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95화 (595/1,009)

─저벅, 저벅.

칙칙한 로브와 사막의 무희 같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에퀴녹스는 도시의 길을 걸었다.

가끔씩 자신과 부딪히는 인파에도 화내거나 귀찮아 하지도 않았다. 그건 목적지를 정해놓은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가야 해.”

내가 네페르티티를 생각해서 멈칫하자, 그녀는 오히려 나를 잡아당기며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손바닥에 차오른 땀은 숨기지 못했다.

서둘러서 쫓아가자, 도착한 곳은 당당하기 짝이 없는 큰 건물이었다.

‘마법사 길드. 이 도시의 지부인가?’

에퀴녹스는 자주 출입했는지 시큰둥하게 걷고, 건물의 어느 한 구역으로 들어갔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그녀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기도 했다.

‘아마 지부 하나를 통째로 회유했거나, 부하들을 길드원으로 삼았겠지.’

이세계 길드는 프랜차이즈 같은 것이니까 그럴 만 했다. 지부장을 부하로 두고, 특정 학파를 별장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흑마법사들로 종교에 가까운 집단을 차린 상태였다.

죽은 자와의 재회를 바라며 산 사람을 죽여대는 찐퉁 이단이다. 이교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불과 1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에퀴녹스는 별 관심이 없었던 이승에마저 이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던 거겠지.

천 년의 존버 범죄자라면 가능할 일이었다.

《어머, 오셨네요.》

그렇기에 내가 놀란 건 에퀴녹스의 권위보다는, 에퀴녹스가 향한 곳에 있었던 사람 때문이었다.

엘프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머리에 쓴 로브의 후드가 인간족보다 넓게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거의 마름모 꼴의 텐트 같았다.

종족을 숨길 생각이 없는 걸까. 그에 비하면 목소리나 인상은 기묘할 만큼 비틀려져 있어서, 종족 외에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는 상대였다.

남들이라면 말투로 여성이라는 걸 짐작하는 게 고작이겠지.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님이 왔다고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이셨군요.》

에퀴녹스는 담담하게 로브를 넘기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무례하고요.》

해골 반, 살점 반의 얼굴을 드러낸 에퀴녹스는 차갑게 말했다. 정체를 꽁꽁 싸매놓고 무슨 얘길 하자는 거냐며 묻는 듯 했다.

《후후. 얼굴을 숨기고 와야 했거든요. 물론, 이 자리에서는 벗어야죠.》

엘프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고 후드를 뒤로 넘겼다. 지켜보던 나는 지긋지긋한 기분으로 혀를 찰 뻔 했다가, 한숨을 쉬는 정도로 참았다.

《예르나 그라시에에요.》

《에퀴녹스입니다.》

1000살 넘은 할망구끼리의 회담인가. 내가 어디선가 쉰내가 나는 듯한 착각에 눈을 찌푸리고 있자 에퀴녹스가 말했다.

《재미있는 제안을 하시더군요. 협력이라?》

《네. 공동의 관심사는 없지만── 공동의 적은 있을 것 같아서요.》

예르나는 사람 좋게 웃었다. 당연히 연기였다.

나는 에퀴녹스의 기억에 의지를 투사했다. 여기 앉은 시점에서, 이 리치 년은 아직 예르나의 정체 따위를 거의 알고 있지 못했다.

알아낸 건 고고학 교수라는 것 정도였다.

지금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보통 엘프가 아닌, 고대에 멸망한 엘프의 왕족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대단한 눈썰미긴 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대체 무슨 내용의 협력일까요?》

에퀴녹스는 정중하게 물었다. 이 여자의 정중한 태도의 뒷면에는 무관심이 있다. 패스트푸스점의 직원이 하는 존댓말도 이것보다는 관심이 있겠지.

나처럼 어둠과 음의 마나를 많이 보유할 적성이 있는 상대가 아니거나,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부 길가의 돌처럼 보는 것이다.

흥미를 끌지 못하면 곧바로 등을 돌려버릴 에퀴녹스다. 예르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풍문으로 듣기론, 창세의 권능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계시다고 그런던데요?》

《……조금 더 진득히 앉아 있고 싶어지는 질문이군요.》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는 듯 에퀴녹스는 작은 웃음을 돌려주었다.

창세의 권능이란 전통시장에서 ‘이 집 고등어가 그렇게 싱싱하다매요?’ 하고 물어보듯 언급할 만한 힘이 아니었다. 에퀴녹스는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부하들─전부 흑마법사겠지─은 회담의 자리를 비웠다.

방에는 예르나와 에퀴녹스만 남겼다.

《협력이라고는 말씀드렸지만, 사실 거래라고 말 하는 게 더 맞을 거에요.》

예르나는 자기 손에 기대듯 몸을 꼬며 말했다.

《저희는 사실, 신대에 목숨을 잃은 어느 신님께 육신을 드리는 게 기본 목표라서요. 아, 이건 중대 기밀인데 에퀴녹스님을 믿고 말씀드린 거에요?》

《제게 창세의 권능으로 그에 적합한 육체를 만들어 달라?》

다짜고짜 핵심을 찔러들어가자 예르나는 수줍은 듯 긍정했다.

