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06화 (1,009/1,009)

아내들은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깨어났다.

나는 그때까지 어디 가는 일 없이, 방 안에서도 할 수 있는 룬 훈련이나 계획, 간단한 연구 등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외출을 금지당한 기둥서방의 삶이란 대개 이런 법이다.

그러고 있자 오프툼이 찾아왔다.

〈나 취직하는 것 좀 도와주게.〉

〈띠요용?〉

나는 뜬금없는 얘기에 눈을 껌뻑거렸는데, 나를 놀래킨 장본인은 머쓱하게 어깨를 움츠릴 뿐.

〈술기운에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지, 교단으로 돌아가는 건 역시 좀 아니다 싶더군.〉

〈흐흐. 많이 쪽팔리십니까?〉

〈그것도 있고, 사실 나 같은 사냥개가 안 죽고 살아있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은가. 이러다가 불신자들의 괜한 의심이나 가십거리만 낳겠더군.〉

그건 그렇다.

성흔을 보이지 않으면 사티스 교단에 의심스런 눈초리가 갈 거고, 성흔을 보여주면 그것대로 꽤 소란스러워지겠지. 오호, 통제라.

〈게다가 사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대놓고 말해서 나는 수렵신님께 승천을 기각당한 거잖나. 그 분의 말마따나 세상에 미련이란 걸 가져볼 생각일세.〉

〈미련이라…….〉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앗, 씨발 면도 깜빡했네.

지금의 오프툼은 인생의 기력이랄 걸 찾는 환자 같은 느낌이었다. 기존의 사냥꾼이나 복수자로서의 삶에서는 몰랐던 것들을 맛보고 즐기려는 걸지도 모른다.

‘이만한 인재를 고용하는 거면 손해는 아니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인재는 얼마나 많아도 부족하니까.

발퀴리에들은 까놓고 말해서 연비가 나쁘다.

아니, 사실 엄청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걸 다룰 우리 가족이 살짝 수준 미달인 게 문제점이다. 저 녀석들을 미스릴 클래스 급으로 굴리려면 얼마나 많은 마나가 필요할지.

‘그렇게 생각하면 돈만 넘치는 졸부는 고용하기 힘든 달인급 전사는 놓치기 아쉽긴 해.’

미스릴 클래스 쯤 되면 어디 가서 굶거나 할 일은 없다.

돈 갖고 궁색맞게 살지도 않는다. 연봉을 많이 준다고 무조건 부하 삼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지금 오프툼 뒤에서 손바닥을 비비는 오드리가 졸부들 창고를 털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다.

〈……좋습니다. 연봉 협상부터 할까요?〉

〈매번 자네 옆에서 일할 것도 아니니, 평소에 받는 돈을 낮추고 프리랜서 모험가처럼 의뢰비를 주는 게 일거양득에 윈윈 아니겠나?〉

〈멋진 의견이군요. 채용할게요.〉

그렇게 나는 화색이 되는 오드리를 보면서 그를 고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흑마법사 사냥을 위해서라면 세상 천지를 다 돌아다니던 사람이다. 브리타니아에서 몇 년쯤 살더라도 힘들거나 어려울 건 없겠지.

그 왜, 헤라클레스도 마굿간에서 몇 년 살았다잖은가. 이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하십쇼. 꺼억─.

***

나르메르-나일에서 할 일은 거의 끝났다.

유통로는 뚫었고, 듀나미스 공방이 대체 불가한 입지가 되도록 안팎으로 명망도 세웠다.

돈 복사 버그처럼 숨풍숨풍 금화를 낳아줄 사업체와 협력 업체들의 계약을 끝낸 것이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어르신 댁에 한 번 들리기만 하면 된다.

“근데 그 전에 관광 정도는 해야지?”

“미식 투어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방방 뛰면서 내 제안에 기뻐했다.

흑마법사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떠나기 전에 속 편하게 놀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원래 출장가서 일만 하고 오면 안 된다. 출장의 절반 손해봣어욧!

“응. 낮에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저녁까지 놀면 더 재밌잖아.”

“술 먹고 퍼질러 잤다가 관광이라. 좋네. 여행 온 맛 나겠는데?”

만장일치로 의견이 통과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여행 싫어하는 사람도 여행지에서 돈 쓰는 걸 싫어하진 않을 걸?’

개처럼 벌기만 해서 뭐하겠는가. 가끔은 쓰기도 하고 그래야지.

“밑에서 놀고 있을게. 천천히 내려와.”

“알았어. ……노르 감시, 잘 부탁해?”

“맡겨두거라.”

감시라고 하지 마, 쉬불쟝.

“와이프 워칭 미…….”

나갈 채비를 하고 발퀴리에들을 우리 가족 공용 인베토리에 넣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사막의 전통시장인 바자를 돌아볼까. 마침 볼 게 많은 알리씨크다. 하루 종일 놀더라도 지루하지는 않겠지. 이세계판 리무진인 마차만 타고 다니느라 발품 뛰는 여행이 그립긴 했어.

