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82화 (582/1,009)

씻고 나와서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싸장님, 나 왔어~. 그리고 여기 뉘신지 모를 아저씨도 왔어~.〉

〈간밤은 잘 쉬셨나? 뉘신지 모를 아저씨다.〉

오드리와 오프툼이었다. 오 씨 콤비로군.

나는 픽 웃고서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파가 2개 있지만 어제 아내들과 뒹군 소파에 손님을 앉힐 수는 없는 마당이라, 내가 그쪽에 미리 앉았다.

〈죄송했습니다, 오프툼 씨. 부상의 심각함으로 치면 제가 오프툼 씨를 찾아뵙는 게 맞을 텐데.〉

〈후유증은 없으니 됐지. 은인에게 더 이상 뭘 바라면 천벌 받아. 수렵신님께서는 의외로 한 성깔 하시거든.〉

그야 사냥의 신이면 그럴 만 하지. 우리 고향의 오리지널 수렵신 아르테 뭐시기 씨는 목욕하는 걸 보면 사슴으로 만들어버리는 인성파탄자라고.

오드리는 오자마자 소파에 흐뭇하게 누웠다.

〈우리 사장님도 쉬어야 할 테니까 일부러라도 하루 정도 텀을 두고 왔지. 여기 아저씨랑은 오는 길에 마주쳐서 같이 올라왔고. 이런 비싼 여관은 너무 넓은 게 문제야.〉

〈글쿤.〉

느그 사장님도 마음만은 차고 넘칠 만큼 힐링을 했단다.

천국을 보고 왔는데 피곤함은 덜 가셨다.

하룻밤에 2~30발 넘게 짜이고도 죽지 않은 게 대단한 거겠지만.

〈암튼 건강해 보이니 됐네. 알리씨크에서 뭔 일 있냐고 물어봤더니 줄초상 난 것처럼 사모님들이 무기력하고 살기등등하길래 나도 이직처를 고민할 뻔 했잖아.〉

〈내가 뒤져도 듀나미스 공방은 남는단다.〉

어르신이 ‘흑흑 자네의 뜻은 내가 이어받겠꺼-억’ 하실 게 분명하거든.

애초에 비지니스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나마 일말의 마초이즘을 가슴에 품은 어르신이니 그런 결말이 됐어도 좆 같은 기분은 덜 할 것이다.

다른 하이에나들이 뜯어먹는 것보단 나을 거고.

〈진짜? 아싸, 나 취직 하나는 뒤지게 잘 했네!〉

〈이 년이?〉

내가 설명에 유독 좋아라 하는 오드리였다.

잠시 잡담을 나누면서 손님용 음료수가 오기를 기다렸다가─사막 국가라서 시원한 음료였다─, 그 직원이 떠나가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 할 말이 있는가 본데, 아가씨 먼저 얘기하게.〉

〈그래도 돼? 나야 좋지. 일단 우리 공방 쪽은 원만하게 돌아가고 있어. 사건사고가 많아서 나라도 나서서 해명? 설명? 아무튼 그런 걸 해야 하나 싶을 정도더라고.〉

오드리는 직원 A 정도의 신분이라 알리씨크에 남아서 조마조마 했었다고 한다. 감히 사장을 대신해서 뭘 설명할 수도 없는데, 당시 터진 일만 해도 작지는 않았으니까.

영주가 주최한 경연대회에 〈임모르탈리스〉의 꼭두각시 술사 놈이 ‘나 강림’ 했다가, 그 자리에서 라리루라와 티르시에게 오체분시 냉동육 엔딩.

위기도 극복해내면 기회다. 〈임모르탈리스〉를 쳐죽이고 인질을 원만하게 구해낸 덕분에, 우리의 듀나미스 공방은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넷째 사모님 꼭두각시로 난리도 아니야. 파급력이 장난 아니더만.〉

오드리는 낄낄대면서 자기 무릅을 쳤다.

