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94화 (594/1,009)

아인크라드류 수면 가스의 호흡으로 잠든 나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수면 마법으로 잠드는 버릇이 들면 안 좋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어났다. 낯익은 초원이었다.

‘네페르티티는…… 옆에 없군.’

상관은 없었다. 이 셰이드보다 상위의 능력── 창세의 권능을 거듭 체험한 나라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 하늘을 날던가 공간을 이동하면 금방이다.

아마 이 셰이드의 꿈 자체가 ‘창세의 권능’ 프리 서버일까.

마인크래프트의 크리에이티브 모드나, 온라인 RPG의 테스트 서버 같은 개념이다. 창세의 권능 체험판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권능 없이 영적인 능력을 깨우기 위한 필드 마법이던가.’

현실에서 권능을 맘대로 쓰는 건 오딘이라도 꽤 부담이 갔을 테니까.

내 생각으론 다른 예지 능력자들이랑 상의해서 만든 마법일 듯 했다.

【중간 가지】가 다른 신들과 힘을 합쳐서 만든 세상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하진 못했을 것 아닌가. 원래 공동소유자가 있는 물건에 함부로 터치하면 못 쓴다.

“돈 모아서 시킨 탕수육에 소스를 부으면 한 대 맞아도 싸지.”

그런 건 부먹파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이전의 문제잖은가? 나는 지혜의 신 다운 오딘의 현명함에 감탄하면서 일단 날아오르려 했다가, 멈칫했다.

내 가슴이 새벽녘의 북두성처럼 빛나고 있었다.

“시팔, 또 뭐여!”

내가 일리단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화들짝 놀란 나는 찌찌를 더듬거리다가 원인을 발견했다. 그건 황금색의 아름다운 열쇠였다.

프레이야의 〈인신〉인 레티티아가 준 물건이다.

─덜컹!

그리고 내가 열쇠를 잡은 순간, 웬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촤르르르르르─.

순금으로 만든 듯한 아름다운 문 뒤쪽으로 공중 계단이 생겨났다. 계단은 천공의 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성의 생김새는 내게도 익숙했다.

“프레이야의 성이군.”

내가 레티티아를 족쳤던, 바로 그 성이었다.

나는 문을 우회해서 계단에 슬쩍 손을 대 봤다. 계단은 당연하다는 듯 통과해버린다. 이래서는 저 멀리까지 밟고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겠지.

‘당연히 날아가는 것도 불가능할 거고.’

저 성은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꿈속 세상이다.

사람이 어떻게 꿈속에서 다른 사람의 꿈속으로 넘어가겠는가? 그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상식 밖의 수단이 필요하단 뜻이지.’

나는 손 안에서 황금 열쇠를 굴렸다.

이게 바로 그 수단이겠지. 나는 엘리트 대갈통을 굴리다가 열쇠를 문에 꽂았다. 당연하다는 꽂히기까진 했는데, 아무리 돌려봐도 열리지는 않았다.

마치 공업 고등학교의 잔학한 익살꾸러기들이 나 몰래 납땜이라도 해 놓고 튄 것처럼, 힘을 줘 봐도 열쇠 자체가 돌아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레티티아는 ‘자격’인지 ‘적성’인지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열쇠를 뽑아서 던졌다가 받았다. 나로서는 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미련 가질 것 없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 나는 등을 돌렸다. 네페르티티부터 찾는 게 먼저였다. 열리지 않는 문은 벽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돌아선 나는 지평선까지 뻗은 사막을 발견하고 눈을 반개했다.

산맥이 솟은 모래 사막이었다. 황량한 바람이 이 높은 곳까지 불 정도로 척박한 대지다. 내 꿈속의 초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아마, 저 사막이 에퀴녹스의 기억이 있는 곳일 것이었다.

“시팔, 꿈속에서까지 지구온난화라니.”

투덜거린 나는 셰이드의 꿈을 조작했다.

쐐애애애애액─!!

하늘로 날아오르자 네페르티티의 물색 머리칼은 금방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내가 건네준 정신방호의 룬 부적을 갖고 잠든 덕에 꿈의 광기에 침범당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옆에 착지한 나를 돌아보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네 꿈속?”

