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달린 마차는 우리가 묵는 여관에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군.’
바지춤을 추스르며 나는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뻘쭘해 하는 내 무릎에서 기절하듯 잠든 티르시가 새근새근 귀여운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었다.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후, 나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딱 10발만 더 싸고 혼절한 티르시를 데리고 귀갓길에 오르는 중이었다.
솔직히 이 마차의 골렘 말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면 귀가를 서두를 건 없을 것이었다. 내 귀가에 불만이 있으면 프랑이 마법을 풀던가 했을 것이니까.
─끼익.
마차가 도착했다. 나는 티르시를 업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알리씨크의 여관에 들어갔는데, 로비 앞 카페 같은 휴식 공간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어느 미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달인끼리의 감각이었을까. 지나칠 법도 했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인지 겨루듯 서로의 존재를 눈치 채고서 시선이 맞았다. 네페르티티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지인 분이십니까?”
내가 그녀를 보고 놀라자 직원이 물었다. 고급 여관이니만큼 브리타니아 어를 써 줬다.
“앗,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 있었나요?”
말하기 편하라고 먼저 물어봐 주자, 그 직원은 진땀을 빼며 대답했다.
“그게…… 어젯밤 내내 계속 저곳에서 기다리고 계셔서요.”
뎃?
어젯밤 내내? 나는 당황하다가 되물었다.
“방에 묵는 것도 아니고, 저기서요? 밤새 혼자?”
“예. 노르드 님의 사모님들께서 오신 뒤에 찾아오셔서……”
직원은 어쩌다 보니까 VIP 손님이 된 우리한테 혹시 트집이라도 잡힐까 횡설수설하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 물론 저 찻집은 24시간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숙박객 님들의 손님 분들께 제공하는 휴식 공간이지만, 그…….”
“아, 그만 괜찮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말귀를 알아먹은 나는 그를 진정시켰다.
편의점에서도 10분 넘게 고민하면 알바생한테 눈치가 보이는데, 아무리 운영방침 상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직원들은 조금 불편했겠지.
발길을 틀었다. 어차피 눈까지 맞았는데 무시할 수도 없다.
“네페르티티 씨. 며칠만에 뵙네요.”
내가 다가가서 묻자 물색 머리의 그녀는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싸울 때의 그녀와는 천지차이인 그 느긋&나긋한 몸 동작에도 어느새 적응한 듯, 나는 별로 어색해 하지 않고 계속 이어 말했다.
“소식은 오프툼 씨에게도 대충 들었습니다. 큰 문제 없이 끝나신 듯 해서 다행이네요. 저희들도 어젯밤에 명예 귀족 즉위식을 마치고 왔거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해도 네페르티티는 여전히 침묵했다.
뭐여 시벌. 왜 대꾸가 없대냐? 약간 부담스러운 시선과 묵묵함에 내 목에 살짝 땀이 났을 무렵, 그 사차원 아가씨는 평소의 무표정으로 말했다.
“네페르티티.”
“예?”
네페르티티는 눈을 내리깔면서 내 얼굴을 슬쩍 외면했다.
“……‘씨’ 자는 빼고 불러 주기로 했으면서.”
살짝 토라진 듯 들리는 건 착각일까.
─툭, 툭.
아니다. 발끝으로 테이블을 차는 걸 보면 딱히 내 착각이지만은 않겠지.
“아, 아! 그랬죠, 네페르티티.”
나는 의외의 지적에 잠깐 당황했다가 헛기침을 했다. 이상한 곳에서 깐깐하군. 네페르티티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뒤늦게 눈치챈 듯 등에 업힌 티르시를 보았다.
“……마법사, 다쳤어?”
“아뇨, 잠깐 잠든 겁니다.”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치였기에 안심하라는 듯 말하자, 네페르티티는 그 대답을 곱씹듯이 입술에 손가락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불륜?”
“이런 쓰벌, 이른 아침부터 그게 뭔 평지풍파를 일으킬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악한 암흑-탐관오리 노르드란 멸칭으로 불리울까 두려워 하던 차에 남들 듣기에 영 그런 말을 듣자 기겁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네페르티티는 의구스러워 하며─무표정인데도 다 보였다─ 침묵했다.