나는 선글라스를 장착하며 픽 웃었다.

“어디 한 번 보여주실까. 사막의 관광도시의 묘미라는 것을…… 응?”

그런데 그렇게 평소 몸 단장을 잘 안 하는 존예 너드 콤비─다나랑 베로니카─랑 셋이서 1층에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입구를 기웃거리는 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무슨 미국 찜질방처럼 바위에 분수 같은 걸 장식해놓은 여관 로비였지만, 그런 분수보다 훨씬 청명한 느낌의 머릿결이었다.

나는 저런 자연스러운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1명밖에 모른다. 안 그래도 괜히 시킨 시큼한 음료에 질색하고 있던 나는 슬쩍 그녀에게 다가갔다.

“……………!!”

나를 발견한 네페르티티는 화들짝 놀라며 자연스럽게 발 뒤꿈치를 180도 돌렸는데, 애초에 전력질주로 도망칠 것도 아니었으니 튀는 의미가 없었다.

휘리리릭! 끼요오옷─!

나는 천지인의 삼보를 점하며 그녀의 앞에 날아들었다. 히히, 못 가!

“으흐흐.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조금 더 걸리셨네요.”

“……왠지 발이 안 떼져서.”

네페르티티는 체념하고 멈췄지만 끝까지 내 눈을 피하려 들었다.

쫄지 마, 쫄지 마. 거 쓰벌 누가 보면 내가 빚쟁이인 줄 알겠어.

이 아가씨도 상당한 미인이라서 시꺼먼 근육쟁이 새끼랑 붙어 있으면 내가 100% 경비대 아저씨들한테 이 놈~ 당할 것이었다.

사막 국가의 영웅에서 악덕 색마 귀족으로 몰락하는 절차를 착실히 밟고 있구만. 이게 그 영웅호색이라는 건가. 나만 나쁜 놈이지, 진짜.

“앗, 그때 그 모험가 분이네.”

“우리 주인님을 보러 왔느냐?”

쫄래쫄래 따라온 다나랑 베로니카가 말했다.

근데 그, 우리 시종 겸 여신님? 대낮에 사람들 뻔히 보는 앞에서 나더러 주인님 운운하는 건 그만둬 주면 안 될까? 내 나쁜 소문에 박차가 가해질 것 같걸랑?

네페르티티는 우릴 둘러보고 물었다.

“……떠나려고?”

“그러기엔 짐이 좀 가볍죠? 잠깐 관광이나 할까 해서요.”

지갑을 흔들어 보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뼉을 쳤다.

“맞다. 네페르티티, 지금 한가하시죠? 아니, 한가해야 합니다.”

“……어?”

“당장 급한 일은 없잖아요. 그쵸? 저희 놀러 갈 건데, 같이 가십시다.”

이거이거 여기에도 인생 절반 손해보는 사람이 있었네.

나는 당황하는 네페르티티를 뜨뜻미지근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복수에 눈이 먼 사람들은 왜 다들 이렇게 한결같은지 몰라.’

복수가 허무하다는 궤변은 그것 말고는 인생의 즐거움을 몰라서 그렇다.

사이다로 속이 뻥 뚫리게 복수를 마쳤으면 집에 돌아가서 맛난 거 먹고 게임이건 뭐건 하다가, 친한 친구든 연인이든 만나서 놀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없이 한 우물만 파니까 그렇지.’

원래 쓸데없이 성실한 사람들이 더 그렇다.

빚이건 뭐건 하나만 보고 살면서, 그 지랄맞은 의무에 인생을 저당잡힌 자신을 그렇게 아쉬워하면서도 정작 그걸 끝마치고 허무해 하는 것이었다.

내 고향 지구에서도 평생을 빚만 갚다 가는 사람들은 있긴 했잖은가.

우리 아버지 친구분 중에도 계셨는데, 정말 몸을 축내가며 빚을 갚으시고는 삶의 보람을 느끼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독신 생활을 하시더라.

이른바 현자타임이다.

군바리가 외출 외박을 나와가지고 물을 빼고서 느끼는 자괴감을 수십 배로 증폭시킨 기분이 계속 이어지는 거겠지.

나쁘다고는 안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요령이 없는 것이다.

‘그 분이 그나마 생기를 가지게 된 게 분명 운 좋게 비슷한 처지의 아줌마랑 결혼하고 나서…… 아니, 이런 건 네페르티티한테 적용할 해결법으론 좀 그런가.’

뭐 아무튼, 네페르티티가 그때 시그룬드를 보며 불태우던 살의를 생각해 보면 복수를 끝내기 전에 인생에 미련을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건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네페르티티가 말을 듣거나 의식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안타깝게도 지금 시점에서 그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런 타입은 생판 남이 백날 조언해도 한 귀로 흘려버릴 사람들이니까. 사티스에게 삶의 미련을 가지다 오라고 쫓겨난 오프툼이 그랬듯이, 무시 못 할 사람이 억지로 끌고 다니는 게 옳았다.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마침 가이드가 필요한 참이었거든요.”

