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55화 (555/1,009)

우리는 알프헤임에서 잠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오프툼이라는 놈도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구조를 서두를 건 없겠지. 나는 그곳에서 혼자서 한참을 버텼다. 몸을 쉬고 바로 7계층을 돌파하고 내려가는 게 더 현명할 터다.”

“뭐, 저야 겪어보지 않았으니 당사자가 하는 말을 존중하겠슴다.”

길다트가 그렇게 말하면서 각자 친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기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을 따라온 4인조 탐험가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고 말이다.

엘리자베트의 일행에서 명계의 문에 들어온 사람은 다 해서 7명.

지금은 공주 부부 2명과 학자 1명으로 3명 뿐이다. 남은 두 사람을 찾고자 했던 엘리자베트는 시신의 유품만 챙겨왔다며 씁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다른 무엇보다 합류를 우선시했는데, 생존률은 절반 미만이더라. 시체들의 상흔은 시련의 몬스터들이 아니라 사람의 손에 의한 거였고.”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해치웠을 흑마법사들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그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싹수가 엿보이는군.

아무튼 전의를 불태우는 건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애도 반, 쓴웃음 반으로 대답해주고서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르드. 조금 전에 미처 못 했던 얘기를 마저 드리고 싶은데요.”

그렇게 잠깐 반나절 정도의 휴식을 취하려고 하고 있는데, 티르시가 내 방을 찾아왔다.

‘아, 그러고 보면 심문하느라 뒤로 미뤘었지.’

존나 금붕어 같은 강북호 새끼. 나는 스스로를 디스하면서 티르시를 들여보냈다.

“어서 오십셔. 근데 여기 의자가 하나 뿐이네요.”

“편한 쪽에 앉으세요. 잠깐 얘기하면 끝이니까요.”

그렇다길래 내가 침대에 앉았다.

사실 앉아있기엔 등받이가 없는 침대가 더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티르시는 엘프들이 캐 왔다는 이슬을 마시고 감탄하다가, 이승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해주었다.

“제가 생각한 계획은 이랬어요. 노르드의 얘기로 흑마법사들이 활보한다는 점은 알았고, 그런 곳에 다짜고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죠.”

“거기까진 정답이네요. 결국 3명이나 들어와 버렸지만.”

“합의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혼자 위험에 노출돼도 몸을 지켜낼 만한 사람들을 골랐죠. 그들이 문으로 들어가서 각각 합류하고, 노르드를 찾겠다는 계획이었어요.”

들어오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구조니까, 어떻게든 안에 들어오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겠지. 나는 픽 웃었다.

“그렇게 네페르티티 씨와 합류해서 7계층까지 오셨군요. 전 그 사이에 에퀴녹스의 콩 뭐시기인가 하는 부하들을 찾아서 해치우기 바빴습니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죠.”

귀찮은 발본색원 끝에 숲의 조사는 대충 끝났다.

아직 안 가 본 곳도 거의 없었으니까, 태양의 십자가 어디 있을지도 대충 견적이 나왔고 말이다.

─꼴깍. 티르시는 이슬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저희가 내려와서 각개격파를 당할 위기를 일단락시키고, 현세에 연락하면 그때 다른 분들도 들어오기로 했어요. 여러 이유로 프랑 씨랑 다나 씨만 같이 오게 됐지만요.”

여기서 또 누가 들어오겠다고? 그건 에바지. 아직 확실히 지옥탈출에 성공할 거라는 보증도 없잖은가.

나는 저절로 오만상을 쓰며 대답했다.

“……위기상황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연락해 주십셔. 피라미드의 시련도 끝이 가까우니 그냥 후딱 끝내고 저희가 먼저 돌아가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쿡쿡.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현세로 돌아가신 뒤에는 사모님들께 엄청 깨질 각오를 하셔야 할 걸요? 돌아오시면 어디 독방에 가둬버린다고 벼르고 계셨거든요.”

“흐흐. 지옥을 탈출하자마자 독방 행입니까? 끔찍하네요.”

─싱긋. 차분하게 웃는 티르시는 좀 짖궂어 보였다.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미소였다.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 밤이 깊어졌다. 나는 직물 커텐을 걷었다. 방이 조금 어두웠다.

“……이 세상에도 밤은 오는군요.”

티르시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내려오면서 몇 밤을 지샜을 텐데, 마치 지금 처음 본 듯한 말투였다.

이 가짜 세계에도 밤은 있다. 하지만 달은 없었다. 이유는 세헤테피브라만이 알겠지.

티르시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윤기가 생생해서 태양빛을 쬘 때가 가장 아름다웠기에, 별이 빛나는 밤의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희뿌예 보였다.

