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스 준비.〉
전투의 막이 오른 직후, 에퀴녹스는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군대에서 가장 강력한 병사에게 필살의 공격을 지시했다. 저 하늘을 홰치던 언데드 드래곤이 숨을 들이쉬며 마나를 브레스의 분출구에 집중했다.
노르드와 쓰레기들은 지금 당장 우선할 만한 가치가 없다.
최우선 섬멸 대상은 저 엉덩이가 가벼운 계집이었다.
〈아하? 그게 《용아병단》이란 별명의 원인이 된 애야?〉
용의 숨결이 모이는 걸 보면서도 레티티아는 그저 웃었다.
〈마음에 드네! 몬스터는 어쨌든, 용의 영혼을 에인헤리로 삼아보는 건 처음이야! 선물 고마워~. 덕분에 네 역겨운 뼈다구마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하는걸!〉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죠. 골 빈 갈보.〉
─쿠화아아아악!!
언데드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어냈다. 하늘의 절반을 덮은 파멸의 마나에 레티티아는 사뿐하게 손짓했다. 천공의 성을 뛰쳐나온 영혼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질주했다.
인간 방패, 아니 영혼 방패다. 브레스를 막고자 뛰쳐든 그 영혼들은 자기 몸을 바쳐 그들의 여신을 지킨 것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죽음도 불사하고 여신을 지키는 영혼의 군대!
사뭇 성스럽고 숭고한 광경이지만 에퀴녹스는 경멸스러울 뿐이었다.
〈쯧.〉
저 ‘에인헤리’는 소멸만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부활한다.
하지만 레티티아는 특히 아끼는 일부를 제외하면 에인헤리 개개인의 생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 역시 1000년을 넘게 살아온 시대의 산 증인이다.
그녀가 ‘사냥’해서 축적한 전사와 몬스터의 영혼은 1만을 넘었다.
몇 백명을 방패로 쓰고 잃는다고 한들, 기품 있는 낭비다.
〈아하하하! 옆구리가 텅 비었네!〉
레티티아는 매의 날개옷을 펄럭이며 악단을 지휘하듯 빛의 랜스를 휘저었다. 발퀴리에 20기가 산개하며 브레스를 뱉는 도중의 언데드 드래곤을 급습했다.
발퀴리에는 신의 정령. 주인의 실력과 부여받은 마나량에 따라 힘을 얻는다.
1000년 전, 엘프의 왕국을 멸망시킬 때보다 훨씬 강해진 레티티아의 발퀴리에는 이미 용을 사냥할 경지에 올랐다.
날갯죽지를 찢겨지고 척추를 쪼개진 언데드 드래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발퀴리에 1기가 우아하게 날아서 그 영혼을 잡아뜯었고, 여신에게로 돌아갔다.
〈드래곤의 영혼이라니! 몇 년 넘게 고생한 가치가 있네!〉
레티티아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발퀴리에가 든 영혼을 보며 웃었다.
〈영혼 수확(Messis Animae)〉. 발퀴리에의 진짜 힘이자 설계 상의 사용법이었다.
사냥한 자의 영혼을 거두는 사신으로서의 면모. 손에 넣은 영혼은 프레이야의 〈인신〉인 레티티아의 궁전에서 그녀의 충실한 노예이자 무기가 되는 것이다.
영혼을 수확하는 힘은 언데드를 상대로 너무나도 치명적인 상성이었다.
병사의 소모전을 벌이면 상대의 병력만 무한히 늘어날 뿐. 그렇다고 영혼이 없는 언데드는 골렘만 못하다. 레티티아가 흑마법사가 창궐한 나르메르-나일을 총괄하는 이유였다.
저 능력 탓에 에퀴녹스는 거처를 숨기고 활동을 자제해야 했던 것이다.
─부욱!
환하게 웃던 레티티아는 불현듯 얼굴을 굳혔다. 자신에게 날아오던 발퀴리에의 손에서 영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간 계열 마법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발퀴리에가 룬 만다라의 마법 저항으로 튕겨냈을 것이다. 지금 그건 훨씬 더 고차원의 권능이다.
〈어쩜 그리 절제 없이 탐욕스러운지. 눈 뜨고 못 봐 주겠군요.〉
11개의 권능 응집체를 빛내며 에퀴녹스가 비웃음을 짓자, 레티티아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창세의 권능을 잘 다루게 됐구나? 그렇게 숨어 다닌 이유가 있었네.〉
창세의 권능은 강대한 힘이지만 만능은 아니다.
