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58화 (55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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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십자를 가지고 돌아오자, 델피니아는 꽃이 핀 듯한 웃음으로 우리를 환대했다.

《어서 오세요, 사신님! 숲의 조사는 끝나셨나요?》

《예. 그런데 전문가를 동원했는데도 이 십자를 어디에서 사용하면 좋을지까지는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무슨 미연시도 아니고 선택지 하나를 잘못 골랐다고 지금까지 좆뺑이를 친 게 무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내 그런 무책임한 직감은 다행히 맞아 떨어졌다.

《어머, 그러셨나요? 알겠어요!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상식적으로 며칠 동안 돌아댕기다 와서 ‘몰? 루’ 거리면 좀 빡칠만도 했는데, 델피니아는 가슴을 펴며 자부심을 뽐냈다.

《알프헤임의 마법은 굉장하답니다! 저는 싸움은 거의 못 하지만, 그래도 사신님이 신기해 하실 마법이라면 여러 개를 보여드릴 수 있죠! 따라와 주세요!》

《아, 넹.》

예르나 페이스로 저러고 있으니 못 버티겠다. 나는 생각을 고이 접고 엘리자베트에게 태양의 십자를 건네버렸다. 로열-하신 분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십셔.

《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세계수의 힘을 빌어서 태양신의 신물에 깃든 힘을 널리 퍼지게 할 생각이에요.》

엘리자베트의 말에 대답하는 델피니아. 세계수라는 단어엔 티르시도 눈을 깜빡였다.

그녀에게는 나르메르 어가 낯설겠지만, ‘세계수’의 발음은 ‘위그드라실’로 현대 로마니아와 같았기 때문이다. 나르메르 어처럼 고대나 현대나 문법이 거의 비슷한 경우가 아니라면 희귀한 일이었다.

아니, 고유명사 취급이니까 수백 년이 지나도 유지되는 게 당연한가?

“……노르드, 혹시 저게 세계수일까요?”

티르시는 도심의 중앙에 우뚝 선 나무를 가리키며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존나 멋진 나무기는 하지만, 저 녀석이 세계수일 것 같지는 않았다. 피라미드에 들어오기 전에 니플헤임의 하늘 높이 뻗어 있던 가지를 본 나니까 확신하는 일이었다.

엘프 기사들, 델피니아, 그리고 우리는 유사-세계수를 올려다보는 곳에서 멈췄다.

“내가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에 도착한 곳이군.”

길다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가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곳인가?

《승강기를 타 주세요. 조작은 저희 기사들이 대신 해 줄 거에요!》

─덜컹. 나무로 된 커다란 접시에 난간을 꽂은 이상한 매직 아이템에 올라탔다. 아무렇지 않게 타고는 있지만 이런 옛날 물건이면 유물이라고 해도 되겠다.

승강기를 타자 접시는 UFO처럼 날아서 유사-세계수의 쩍 벌어진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딱다구리처럼 안쪽이 다 파여 있었기에 나무 안은 적잖이 넓었다.

─위이이잉.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접시에 당황하는 일행들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엘프 기사는 승강기를 하강시켰다. 아마도 지하로 내려가려는 거겠지.

나랑 네페르티티, 그리고 길다트만 무덤덤한 표정으로 밑을 내려다봤다.

“뎃?”

그리고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던 다른 2명은 몰라도, 일단 나 1명은 안색까지 바꿔가며 존나게 놀랐다.

동그랗게 파인 나무 밑둥의 땅에 원뿔 같은 뭔가가 솟아나 있는 게 보인 것이다.

그 원뿔은 크리스탈처럼 마법의 조명을 난반사했다. 원뿔 자체를 둘러싼 고리 같은 마법진이 회전하며 유사-세계수에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저게 저희 알프헤임의 자랑, 세계수의 가지랍니다.》

델피니아가 보석 상자 안을 자랑하듯 말했다.

《과거,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인간 세상을 부르는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시나요?》

《【중간 가지】. 【인간의 집】.》

엘리자베트가 대답했다. 이 공주님이 생각보다 상식이 풍부하시군.

발음은 【중간 가지】가 ‘미드가르드’에, 【인간의 집】이 ‘마나하임’이다. 나는 귀찮아서 이세계로 뭉뚱그려 부르는데, 호칭 자체는 그렇다는 모양이다.

