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76화 (576/1,009)

“가자. 머리 말려줄게.”

내가 혼자 말도 못 하고 전율하고 있자, 다나는 시크하게 말하면서 수건을 몇 장 더 꺼냈다.

시발, 다나가 내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뭐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지구에 떨어지나? 나는 평소 때와 다름 없는 다나의 새초롬한 얼굴에서 뭔가 오한이랄 걸 느끼며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너희도 나 때문에 못 씻었지? 목욕하고 와.”

“순서대로 씻을 테니 걱정 말거라. 네 명이 들어가기엔 좀 좁잖느냐.”

“……열 명이 들어가도 될 넓이던데?”

눈을 껌뻑거리던 다나는 무슨 소리인가 하는 느낌으로 되물었다.

“왜? 다시 들어가서 씻게? 그럼 우리도 씻고.”

“……아냐. 가자.”

“음. 뭐든 느긋하게 하자꾸나. 서두를 것 없지.”

베로니카는 그럼 됐다는 듯 내게 팔짱을 꼈다.

“……………….”

그러고 보면, 이것도 이거다.

우리 여신님 쪽에서 먼저 팔짱을 낀다고? 리을리?

데이트 중에도 내가 팔짱을 끼자고 하면 얼굴이 빨개지던, 바이콘이란 이름 값을 못 하던 여신님이 왜 이렇게 태연하게 팔짱을 끼며 가슴까지 밀착한다는 말인가?

‘아니 시발, 이거 혹시 팔짱이 아니라──’

“야, 남편놈아. 머리 말리면서 이거나 읽어 봐.”

뭔가 깨달으려 하던 차에 다나가 편지지를 내밀었다.

베로니카에게 이끌려서 소파에 앉혀진 나는 평소랑 똑같은 다나의 말투에 살짝 안심했다. 어째선진 모르겠는데, 지금은 다나 특유의 새침한 말투가 안도감을 주는 것이었다.

“편지? 누구한테 온 거야?”

“누구한테? 아니, 니가 보낼 편지인데.”

“……데에?”

내가 멍청하게 편지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지에 가득 적힌 글이 눈에 들어오자, 다나가 말했다.

“너, 정식 허가 없이 탐사대에 껴서 모든 일을 선두지휘한 꼴이 됐다매.”

“어? 뭐, 그렇지.”

원래는 유적탐사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나는 정식 허가를 받은 입장이 아니다.

어쩌다가 피라미드로 가서 그 안의 온갖 문제를 쓸어버리고 나르메르-나일의 오랜 고름과도 같던 흑마법사의 대가리를 똑 따 온 것에 가깝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한테 입증을 받고, 보고서를 써 놔야 파라오한테 포상을 받든가 할 거 아냐. 그건 그 초안이고, 또 아르마알스 가문에 보낼 편지도 써 놨으니까 첨삭해서 줘.”

“……누나가 대씬 써 줬다고?”

“그럼 달리 누가 쓰냐? 나도 너만큼 예의 차린 편지 쓸 줄 알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도 그게 아니었다.

다나가 내가 씻는 사이에 내 일을 다 해 놨다니?

평소랑 말투는 똑같지만, 평상시라면 절대로 할 리가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말리는 다나의 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이런 건 내가 친필로 써야 하지 않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여 전투의 후유증으로 글을 쓰기 어려우나, 시급을 요하는 보고이므로 삼가 아내의 손을 빌려 대필합니다. 부디 가주님께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코르넬리우스 어르신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였다.

─글을 쓰기가 힘들어서 아내가 제 말을 받아적었습니다.

해석하자면 저런 뜻이었다.

존나게 교묘한 표현이었다. 살수대첩에서 이긴 을지문덕이 붓을 들 힘이 없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러겠는가? 보고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글만 대신 적어줬다는데.

내가 해낸 결과를 생각하면 대필가지고고 쿠사리를 주는 건 너무 쫌생이 같겠지.

편지를 받을 사람들도 그렇다. 어르신은 진정한 마초시니 이런 걸 신경쓰지도 않으실 것이며, 길다트나 다른 사람들도 별로 개의치 않을 듯 하다.

나는 다나가 쓴 편지에 몇 줄 정도 첨삭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 고쳤냐?”

“어? 어, 어어.”

“그럼 이리 줘. 다시 쓰게.”

편지를 받고 얼마나 지났을까. 몇몇 표현을 나답게 고치고, 전할 말을 추기(追記)해 놓고 나자 다나가 내 손에 편지지를 쏙 빼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말했다.

“아, 아니. 그냥 내가 쓸게. 뭘 누나가 대신……”

“다 받아쓰고 또 읽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아니 그니까, 그걸 신경 쓰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황망해하든지 말든지 다나는 내가 보이는 데 앉아서는 펜을 끼적대기 시작했다. 첨삭한 내용을 추가해서 편지를 여러 통 쓰려는 것이었다.

“후후. 머리가 살짝 덜 말랐군. 그대의 향취가 난다.”

베로니카가 내게 안겨서는 몸을 끌어안았다.

마치 동물이 자기 소유의 수컷에게 마킹을 하는 듯 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불현듯 그 따스한 눈빛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거, 마킹이 아니라……’

……마크?

1대 1 전담 마크?

“후우, 며칠 만에 하는 목욕은 개운하네요~.”

그때 목욕을 끝낸 라리루라가 여관 방의 거실로 들어왔다.

목욕이 끝났나보다. 프랑도 머리를 깔끔하게 말리고 왔다.

평소라면 내가 말려주니까 일부러라도 조금 덜 말린 채로 오는데, 오늘따라 절대 그럴 일이 없도록 방지하기라도 한 듯 빗질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들은 나에게 안겨 있는 베로니카를 슥 지나가선 옷을 갈아 입었다.