똑같은 마나를 다루면서도 누군가는 달인급 전사가 되는가 하면, 누군가는 3류 마법사로 인생을 끝마친다.
창세의 권능도 그와 같았다.
모든 신들이 가진 권능도 아니었으며, 잘 다룰 수 있던 건 신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 주신급이나 재능을 타고 난 창조 계통의 신들 뿐이다.
그렇기에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어렵고, 저 힘으로 영혼을 가진 생명 자체에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창세의 권능은 만드는 힘이지, 파괴하는 힘이 아니니까.
레티티아 역시 프레이야의 권능이 아니었다면 발퀴리에나 에인헤리를 되살릴 수 없다.
〈충분한 권능과 응용력이 있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죠.〉
하지만 상대는 흑마법을 극한까지 다루며 삶과 죽음마저 제 힘으로 주무르는 리치였다. 에퀴녹스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권능을 사용하자 파괴된 언데드 드래곤이 되살아났다.
여전히 언데드인 채였지만 상처는 사라졌다.
권능으로 시체를 복구하고 흑마법으로 되살린 것이었다. 두 가지의 힘을 ‘부활’이라는 명제 아래에서 지배하는 흑마법의 반신다운 기적이다.
【아아아아아──!!! aaaaaaaAAAAAA──!!】
어디 그뿐인가?
에인헤리의 일부를 노획한 에퀴녹스는 권능으로 강자에게 걸맞는 시체를 만들고, 빼앗은 에인헤리를 데스 나이트 삼아 자신의 군대에 추가하기까지 했다.
에퀴녹스는 아직 생명을 만들 수 없다. 언젠가 그마저 해낼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체라면?
그 정도는 어려울 것 없다. 시체는 그저 인간과 닮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다. 에퀴녹스는 권능으로 만든 시체에 마법으로 영혼을 부여하여, 영혼에 준하는 병사를 만들어냈다.
영혼이 신선하고 니플헤임을 왜곡시키는 힘까지 합쳐지면, 죽은 부하를 되살리는 것마저 손쉽다.
〈남의 영혼을 탐내는 하이에나들끼리, 누가 더 존귀하니 어쩌니 하는 얘기는 하기 않겠죠?〉
에퀴녹스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소박한 미모의 나르메르 인 흑마법사는 화려한 미모의 로마니아 인 여전사에게 도발하듯 속삭였다.
─뿌드득. 레티티아는 창을 쥐며 발퀴리에를 정렬시켰다.
〈하! ‘불멸’이라더니, 다시 봐도 정말 잘 지은 이름이야!〉
〈당신만 할까요. 겉만 휘황찬란하지, 속은 저나 당신이나 다를 바 없죠.〉
〈죽음의 냄새 따윈 향수 몇 번이면 감춰지지! 너야말로 뭐? 명계의 여왕? 재미있네! 나를 향한 도발이라는 걸 알고 웃다가 배가 찢어지는 줄 알았어! 도망이나 치던 시궁쥐가!〉
〈쥐에게 물려 죽는 여신이라. 해학적이군요.〉
정 반대인 듯 하면서도 닮은 반신들은 살기를 터트리며 제 병사들을 격돌시켰다.
쿠콰과과과광─!!
그것만이 아니다. 소멸하고 되살아나며 보충되는 병사들의 사이에서 중장거리의 마법전이 이뤄졌다.
빛의 창이 발퀴리에 1기와는 격이 다른 숫자로 쏟아졌다. 검은 마법진의 열기가 창을 태워버리고 쏟아졌지만, 매보다 빠르게 비행하는 레티티아의 머리칼을 그슬리는데 그쳤다.
명계의 하늘을 떨게 만드는 접전은 그야말로 신들의 전장이었다.
신대의 싸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지언정, 필시 이 시대 어디에서도 이만한 전력의 격돌은 보기 힘들 것이었다.
‘……호각!’
반신들은 용호상박의 전투를 일으키며 눈을 반개했다.
둘 다 자신의 승산을 더 높게 쳤지만, 이기더라도 군대의 영혼 소멸 및 그녀들의 데미지가 남는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병력을 지휘하는 자로서 눈 감을 수 없는 피해다.
그렇다면 길항하는 싸움의 흐름을 틀어쥘, 새로운 비대칭 전력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초월적인 어둠과 음의 마나를 보유한 어느 키타이 인의 영혼.
