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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71화 (571/1,009)

하늘에서의 싸움이 끝나기 직전.

에퀴녹스가 지상에 내려온 그때, 길다트는 매직 아이템을 기동시키며 외쳤다.

〈언데드는 무시해!! 본체를 친다!!〉

─달칵! 길다트는 유물 【정령원의 야곡】의 효과를 발동시켰다. 인연이 깊은 정령술사가 소환한 정령을 대신 조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매직 아이템이다.

“Uuuuuuuuuuuuuuuuuu!!”

정령들이 포효하며 마법을 퍼부었다.

칼날과 같은 물줄기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치며 감옥을 만들었다. 마법에 노려진 언데드들 중에 마법사는 거의 없었기에 숫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발을 묶는 건 간단했다.

쥬우우우욱……!!

단지, 대가로서 그만한 마나를 소모했다.

티르시에게서 전해지는 마나가 잠시 줄어들었을 만큼, 저 과감한 공세는 만만찮은 비용을 요구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적군을 돌파하기 위해서 티르시에게 부담을 지운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티르시의 발목을 잡을 뿐.

역전의 전사들은 그 사실을 말할 것도 없이 이해했기에, 제 몸에 가해지는 부작용도 잊고 3방향에서 에퀴녹스에게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영혼은, 본체 안!〉

네페르티티가 정보를 공유하고자 외쳤다.

리치 정도의 언데드라면 영혼을 몸 밖에 보관하는 것으로 유사적인 불로불사를 이룰 수 있다.

단지, 에퀴녹스는 인간의 육체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창세의 권능이라는 신성력의 극치를 사용하고자 언데드로 완전히 전향하지는 않은 거겠지. 지금 보이는 본체만 죽이면, 부활마저 가능하다는 사악한 대마법사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집채만큼 커진 땅의 마나의 오러가 춤을 추었다. 오러 차크람을 둘둘 감은 팔이 믹서기처럼 휘둘러졌다. 드래곤의 방어 마법도 부숴버릴 채찍이 니플헤임의 찬 공기를 찢었다.

콰르르르르─!!

단기간이라면 무한정에 가까운 마나 공급에 힘 입어, 분명하게 미스릴 클래스 최상위권 수준의 공격이 다리를 잃고 떠 있는 에퀴녹스의 급소를 노렸다.

어느 것이라도 드래곤이라도 해치울 수 있는 공격들이다.

위력만 말하자면 분명 에퀴녹스의 흑마법에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힘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거둬가는 공격이 퍼부어지는 그 일촉즉발의 순간, 에퀴녹스는 담백하게 주문을 외웠다.

〈《혼백 공명: 부감(俯瞰)》.〉

찰나와 같은 영창이 끝난 순간, 3명의 달인은 마치 차원이 다른 존재로부터 부검(剖檢) 당하는 듯한 기분에 전율했다.

─으적!

그 오한의 의미를 깨닫고 뒤늦게라도 공격을 멈춘 건 네페르티티 뿐이었다.

길다트의 검은 가볍게 흘려지고, 대신 그의 가슴에 뼈 손바닥이 격돌해 갈비뼈를 부숴버렸다. 오프툼의 오러를 감은 팔은 불가능한 각도로 뒤틀리며 시꺼멓게 변색됐다.

〈끄학……!!〉

〈아실지 모릅니다만, 저는 사바세계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화오오오오! 에퀴녹스는 팔에서 뿜어낸 망령의 영혼으로 오프툼을 붙잡았다.

뼈마디를 부숴버릴 듯한 압력에 오프툼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힘을 짜냈다. 180도 꺾인 팔에 만든 오러 차크람이 스스로 회전하며 망령의 감옥을 갉아내기 시작했다.

〈때문에 현세의 지식은 그다지 없지만, 근 수백 년 사이 재미있는 이론도 몇 가지 나왔더군요. 모험가 길드의 총창이라는 자가 만든 클래스 제도는 그중에서도 발군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수다쟁이군!!〉

길다트가 검을 휘둘러 오프툼을 구속한 망령을 베려 했다. 내출혈로 숨을 쉬기 힘든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예리한 검술. 하지만 에퀴녹스는 예측했다는 듯 흘려냈다.

