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31화 (531/1,009)

후웅─!

오러의 손톱이 뻗어왔다. 바닥에 처박힌 코뤤투스는 마치 실로 당겨진 듯 몸 동작 없이 수직으로 뛰쳐올랐다. 빗나간 손톱이 돌바닥을 살얼음을 부수는 것처럼 뚫었다.

〈미꾸라지 같으시네요!〉

즉시 도주 방향으로 〈마법의 화살〉을 연사했다.

개량된 마법은 광선을 남기며 오러를 뿜어냈다. 코뤤투스는 결계에 갇힌 하늘을 날며 후방으로 피신했다. 빗나간 광선은 결계의 천장에 구멍을 뚫었다. 결계는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꼭두극〉은 출력만 높다면 염동력처럼 사용할 수 있다. 마나의 실로 만든 코뤤투스의 새로운 강화 마법은 흑마법을 잃은 뒤, 그가 빠른 전투가 가능하도록 개발한 것이었다.

출력이 강해진 6호도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무대의 상공을 주파했다. 하늘 위의 추격전이었다.

〈떨어져라!!〉

쿠과과과─! 코뤤투스가 검을 휘두르자 칼날이 비처럼 쏟아졌다.

방금 전의 공방과 정반대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라리루라가 조종하는 6호는 공격을 피하면서 장거리에서 사격전으로 응수했다. 오러의 광선 포격이 투구를 스치자 코뤤투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 거리에서는 서로 맞질 않나.〉

〈의견이 맞았네요! 기분 나쁘게!〉

벌어진 거리를 0로 좁힌 라리루라가 6호의 오러 손톱을 큰 동작으로 휘둘렀다. 마나의 검과 오러가 유폭을 일으켰다. 그 틈에 코뤤투스는 붉은 마나를 두른 6호의 배를 찼다.

오러를 뿜는 적에게 접촉하는 것은 각오가 필요했지만 발목 밑이 오러에 갈려나가는 일은 없었다.

〈역시! 오러의 대부분은 출력 강화에 사용하고 있구나!〉

발차기의 반작용으로 한 번 더 뒤로 뛰며 코뤤투스는 이를 드러내며 가가대소를 터트렸다.

오러는 방출하기만 하면 파괴적인 마나에 불과했다.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기능은 없다.

하지만 적은 오러를 발동하고서부터 신체능력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코뤤투스는 그 인과관계를 감을 잡았다.

〈꼭두각시의 코어로 오러를 에너지로 전환한 거였어!〉

노르드의 설계에서, 그가 저장한 오러는 핵융합로처럼 폭발적인 출력으로 6호의 성능을 높이는 기능을 맡았다.

처음엔 그가 사용할 때처럼 전신에 두르는 것도 생각했다. 단, 라리루라라는 본체가 있는 이상 기체의 부하를 늘려가며 6호의 공방을 강화하는 것은 낭비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오러의 절반 이상은 출력 강화에 돌리고, 육탄전과 원거리 사격에 저장한 오러를 사용하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출력을 내부로 돌리면서 오래 버틸 수 있겠나? 네가 그랬듯 도망치며 시간만 끌면──〉

〈누가 그렇게 둔대요?〉

코끼리 만한 고드름이 코뤤투스의 퇴로에 쏟아졌다. 적을 유인하려고 떠들던 입을 다물고 검으로 얼음을 베어냈다.

투기장의 결계가 줄어들었다. 베로니카와 다나가 전황을 인지하고서 적의 활동반경을 좁힌 것이었다.

코뤤투스는 인질 방향으로 도주했다. 라리루라가 포격으로 인질 앞에 광선을 그으며 그의 진로를 제한했다.

〈흐어억!〉

〈방패로도 못 쓸 쓰레기들에겐 관심 없다.〉

코뤤투스는 대회의 선수들과 인질을 무시하고서 항마력의 가호를 받은 골렘의 코어를 팔꿈치로 박살 냈다.

─으직!

기능을 잃은 골렘을 방패로 내세우고 코뤤투스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항마력의 가호와 인공 미스릴이 섞인 골렘이라면 몇 초 정도는 포격을 막아줄 거라는 계산이었다.

─큐기기기기깅!!

포격과 그에 따른 유폭의 불길을 갑옷으로 막으며 접근한 코뤤투스는 걸레가 된 방패를 라리루라에게 던졌다. 광선의 난반사가 경기장에 탄흔을 그었다.

투척하는 찰나에 그의 팔이 몸통보다 굵어졌다. 인질들을 부숴가며 억지로 힘을 쥐어 짜냈던 마법을 안전한 식으로 써서 힘을 강화한 것이었다.