기이하게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두 반신의 눈이 지상을 굽어보았다.
그녀들이 갈망하는 새로운 종복이 그곳에 있었다.
***
〈아니 씹, 니미들아! 뉴비 뒤져욧!!〉
나는 싸우다 말고 나를 꼬라보는 씨팔련들의 눈깔을 보고, 그 즉시 눈치를 깠다.
저 씨팔년들이 나를 족쳐서 언데드나 에인헤리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지들끼리 싸우길래 어부지리를 취하려고 했는데, 설마 저 미친년들이 아이템 파밍 경주를 하듯 나를 노리려 하다니?
이 빌어먹을 발기부전의 저주는 우리 아내님들을 귀찮게 만들다 못해서, 이제는 저런 미친 년들까지 꾀어내고 있다!
존나 이거 시선 강간 아니냐? 남자가 이렇게 성희롱, 성추행에 무방비합니다.
“얀데레 여신들에게 너무 사랑받아서 곤란합니다만!”
나는 내 고향 지구의 씹덕 라노벨 제목으로 써도 좆 같아서 불쏘시개가 될 듯한 타이틀에 세상 서럽게 비명을 질렀다.
〈씨이이이팔!! 저 씹새끼들 옵니다!!〉
서로 견제하느라 본체인 썅년들은 오지 않고 있지만, 자기 부하들을 돌격시켰다.
《GOoooooooooooooocccccc!!!》
【으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영혼처럼 희끄무레한 병신들이랑 데스 나이트들의 맹렬한 구애 행위!
꿈이어도 좆 같을 텐데 심지어 현실이기까지 하다! PTSD 터진 병사처럼 농담을 지껄여도 등골을 달리는 오한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끄윽……!〉
길타드가 곱창난 팔로 검을 쥐었다. 오프툼은 말 그대로 신 레벨의 싸움에 주먹을 떨면서 오러 차크람을 꺼냈다. 네페르티티는 잘 쓰지 않는 손으로 어렵게 채찍을 들었다.
─까득!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물어뜯어, 창날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애1미. 존나 아프다. 사스케 이 씨팔럼은 만화에서 소환술 할 때마다 손가락을 씹어먹던데, 그건 역시 만화였다. 이빨로 손가락을 뜯으니까 눈물이 찔끔 났다.
하지만 대가리가 깨져서 뇌수가 찔끔 흐르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나는 룬과 마법진으로 미스릴 창에 마법을 새기고서 금태양의 호흡으로 심호흡을 실시했다.
지금까지는 킬 각만 노리며 비장의 필살기를 아껴 왔지만, 이러다가 좆 될 각이었다. 미니언에게 궁을 갈기는 기분이긴 한데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지 않은가.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의 산증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죽일까, 노르드?’
그래, 참지 마. 내 안의 교수 슬레이어.
그렇게 결론지은 내가 숨을 길게 몰아쉬었을 때였다.
“〈대륜빙벽(Flowering Ice Wall)〉!!”
콰르르르─!!
티르시가 남은 마나를 전부 사용해서, 우리 일행을 감싸는 얼음 돔을 만들었다.
데스 나이트와 에인헤리는 그 벽을 거칠게 두들겼다. 바로 부숴질 정도의 마법은 아니었지만 티르시는 충격이 자신에게 전해지는지 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르아아아아아──!!!】
그때 이성이 없는 듯한 에인헤리가 데스 나이트들을 공격해대기 시작했다.
일부 축출한 파밍 병사들끼리의 싸움이다. 적 병사를 먼저 쳐죽이면 편하게 사냥할 수 있을 거라는 속셈이겠지. 창세의 권능으로 낚아채면 내가 룬으로 저항할 테니, 물리적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쿵쿵쿵쿵쿵!!
덕분에 타격이 들어오면서도 티르시의 얼음 돔은 부숴지기까지 잠시 시간을 얻었다.
“……콜록.”
마나를 전부 쓴 티르시는 기침을 하며 완드를 내버렸다.
허용량을 넘은 마나에 완드의 수정은 깨져 있었다. 눈빛이 침침해진 티르시는 입가를 닦으며 내게 와서 안겼다.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기 직전의 로맨스 타임이야? 길다트, 우리도 할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조금 기다리지.〉
그래, 길다트 이 새끼. 역시 니가 눈치가 있긴 하구나.
나는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하며 잠깐 말을 잃었다. 우리 마법사님의 행동이 상황에 맞지 않는 짓어서? 아니다. 반대로 너무 상황에 딱 맞는 일인 게 이유였다.