《우후후, 아무래도 힘들거든요. 생물의 장기를 바꾸는 수준이 아니니까요. 저희 신께서는 물질도, 영체도 아니시니 보통 몸으로는 버티질 못해요.》

《다른 신의 육신을 빼앗는 건?》

《조금 힘들겠더라구요.》

《찾아와 주셨는데 아쉽지만, 거절하도록 하죠.》

에퀴녹스는 예르나의 ‘힘들다’는 대답이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빼앗아도 거부반응이 심해서 몸을 이식할 수 없더라는 건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왜 육신이 필요한지, 어떤 신을 살리고 싶은지도.

하물며, 얼마만큼의 육신을 요구하는지도 말이다.

《흐응? 제가 뭔가 실례라도 저질렀을까요?》

그래서였을 것이다. 예르나도 에퀴녹스가 불과 몇십 초 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제안 자체에 일절 관심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창세의 권능 얘기가 나왔을 때까지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가.

귀를 기울이는 듯 하다가 갑자기 뭐라고 떠들건 관심이 없다는 듯 딱 잘라버리니, 이상하다는 걸 눈치 못 채는 게 더 웃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급변한 반응의 원인을 알았다.

《공통된 관심사가 없는 걸 넘어, 목표 자체가 정 반대로군요. 신을 찾아서 죽이겠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굳이 죽어 나자빠진 신을 찾아 살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신을 혐오하는 에퀴녹스다.

차라리 인류를 멸망시키고 싶다고 말했다면, 뭐 언젠가는 그녀가 다스릴 명계에 떨어질 인간들을 미리 받아들인다는 취지로 승낙했을 수도 있을까.

물론 예르나의 직장인 헤니르와 친구들은 영혼 한 톨 남기지 않고 죽이고 싶어할 게 뻔하기에, 이 거래는 애초에 성사되지 못할 얘기였다.

《과연……?》

예르나는 비록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가 무슨 대가를 떠들건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건 대충 깨달은 눈치였다.

《그러면 말이죠? 딱 한 가지만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엄마 없이 자란 천하의 개썅년은 주둥이로부터 일체의 예의마저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질문하시길.》

《왜 위아래가 아니라, 좌우로 반반이에요?》

《……뭐라고요?》

에퀴녹스는 예르나가 이 제안이 파토난 이유에 대해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기에, 생뚱맞은 질문에 눈을 반개했다.

《그야 그렇지 않나요? 창세의 권능은 신성력의 상위능력이니까, 빛의 마나를 흡수할 인체 부위가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요.》

예르나는 키득거리며 에퀴녹스가 탁자에 올려둔 무희의 얼굴 가리개 같은 것을 집어들었다. 얼굴 절반의 해골을 가리고자 쓰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수리를 기준으로 한쪽으로만 살점을 남길 게 아니라, 상체만 남겨도 되잖아요. 그러면 매번 예쁜 얼굴을 가릴 것도 없는데.》

《……………….》

《리치로서 위엄을 세우려고? 그거라면 일부만 남겨도 될 텐데요. 아니면 명계를 다스리던 구신 중 한 명을 따라하려고? 신을 싫어하시는 듯 한데 그건 아니겠죠.》

창세의 권능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그냥 영혼에 저장하면 그만이다.

라이프 배슬처럼 혼과 육신을 나눌 수 있는 리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에퀴녹스가 자신의 살점을 남긴 건 고의라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고의에는 개인의 의지가 들어 있다.

예르나는 깍지낀 손에 얼굴을 기대며 웃었다.

《그도 아니면…… 되살리고 싶은 가족을 만났을 때, 동정이라도 받고 싶었나요? 어여쁘던 얼굴이 이렇게 될 만큼 희생하고 노력했구나~ 하고?》

《……좋아요,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 순간, 에퀴녹스의 얼굴에 스쳐지나간 것은 천 년도 전의 과거였다.

죽은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을, 괴물이라 매도하며 끝내버렸던 그녀다.

그래서 가슴의 상처도, 얼굴의 절반도 굳이 이 육신에 남겨두었다. 에퀴녹스는 차갑게 미소 짓고 예르나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제 권능을 빼앗고 싶다면 언제든 오세요.》

《후후, 딱히 그렇게까지 필요하진 않지만요.》

에퀴녹스는 웃는 얼굴인 채 지팡이를 휘둘렀다.

─뿌작!!!

소파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하이 엘프는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서 방의 일면을 붉게 적셨다. 손을 거둔 에퀴녹스는 피웅덩이를 내려다봤다.

《다음에는 분신이 아니라, 본체로 뵙죠.》

일부러 도발했을 정도라면 죽기 직전에 분신과 연결을 끊었을 것이다. 데미지는 받지 않았겠지만, 이 근처에 본체가 있을 가능성은 컸다.

그렇다면 찾아낼 만 가치가 있었다.

에퀴녹스는 등을 돌려서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와 교대하듯 들어온 흑마법사들이 피와 살로 만든 분신의 시체를 정리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