흑마법사는 물론이고 전문 전사들에게도 보기 힘들 정도로 원숙한 패링이었다.

휘릭─!

오프툼을 구해 내지도 못하고 역으로 붙잡힐 뻔한 그를 네페르티티의 채찍이 낚아챘다.

〈……물론 미스릴 클래스라는 분류는 좀 진부했죠. 실력 있는 전사가 마나를 오러로 정제할 수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니, 실력의 고저를 무시하고 포괄적으로 분류한 겁니다.〉

길다트를 놓친 에퀴녹스는 시시한 듯 말했다.

네페르티티는 타고난 영감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주문 없이 발동하는 마법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간 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섣불리 공격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면 적어도 말하는 데 정신이 팔린 이때, 오프툼을 묶은 망령만이라도 해치우자.

그렇게 생각하고 채찍을 살짝 움직인 네페르티티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부 들여다 본 것처럼 쏘아보는 검은 눈동자에 흠칫 멈췄다.

〈같은 클래스에서도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강한 자와 약한 자로 나뉩니다. 제 느낌으로는…… 채찍을 쓰는 당신이 다른 2명보다 1~2수 위로군요.〉

〈……관심 없어.〉

〈예. 필시 모험가 길드의 총장이라는 자도 그랬겠죠.〉

즉답과 같은 단언에 무안할 만도 하건만, 에퀴녹스는 원래 하려던 말로 이야기를 흘러넘겼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떤 힘의 극(極)에 도달하면, 그때부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오는 이들에게 흥미를 가지기가 힘들게 되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에퀴녹스는 지팡이를 내려찍었다.

─쿠슉!

지팡이가 구속에서 벗어나려던 오프툼의 안구를 관통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이들을 보며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중턱에 있을 무렵까지이다’. ‘산의 정상에 선 뒤부터는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는 것보다는, 정상보다 더 높은 곳을 갈망하게 된다’…….〉

─휘적, 휘적.

동화 속 마녀처럼 오프툼의 눈에 꽂은 지팡이를 휘저으며 에퀴녹스는 말했다.

긴장감 없는 질문이었지만 네페르티티는 차마 공격하려 들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짓이 될 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마스터 클래스의 마법사로서 정말이지 공감이 가는 말이더군요. 왜인지 아시겠습니까?〉

─오싹.

검 손잡이에 힘을 주려던 길다트는 조금 전, 하늘보다 더 멀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거대한 악마가 다시 나타난 듯한 오한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위압감은 에퀴녹스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저희에게는, 여러분의 혼과 생각이 손에 잡힐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냉정한 표정 뒤에서 필사적으로 기회를 탐색하는 길다트와 네페르티티의 기분마저, 《혼백 공명: 부감》을 발동한 에퀴녹스에게는 전부 보이고 있었다.

달인에게는 전사와 마법사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그건 어떤 방식으로 강함을 탐하건, 결과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같기 때문이다.

미스릴 클래스의 전사의 무예는 마법처럼 술식을 이루듯, 마스터 클래스의 대마법사에게 격하(格下)의 전사들이 쓰는 기술 따위는 손에 불을 지피는 저위 마법이나 진배없다.

그렇기에 마스터 클래스는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패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강함은 육체의 강함과 영혼의 크기로 정해지죠. 그리고 영혼이 확장될 수록, 영감(靈感)도 강해집니다. 정상에서 내려보면, 어떤 길로 올라오는 인간이건 손에 잡힐 듯 보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짓이 뻔히 보이기라도 한다는 건가.〉

길다트는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 이야기로만 듣던 마스터 클래스와의 격차가 이 정도라니?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뻔히 당해놓고도 현실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승에서도 마스터 클래스로 평가받는 이들의 숫자는 수십 년 간 변하지 않았다.

인류 역사를 전부 뒤져도 20명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리치는 그만한 존재인 것이었다.