“……노르드. 제가 뭘 하려는 건지, 당신이라면 알겠죠?”
나를 신뢰하는 눈과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림〉 마법을, 쓰시려는 거군요?”
아까 전, 악마의 환상을 상대로도 하려던 짓이다.
〈강림〉 마법의 조건은 이 니플헤임에 전부 갖춰져 있다. 당장 하늘에 떠 있는 얼음의 태양부터가 그렇다. 필요한 건 티르시의 각오와, 도구로 변해버린 그녀를 지배할 소유권의 당사자 뿐.
하지만 그 대가로 티르시의 자아는 사라진다.
영혼이야 남아 있겠지만 그건 더 이상 티르시가 아니다.
머리가 없는 시체를 살아 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기억을 잃고 자의식마저 사라진 인형을 티르시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노르드는, 그러기 싫죠?”
“당연하죠.”
“저도 그래요. 그치만…… 안 하면 전부 죽어요.”
티르시는 단호하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준비한 방책도 일회용이며 타계책 1개에 불과하다. 그녀에게 언젠가 말했듯, 내가 완전무결한 초인처럼 굴어봤자 한계는 명백했다.
“……저만 노력하면, 여러분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다시 말해서, 내가 디아볼로처럼 티르시를 도구로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면── 이 상황에 대한 타계책이 하나 생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스 말고 다음 것도 할 걸. 후회하지 말자고 결심해 놓고…… 또 이러고 있네요. 저는 평생 그럴 운명이었나 봐요.”
티르시는 싱긋 웃었다.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얼음 돔에서 눈을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안녕히. 눈치 채셨겠지만── 첫 사랑이었답니다.”
그녀는 로브 자락을 들추며 귀족적인 인사를 올렸다. 뒤의 얼음 벽에서 포효하는 망자들을 배경으로, 웃으면서.
그래서였을까.
“그럼, 여기서 나가면 결혼하죠.”
나는 덤덤하게 그녀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네으에?”
“아, 물론 제가 양심이 많이 없는 양아치 놈이라서 순서는 기다리셔야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사랑하시죠?”
“에? 헤?”
“주례는 친구 분인 헨네시스 영애한테 부탁드립시다. 뭐, 그 분이 안 된다고 날뛰면 뒤에 계신 공주님이나 코르넬리우스 어르신도 계시고요. 기다린 만큼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나는 티르시의 허리를 낚아채듯 안았다. 폼 잡으면서 작별 멘트를 읊었는데, 그게 그대로 고백이 돼 버린 우리 마법사님께서는 멍한 눈으로 내 키스를 받아들였다.
〈휘익~♬〉
오프툼이 휘파람을 불었다. 거 조용히 좀 있으시지.
아예 묻어버릴 기세로 마나를 돌렸다. 바람이 내 주변에서 회전했다.
마나를 남길 필요는 없다. 전부 써 버릴 기세로 폭풍이 내 주변에서 회전했다. 티르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담한 듯 보였지만 만지면 볼륨감이 꽤 있다.
야수회귀의 마나를 그녀의 몸 안에 집어넣었다. 부수거나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이다.
“……푸하, 아?”
티르시는 깊은 키스로 넋이 뽑힌 듯 침을 흘렸다. 나는 그 입에 묻은 침을 핥았다. 우리 마법사님은 그런 짓 하나로도 깜짝 놀라서는 꿈쩍도 못 했다.
짐승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토끼 같은 눈.
그런데 우습게도, 이 눈밭이 잘 어울리는 토끼는 먹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나는 그 깜찍한 눈이 귀여워서 픽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빠 믿지?”
티르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몸을 움츠리며 끄덕였다.
“……네. 죽어도 용서해 버릴 만큼요.”
그거 영광이군.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티르시를 죽게 둘 생각은 없었다. 일을 다 끝내고 지옥을 나가서, 몸도 마음도 멀쩡한 이 토끼를 냉큼 업어다가 침대에서 배 터지도록 냠냠쩜쩜 해야지 않겠는가.
폭풍의 회전이 최대치에 달했다.
나는 열기와 냉기를 손에 두르고 회전을 가속했다. 얼음의 돔이 박살나면서 망자들이 돌격했지만 폭풍을 뚫지는 못하고 오러며 마법 같은 걸 쏟아붓고 있을 뿐이다.