“예. 세헤테피브라의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물론 현실은 아니지만요.”

“저세상도 결국은 꿈의 일종이야.”

네페르티티는 어딘지 현기가 어린 대답을 했다. 그녀의 시선은 나르메르-나일의 사막과 닮은 꿈속 사막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은 죽음을 영면이라고도 부르는걸.”

“그럼 사람은 잠들 때마다 죽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저희가 니플헤임에서 용케 살아돌아왔던 건, 평소에도 매일 아침마다 침대에서 부활했던 경험 덕일지도요.”

“……그럴지도.”

농담으로 받아치긴 했지만 그녀가 이런 실없는 소리에 대답까지 해 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무례하게도 살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새 붙임성이 늘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내가 픽 웃은 순간이었다.

─빼꼼.

사막의 산맥에서 무슨 산양 같은 놈이 대가리를 쳐들었다. 독특한 가죽이 인상 깊은 놈으로, 따로 뿔 같은 건 없는 동물이었다.

당연히 내 꿈의 주민은 아닐 테니, 여기 재현된 공간 속의 환상이겠지.

그런데 고놈은 우연히도 네페르티티와 눈이 딱 맞았다.

네페르티티는 눈을 피하지 않았고, 꿈속 산양도 그녀가 보이지 않으니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묵묵하게 서로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평화로운 모습에 낄낄대며 말했다.

“네페르티티. 노파심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기억에 너무 몰입하시면 안 됩니다.”

“몰입?”

네페르티티가 나를 돌아봤다. 간단한 듯 하면서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리얼해도 지나간 과거, 남의 기억이니 말이죠.”

과몰입 금지라는 거다.

네페르티티는 조용히 있다가 납득이 간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범죄자 새끼의 기억인데 그렇게 몰입해 버릴 만한 일이 있을까 싶긴 했다.

그렇게 내가 산양에게 눈을 돌렸을 때였다.

쉬이이이익─!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산양의 몸에 박혔다.

산양은 깜짝 놀라서 껑충 뛰었는데, 마나로 된 화살은 신기루처럼 녹아서 없어졌다. 네페르티티와 눈싸움을 하던 산양은 영문도 모르고 도망쳤다.

하지만 살을 꿰뚫은 화살이 사라졌기에 남은 건 깊은 관통상과 출혈 뿐이다. 달려가던 산양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화살이 날아온 곳은 야트막한 언덕 위였다.

─파사삭. 모래언덕을 타고 내려온 남자는 태양빛을 피하려고 뒤집어 쓴 낡은 망토를 풀어헤쳤다. 희끗한 머리가 보이는 중년의 나르메르-나일 인이었다.

그는 확인사살한 산양을 들춰업고서는 어딘가로 걸었다.

그제야 보이는 건,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을 듯한 장소에 만들어진 오두막이다.

사냥꾼이 손수 세운 걸까. 어설프면서도 애착이 깃든 듯이 보이는 낡은 건물이었다. 그 문앞에서 손을 흔들며 해맑게 웃는 젊은 처녀가 있었다.

과묵한 사냥꾼은 그 미소를 보고서야 사냥감을 잡았을 때도 보이지 않던 미소를 띄우고서, 갈색 피부의 아름다운 딸에게로 돌아갔다. 사냥꾼의 귀가였다.

그런 그의 검에는 수렵신 사티스의 신표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와 딸인가?’

딱히 말로 전해지지 않은 사실조차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치트 모드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에퀴녹스의 기억을 뽑아내서 그렇겠지. 평소보다 기억의 농밀도, 전달력, 분량 모두 훨씬 많았다.

사냥꾼은 자뭇 자랑스럽게 사냥감을 딸에게 보여주고, 그런 그에게 핀잔을 준 딸이 웃으며 현관의 문을 닫았다. 나한텐 그게 가혹한 사막에서의 평화로운 한때로 보였다.

──장소가 변한다.