〈온갖 셀럽의 부하 직원들이 모여서는, 아직도 사장님이 체크 아웃 안 하고 갔던 알리씨크의 여관이랑 영주 저택 앞에서 ‘그 꼭두각시 양산됨? 팔 예정 있음? 얼마임?’ 거리고 있을 걸.〉

〈그 몇째 사모님 하는 거 하지 마, 임마.〉

〈아, 순서 틀렸어?〉

〈그런 의미는 아닌데, 아무튼 하지 마.〉

이 사장님의 워딩에 담긴 철학을 깨달으라고. 에반게리온도 아니고 퍼스트 와이프, 세컨드 와이프 같은 불편하기만 한 넘버링을 뭐하러 붙이는데.

나는 고개를 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전지역에 갑자기 건담이 떨어진 듯한 미스릴 클래스의 꼭두각시. 그 오버 스펙으로 이목이 모인 건 좋지만, 나는 이걸 공급할 생각은 없었다.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지.’

링링이 6호의 양산은 가능할 것 같은데, 거기에 담을 엔진 쪽이 문제다. 유니콘 흑마법사의 골렘 코어 같은 걸 넣으면 채산성이 지랄난다.

‘게다가 오러를 채워줄 사람도 없고, 채워봤자 일회용이잖어.’

최신형 스마트폰(충전 불가능)을 상품이라고 팔 수는 없잖냐고. 매장에서 100% 충전해서 팔아도 다 쓰면 효도용 실버폰이 돼 버릴 각이다.

〈그쪽은 내가 나중에 알아서 처리할게. 믿을 만한 사람을 고용하던가 해야지. 편지도 뿌렸겠다, 그 쪽은 알아서 끝낼 거야.〉

알리씨크 영주인가 그 대리로부터 답장을 받은 뒤에 말이다.

나는 오프툼에게 물었다.

〈영주 본인은…… 시다나브가 없어졌는데 별 말 않더랍니까?〉

〈사망 소식을 듣고 몸져 누웠다더군. 아들이 그 대신 정무를 처리 중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더 이상 알아보진 않았지. 한 번 알아와 볼까?〉

〈아, 괜찮슴다. 어떻게든 되겠죠.〉

〈아, 경연대회는 속행한다는 모양이더라. 며칠 더 유예를 뒀다가 다시 한다는 얘기였는데, 기권 선수도 좀 있다고 해. 굳이 겨룰 것도 없이 우승자가 정해진 느낌.〉

오드리가 사족을 붙였다. 필요한 사족이었다. 난 고개를 모로 꼬았다.

〈흑마법사 뚝배기를 깨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봐 놓고도 링링이 6호한테 개기려 든다고? 쬐까 의심스러운데.〉

〈질 때 지더라도 자기네 공방이며 길드를 어필할 찬스니까 그런 거 아냐? 안전에는 한층 주의를 기울인다고들 하니까.〉

〈그런가? 뭐, 대비만 잘 하면 문제 없겠지.〉

에퀴녹스도 죽었겠다, 이제 〈임모르탈리스〉란 조직에 의미는 없다.

해 봤자 그 핵심 멤버나 멤버 후보도 못 된 쭉정이들만 남았을 것이고, 흑마법사의 사냥을 맹세한 사티스의 사냥개들을 일부 배치하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더 대회를 확실하게 마무리 지으려는 거겠지.〉

오프툼은 홀가분하게 씨익 웃었다.

〈나와 네페르티티 아가씨의 증언으로, 〈임모르탈리스〉의 괴멸 소식은 전해졌네. 흑마법사라는 종자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만 이 나라에 빛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확실해.〉

〈대회의 성공적인 폐막을 그 첫 걸음으로 삼겠다는 거군요.〉

흑마법사! 물리쳤다! 같은 느낌으로 상징성을 줄 생각일까.

그 영주 대리─이름을 까먹었다─는 골렘 기술 경연대회를 상징성으로 만들려는 걸지도 모르지. 내가 봐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 같다.

내가 마나 부여 기술을 유통시키면 금속 골렘들 손에 흑마법사들의 뚝배기가 터져나갈 테고, 경연대회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그런 산업 혁명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겠지.