〈돌멩이랑 허그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토끼처럼 깡총 뛰어서 피하는 라리루라. 물 수제비처럼 퍽 하고 튕겨대는 골렘이 얼마만큼 강한 힘으로 던져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코뤤투스는 마나의 검을 새롭게 뽑으며 부푼 팔로 후방을 파고드는 6호를 막아냈다.

〈첨섬(尖銛)의 쇠사슬(Chain of Sharp Harpoon)!!〉

티르시가 적을 마비시키는 쇠사슬을 링처럼 둘렀다. 피할 공간이 없는 무대였다. 코뤤투스와 라리루라는 그걸 인지한 찰나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공격했다.

어느 쪽이 선공을 할지를 다투듯 마나가 부딪혔다. 폭발에 가까운 불꽃이 X 모양으로 터져나왔다.

〈동작이 느려 터졌단 말이다, 인형 따위로는!!〉

코뤤투스는 마나의 분출구와 일렬로 서지 않도록 이동하며 전초전에서 파악한 능력 차이를 기술로 극복했다.

그는 남의 무예를 빼앗기는 해도 근본은 마법사다. 오러까지는 다루지 못했지만 마나 소모량을 늘려서 마법의 위력을 올린다면 파괴력에서는 오러와 견줄 수 있었다.

─콰득! 무기가 부러지자마자 새로운 마나의 검을 꺼냈다. 전법이 단순무식한 전사와 전사의 싸움에서는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오러도 마법사답게 쉼없이 대처하는 코뤤투스를 상대론 잘 드는 칼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하지만 기능의 다양함으로는 라리루라도 지지 않았다. 크게 앞으로 디딘 6호의 허벅지가 덜컥 열리며 불꽃을 넣은 폭죽이 미사일처럼 쏟아졌다.

원리는 폭죽이지만 오러를 에너지로 넣어버려서야 폭탄도 새파랗게 질릴 흉악한 무기였다. 1회전에서는 꺼내지 않았던 병기에 코뤤투스는 타격을 입고 밀려났다.

〈캬아아악!!〉

자세를 정돈하려고 했겠지만, 그렇게 헛되이 쓸 1초조차도 아쉬웠을 것이다.

물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계와 마비 마법의 이중장벽 때문일까. 코뤤투스는 미사일 무리에 마나를 뿜어냈다. 라리루라는 6호에게 방어자세를 취하게 했다.

크허헝─!!

코뤤투스의 마나가 사자처럼 변하며 포효를 질렀다. 폭죽 미사일은 공중에서 뭉개지며 유폭을 일으켰다.

빛과 소음이 앞을 가린 순간에 라리루라는 보라색 마나의 집결을 감지했다.

〈──앞으로!〉

콰앙─!! 폭발에 표피장갑을 달구며 거칠게 돌격한 6호는 그 뒤에서 큰 일격을 준비하던 코뤤투스를 후려쳤다. 마나를 얼마 끌어모으지 못한 코뤤투스는 검과 팔에 마나를 퍼붓고 역공을 가했다.

두꺼워진 코뤤투스의 팔뚝은 선을 넘은 강화 술식에 역방향으로 부러졌다.

…쩌적!

적의 한쪽 팔을 꺾은 6호도 성치는 못했다. 온갖 마법으로 써서 강화한 일태도는 오러의 출력을 웃돌았다.

복층장갑을 두른 6호의 팔뚝에 마나의 칼날이 힙겹게 파고들었다. 마나끼리의 격돌에서 발생한 고열에 단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금속의 팔을 쪼갰다.

〈은신의 장막(Curtain of Hiding)!!〉

그때 코뤤투스의 부러진 팔에서 터진 피가 이상하게 뻗어나가며 쇠사슬의 링을 감췄다. 라리루라의 시야에서 코뤤투스도 6호도 사라졌다.

얇은 장막이라도 꼭두각시가 보이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

꼭두각시는 본체와 거리가 떨어지면 이런 간단한 연막에도 취약해졌다. 본체가 위험에서 노출되지 않는다는 장점만큼의 단점이자 한계였다.

코뤤투스는 그런 단점을 극복하고자 스스로의 영혼을 언데드에게 빙의시키는 흑마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라리루라도 이 점에 따른 반격법을 가지고 있었다.

〈링링아, 난사해 버려!!〉

─덜커더덕! 모든 분사구를 전개한 6호는 오러를 뿜어냈다.

〈확산 복사 방출(Spread Emission of Radiation)!!〉

퓨뷰뷰뷰븅─!!!!

8개의 분사구에서 각각 8개씩. 얇지만 철판도 꿰뚫어버릴 오러 광선이 뿜어졌다.

미러볼처럼 분사한 오러가 쇠사슬의 링과, 근거리에 있던 코뤤투스를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끄학?! 으어아아아악──!!〉

시야를 차단한 사이에 코어를 부숴보려던 코뤤투스는 몸에 바람 구멍이 났다. 팔은 덜렁거리다가 조사되던 광선에 스쳐 잘려나갔다.