몇 년이 지났을까. 낡은 촛불에 의지한 오두막 안에서 보이는 건, 나무 침대에 누워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사냥꾼의 딸이다.

사냥꾼은 그런 딸의 이마에 수건을 얹어주다가 말했다.

《다 괜찮을 거다. 수렵신께서 말씀하시길, 삿된 병은 영양의 부족에서 온다고 했지.》

사냥꾼의 딸은 아버지가 헤질 때까지 읽은 수렵신의 경전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런 딸의 눈을 사냥꾼이 살포시 감겼다.

《내 얼른 갔다오마. 네가 좋아하는 산양 고길 먹으면 이깟 병 따윈 금방 나을 거야.》

사냥꾼의 딸은 아버지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끝내는 몽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활을 들고 오두막을 박차고 나갔다.

옆집 장의사에게 잠시 딸의 보살핌을 부탁하러 갔던 사냥꾼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담벼락이 무너진 장의사의 집 현관에 험악한 발자국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시체 냄새를 풍기는 장의사는 언제나 기피받는 직업이다.

그의 옆집 이웃이 사냥꾼이나 살 법한 오지까지 와서 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특히 근래에는 장의사가 사악한 주술로 시체를 능멸한다는 미신이 돌던 탓도 있었다.

할 일 없는 청년들은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으며 장의사들을 핍박하고, 때로는 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악한 주술을 가장 경멸하기로 알려진 것은 수렵신 사티스였다. 청년들이 어설픈 사냥꾼들로 거듭나게 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절제 없이 사냥하고, 덕분에 안 그래도 숫자가 적은 사막의 동물들은 개체수가 더 줄었다. 뛰어난 사냥꾼인 그가 해가 저물 무렵까지 산을 헤맨 이유였다.

수렵신의 교리에 따르면, 사냥이란 숭고한 행위였다.

따라서 사냥꾼은 먹지 않을 동물을 잡아서는 안 되었다. 그의 집에 식량이 많이 비축되지 못하는 건 사냥꾼이 그만큼 독실한 수렵신의 신도였기 때문이다.

사냥꾼은 마침내 청년들이 재미 삼아 잡아놓고 방치한 산양을 발견했다.

나무에 꽂힌 산양은 대체 누가 시체를 욕보이는 건지 묻고 싶을 만큼 처참했지만, 부패하지는 않아 보였다. 연이은 허탕에 지쳤던 사냥꾼은 부주의하게 다가갔다.

─콰직!

그리고 바닥에 숨겨둔 채로 방치된 덫이 그의 발 한쪽을 물어뜯었다.

최근 늘어나기 시작한 사냥꾼들이 설치한 함정이었다. 다른 사냥꾼들을 위한 표식을 남기지 않은 탓에, 노회한 그도 덫의 존재를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다.

순간적인 동체시력이 덫에 음각된 수렵신의 문양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휘청거렸던 사냥꾼은 험준한 산의 경사를 구르며 미끄러졌다.

눈을 떴을 때는 오밤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노이즈와 같다. 온갖 욕설을 다 내뱉은 늙은 사냥꾼은 부러진 다리에 응급처치를 하고 서둘러 산을 기어내려갔다.

덫에 독이라도 발라져 있었는지 의식이 흐릿했다. 생각나는 건 딸아이에 대한 걱정 뿐이다.

중간중간 약초 몇 개를 주워먹으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그렇기에 그가 하산했을 때는 산맥의 귀퉁이에 태양신의 축복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오두막 쪽에 흐릿한 시선을 준 사냥꾼은 수렵신에게 감사했다.

독으로 흐려진 시야로도 못 알아볼 리가 없는, 산양의 가죽.

오두막 담벼락에 말린 약초 주변을 기어다니는 그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사냥꾼은 그저 행운에 감사하며 활 시위를 당겼다.

그게 딸이라고 깨달은 건 시위를 놓은 뒤였다.

덫에 물렸을 때보다 처절한 비명조차 날아가는 화살을 막아주진 않았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집 밖으로 나와 기다리던 사냥꾼의 딸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에 화살이 꽂혔다. 활까지 내던진 사냥꾼도 고통도 잊고 달렸지만 덫으로 부러진 다리는 수월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오열하며 딸아이를 끌어안았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말도, 독려의 말도 남기지 못한 채.