나는 마케팅이 되서 좋고, 영주 대리는 이세계 골렘 올림픽의 시조가 될 수 있으니까 이득이다.

이 얘기는 길어질 테니까 나중에 후딱 해치우는 게 나을까.

‘아마 명예 귀족 즉위식 언저리에서 또 만나서 쇼부를 볼 수 있겠지.’

……우리 아내님들께서 내 외출을 허가한다면, 말이다.

〈대충 알겠습니다. 그래서, 네페르티티는……?〉

〈……시다나브의 호위 부실로 질책을 받는 듯 했는데, 그에 대한 대처가 아주 대범하더군.〉

오프툼은 쓴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가진 재산을 하토르 교단에 전부 환원하고서, 호위 중에 발생한 모든 책임을 다 지고 교단에서 사임하겠다더군.〉

〈……풉. 다시 말하자면?〉

〈‘더 이상 니들이랑 어울릴 이유도 없고, 이만 때려치련다’. 그런 뜻이지.〉

오프툼은 내가 슬쩍 웃자 자기도 재미있다는 듯 박수를 쳤다.

〈크하하하! 하토르 교단도 당황했을 거야. 공갈 좀 해서 목줄을 채우려 했더니만 교단의 중요 전력 중 한 사람이 은퇴를 선언했으니까!〉

〈하긴, 네페르티티 입장에서는 새삼 교단에서 못 볼 꼴 보면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죠. 옷 벗고 나와버리면 그만이긴 하겠군요.〉

그럴 수밖에. 〈임모르탈리스〉는 괴멸하지 않았는가.

조잡한 비유지만 수십억 어치 복권에 맞았는데 굳이 지금 회사에서 욕 먹으며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캐리어도 비교적 튼튼하니 은퇴하고 뭘 해도 잘 먹고 살 듯.

옷을 벗고 은퇴하는 걸로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캬악 퉤 하고 나와 버리면 그만이다.

옛 정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모를까, 쿨하게 가 버린 걸 보면 그런 것도 없는 모양이다.

〈신성력과 미모가 뛰어나던 고위 신관…… 시다나브를 잃어버린 하토르 교단이야.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미스릴 클래스인 달인마저 은퇴하겠다니, 당연히 내외로 발칵 뒤집혔지.〉

─네페르티티 군! 떠나지 말게! 우리가 미스릴도 대접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자기 발목을 잡고 늘어지려는 교단 상층부에게, 작은 개인 짐만 들고 나온 네페르티티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비켜, 바빠.

〈키워준 은혜는 충분히 갚았으니, 작별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였다네.〉

그만한 일이 고작 하룻밤만에 벌어진 건가.

그 무뚝뚝한 달인 아가씨는 진짜 빠르기가 번개 같군.

‘마음을 정하면 머뭇거림이 없네. 나도 본받아야겠는걸.’

나는 픽 웃었다.

떽떽거리는 꼰대들을 ‘그럼 은퇴할게’라는 말로 쌉치게 만들고, 진짜로 그날밤에 바로 떠나버렸을 네페르티티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갔다.

〈교단에서 은퇴하면 잃어버리는 편리함 만큼, 자유도 생기지. 아마 조만간 자네를 만나보러 올 듯 하군.〉

〈예. 꼭 들러줬으면 하는군요. 저번에 헤어졌을 때는 인사만 하고 가셨으니까, 이번에는 신세를 진 제가 가능한 감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뭐, 부탁할 게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찾아올 것 같긴 하다.

나도 당장 나르메르-나일을 떠날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고민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시다나브── 레티티아가 하토르 교단에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은 적다.’

스파이로 잠입한다는 건 그런 뜻이다.

만약 〈편찬대대〉로서 교단 상층부를 포섭할 수 있었다면, 레티티아가 하기 싫은데도 나르메르-나일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애초에 흔적이며 꼬리를 남기는 건 〈편찬대대〉의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활동반경이 넓은 만큼, 인원 관리가 소홀해지지 않도록 접점을 쉽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 안 그랬으면 천 년 이상 기밀이 유지될 리 없지.’