〈……하. 그런 것 치고는 우릴 상당히 경계하더군?〉

〈예. 영혼의 본질과 강대함이 보였기에 경계했습니다. 당신들이 아니라, 노르드를.〉

에퀴녹스는 흑마법사였다. 영혼과 죽음을 다루는 마법으로 일대 경지에 도달한 대마법사에게 타인의 영혼과 그 강함을 읽어내는 건 경험과 본능, 어느 쪽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경계하기에 걸맞은 상대는 노르드 뿐.

아무리 경지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가 품은 마나는 무시할 게 못 됐다. 특히 그로부터는 비수를 감춘 듯한 기척이 느껴졌기에 한층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어도 양치기는 늑대를 피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걸 압니다. 그는 제 군대를 괴멸에 이르게 할 힘이 있었고…… 제 경계심은 현명했습니다.〉

에퀴녹스가 안구가 묻은 지팡이를 가볍게 털었다.

긴 시간 동안 준비되었던 고위 흑마법이 발현했다.

콰르르르륵─!!

네페르티티 일행에게 흘러가던 티르시의 마나가 전조없이 물꼬를 틀었다. 마치 자신보다 큰 거머리에게 목을 물린 것 같은 출혈감에 길다트가 이를 악물었다.

〈마나를, 흡수하는 건가……!!〉

〈말씀드렸죠? 어울려 달라고.〉

에퀴녹스가 그들을 살려뒀던 이유는 그것 뿐이었다.

저들은 단지 티르시로부터 마나를 빼앗기 위한 수단이다.

흡수 효율은 나쁘지만, 마법사 간의 전투에서 이만큼 흉악한 흑마법은 달리 없었다.

〈Cuaaaaaaaaaaaaa!!!〉

어느새 정령들을 격파한 언데드들이 그들을 구속하고자 덤벼들었다. ─콰릉!! 반사적으로 피하려던 네페르티티는 가슴에 흑마법의 낙뢰를 맞고 기침을 토해냈다.

〈케, 흑…….〉

〈저쪽도 끝나가는군요. 불쾌한 개입이 많았습니다만, 이제 끝낼 시간입니다.〉

에퀴녹스는 붙잡은 이들에게는 관심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쿠웅!! 언데드 드래곤이 혼을 반파당하고 추락했다.

티르시가 마스터 클래스의 언데드를 사살한 것이었다. 에퀴녹스는 눈을 반개했다. 5백 년 넘게 다뤄오던 용의 죽음에는 아무리 그녀라도 적잖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바세계에, 흥미가 없다고…?〉

진짜 싸움을 앞두고 갈고 닦던 정신을 가라앉히는, 시체와 같은 음성.

에퀴녹스는 마법으로 적의 기척을 널리 감지하며, 안구에 큰 구멍을 내고 죽어가는 흑마법사 사냥꾼에게 귀찮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왜… 내 가족이 있는 도시를 파괴했지…?〉

〈제가 관심이 없다 해도, 상대도 제게 흥미를 가지지 않는 건 아니죠. 저는 예전부터 흥미 없는 상대에게 구애를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요. 마침 지금처럼요.〉

에퀴녹스는 뇌까리듯 말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지금’이란 귀찮을 뿐인 마나 주머니로부터 말을 건네지는 이 상황과, 반파된 하늘의 궁전에서 날아오는 적들을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슈와아아악─!!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빛살. 20마리의 발퀴리에들과 그 수장이었다.

에퀴녹스와 같은 것을 발견한 네페르티티의 눈이 떨렸다.

〈……노르드.〉

〈그에게 이겼나 보군요. 골 빈 가짜 신.〉

건재한 레티티아를 목격한 에퀴녹스가 혀를 찼다.

상처는 컸던 걸까. 투구과 갑옷의 일부를 잃었지만 대담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노르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인헤리로 삼지도 못했나. 강력한 언데드의 소체가 되어 주었을 전사의 혼이 소멸했다는 의미였다. 에퀴녹스는 용을 잃었을 때보다 진한 아쉬움을 느꼈지만, 금새 웃음을 띄웠다.

레티티아로부터 느껴지는 마나가 적다. 노르드를 상대하며 소모가 컸던 것이다.

이 3파전의 최종 국면에서, 가장 높은 승기를 지닌 건 그녀였다.