한동안 울부짖던 사냥꾼은 약초 근처에 어지러이 남겨진 사람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것은 어제 장의사의 집 근처에서 본 것과 같은 발자국이었다.

장의사를 핍박하러 온 사냥꾼들이 그의 이웃인 사냥꾼과 그 딸의 집을 기웃거리다가 갔던 것이다.

사막의 밤은 춥다. 딸은 아버지를 걱정하며 가공하다 만 산양 가죽을 입고 나왔다가, 그들이 망친 약초를 줍고자 허리를 숙였다.

독으로 흐려진 사냥꾼의 눈은 그런 딸을 약초를 먹는 산양으로 보았다.

사방으로 향하려는 분노와 원망을 삼킨 사냥꾼은 딸의 시신을 안고 수렵신의 교단으로 달려갔다.

당신의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신도의 탓이라고 원망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사냥꾼은 그저 수렵신에게 탄원했다.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제 실수로 죽은 딸에게 작별의 인사만이라도 남기게 해 주십시오.》

신관들마저도 탄복한 그의 절실한 기도에 수렵신마저 응했다. 여신은 사냥꾼의 사연을 안타깝게 여기고서, 그런 그에게 은총을 내렸다.

──사냥꾼은 사냥감의 혼을 분간하는 수렵신의 눈을 얻었다.

《죽은 자는 되살아나서는 안 된다.》

여신은 그렇게만 말하고 떠나갔다. 딸아이와의 재회는 없었고, 시신은 차가운 채였다. 사냥꾼은 두 눈을 움켜쥐며 밤낮으로 울다가 신전을 등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딸아이의 장례를 치러줄 장의사마저 구할 수 없노라고.

시신에 맞닿는 이들에 대한 핍박은 강해졌기에, 대부분의 장의사들은 손을 씻고 숨어 살았다. 어찌하면 좋을지 고뇌하는 사냥꾼에게 젊은 청년들이 달려왔다.

─당신은 여신의 가호를 받은 용사입니다.

─장의사는 사악한 마나와 영혼을 능멸하는 질 나쁜 존재지요.

─당신의 눈은 보다 많은 장의사를 축출해내기 위한 힘인 것입니다.

사냥꾼은 그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 쫓겨난 그들이 목숨을 댓가로 비슷한 권능을 눈에 받았단 소식에도 그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이웃 집의 장의사에게 딸아이를 부탁했다.

손을 씻고 물러나려던 장의사도 썩어가는 딸을 안고 거리를 누비던 그를 내치지는 못했다. 장의사는 조수인 딸아이와 함께 마지막 장례를 준비했다.

차마 그 장례 과정을 보지 못한 사냥꾼은 자기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사악한 흑마법사를 토벌했노라!!》

반나절 뒤. 딸아이의 물건을 정리하고서 돌아온 그를 머리가 으깨진 장의사가 맞이했다.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은 장의사의 딸을 보며서 지난날의 청년들은 진혼법이 적힌 장의사의 책을 들고 일장연설을 했다.

사냥꾼의 딸은 내장을 적출하던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그 눈동자에 파리가 앉아서 손을 비볐다.

《용사님? 용사님도 오셨군요. 보십시오! 저기 저 여자도 어둠과 음의 마나를 가졌습니다. 저 년도 흑마법사가 분명하니, 용사님께서 처형하십》

사냥꾼은 청년들의 목을 전부 베어갈랐다.

그렇게 시체 냄새가 가득한 공간에는 딸을 잃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딸만이 남았다.

《……차마 네게 장례를 부탁하진 못하겠구나.》

딸의 배에 내장을 채워넣는 사냥꾼의 말에, 피눈물을 흘리던 장의사의 딸이 대답했다.