유부남이 아내들도 대동하지 않고 외간 여자랑 외박하고 왔는데, 그게 불륜이 아니면 뭐냐고 말없이 묻는 듯 했다. 아니 쓰벌, 이건 좀 관심법인가.
“이건 다 암묵의, 예? 그런 합의가 있는 일이다 이 말씀입니다. 저희 아내들도 다 알고 있고요. 별 일 아니니까 문제 없습니다.”
“……………….”
“……크흠, 저번에 말씀하신 부탁 때문에 오신 겁니까?”
내가 화제를 바꾸자 네페르티티는 그게 원래의 목적이기는 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안색을 살피고 코를 한 번 킁킁댔다.
달인의 오감은 그녀의 시선이 0.1초 정도를 내 하반신에 머물다 간 걸 눈치챘다.
하지만 정작 그러는 나도 이 사차원 아가씨의 노출 많은 살갗에 무심코 눈길이 가던 참이었기에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게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
“피곤한 거면, 다음에 다시 올게.”
“아뇨, 그러실 것까진 없고요.”
강해진 사지(四肢)는 이 정도로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는 나보다 더 지쳐 보이는 네페르티티의 안색을 눈치챘다.
“그러는 네페르티티야말로 피곤해 보이네요.”
“……밤새 달려오다가 몬스터랑 몇 번 싸웠어.”
“예? 달려와요? 설마 하토르 교단 본산에서요?”
“응. 직접 뛰는 게 빠를 것 같아서.”
내가 기겁하며 묻자 네페르티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수로운 일이 맞았다. 마라톤이 가능한 거랑, 반나절 거리를 뛰어서 약속 장소에 가는 건 다른 얘기다. 수백 킬로미터를 달리면 달인이라도 지칠 수밖에 없다.
‘그야 말이나 마차보다 빠르긴 하겠지만…….’
덕분에 양심이 적지 않게 찔리는 나였다.
내가 새벽부터 티르시와 뜨거운 아침을 보내는 동안, 밤새 달려오느라고 지친 네페르티티는 여기 혼자 앉아서 기다렸다는 얘기 아닌가?
그게 내 잘못은 아니겠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또 오십쇼’ 하고 쫓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해 봤자 편하게 쉬지도 못할 것이고.
“그러면 이렇게 하죠. 네페르티티도 저희 방에 오십쇼. 같이 한 숨 주무십시다.”
나는 목을 긁다가 말했다.
”무슨 부탁이신지는 아직 모르지만, 많이 급한 일이 아니면 푹 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실수하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급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나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제안했는데, 네페르티티는 그녀 치고는 드물게도 말끝을 흐렸다.
─안절부절.
좌불안석에 앉은 듯 고개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발가락이 바닥을 문질렀다.
비언어적 표현이라고 하던가. 얼굴은 무표정한 그녀라도 감정이 없지는 않으니만큼, 입이 아니라 몸에서 지금 느끼는 감정이 흘러나오는 모양.
그렇게 당황하던 네페르티티는 머뭇거리며 고갤 숙였다.
“동침이라니, 그게, 조금 갑작스러워서…….”
“갈!!! 자고로 남녀칠세면 부동석이라 하였거늘, 제가 네페르티티 같은 젊은 처녀에게 유부남이랑 같은 침대를 쓰라고 하겠습니까!!!”
혼인 전의 여성과 질펀하게 뒹굴다가 온 남자의 말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서 말했다.
“이상한 오해는 둘째치고, 같이 자자는 건 다른 뜻이 아닙니다. 아마 네페르티티도 관심은 있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야, 없지는 않지만…….”
“아니 좀 끝까지 들으라고, 이 아가씨야!! 아직 내 말 안 끝났다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고개를 떨구는 네페르티티의 대답에 나는 빼액거리며 고함을 쳤다. 뭐가 ‘없지는 않지만’이야!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제가 관심이 있을 거라는 건, 이거 얘깁니다.”
씩씩대던 나는 티르시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손 하나로 받치면서, 머뭇거리던 네페르티티에게 룬 스톤을 보여주었다.