미래 공주님의 말에 델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이 촘촘히 박힌 나무를 승강기로 내려가는 길에 그녀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반짝거리는 듯 보였다.

《저희 엘프족은 【중간 가지】로 부르죠. 그리고 【중간 가지】라는 이름은 저희 인류의 땅이 세계수의 중간 쯤에 핀 열매이기 때문이래요.》

《……열매요? 땅에 묻혀 있는데.》

나는 무심코 그렇게 질문했다.

여태까지 내가 델피니아에게 ‘혹시 자녀계획 있음?’ 같은 걸 묻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그녀가 세헤테피브라가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었다.

진짜 본인이 아닌 이상은 세헤테피브라가 만든 엘프 모양 심심이에다가 QnA를 하는 셈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잼민이 파라오가 알프헤임의 모든 사정을 알 리도 없는데.

하지만 시발, 내 2번째 고향인 이세계가 세계수의 열매란 얘기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백 보 양보해서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해줘도, 그러면 세계수는 존나 땅 밑에서 열매를 맺는 구황작물이란 말인가? 전국 고구마 협회가 세상을 음지에서 지배하고 있어요!

《후후. 가지가 뻗은 곳이 땅 밑으로 보이는 건 국소적인 관점일 뿐이에요. 사실 저러한 가지는 【중간 가지】 곳곳에 있답니다.》

델피니아의 대답이었다. 나는 대충 여의주를 쥔 용신의 손 같은 모양을 상상했다. 대충 맞을 것 같다.

위잉─.

─척.

승강기가 멈췄다.

가까이서 본 세계수의 가지는 끄트머리에 불과한데도 졸라 컸다. 이런 굵은 게 이세계의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니, 사실 이 세상은 엄청 큰 촉수물 망가의 표지 같은 모양이 아닐까?

개소리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아무튼 이 내부 공간은 무척 마나의 흐름이 짙고 영험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불쾌하거나 갑갑하지 않고 청렴결백한 느낌이다.

이런 걸 맨날 쬐고 산다니. 알프헤임의 엘프들이 좆프라는 암흑진화 테크를 타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군.

《태양의 십자를 빌려 주시겠어요?》

델피니아는 태양의 십자를 받아서 그것을 띄우고 기도하듯 손을 벌렸다. 엘프 기사들도 둥글게 둥글게 강강술래를 하며 뿌리를 감쌌다. 룬 어로 된 주문이 들려왔다.

우우우웅……!

세계수의 가지가 떨리기 시작했다. 태양의 십자에서 뽑힌 마나는 공회전을 하다가 가지에 빨려들어갔다. 델피니아는 홱! 소리가 나게 움직이며 말했다.

《자, 올라가요! 결과를 볼 수 있을 거에요!》

나한테 볼장을 마친 태양의 십자를 건네길래 받아들었다. 다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자 우리를 뒤쫓듯 주홍색 마나가 유사-세계수의 맥을 타고 올라왔다.

─푸확!

바람을 뚫고 승강기는 계속 날아올랐다. 우리는 사방이 뻥 뚫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날아오른 듯 하늘을 유영하며 안개 투성이의 숲보다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내 오감에 공간 왜곡의 결계가 걸릴 쯤에 승강기가 상승을 멈췄다.

화아아아악──.

유사-세계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매직 아이템이었을까. 태양빛을 농축한 듯한 마나가 뿌리와 그루터기와 줄기를 타고 가지에 뻗은 나뭇잎까지 뻗어서──

파아아앗─!!

태양 같은 광채를 원형의 파문으로 흩뿌렸다.

《──아!》

누군가가 터트린 탄성은 아마 다른 사람들의 입 안에서도 맴돌던 것이었겠지.

파란 하늘은 잠깐 새벽녘이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둥그런 파문을 일으켰다. 태양의 광채는 숲의 전체를 뻗어나가면서 환혹을 일으키던 안개를 일소했다.

빛은 자애로운 손길처럼 숲을 빗어넘겼다.

으스스하던 숲이, ‘엘프의 숲’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딱 그대로의 광경으로 덧그려지는 듯 했다. 숲 전체를 관망하는 높이에서 바라보는 그 광경은 감격스러울 정도로 절경이었다.