《흑마법이 아니라, 진혼을 위한 주술이었어요.》

《그래.》

《아버지는 죽은 자를 누구보다 공경했어요.》

《그래.》

《아저씨도 이제 흑마법사의 패거리가 됐어요.》

《그래.》

《그러면 우리, 정말로 흑마법사가 돼 볼래요?》

사냥꾼의 대답이 멈췄다.

《따님의 혼은 아직 시신에 남아 있어요. 저희 아버지도요.》

장의사의 딸은 피웅덩이에서 진혼법이 적힌 책을 건져올렸다.

폐인의 눈빛이며, 광기의 눈빛이었다.

그녀도,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사냥꾼도.

《저는요. 아빠랑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래.》

그는 피에 젖은 칼 폼멜에서 수렵신의 신표를 뚝 떼어냈다.

《나도 그렇다.》

─콰슥!

사냥꾼의 칼이 수렵신의 신표를 칼로 꿰뚫었다.

──시간의 흐름은 노이즈와 같다.

천년인가, 아니면 만년인가. 인류의 역사의 절반 이상 이어진 긴 시간의 끝에서 한 마리의 리치가 제단에 엎어졌다. 그의 등을 화살이 꿰뚫고 있었다.

제단에서 깨어난 젊은 처녀는 피와 시체로 가득 찬 일대를 보고 공포에 떨며, 자신에게 손을 뻗는 언데드에게 외쳤다.

《괴, 괴물!!》

리치는 그런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처녀의 손에 작은 구슬을 건네줬다.

그의 혼이 담긴 구슬이며, 사람들이 라이프 배슬이라 부르는 리치의 심장이었다. 갈고 닦은 지고의 흑마법이 리치의 기억을 처녀의 혼에 전달했다.

신대에 목숨을 잃은 처녀는 황금시대의 말미에 눈을 뜨고, 죽어가는 리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빠?》

남은 힘과 기억을 모두 딸에게 건네준 사냥꾼은 대답할 힘이 없었다. 흑마법의 힘을 빌지 않으면 혀도 없는 뼈 뿐인 턱이 발성이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와르르르…….

무너져 내리는 뼈에 안기며 사냥꾼의 딸은 수만 년에 달하는 아버지의 기억을 전부 이어받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참혹한 악행에 전율하고, 자기 영혼을 되살리고자 희생된 생명들의 존엄에 눈물 흘리며, 그녀의 가족이 그렇게 되고 말았던 이유를 찾아헤맸다.

《……왜인가요?》

1만년의 기억을 되짚은 그녀는 하늘에 물었다.

리치의 가슴을 꿰뚫은 신성력의 화살은 그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왜 신도들의 폭주를 막지 않았죠? 그 사람들이 이웃집 곳소르 아저씨를 죽인 것도, 저희 집에서 약초를 밟아댔던 것도, 전부 당신의 뜻인가요?》

─신은 더 이상 사람의 세계에 쉬이 개입해서는 아니된다. 라그나로크 이후, 신들이 인간의 분쟁에 개입해도 되는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왜!!!! 왜 하필 지금에 와서!!!!!》

니플헤임의 균열이 열린 하늘을 그녀의 고함이 뒤흔들었다.

수렵신은 부름에 응했다.

─네 아비가 세계의 율법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율법?》

─창세의 권능을 다룰 신이 너무 줄었다. 더는 세상의 규칙이 무너져서는 안 될 일. 너의 아비는 옳지 못한 수단으로 너의 부활을 꿈꿨고, 이는 그 응보이니라.

《그랬다면 왜 처음부터 막지 않았어!!!! 어째서 우리 아빠가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뒀냐고!!!!》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세상에, 필히 개입해야 할 균열이 생겼을 뿐.

피를 토하는 외침에 수렵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지켜만 보던 내게도 바람은 있었노라.

하늘의 여신은 슬픈 눈으로 활 시위를 겨눴다.

─나 역시, 너와 네 아비가 평화로이 살아가기를 바랐다.

천벌은 화살의 형태로 꽂혔다.