〈운명이란 정말 얄궂군요. 그렇지 않나요? 제가 20여년도 전에 저 골 빈 여자의 동료와 교전하지만 않았어도, 〈임모르탈리스〉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요.〉

에퀴녹스는 긴 장정을 끝낼 때라는 직감에 중얼거렸다.

과거,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파라오의 혼을 노리던 무렵.

에퀴녹스와 뜻을 함께하는 흑마법사는 그 밖에도 몇 명 더 있었다. ‘육망성의 좌’라는 이름의, 장차 〈임모르탈리스〉의 핵심 요인이 될 이들이었다.

그렇게 어느 하이 엘프 교수와 접선하려던 날.

에퀴녹스는 1명의 〈인신〉과 조우했다.

─신좌에 도달할 가능성 다대(多大).

─따라서, 너를 제 1급 척살대상으로 규정한다.

그 짧은 선언이 나르메르-나일의 대도시 하나를 괴멸시킨 전화(戰火)의 방아쇠였다.

이승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그녀가 처음 사바세계에 힘을 휘두른 날이었으며── 〈편찬대대〉가 에퀴녹스를 《용아병단》으로 지칭하고, 척살대상으로 삼은 날이었다.

〈그랬다면 제가 적과 싸우다가 친구를 잃거나, 여러분이 가족을 잃는 일도 없었을 테죠. 돌고 돌아 그날의 면면이며 상황의 반복이라……. 불쾌하기 이루 말할 데 없어요.〉

〈……그 동료란 건, 누구였어?〉

중얼거린 감상을 헤집듯 불쑥 파고드는 말에도 에퀴녹스는 무관심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오싹.

단지 목덜미를 스친 살기가 그녀마저 경직되게 만들 만큼 오싹한 귀기(鬼氣)를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 에퀴녹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츠즈즈즈즈…….

끓어오르는 마나로 하늘색 머리카락을 띄우면서, 무표정한 얼굴에 소름 끼치는 귀기를 품고── 팔을 묶인 네페르티티가 그녀를 죽일 듯 쏘아보고 있었다.

〈그때, 너와 싸웠던 건…… 누구였어?〉

〈……아하.〉

에퀴녹스는 마스터 클래스의 영감을 더욱 길러주는 흑마법으로 네페르티티의 혼을 읽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들끓는 몇 개의 감정을 해석하고서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과연. 왠지 전의가 희박하다 했더니…… 제가 아니었던 모양이죠?〉

〈……………….〉

등골이 쭈뼛 서는 살기도, 결국 목덜미를 구속된 패배자의 발버둥이다.

에퀴녹스는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저 젊은 천재에게 동정심마저 느끼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평생의 노고가 헛수고였다니, 그 기분은 저 역시 잘 알죠.〉

〈……질문에, 대답해!〉

〈이름 따위 모릅니다. 이승에는 관심 없다고 했잖아요?〉

에퀴녹스는 지루한 듯 대답하며 날아오는 2명의 여신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군요. 창과 마법을 능숙하게 쓰는 자였죠. 꼭 방금 전에 봤던 그 남자처럼──〉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하던 에퀴녹스는 문득 위화감을 발견했다.

접근해 오는 발퀴리에의 마나가 방금 전과 다르다. 마나의 패턴에서 사람을 구분짓는 건 어지간하면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지만, 이렇게까지 다르다면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했다.

‘어둠과 음의 마나……?!’

발퀴리에를 움직이게 만드는 마나는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어둠과 음의 마나로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쌩쌩한 발퀴리에였지만, 저건 레티티아의 마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레티티아 본인한테서 느껴지는 마나마저── 어둠과 음의 마나였다.

〈──함정!!〉

〈넹, 정답!〉

──쐐애애애애액!!

눈을 1번 깜빡이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만큼 빨라진 그녀의 시간 감각 속.

투명화 마법을 해제한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쑥 솟아나 창을 휘두르는 남자가 보였다.

서걱─! 에퀴녹스의 팔이 공중을 춤췄다.

레티티아를 쓰러트린 후, 지면에 착지한 노르드가 간신히 반격에 성공한 것이다.