프랑은 속옷이나 다름없는 네글리제 잠옷이고 라리루라는 나잇대에 맞는 트렌디한 옷이었다. ─쪽♡ 베로니카가 뺨에 키스를 하고 일어섰다.

“머리는 프랑에게 말려달라고 하거라. 나는 잠시 연구하고 싶은 게 있으니.”

“연구? 무슨 연구?”

─핫! 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몇 가지의 후보를 떠올렸다.

내 창, 〈강림〉 마법, 그밖에도 이것저것. 베로니카가 손 댈 연구는 많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그 정도인데, 갑자기 뭘 연구하려는 생각일까?

베로니카는 고개를 살짝 꼬며 말했다.

“아니, 결계 연구다. 지금으로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지.”

“결계……? 방어 결계 같은 거?”

“아무래도 우리 집의 보안이 낮은 듯 해서 말이다. 안전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얻은 발퀴리에도 배치했으면 한다만, 괜찮겠느냐?”

내가 오딘의 후계자란 걸 알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며 숭배하던 애가, 이제는 오딘이 손수 만든 병사들을 경비병으로 쓰자고 하고 있다.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해. 그래, 집이 안전해지는 건 좋은 일이지.”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우선은 오러에도 견디는 결계가 기본 목표다.”

오러? 오러라니? 내가 아는 그 오러 말인가?

“……아, 〈편찬대대〉가 쓸지도 모르니까 그런 거지?”

침입자의 실력의 척도로 삼은 거지? 그렇지?

베로니카는 싱긋 웃기만 하고 동문서답을 했다.

“결계를 파괴하거나 돌파하려는 시도가 발생하는 즉시 집 전체에 경보를 울리고, 〈아공간〉 마법과 골렘, 발퀴리에를 총동원해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다.”

“……적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맞지?”

“적만이 아니지.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말고.”

와! 증말 믿음직스러운걸! 나는 억지로 웃었다.

─꿀꺽. 목울대가 울었다. 숨 쉬기가 갑갑하다.

나는 목을 조르는 옷깃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입은 옷에는 칼라가 없었다. 목을 조르는 옷깃은 커녕 쇄골이 보일 만큼 널널했다.

“……돈은 괜찮아? 내가 내 줄까?”

“되었다. 일족의 자산을 융통할 생각이니.”

“어…… 바이콘 족이 모아둔 돈 같은 거? 그걸 그렇게 막 써도 돼?”

“흠? 그대의 안전을 위해서다. 싼 편이라고 생각한다만.”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베로니카.

‘우리’의 안전이 아니라, ‘내’ 안전이랜다.

그때 며칠 굶기라도 한 듯 편지를 쓰면서 작은 빵을 먹던 다나가 입을 열었다.

“돈이 모자라면 말해. 나도 보탤게.”

“뎃……? 눈나가 돈이 어딨어서?”

아니 그야, 있긴 하겠지. 내가 아내님들 통장을 건드리진 않으니까.

다나는 펜으로 머리를 긁다가 말했다.

“적금 깨려고.”

“……적금?”

“어. 지금 집은 네가 샀잖아? 덕분에 어영부영 남겨뒀던 돈의 활용처가 생겼네.”

“아, 그럼 저도요~. 모아둔 저금이 있어서요~. 혼수금이었지만, 사랑하는 선배를 위해서라면 적당한 쓰임새겠네요♡”

“후후. 다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어떤 식으로 만들지 같이 상의라도 하자꾸나.”

“그거 좋네. 우리가 같이 머리를 맞대면 무서울 것 없지.”

“티르시 언니도 일어나시면 도와달라고 부탁해 볼게요~.”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아내님들. 정말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따듯해진다.

하지만, 왜일까.

땅콩 떼는 날이 정해지는 걸 츄르를 먹으며 보고 있는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뭐라 형언하기 힘든 오한이 등골을 스치는 것만 같다.

“노르, 이거라도 마시면서 해.”

그때 프랑이 음료수를 타 왔다.

여관 방에 있는 재료들을 써서 만든, 힐끔 봐도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료수였다. 유리잔에 들어간 얼음이 달그락 하고 시원한 소리를 냈다.

“……나, 지금 딱히 하고 있는 것 없는데.”

“앗, 그랬어? 그럼 쉬면서…… 아니다. 할 일이 없으면 내가 귀 파 줄게. 자.”

─탁탁. 누우라는 듯 무릎을 두드리는 프랑.

저 부드러운 허벅지 살을 보라. 일단 누우면 뭘 어쩔 것도 없이 칠랠래 팔랠래 누워서 프랑이 쓰다듬어주는 걸 하루 온종일 받게 되고 말겠지.

그기로 그렇게 되면, 피로가 쌓일대로 쌓인 나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자비가 넘치는 나머지 오히려 무자비해진 프랑의 손길에 사르르 감기는 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잠들어 버리고 말 게 분명하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네에~.”

─벌떡! 불길한 예감에 일어나자 프랑이랑 라리루라가 나를 따라 일어났다. 마치 군부대 시절에 겪었던 전우조와 한없이 유사한 움직임……!!

그야말로 러브러브 전우조!!!!

‘이건……!’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게 『상식』이라는 듯이 소파 옆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는 라리루라.

내가 집에서 할 만한 일을 전부 빼앗아 간 다나.

아무튼 절대 도망 못 치는 결계를 구상하겠다는 베로니카.

마지막으로 나의 먹고, 자고, 쉬는, 모든 행위를 관리할 기세인 프랑……!

‘이건……!!’

자꾸 집 밖으로 나가다가 골골대는 나를, 노답 백수 히키코모리 기둥서방으로 만들기 위한 포위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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