─찰랑. 가볍게 머리카락을 턴 티르시가 말했다.

“저도 이곳에 오고서 그 어린 파라오를 만났어요. 시련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모습에서는 도무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한계에 가깝다는 증빙일지도요.”

“오랜만의 방문자에 감정을 주체 못하고 있다는 겁니까?”

“네. 노르드는 이 세상이 파라오의 일생과 후회를 본따서 만들어진 것 같댔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은 그 잼민이 파라오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존나 고독에 매몰돼서 하루하루를 지새는 것조차 좆 같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 흑역사다.

좋게 말하면 흑역사지만, 나쁘게 말하면 PTSD다.

밤이 긴 겨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던가.

지옥에서 쾌활하다는 게 더 웃긴 얘기이긴 했다.

“……저는요, 노르드.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침대가 살짝 가라앉았다. 티르시가 나랑 어깨를 맞대가며 옆에 앉아서였다.

그녀는 고대 엘프 왕국의 경치를 보며, 이 시대보다는 가깝지만 절대 돌아가지는 못할 과거를 떠올리듯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죽음이 남기는 건 남겨진 사람의 후회 뿐이죠. 하지만 알고 보니 죽은 사람을 위한 세상이 있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그들 나름의 후회랄 걸 하는가 봐요.”

나는 그걸 듣고, 이 얘기가 티르시가 어릴 적에 잃었다는 가족들의 얘기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나는 약간 힘이 없는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누군들 후회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고, 그 영혼에게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저세상에서도 지난 날에 대한 후회는 이어질 겁니다.”

“그렇네요. 무서운 일이에요. 평생 실패만 하며 살았는데, 나중에 더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 지옥에 떨어지면 그때는 왜 그랬나 하는 생각만 들려나?”

품위 있게 웃는 티르시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왔다. 이미 떨쳐냈던 후회다. 마음의 수면에 던진 돌이 깊은 곳에 남은 응어리를 들끓게 해도, 그런 씁쓸한 기분도 금방 가라앉는다.

시간으로 낫지 않는 상처는 사랑으로 낫는다.

아니, 애초부터 사람의 가슴에 뚫린 구멍은 사랑이 머물다 떠나버린 빈자리다. 그걸 채우려면 다른 사랑을 흘려넣는 게 유일한 방책일 것이었다.

“하으, 왜 이러지…?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티르시는 뺨을 문지르며 쑥쓰러워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조그맣게 들렸다.

“다시는 영영 못 만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을 만나서, 나도 모르게 감정적이 됐나? 흐으, 또 부끄러운 기억만 늘겠어…….”

“감정적이 돼서 다행이군요. 사람이 계산적으로만 살 수는 없잖습니까?”

“……이씨. 그렇게 남의 혼잣말을 훔쳐듣고 대답하시는 거, 좋지 않거든요?”

티르시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렇게 밀착해서 말하면 내가 아니라도 들렸을 텐데,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구만.

얼음 마법을 쓰는 마법사면서, 그녀의 손은 무척 따듯했다.

그래서인지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듯하다던가.

나는 그 표현을 종종 쓰긴 하지만, 크게 좋아하진 않는다.

손이 차가운 사람들은 기뻐할 칭찬이기에 가끔씩 입에는 담지만, 그 말은 반대로 손이 따듯한 사람은 마음이 냉정하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나 티르시처럼 계산적인 사람들은 은근히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자기 허리를 감는 팔에 움찔하며 놀랐다. 내게 안긴 티르시가 뚱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

“누구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렇게 제가 옆에 있는데.”

“그야 뭐, 연금술의 전문가에,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고, 냉정한 듯 하면서도 결국 정이 많은데다, 은근슬쩍 질투하는 모습이 엄청나게 귀여운 사람 생각밖에 더 있나요.”

나는 티르시의 뒷목과 등을 쓸어내리며 픽 웃었다. 나열한 조건에 딱 맞는 여인의 눈은 꼬리를 붙잡힌 토끼처럼 동그래지고 말았다.

“평소에 계산적이던 사람은,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는 순간 엄청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다……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 누구 얘기일까~? 저는 잘 모르겠네요~?”

티르시는 눈을 주먹만하게 키웠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몸 안의 피가 전부 얼굴에 쏠리기라도 한 듯, 도망치지 못하게 슬쩍 붙잡은 손이 핏기 없이 차가워졌다.

사람의 혈액도 감정도 때에 따라서 흐르고 변화하는 걸까.

가만 생각해 보면, 굳이 설명하는 게 더 멍청하게 들리는 당연한 얘기였다.

“아, 아아~! 그건 그렇고, 이 피라미드는 정말로 대단하지 않아요?!”