〈커흑, 크흑……!〉

치명상은 복부였다. 메스로 그은 듯 길게 찢어진 복강이 확 벌어지며 피투성이 내용물을 쏟아냈다. 엘릭서를 몇 병이라도 끼얹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할 상처였다.

피를 철철 흘려대던 코뤤투스의 눈앞을 어둠이 잠식했다. 어떤 흑마법보다도 짙은 칠흑의 어둠은 이 세상의 섭리였다.

그에게 2번째 죽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혼자 죽지는…… 않겠다!〉

우드득…! 장막이 걷혔을 때, 코뤤투스는 팔의 근육과 뼈를 부숴트리며 6호의 팔을 붙잡았다.

죽을 목숨이라면 아낄 것도 없었다. 이대로 오러를 충전한 코어를 역류시켜서, 그의 마나까지 이용해 폭발시킨다.

골렘 코어에 있을 오러는 라리루라의 통제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꼭두각시라는 도구를 통해서 발휘되고 있는 거라면 남의 칼을 빼앗아 쓰는 것처럼 자폭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코어 안에서 이전에 자신을 산 채로 불태웠던 남자의 마나를 발견하고서, 코뤤투스는 각혈을 하며 일갈했다.

〈사라져라! 더러운 마나와 함께!〉

푸욱…! 마나의 칼날이 골렘 코어의 겉면을 뚫고서 오러가 저장된 부분까지 들어갔다.

성공했다. 코뤤투스는 그렇게 여겼다.

빠지직…!

절로 오한이 들 만큼 차가운 냉기가 마나의 칼날을 얼려버리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티르시는 완드를 내리며 전투 중에 외운 주문을 내뱉었다.

〈……영구의 동토(Dominion of Permanent).〉

얼음 관이 코어와 코뤤투스를 빙결시켰다. 이렇게나 얼어버린 상태에서는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다.

〈어떻게 언데드조차 아닌 산 자의 몸으로 되살아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불사와 죽은 자의 부활은 연금술사의 가장 큰 목표에요. 성공사례가 있다고는 들어 본 적도 없지만요.〉

폐에 침투한 냉기 때문일까. 입이 열리지 않는 그에게 티르시는 눈을 반개하며 말했다.

〈하지만 실패의 역사는 성공의 토대가 되죠. 당신이 다신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건 아주 간단해요. 고스트 형 언데드 퇴치나 진배 없는 일이니까요.〉

─휘릭. 완드를 돌린 티르시가 얼음 관의 크기를 키웠다.

〈죽어서 저세상에마저 가지 못하도록, 혼과 육을 완전히 소멸시켜 드리겠어요.〉

미동만 해도 살갗이 찢어질 정도로 단단한 얼음! 그 속을 헤엄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꼭두각시 인형 뿐이었다.

─콰드득! 얼음을 부수며 몸을 움직인 링링이 6호가 남은 오러를 모아서 빛을 뿜어냈다.

얼음 마법의 관에 갇힌 이상, 코뤤투스에게 도망칠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죽은 뒤의 영혼조차도 말이다.

티르시는 악보를 덮듯 완드를 내리그었다.

〈──원소의 티끌로 돌아가세요.〉

〈자연이 그대를 거부하리라♡!〉

노르드의 농담을 따라 하며 라리루라는 마지막 남은 오러를 방출시켰다.

지이이잉─!

─퍼어엉!!!

붉고 푸른 빛이 밤의 무대를 밝혔다. 죽음에서도 부활했던 흑마법사의 영혼은, 그렇게 한 점의 흔적조차 못 남긴 채로 세상에서 완전무결하게 증발했다.

눈꽃처럼 터져 나온 입자가, 대자연으로 돌아갈 그 간촐한 최후의 순환을 보여 주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

난장판이 된 경기장에 침묵이 돌아온 뒤, 라리루라는 힘을 잃고 옆으로 엎드렸다.

─퍽!

“으헿.”

사람에게 밀쳐진 마네킹처럼 쓰러졌지만, 넘어진 아픔보다 누워서 생긴 편안함이 더 기분 좋았다. 라리루라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돌바닥에서 혀를 빼물고 숨을 내쉬었다.

저 힘은 노르드가 준비해 준 것이었지만,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마나는 어디까지나 라리루라의 것이었다.

자신의 원래 수준을 넘는 전투를 겪은 것 아닌가. 쓰러진 것도 당연히 그렇게 될 만한 일이었다.

물론 방금과 같은 고차원의 전투는 후일 그녀의 성장에서 남들은 꿈도 못 꿀 만큼 큰 양분이 되어 줄 것이었지만, 당장 움직일 힘도 없는 라리루라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힘들다……. 티르시 언니, 저 죽겠어요…….”