기습까지 가했는데도 적이 피해 버리고 말았지만, 솔직히 빗나가거나 말거나였다. 노르드는 입 꼬리를 위협하는 야수처럼 끌어올리며 노호성을 뱉었다.

〈귀여운 여신인 줄 알았어? 유감! 꼴마초였답니다!〉

〈칫, 이딴 잔꾀를 잘도──!!〉

〈성공한 야바위를 전략이라고 부르는 거야, 썅년아!!!〉

말투에 안 맞는 살기등등한 미소였다.

어째선지 〈공간이동〉은 막혔지, 동료들은 내려오려는 중에도 곱창나고 있지, 숨을 죽이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완전미채 마법으로 접근하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파파파파팡!! 팔을 잃은 에퀴녹스는 반사적으로 흑마법을 연타했다.

직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마법. 무영창 마법인데도 노르드를 죽이기에 충분한 마법의 연속이었다.

〈저 여자는, 변신 마법을 건 발퀴리에입니까!!〉

〈다 속아놓고 ‘사실 알고 있었음’ 하고 정신승리 해 봤자 추하다, 에퀴녹스야!!〉

콰과과광─!! 폭발에 틈타는 노르드의 움직임에 에퀴녹스가 이를 갈았다.

창의 항마력과 남은 마나로 받아치는 노르드는 에퀴녹스로 하여금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할 만한 강적이었다. 교전하는 중에 하늘에서 집중되는 얼음의 마나를 무시해야 할 만큼.

노르드는 전사답게 마법사가 영창할 시간을 벌고, 기다림 끝에 외쳤다.

〈티르시!!〉

티르시는 지시에 응했다. ─투과아아아앙!! 엄청난 마나로 만들어진 얼음 유성군이 후방의 정예 언데드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갈아버렸다.

콰아아앙─!!

얼음 유성군 중의 1개가 에퀴녹스와 노르드 사이에 꽂혔다.

거리 조절 실수인가?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걸 착각할 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혼백 공명: 금관》!!〉

에퀴녹스는 바로 전방에 최대한 마나를 응축한 실드 마법을 펼쳤다.

마나량이 모자란 저들은 눈속임을 통해서 기습을 가할 게 분명했다. 적의 영혼과 기척은 전부 전방이었다. 에퀴녹스는 모든 방어를 1장의 실드에 맡기고 반격을 준비했다.

〈──역시, 머리 좋은 놈들이 속이기 쉽다니까.〉

그리고 그때, 얼음 유성의 후방에 숨은 노르드는 사악하게 웃었다.

〈대신 귀여운 사냥개를 드리겠읍니다.〉

──콰득!!

에퀴녹스의 후방에서, 완전히 그녀의 관심 밖이었던 손이 뼈와 살이 뒤섞인 영혼의 중추를 관통했다.

〈……어?〉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 상관없지만, 그렇게 매정하게 차 버리면 곤란하지. 나는 그날 이후 너와 만나는 순간만을 상상하며 살아왔는데.〉

위이이이이잉──!!

자신과 동격의 적에게만 집중했던 에퀴녹스는, 자기 가슴에 불쑥 솟은 검은 피부의 팔을 보았다.

오러로 만들어진 차크람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치료해 줘서 고맙군, 노르드. 깜빡 잠들 뻔 했지 뭐야.〉

피투성이의 안와에서 한 쌍의 눈빛을 빛내는 사람은 물론 오프툼이었다. 에퀴녹스에게 접근한 노르드는 기습을 가하기 전에 오프툼을 먼저 치료했던 것이다.

그리고 티르시로부터 받은 마나로 만든 오러 차크람은, 등 뒤의 가드를 포기한 에퀴녹스의 방어를 꿰뚫었다.

〈마스터 클래스는 미스릴 클래스한테 절대 안 진다굽쇼?〉

언젠가 들었던 얘기다. 노르드는 픽 웃으며 말했다.

〈짜잔, 그런데 절대란 건 없군요.〉

원한의 크기는 달라도 피차 비슷한 처지의 복수자였기에, 그는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복수라는 건, 남에게 맡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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