사냥꾼의 딸은 그녀의 아버지가 뚫은 가슴팍에 또 한 번 화살을 맞고, 되살아난 보람도 없이 그 목숨을 잃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면, 어쩌면 수렵신의 배려로 고통없이 영멸에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렵신은 비극의 처녀가 주인을 잃은 명계에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여신을 향한 증오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안배였을까.

그녀의 영혼은 영멸에는 들지 않고 기어이 니플헤임의 설원에 쓰러졌다.

바닥을 기던 사냥꾼의 딸은 제 앞으로 모여드는 괴물의 무리를 보아야 했다. 추악한 거인과 개의 머리를 한 인간들이 먹잇감에 꾀여온 것이었다.

신이 보살피는 세상에 왜 그런 괴물들이 있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왜 어머니는 그런 괴물들의 손에 목숨을 잃어야 했냐고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답해주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신들의 악의나 무능을 상징하는 듯한 그 몬스터의 떼거리가, 그녀의 눈에는 세상의 부조리가 피와 살을 가지고 현현한 것처럼 보였다.

《이승도, 명계도…… 결국 똑같군요.》

사람은 살아 생전 죽음과 고통에 시달린 끝에, 이 설원에서 다시 한 번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사냥꾼의 딸은 난생 처음 보는 눈을 움켜쥐며, 그것을 배웠다.

거인들이 땅을 울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해야 하는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겐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손을 휘저었다.

쿠오오오오오오─!!

인간의 살을 탐하며 달려들던 거인들은 그녀의 손에서 뻗어나온 어둠과 음의 마나에 갈려나가고, 죽은 채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 움직였다. 아직은 아버지처럼 삶과 죽음을 초월한 경지가 아니었다. 죽어가는 그에게 건네받은 힘은 극히 일부분이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 천 년이 걸리든 만 년이 걸리든.

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운명에서 태어났던 것일 테니까.

《신이 사람의 죽음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제가 대신 하겠어요.》

거인의 시체를 밟고 사냥꾼의 딸은 일어섰다.

《아버지도, 아버지가 죽인 사람도── 그리고 제가 앞으로 죽일 사람도, 전부 제 손으로 되살려내서 죽은 자들을 위한 낙원으로 이끌겠습니다.》

가슴의 상처를 매만진 처녀는 운명의 레일에 제 몸을 던졌다.

영멸에 든 영혼을 되살릴 수 있게 되면 되었다. 죄악에 손을 더럽힌 아버지도, 그가 자신을 위해 죽인 사람들도 전부 되살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면, 삶과 죽음이란 구분은 무가치하다.

언젠가는 모두 죽을 목숨이며, 모두 되살아나게 될 목숨이니까.

불가능하면 어쩔 것인가, 하는 가정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존재의의 자체에 반하는 가정이다. 태어나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눈을 뜨는 신생아가 없듯, 그녀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에퀴녹스(Equinox)라는 말이 있다.

어원이 의미하길, ‘동등한 밤’.

밤과 낮이 하루를 각각 12시간씩 양분하는 날. 오시리스의 부활을 축하하는 나르메르-나일의 옛 축일(祝日) 기간을 고대 로마니아가 일컫는 표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에퀴녹스란 부활과 재생을 의미하는 날인 것이다.

《명계의 여신이라. 조금 분에 넘치네요.》

흑마법사 에퀴녹스는 명계의 하늘에 펼쳐진 세계수를 보며 속삭였다.

《신까지 갈 것도 없이, 여왕이면 충분하겠죠.》

망자의 군세를 거느린 에퀴녹스는 첫 발을 내디뎠다.

평생 겪어본 적도 없는 추위도, 그녀의 가슴 한 켠에 몰아치는 폭풍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네페르티티.”

그리고, 나는 네페르티티의 어깨를 건드렸다.

“……읏!”

에퀴녹스를 따라가려던 그녀는 잠에서 깬 듯이 흠칫 떨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구분하기 힘든 듯,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문득 추운 것처럼 새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겉옷을 만들었다.

“말했죠? 너무 몰입하지 않게 주의하라고. 그냥 기억에, 꿈일 뿐인데 추울 리가 없잖아요.”

그녀에게 겉옷을 걸쳐주고 등을 다독였다.