내밀한 협력자였던 투스타스 상회장한테마저 토르의 〈인신〉을 붙여놨을 정도다. 하토르 교단을 털어봤자 단서는 나오지 않겠지.

괜한 시간 낭비 말고 다른 대처에 들어가는 게 낫다.

〈저기 여보셔들? 나는 얘기 끝났는데, 자리를 비켜주는 게 나으려나?〉

오드리가 거수하며 말했다.

심도 깊은 얘기를 하기 전에 눈치껏 비켜주려는 거겠지. 하는 김에 내 건강도 확인했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꿀을 빨며 쉬겠다는 괴도의 눈빛이다.

날먹충 쉐끼가 빠져가지고 말야, 나 때는 존나 교수들이 지들끼리만 얘기해도 옆에서 경청하는 척 고개를 끄덕끄덕 해야 했다고. 알아?

하지만 다정한 나는 그런 좆 같은 추억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야지.

〈그래, 가서 쉬어라.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면 또 바빠질 테니.〉

〈아 진짜! 그런 사족 붙이지 마! 그리고 나, 이 동네에서는 쉴 데도 없어! 설마 나더러 알리씨크의 여관까지 돌아가라고?! 나도 여기 묵게 해 주라, 사장님!〉

〈옛다, 여관비. 가성비 좋은 비지니스 여관으로 가서 푹 쉬도록 하렴.〉

〈썩을…….〉

오드리는 돈 주머니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이 고급 여관은 내 돈으로 묵는 건데, 여기에서 묵게 할 수는 없지. 출장비가 나오는 것만도 감사하거라. 월급은 후하게 쳐 줄게.

‘이세계 여관들에는 영수증을 끊어주는 문화도 거의 없으니, 나였으면 걍 싼 데 묵고 남은 돈은 주머니에 홀라당 넣었겠다.’

이세계에서는 법인 카드로 회식하는 것만큼 보편적인 절약법이다. 횡령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단, 들키면 다음부터는 빼돌린 만큼 줄어든다. 참 대단한 세상이야.

저 괴도 출신 새내기 사회인이 그걸 눈치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은퇴 얘기라면 나도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니지.〉

그때 오프툼이 상쾌하게 웃었다. 나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했다.

〈은퇴를 생각 중이십니까?〉

〈은퇴랄 것도 없겠군. 잊었나? 우리 수렵신의 사냥개는 평생을 들여서 사냥할 대상을 신께 맹세하고, 그 과업에 성공하면 신의 곁으로 간다네.〉

〈아…….〉

나는 한순간 말을 잃고 망연해졌다.

그랬었다. 수렵신의 신도들은 사냥의 여신을 섬기는 몸으로서, 평생을 들어서 사냥할 ‘사냥감’을 입교 당시에 맹세하는 거였지.

그리고 그 과업의 대상을 사냥한 순간, 과업을 완수한 위대한 사냥꾼으로서 수렵신 사티스의 곁으로 불려간다.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쉽게 말해서 죽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오프툼에게 복수할 기회를 준 나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서, 알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오프툼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사냥을 완수한 그에게도 당연하게 찾아올 결말이건만, 복수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프툼은 쭉 기쁘거나 후련해 보이기만 했잖은가.

〈음.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지.〉

오프툼은 내 표정을 보고 활기차게 웃었다.

〈이상한 죄책감은 느끼지 말게. 자네 손에 그 리치가 죽었어도, 그 ‘사냥’에 참가했던 나는 과업을 완수한 신도로서 얄짤없이 수렵신님의 곁으로 불려갔을걸.〉

〈말씀은 고맙지만…… 입맛이 쓰긴 합니다.〉

〈뭘 또 그러나. 자네의 위업은 죄가 아니야. 내 손으로 복수할 기회를 준 건, 이 몸에 남은 시간으로는 다 갚지 못할 은혜 아닌가.〉

─톡톡. 오프툼은 자기 눈두덩이를 건드렸다.