내가 조금 더 자연풍경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것만으로도 그 개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세요, 사신님! 저희가 해냈어요!》

델피니아가 환성을 터트렸다. 그녀와 같은 승강기를 탔던 엘프 기사들도 나라에 드리운 암운이 걷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절경에 안심한 듯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엘프 알레르기 환자인 내가 보기에도 아름답고, 화사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광경에 나는 잠깐 눈을 감고, 깊게 들이쉰 숨을 내뱉었다.

환상이자 꿈에 불과한 이때를,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남겨 둘 수 있도록 말이다.

***

우리는 잠시 후에 승강기를 타고 내려왔다.

《감사합니다, 세헤테피브라 님의 사신님.》

델피니아는 머리를 빗어서 긴 귀에 걸고는 샐쭉 웃었다.

《세헤테피브라 님께도 제 말을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건, 저희들이 여러분께 전하는 간소한 성의랍니다.》

치마 한쪽을 살짝 들추는 그녀의 인사가 끝나자, 내 앞에 에메랄드 비석과 황금으로 된 상자가 떠올랐다.

호르르르르─.

상자를 열어보자 내용물은 이파리였다. 사람 손바닥 만한 크기였는데, 뭐 관점에 따라서는 커다랗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단지 중요한 건 물리적인 크기보단 이파리에 깃든 마나의 크기였다.

눈을 부릅뜬 나는 비석의 설명을 읽었다.

《◆ 세계수의 새순.》

《100년을 주기로 돋는 세계수의 어린 이파리.》

《어느 파라오가, 유일무이한 벗으로부터 우애의 증표로써 선물 받은 것.》

다른 보상이랑은 상반되게 일목요연한 설명이었다.

진품이라면 가지에서 떨어진지 한참 된 물건일 텐데 마치 방금 딴 것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가치를 잘 모를 아이템에 얼떨떨 해 하면서도, 일단 거기에 깃든 마나량이 앵간한 희귀 소재보다 까마득하게 많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상자를 닫은 나는 일행에게 그걸 한 바퀴 보여줬다.

“앞서 상의드렸듯, 보상은 제가 챙깁니다?”

“그렇게 해라.”

길다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엘리자베트도 당연하단 듯이 보고 있다. 진심인지 왕족다운 표정 관리인지는 몰라도 뒷말이 안 나오면 그만이다.

내가 다음으로 네페르티티를 보며 뭔가 말하려고 하자, 내 시선을 감지한 그녀가 말했다.

“네가 가져.”

“저도 상관없어요.”

“아, 감사합니다. 역시 다들 포부가 넓으셔.”

솔직히 어따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너무 옛날 피라미드라서 그런가. 석사따리 석사따는 감정하기도 힘든 아이템만 쏟아지고 있는 거에요.

나는 델피니아가 웃으며 축제니 감사연이니 뭐니 말하는 걸 대충 사절하고, 뒷일을 엘리자베트에게 토스했다. 놀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프로에게 맡긴 것이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언제고 원하시는 만큼 알프헤임에 머무르셔도 좋으니까요?》

그렇게 델피니아는 아쉬운 듯이 떠나갔다.

‘……7층의 보상은 태양의 십자의 모조품이랑 세계수의 새 이파리인가?’

아, 그리고 신혈인가 뭔가도 있었지. 전부 내가 챙기니까 좀 아이템 도둑놈이 된 느낌이지만, 솔직히 내가 그만큼 캐리한 게 있으니까 뻔뻔하게 굴어도 될 것이었다.

물건을 대충 챙긴 우리는 다 같이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매 한 마리가 엘프의 건물의 풍향계에 앉아 있다.

그 매는 눈에 띄게 밝아진 알프헤임과 그 알프헤임의 엘프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대로 냅두면 언제까지라도 계속 그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동물이랄 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 시련에 도전한 순간, 우리에게 룰을 설명해주던 때를 빼면.

끼에에에엑──!!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매는 마법적인 울음소리를 드높이며 홰를 치고, 2~30마리로 분열했다가 다시 공중해서 합체했다. 20배 넘게 부풀어오른 부피는 검은 깃털을 휘날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결합했다.

《──파라오, 등장!》

검은 머리카락에 갈색 피부. 눈을 가린 안대까지.

잼민이 체형의 꼬마 파라오, 세헤테피브라의 재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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