“에퀴녹스의 기억, 저도 아직 안 봤거든요. 같이 보시겠습니까?”
“……기억.”
희미하게나마 떠 있던 감정이 착 가라앉는 게 내 눈에도 훤했다.
네페르티티는 어째서인지 내가 쥔 룬 스톤을 그 반반 리치년을 볼 때보다 더 짙은 감정을 담아서 바라보다가, 넌지시 말했다.
“응, 보고 싶어.”
***
방으로 돌아와서 아내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생각보다 빨랐네. 10발은 싸길래 점심 때에나 올 줄 알았는데.”
“시발?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다나가 내 사정횟수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미지의 괴현상! 나는 그만 조헌병 환자로 격리당한 사라 코너처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 CIA가 내 폴더를 감시하고 있어!!”
“대충 뭔 헛소린지 알겠네. 이거 덕분이야.”
다나가 자기 결혼반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테에에엥……? 반지? 반지 왜?
“니가 뒤졌다고 알려줬을 때만 해도 버리고 새 걸 사버릴까 했는데, 요즘 보니까 이게 생각보다 활용도가 높더라고.”
“……활용도라니?”
“네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으니까, 그걸 조금 더 파고들면 지금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실시간 중계가 되는 셈이잖아? 그럼 비율로 계산해서 네 체력도 알기 쉽게 보이지.”
그렇게 말하고서 반지를 쓰다듬는 다나였다.
내 사정량이나 남은 체력, 건강상태까지 전부 다 알 수가 있다고?
이런 씨발. 등골에다가 얼음을 넣은 듯 오한이 들었다.
‘애1미. 그게 생체 GPS랑 뭐가 다른 것이지?’
나는 혹시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게 아닐까?
나는 자녀안심어플에 비견되는 남편관리어플을 우리 누나의 손가락에 설치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그 위험성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아내가 내 남은 정액량과 현재 위치를 언제든 볼 수 있다니, 유부남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떳떳한 사람이라도 그럴 것이다.
─여보, 나 피곤해. 내일도 출근해야 된다고.
─구라치네. 앞으로 3발은 더 쌀 수 있겠구만.
이것은 의무방어전에서 적에게 아군의 작전이며 진로, 남은 숫자부터 병참까지 완전히 파악당하는 것과 같은 초유의 사태였다.
물론 의무방어전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내 정력이나 다나의 매력에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이건 그거랑은 또 다른 얘기일 터였다.
“아무튼 그런 거니까 알아둬~.”
다나는 전율하는 나를 본 체도 않고 손을 젓고 떠나갔다. 아마 내가 파밍한 유물들을 학계에 낼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겠지.
황망하게 남겨진 내게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먼저 가서 잘게.”
“아, 예.”
그녀는 우리가 쓰지 않는 침실로 갔다. 원래는 티르시가 의식을 되찾기까지 잠들고 있던 곳이다. 의식해서 침착해지려는 나한테 라리루라가 쉭쉭거리면서 다가왔다.
“선배, 선배. 또 여자를 후렸나요?”
“후리긴 누가 후려.”
하여튼 안 좋은 건 금방 배우지. 나는 라리루라에게 손가락을 써서 딱밤을 날려줬다. 우리 막내 아내님은 그게 또 그리웠는지 이마를 감싸쥐며 헤실거렸다.
“나 한숨 잘게. 진지한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공연히 건들진 말아줘.”
“네에~♡”
“대답은 잘 해요.”
나는 피식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에퀴녹스의 기억 따위, 티르시나 네페르티티를 빼면 다른 아내들이랑 별 접점도 없다. 절대 좋은 걸 보여줄 리도 없고.
‘볼 사람만 보면 된다는 애기지.’
내가 굳이 기억을 뒤져보려는 것도, 레티티아와 구면이었던 듯한 에퀴녹스라면 혹시 〈편찬대대〉 관련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노리고 한 건 아니지만 셰이드 준비는 티르시랑 했고.’
이제 잠들어서 네페르티티랑 의식을 연결하기만 하면 되겠지.
“링크 스타트.”
나는 침대 구석에 티르시를 눕혀놓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