“포션 드릴게요. 아~ 하세요.”

“……아~.”

누워서 입을 벌리는 라리루라의 팔뚝에 주사가 꽂혔다. ─힉! 라리루라는 번개에 맞은 쥐처럼 몸을 떨었다.

“주, 주사를 꽂을 거면 입은 왜 벌리라고 했어요?!”

“긴장 푸시라고요. 스태미너 주사에요. 다친 곳은 없으니 이 정도면 될 거구요.”

“……어른들은 금방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니까.”

라리루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노르드가 ‘의사들은 사람을 치료할 때 마네킹 고치듯 날림으로 하더라’ 같은 말을 했던 걸 떠올린 그녀는 그야말로 맞는 말이라고 투덜거렸다.

“둘 다 괜찮아?!”

─타다닥! 프랑이 달려오며 물었다. 컨디션을 묻는 사람이 더 안색이 창백하니까 라리루라는 어쩐지 조금 우스웠다.

“괜찮아요. 인질들은……”

“……일단, 죽은 사람은 없어.”

프랑은 말을 아끼며 고개를 저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인질들의 끔찍하게 비틀린 몸을 봤던 라리루라도 그것 이상은 묻지 않았다.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사람도, 많든 적든 후유증을 남기는 사람도 나왔을 것이었다.

죽음보다 못한 인생도 있을까. 라리루라는 그렇지 않기를 빌었다.

“다나가 치료 중이야. 다행히 경기 중에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해서 사제들도 있대. 싸움은 못 하는 사람들이라서 입구 쪽을 막은 결계를 뚫고 돌아와 줬어.”

프랑은 간단하게 피난 상황을 설명했다. 이 투기장을 노린 흑마법사는 코뤤투스가 끝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노르드가 걱정이네요.”

염려스럽게 말한 티르시는 바람 마법으로 라리루라의 몸을 띄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들 것에 들린 것 같았다.

“꺅?! 뭐, 뭐 하세요?!”

“다나 씨한테 가요. 다친 곳은 없지만, 그분은 반지로 노르드의 상태를 알 수 있댔죠?”

“링링이는요!”

“혹시 모르니까 저대로 잠시 방치하죠. 저 흑마법사, 아니 마법사가 또 부활해서 나오는 꼴은 보기 싫잖아요?”

라리루라는 합죽이가 되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이 투기장의 참상만 봐도 노르드가 쉬운 싸움을 하고 있진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상상이 갔으니까.

─타닷! 세 사람은 질주하듯 다나를 찾았다.

사실 초조한 기분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걱정을 했다곤 할 수 없었다. 라리루라가 아는 노르드는 그만큼 강했다. 이런 식의 위기 상황을 몇 번인가 넘어오기도 했다.

이번에도 크게 다칠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녀들도 이겨 낸 싸움에서 그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밀랍 인형처럼 주저앉아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망연자실해 하는 다나와 베로니카를 찾아냈을 때, 라리루라는 형언 못할 오한에 몸을 떨었다.

“……왜들, 그러세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리루라가 아는 그녀들이라면 당장에라도 노르드가 있을 곳으로 달려가거나, 하다못해 다친 사람들을 도울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실 끊긴 인형처럼 주저앉아 있는 걸까.

베로니카는 지팡이도 떨어트리고 손을 뻗었다. 미스릴 결혼 반지가 떨리는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 다나의 반지였다.

그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베로니카와 라리루라 앞에서도 그렇게나 기뻐하고 은근슬쩍 자랑하던 반지이지 않았던가.

그런 반지가 왜, 다나가 아니라 베로니카의 손에 있지?

“──거짓말.”

프랑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부터 하얗던 그녀의 안색은 이제는 거의 시체처럼 보였다.

“……아니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그런 거 아니지?”

“보여주세요. 저한테도…… 그 반지, 저한테도 보여주세요!”

─쿠당탕! 라리루라는 바닥을 구르듯 떨어져서 그 반지를 낚아채듯 손에 쥐었다.

마나를 털어넣어서 반지에 깃든 힘을 발동시켰다.

그렇게, 아무런 배려심도 여과도 없는 정보가 라리루라의 마음을 정수리부터 꿰뚫었다.

팅, 티디딩….

떨어진 반지가 바닥을 구르다가, 티르시의 발에 부딪혀서 멈췄다. 라리루라는 혼이라도 뺏긴 것처럼 다나나 베로니카와 똑같이 절망 어린 표정으로 무릎을 무너트렸다.

반지에 깃든 쌍성의 호박은 매정하게 선고했다.

그녀들이 사랑하는 남자의, 노르드의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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