〈수렵신님의 눈을 빌린 값을 치뤄야지. 자네가 마법으로 고쳐준 덕에, 수렵신님께 두 짝 다 돌려드릴 수 있겠군. 참 다행이야, 하하하하!〉

〈별로 웃을 포인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흐흐, 그건 감성의 차이로군. 뭐, 그 춥기만 한 니플헤임에 떨어지는 것보단 낫지 않나. 나로서는 바라 마지않던 마무리일세.〉

그렇긴 하지만, 역시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딱딱 나누기 힘들다.

나는 고개를 젓고서, 방 구석에 장식물처럼 근사하게 걸려 있던 술을 가져왔다. 와인은 아닌지 떡 하니 장식돼 있었지만 고급 술인 건 틀림 없겠지.

─퐁! 뚜껑을 따고 얼음을 담은 잔에 따랐다.

그리고 내 몫의 잔을 들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전별하기 전에 한 잔 하십시다.〉

〈이거 횡재했군. 꽤 비싼 술인데.〉

〈가는 길을 축복하는데 이승의 돈이 중요할까요. 대낮이라 아쉽긴 합니다만.〉

〈오히려 좋지. 사냥꾼은 야행성이라 해가 뜨면 잘 시간이거든. 좋은 술을 걸치고 벌러덩 누우면 최고였어. 아내는 그런 나를 부끄러워했지만 말이야.〉

─짠! 잔이 부딪히면서 그리운 소리를 냈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살짝 튀는 액체. 손에 닿는 잔의 매끄러운 질감.

내가 단련하고 기른 달인의 오감에 전해지는 그 감촉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술이 든 유리잔을 부딪히는 순간은 이렇듯 내게 노스탤지어를 불러 일으킨다.

그립디 그리운, 지구 시절의 백색소음이다.

나처럼 그리운 시절의 추억에 잠긴 듯, 오프툼은 잔을 걸치며 말했다.

〈영혼이 소멸한다면, 나는 가족의 얼굴을 기억할 수조차 없겠지.〉

〈죽음이란 그런 법이죠. 죽은 사람은 잠들면서 산 사람을 잊고, 산 사람도 그렇게 떠나간 사람을 점차 잊어가는 것. 그래서 더 슬픈 일인 거고요,〉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죽은 사람은 속세의 일을 모두 잊고 세상을 떠나버렸는데, 산 사람만 그 사람을 기억하느라 삶을 망쳐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는 죽은 사람에게 쓸데없는 죄를 더 씌워버리는 격이잖은가.

죽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추억해 주는 사람들이 인생을 망치길 바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감히 내가 말하기엔 주저되는 일이라,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오프툼은 입 밖에 내지 않은 말까지 다 알아들었다는 듯 말했다.

〈음. 하지만 수렵신님께 불려간다면 이 영혼은 그 분 곁에 남지 않겠나. 나는 그걸 바랐기에 수렵신님의 곁에 불려갈 수 있도록 맹세한 거거든. 좀 치졸한가?〉

〈설마요. 저도 사티스 신도가 되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니플헤임이냐, 수렵신님의 곁이냐’. 이걸 교단의 홍보문구로 삼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좋은 의견이군. 교주께 직접 타진해 보면 어떤가?〉

직접 타진하라니?

이세계판 천국과 지옥 이론을 지껄여대던 나는 술잔에서 입을 뗐다.

이번에는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베로니카와 바이콘 신족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라그나로크에서 살아 남은 진짜 신을 만나보고 싶어 했었으니까.

〈교주로부터의 전언일세. 수렵신을 만나뵙고자 한다면, 오늘로부터 8일 뒤── 내 과업이 이뤄진 날로부터 9일째 되는 날, 우리 교단의 본산을 찾아오게.〉

찰랑….

과업을 이루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냥꾼은, 술잔 속 알코올처럼 투명한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사티스 여신께서 내 혼을 거두러 오실 때, 그 분을 알현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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