“……그래?”

“네, 네~. 제가 한 턱 쏠 테니까, 도시 안내 좀 잘 부탁드려요~.”

미안하지만 베임 씨한테는 오늘도 쉬어 달라고 하자. 놀면서 월급 나오는데 싫어하지는 않겠지.

나는 준비를 다 하고 내려온 아내들까지 데리고 여관을 나섰다. 선글라스를 쓰고 후드까지 머리에 써야 했기에 귀찮긴 했지만 말이다.

“너무 유명해지면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 유명세도 지나치면 좋지만은 않군.”

“선배도 변신 마법을 더 갈고 닦으면 되는데♡”

티르시의 언니 모습─예전에 마피아들을 들쑤실 때 변신했던 그거─을 한 라리루라가 말했다. 난 신체 변신에는 재능 없다니까 그러네.

“어쩔 수 없네요, 선배는~♡! 제가 분위기를 좀 띄워드릴게요! 자, 티르시 언니도 그렇게 어색한 거리감 두고 있지 말구요!”

“엇? 자, 잠깐! 당기지 말아요!”

이 동네에서 나만큼 유명인사가 된 라리루라는 친목을 다지려는 듯 나랑 티르시를 데리고 사막의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문화 탐방을 실컷 즐겼다.

뭐, 대학 OT처럼 놀고 먹으면서 어색함을 푸는 건 좋은 일이었다.

프랑이랑 다나는 각자 소화해내기 바쁜 새로운 힘을 갈고 닦으려는 듯 예술적인 안목을 기르는 데 집중했고, 베로니카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사막 특유의 식문화에 흠뻑 빠진 듯 했다.

덕분에 혼자 붕 떠버린 우리 4차원 아싸 아가씨에게 이것저것 말을 거는 건 주로 내 역할이었다.

“으음♡ 이 샤베트라는 것도 꽤나 진미로군.”

베로니카는 천막이 깔린 사막식 카페테리아에서 얼음이며 우유 등을 얼린 샤베트를 맛보며 자신의 볼따구를 쓰다듬었다. 하여튼 사줄 맛 나는 리액션이야.

“맛있냐?”

“한 입 먹어보겠느냐?”

“좋지.”

스푼을 입에 넣자, 확실히 21세기의 아이스크림 할인점을 휘젓던 강북호도 감탄스러운 맛이었다.

‘하긴 여기가 브리타니아도 아니고.’

좋은 재료를 쓴 수제 디저트가 맛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베로니카는 내 입에서 꺼낸 스푼을 낼름 핥으며 맑게 웃었다.

“신기하구나. 사막인데 이런 얼음 디저트가 전통적인 음식이라니. 역시 마법인가?”

“아닐 걸? 무슨 냉동고가 있었어. 물이 증발할 때 생기는 냉기를 이용하는 거였는데…… 다나?”

“야크찰(Yakhchāl) 얘기?”

다나는 어젯밤의 모유 사건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듯, 샤베트는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말했다.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흐음. 네페르티티야. 혹시 너는 아느냐?”

갑자기 이야기의 화살이 날아오자, 앞에 놓여진 샤베트와 무언의 눈싸움을 하고 있던 네페르티티가 고개를 들었다. 내 착각이 아니면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지하수로를, 지열(地熱)로 덥히는 거랬어.”

“덥힌다? 냉동고인데?”

“……수로보다 깊이 판 돔에 증기가 들어가면, 구멍으로 뜨거운 공기만 빠져나가. 그러면 차가운 공기만 가라앉아. 그게 냉동고.”

“마법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응용인가? 배울 게 많군.”

베로니카는 뭔가 감명이라도 받은 듯 샤베트를 한 스푼 떴다.

이 녀석 뭔가 안 좋은 걸 생각하는 눈빛이구만. 착정당하는 남편의 직감이 경종을 살짝 울렸다. 쪼옥 빨아먹힐 듯한 예감이 드는구만.

피하지 못할 미래임을 알았기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네페르티티도 의외로 박식하시군요.”

“……의외로?”

이런, 삐졌나? 눈을 반개하며 쳐다보는 게 은근 인간미가 있군.

이번엔 내가 눈을 피하는 입장이 되었다. 나는 느긋하게 샤베트를 입에 넣었다. 소젖은 아니지만 역시 꽤 맛있었다. 이런 게 여행의 참맛이지.

한량처럼 단 것을 입에 넣는 내 머릿속에서는 몇 개인가의 마법이나 룬 문자가 뒤섞이고 있었다.

탁자나 랩실에 앉아만 있어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유연한 발상과 사고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역시 발명의 레퍼런스는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법 아니겠는가.

인생은 무덤이라는 골을 향한 마라톤이다.

편안하고 노닥거리기만 하는 시간도 사람한테는 필요한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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