웃었다.
〈흑마법을 못 쓴다? 마법이나 매직 아이템으로 사티스의 사냥개들을 피한 게 아니라요?〉
〈네. 그냥 부활한 뒤로부터 흑마법사가 아니게 된 거에요. 봐요, 아까 전부터 흑마법은 전혀 안 쓰잖아요♡ 어때요? 꽤 괜찮은 추리 아니에요?〉
〈후후. 그러게요. 대답도 없고, 정답을 맞춘 셈 치죠.〉
─스릉. 코뤤투스는 길게 뽑은 검을 세우며 가장 오래 쓴 무예를 1개 선별했다. 일전의 패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하는 의미의 선택과 집중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녀들에게 코뤤투스의 표정이 보였다면, 그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와아~ 무서워라~♡〉
라리루라는 안 봐도 알겠다는 듯 익살맞게 키득거렸다. 픽 웃은 티르시가 차분하게 물었다.
〈저기요, 라리루라. 혹시 노르드가 했던 얘기 기억해요?〉
〈얘기요?〉
〈노르드가 이 나라에서 대외활동을 할 때, 우리 두 사람만 데리고 다녔던 이유가 뭔지.〉
〈……아핫♡! 당연히 기억하죠.〉
라리루라는 티르시의 자부심이 섞인 질문에 이끌린 것처럼 가슴을 폈다.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설명을 듣고, 합의까지 전부 나누고서야 그의 뒤를 따라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그녀들이 동행을 허락받은 이유?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이 파티에서, 노르드라는 부동의 No.1을 제외하면──
〈〈──우리가 제일 강하니까.〉〉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같은 남자에게 반한 그녀들은 등을 맞대며 겁없이 웃었다.
─혹시라도 〈임모르탈리스〉가 아내들을 노렸을 때, 우리들이 노려지는 게 가장 덜 위험하다.
그녀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주장했기에, 노르드도 한숨을 쉬며 비서 겸 파트너로서 동행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라리루라도 티르시도 아직 노르드만한 기량을 가지진 못했다.
거기다 라리루라는 노르드의 저주를 진정시키고자 성수를 발랐을 때, 다른 두 사람과 마나량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과시당하지 않았는가. 마나량만 보면 파티 전체에서도 하위를 다툴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니까.
피난객은 다나와 베로니카가 지켜주었다.
인질들은 프랑이 탈환하고 보호해주었다.
그녀들로는 지키지 못했던 이들도 다른 선수와 참가자들이 구해주었다.
끝으로── 지금은 곁에 없는 남편이 빌려준 힘이 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해치 개방.〉
라리루라는 6호의 내장 기능을 조작했다. ─덜컥! 인형의 등이 열리며 코어가 드러났다.
키이이이잉……!
태양빛을 담은 노심처럼 마나를 흩날리며 코어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인공 미스릴과 마나를 부여한 강철─노르드가 현철(玄鐵)이라고 명명한 것들─로 만든, 링링이 6호.
완전 금속 꼭두각시라는 유례 없는 신병기는 그 제작 소재 덕분에 한 가지, 터무니없는 장점을 가질 수 있었다.
금속의 몸체는 마나 때문에 발생하는 고열과 부하를 일반 골렘보다 까마득하게 오래, 그리고 강하게 견딜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노르드는 베로니카가 훌두폴크의 옥새를 연구하며 완성한 마나 저장 술식으로, 또 하나의 무식한 기능을 추가했다.
─내가 끼고 있는 의수는 내 오러를 견딘다며?
─그러면 말이야……. 의수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든 이 꼭두각시도, 똑같이 내가 넣은 오러를 견딜 수 있지 않을까?
라리루라는 이번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발상에 고개를 젓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때의 그를 빼닮은 웃음을 지었다.
부부는 닮는 법이라던가.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쿠웅─!!
코뤤투스가 그녀들을 향해서 돌진했다. 마나를 각성한 티르시가 재빨리 무영창의 〈빙벽〉을 세워 그 돌격을 막았다.
라리루라는 얼음 파편을 맞으며 침착하게 절차를 밟았다.
〈리미터 해제. 코어 전개.〉
─쿵! 노르드가 코어의 최심부에 저장시켜 두었던 오러가 패도적인 출력으로 6호의 전신을 타통했다.
오러는 틀림없이 달인들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그 본질은 달인들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펼치는, 마법이나 진배 없는 무예의 극의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극론을 말하자면── 오러 또한 극도로 파괴적인 성질을 띄었을 뿐, 세상에 존재하는 마나의 한 종류였다.
따라서 완전 금속 꼭두각시의 견고함은, 오러의 과부하에 견딘다.
라리루라는 평소에는 제한시켜둔 기능을 완전히 해방하며, 링링이 6호가 가진 비장의 수단을 발동했다.
〈──노심 전환(Trans-Reactor)!!〉
위이이이잉─!!
핑크빛의 오러가 꼭두각시를 감싸고 터져나왔다.
일반적인 마나와 출력을 달리 하는 위력을 코어로, 강철의 회로로 돌린 6호가 땅을 박찼다. 꼭두각시를 써서 계측했던 속도의 3배에 달하는 가속에 코뤤투스가 기함했다.
〈오러?! 네가 어떻게……!!〉
〈저희 남편이 빌려줬어요!〉
우지끈……!! 코뤤투스의 사각을 파고든 꼭두각시의 주먹이 그의 갑옷을 파쇄했다.
〈크허학!!〉
─콰앙!!
코뤤투스를 지면에 때려박으며, 라리루라는 꽃이 피는 듯 살갑게 웃었다.
〈템빨로 홍보 좀 하고 오라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