네페르티티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것처럼 내 손에 의해 걸쳐진 코트를 조심스럽게 여맸다.

“……방금 그게, 에퀴녹스의 과거?”

“정확히는 그 아버지의 과거인가 보더군요.”

나는 굳이 지나간 옛 일에 평가를 내리기보단,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고고학자는 역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직업이 아니다.

“……사티스의 최초의 사냥개가, 흑마법사?”

“어디 가서 말해도 안 믿어줄 진실이네요.”

존나 왜 나는 이딴 것들만 알게 되는 건지.

오프툼한테 말해주면 믿을까?

아니, 가는 길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기만 할 것 같다.

‘그보다 사티스 여신의 성격이 좀 의외인데…… 다음에 직접 만났을 때, 내 부탁을 들어주긴 할까 모르겠네.’

나는 다른 것보다 그쪽 걱정을 먼저 하며 혀를 찰 뻔 했다가, 아직 몰입에서 덜 빠져나온 네페르티티가 들을 듯 해서 참았다.

그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꿈속에서는 아무리 지리멸렬하고 이상한 상황이라도 이상하게 엄청 기쁘거나 슬프거나 하는 거. 나는 10년 넘게 키우던 모기가 죽어서 우는 꿈도 꿔 봤다.

말도 안 되지만 꿈을 꾸는 중에만 공연히도 감수성이 폭발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동정받을 만 할지언정 용서받을 사연은 아니기에, 네페르티티도 금방 선을 그은 듯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길 멈추며 말했다.

“에퀴녹스가 아버지의 기억을 이어받아서, 저희들도 그 년이 죽은 다음의 상황을 볼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운이 좋았다기엔 조금 그렇지만요.”

나는 떠나가는 에퀴녹스를 가리켰다.

페이드 아웃을 반복하며 수백 년의 시간이 훌쩍 훌쩍 넘어갔다.

엄청난 속도로 재생하는 영상처럼 파라오들한테 창세의 권능을 빼앗은 에퀴녹스는 기어이 지상에 올랐다.

“아직 남았군요. 별로 길지는 않을 듯 합니다만.”

지상의 풍경도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흘러간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뇌는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기억을 쉽게 삭제해 버리기에, 기억의 재현인 꿈 역시 개인의 주관의 좌우된다.

즉, 에퀴녹스에게 1천 년의 세월은 거의 대부분 무가치했다는 거겠지.

사람이 쌓은 건물이 무너지고, 세워지고 하늘을 날거나 바닥을 데굴거리며 굴러다녔다. 꿈을 구성하지도 못할 만큼 편재된 기억이라는 증거였다.

마치 물리엔진이 고장난 게임의 버그 장면처럼 뒤섞이는 광경!

네페르티티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렸다. 아마 저기로 들어가면 또 에퀴녹스의 기억에 먹힐까 걱정되는 듯 했다.

대충 비유하자면 인간말종들이 바글대는 사이트 등을 기피하는 느낌이랑 비슷하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묻을까 봐 피하는 거잖은가.

나는 그런 네페르티티에게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 잡으실래요?”

“……괜찮아?”

“네. 다른 사람이 곁에 있는 걸 수시로 느끼면 쉽게 동화되지 않을 겁니다. 의식이 뒤섞이는 듯 할 때마다 제 손을 꽉 잡으세요.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 하시겠어요?”

“……아냐.”

네페르티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너랑 같이라면…… 괜찮아.”

“제가 좀 믿음직스럽죠?”

“응.”

이걸 YES로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어깰 으쓱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붙잡고 기억의 중추로 걸어들어갔다.

우리가 들어서자 세계는 격변하며 어떤 사막의 도시를 이루었다. 나는 풍경을 슥 둘러보고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젠 거의 현대 이세계의 양식이랑 동일한데?’

알리씨크와 큰 차이도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네페르티티?”

나는 목을 돌려서 그녀를 살폈다가 살짝 놀랐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안색이 이상하리만치 새파랬다.

“……여기, 내 고향이야.”

이 뒤에 벌어질 일을 알리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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