폭풍은 가라앉고 내 주변은 태풍의 눈처럼 침묵했다.
그 고요한 에너지의 집대성에, 뇌기를 더했다.
──절대천공영역.
〈묠니르, 싼닷──!!!〉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언젠가 토르의 〈인신〉마저 때려죽였던 번개의 망치가, 돔 바깥에서 돌아다니던 망자의 무리를 일소했다.
어수룩하기는 했어도 반신마저 불태운 번개다. 에인헤리고 데스 나이트고, 아무리 띄워줘 봤자 죽창 한 방이면 뒤진다.
〈푸우우우…….〉
당연히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마나는 쥐좆만큼 남았고, 내 환상의 번개쑈에 이목이 집중됐다. 말하자면 뒤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다. 저기 발퀴리에 하나가 창만 던져도 맞아 뒤질 각이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서서 고함쳤다.
〈레티티아──!!!!!!!!〉
남은 마나를 전부 성대의 강화에 써서 포효했다. 전쟁터와 같은 소리로 어지럽던 니플헤임의 설원이 공명하듯 떨렸다.
─우뚝!
전황이 일시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죽이고 죽이던 망령의 전쟁터가 시간이라도 얼려버린 듯 정지했다. 놀랍지는 않다. 결국 저들을 조종하는 2명이 싸움을 멈췄을 뿐이니까.
〈……네에~ 부르셨나요?〉
레티티아는 요염하게 웃으며 아이처럼 대답했다. 그 눈은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 했지만, 절대 동격의 존재를 보는 건 아니었다. 티르시와는 천지 차이다.
오히려 새끼 동물을 박제하기 직전, 가학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듯한 눈깔이다. 매우 좆 같다.
나는 그런 빡침마저 연료로 삼아서 물었다.
〈너, 아까 전에 알프헤임을 멸망시켰다니 어쩌니 했었지.〉
〈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저는 병사를 보내고 뒤에서 놀고 있었지만요.〉
〈그런가. 그러면 드워프 왕국, 니다벨리르는?〉
그 질문을 뱉자 배 안에 또아리 친 분노가 꿈틀댔다.
──영국의 교수 크라피카는 말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이 분노가 풍화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아마 짐작하건대 그는 옳게 된 교수였으리라. 그 말에는 귀 기울일 만한 현기가 서려 있었으니까.
〈니다벨리르에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염료를 유통시킨 것도, 네 짓인가?〉
언젠가 말했듯, 분노는 소모성이다.
시답잖게 소모하면 탄산음료에서 김이 빠지듯 농도가 낮아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분노를 참아 왔다.
니다벨리르를 떠나기 전, 장인 어른의 묘비 앞에서 울었던 프랑의 모습.
결혼식 날, 프랑의 가족이 앉을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그 날의 기억.
거기에서 유래된 모든 분노를 구밀복검의 마음으로 가슴에 묻어뒀다.
〈……아하.〉
레티티아는 눈을 크게 뜨고서, 뭔가 알아차린 듯 웃었다.
〈뭐, 저희는 관할이 달라서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데요.〉
투구를 쓴 반신은 하늘에서 다리를 꼬며 놀리듯 말했다.
〈물건을 만드는 솜씨도 떨어진 땅딸보 노예들 정도야…… 몇만 마리 죽어도 그닥 상관 없지 않을까요?〉
〈그래?〉
그 말이 길디 긴 인고의 시간의 끝을 고했다.
나는 조용히 한쪽 눈을 감았다.
〈자, 바라던 대로의 대답이었나요? 이건 무슨 이유에서의 질문이죠?〉
〈이유라……. 별 건 아니고.〉
분노가 임계점을 두들겼다. 티르시가 내 손을 잡았다.
준비 올라잇이다. 나는 사나운 웃음을 띄웠다.
〈그냥 조금 더, 니들한테 빡칠 계기가 필요했거든.〉
창을 쥐고, 타이밍을 맞춰서──
──지금.
……쿠화아아아아악!!!
얼음의 태양에서 빛의 기둥이 티르시에게 내리꽂혔다.
그 빛은 니플헤임의 추위보다 더 거세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엄동설한이라는 말조차 가벼운 풍압에서 나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분노는 소모성이다.
왜냐하면, 꼴마초의 분노는 불처럼 타오르기 때문이다.
슈와아아아아아아아악──!!!
오러보다 더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넘쳐흐르며, 내 몸에서 어둠과 음의 마나가 용솟음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