─홱! 나한테서 어떻게 도망친 티르시는 등을 돌리며 침대 옆의 책장에 손을 뻗었다. 가슴에서 빠져나간 체온이 은근히 안타까웠다.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늘씬한 허리의 곡선과 엉덩이에 슥 눈이 가 버리는 남자의 본능이란.

“멸망한 엘프 왕국을 재현하다니! 여기 이렇게 방에 대충 꽂힌 책들도 이렇게 펼쳐 보면, 노르드 같은 고고학자 분은 군침을 삼키는 고대의 역사가…… 어……”

먼저 보디 터치를 감행해 놓고 얼버무리며 책을 펼친 티르시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침대맡의 책은 텅 비어서 아무 글자도 없는 백지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세헤테피브라가 만든 겁니다. 저도 시험해 보긴 했는데,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재현하지는 않았겠죠.”

“그, 그런가요……. 아쉽네요…….”

눈이 방 안을 헤엄치는 티르시. 괴롭힐 맛이 나는 사람이다.

“티르시도 책을 읽는 걸 좋아하시나 보네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책 얘기를 다 꺼내시고.”

“뭐, 뭐, 그렇긴 하죠! 명색이 연금술사니까요!”

“최근에는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아, 그러고 보면 친구 분 덕분에 성인 잡화점에서도 일을 하시던데, 혹시 그 잡화점의 상품을……”

“아, 아, 아니거든요?! 교양서적만 읽어요, 저는!”

“흐으음. 그러시군요. 어떤 책이죠? 저는 전공서적 말고는 책을 잘 안 읽어서.”

“그, 그건……”

내가 능글맞게 웃자 티르시는 백지의 책으로 자기 얼굴을 숨겼다.

“……반한 남자를 돌아보게 하는 법, 같은…?”

“아하, 과연.”

티르시의 얼굴이 책으로 가려질 정도로 작아서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본인의 수치심은 둘째 치고, 내가 낄낄대는 걸 본 그녀가 책으로 내 머리를 내려쳤을 테니까.

“그러면 어디, 그 책이 효과는 있던가요?”

“……직접 물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어요. 그치만 아마 별로 효과적이진 않은가 보네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걸 보면.”

얼굴을 감춘 책에서 눈만 내민 티르시는 나를 부들거리는 눈망울로 째려보았다.

그 눈은 화를 쥐어짜려는 듯 떨다가도, 결국 내가 웃으며 쳐다보자 못 당하겠다는 듯 흐물흐물 힘이 풀렸다. 그리고서 그런 자기가 정말 못 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 책 내용, 조금 더 시험해 봐도 되요?”

“예? 아, 뭐 좋으실대로.”

내가 대답하자, 티르시는 고민하듯 책장에서 책을 꺼내고 뒤적거리며 어영부영 굴다가 어떤 책을 딱 펼쳐서 내밀었다.

“자, 여기요. 마침 이거랑 비슷한 내용이었어요.”

“응?”

나는 책에 눈을 돌렸다. 당연히 이 책도 백지였기에 나는 머리를 숙이고 텅 빈 페이지를 몇 장 넘겼다.

그리고 하얀 책장 위에, 그보다 하얀 머리카락이 눈꽃처럼 내려앉았다.

─쪽.

어깨에 닿는 손가락의 감촉에 고개를 들자, 내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포개졌다가 떨어졌다.

대범한 시도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달인의 허를 바늘에 실 꿰듯 푹 찔렀다. 마치 1분인 듯, 1시간인 듯 시간 감각이 늘어지는 놀람 속에서, 용기를 쥐어짜내 눈을 질끈 감은 티르시의 얼굴이 보였다.

“……백날 책만 읽어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부딪히면서 실수하고 후회해 보라네요. 진짜 무책임하죠?”

얼굴을 뗀 티르시는 입에 두 손을 포개며 중얼거렸다.

─폴짝. 사뿐하게 물러난 티르시는 문고리를 잡고 그 뒤에 숨었다. 그러고는 눈매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감정적으로 구는 제가 귀여우시댔나요? 어때요? 소중한 첫 키스를 충동적으로 드려버렸으니, 충분히 감정적이었죠?”

정신을 차린 내가 허허웃음을 짓자 그녀가 살랑살랑 손을 저었다. 부드러운 손목의 움직임이 여성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 오늘밤만은 제 꿈을 꿔 주세요. 저, 죽어버린 후에 웃으며 떠올릴 소중한 추억을 많이 쌓아보고 싶답니다.”

치마를 들추며 인사한 티르시는 문을 닫고 가 버렸다.

나는 가만히 입술을 만지다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거 참, 순진한 건지 과감한 건지.

지옥에서 사랑을 외치다, 쯤 되려나.

그거 참 존나게 로맨틱하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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