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우리는 나르메르-나일을 떠나서 아르마알스 가문 본가에 들렀다. 희귀금속에 둘러싸여서 ‘이젠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어욧!’ 이라며 행복사를 하고 있을 클라라를 주워서 돌아가기 위해서다.
베임 씨와 인사를 하고서 바로 집무실로 직행.
마침 점심을 먹고 한가롭던 어르신을 만나 뵀다.
〈편지는 흥미롭게 읽었네. 활극 소설인 줄로만 알았어.〉
〈넹?〉
〈사업하라고 보냈더니 별에 별 짓을 다 하다가 왔더군.〉
어흑, 뼈 맞았어.
확실히 영업사원으로 보낸 새끼가 현지에서 빈 라덴 대가리를 파밍해 왔는데 얼탱이가 없을 만도 했다. 당연하다는 듯 원래 목적도 달성했으니 더 그렇겠다.
오른쪽 옆구리엔 흑마법사였던 것, 왼쪽 옆구리엔 발주 계약서.
돌이켜 보니까 나란 새끼는 대체 뭐지.
영업부 바바리안인가.
〈만드라고라 밭에 연금술사를 보냈더니 단칼에 5백 년 정도 묵은 사악한 엘더 트렌트를 처치해 온 것 아닌가. 편지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내가 촌철살인에 허우적대고 있자 어르신은 별 웃기는 얘기 다 보겠다는 듯 피식대셨다.
5백년요? 존나 천 년은 된 년이었는데요. 아니, 그것보다 만드라고라는 뽑으면 뒤진다는 광대버섯 최종보스 버전 아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계셨던 거야? 존나 내가 시급 3만원 받는 체르노빌 제염 알바였다니 뇌가 까무라칠 것 같군 그래.
〈믿었으니까 보낸 것 아니겠나. 나야 만드라고라를 대신 뽑아줄 골렘들을 팔라는 마음이었지. 좀 불편한가? 그러면 앞으로는 전설 속의 전사건 부유한 기술 장인이건 하나만 하게.〉
〈그렇지 않아도 아내들한테 가정에 충실하라고 혼나는 중입니다.〉
〈무턱대고 처를 늘리니까 그렇지. 혹시 브리타니아나 키타이에는 처첩 제도가 없나? 본처와 처, 첩의 숫자는 따로 세는 게 귀족의 미덕일세.〉
와우, 말씀 한 번 매콤한 것 봐. 여기가 이세계 판타지랜드라는 걸 상기시켜 주시는군.
하긴, 남자는 수저를 들 힘만 있어도 어쩌고 저쩌고 하니까. 당장 내 고향 지구에서 ‘여든 살 갑부와 결혼한 미스 어디어디 출신 미녀 모델’ 얘기는 발에 치일 만큼 널렸고.
아무튼 남자끼리라곤 해도 이런 얘기는 안 하는 게 제일이다. 어딘가에선 40대 아주머니들이 자기 남편 숫자로 체스를 두고 있는 세상이라도 말이다.
슬슬 여기가 궁극의 남녀평등 이세계라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의 왕국 같아질 것 같거든.
〈브리타니아 귀족이 된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일세.〉
어르신은 느긋하게 꿀을 넣은 차를 저었다.
〈물론 로마니아에서 귀족이 되는 게 이곳의 정세를 파악하고 휘어잡는데는 좋겠지만, 그거야 꼭 자네가 아니어도 가능한 일이지.〉
〈솔직히 제가 뭐 대단한 귀족 나으리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은 어르신이나 휘하의 문관 분들한테 토스해도 된다고 봤거든요.〉
〈그래. 대처 가능한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외부 시장과 그 시장의 영주 딸과 안면을 트는 게 옳은 일이야. 누가 알겠는가? 자네가 그 딸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가 될지.〉
시발, 비유 좀 살살 하이소. 브리타니아 마켓의 영주 따님이면 미세스 브리타니아잖아요. 그 동네 왕가가 제일 잘 나가는 영주 같은 거래도 말투가 쬐까 거치시네.
저처럼 섬세한 마인드의 꼴마초는 나랏님 욕을 하기 어렵거든요? 민주주의 정치인처럼 탄핵할 수 있는 작자들도 아니고 왕녀야, 왕녀.
나는 어색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날 가만히 쳐다보는 어르신.
〈허심탄회한 질문을 좀 해도 괜찮겠나?〉
뭔데요 또 씨발.
지금보다 더 노빠꾸로? 대체 뭔 소리가 나올지 상상도 안 가네.
〈……물어보시죠.〉
〈자네는 꿈이 뭔가?〉
……뎃?
나는 예상과 180도 다른 질문에 입을 헤─ 벌려버리고 말았다.
〈그런 걸 물으시기는 몇 달쯤 늦지 않았나요?〉
장래희망이 뭐냐니, 후원자 면담 때도 안 하신 질문을 새삼?
〈이해가 안 가서 그렇다네, 내가.〉
내가 몹시도 어이가 없어 하자 어르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는 권력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 혹시 스토익하게 단련해서 전사의 정점을 노리기라도 할 텐가? 그게 목적이라면 다른 곳에 기웃거릴 리도 없잖나.〉
친위대장 가이우스 씨가 혼자 끄덕거리고 있다.
하긴 내가 뼈와 살을 깎아서 강해지려는 동기는 또 없지. 필요하니까 쎄지고 싶을 뿐이고. 어머나 시발, 천하제일인 노르드라니. 마법의 신이 그나마 낫겠네.
〈자네는 얻을 만큼 얻었잖나? 세상 누구라도 다 부러워할 절색의 미녀들과 충분한 명예, 뛰어난 힘. 남들이 평생 하나만 목표로 하기도 벅찬 것들을 다 손에 넣었어.〉
〈그건 좀 과찬 아니십니까?〉
〈너무 자기 객관화가 부족하면 욕을 얻어먹는 법일세. 내 의문은 거기서 생겼지. 자네는 인생을 즐기며 살 만큼 성공했는데, 눈빛에서는 안주하고 편히 살려는 기색이 없더군.〉
어허, 말을 왜 또 그렇게 하실까. 남들이 들으면 내 눈에 흑염룡이라도 사는 줄 알겠네. 제 눈깔이 그렇게 사나워요? 혹시 째진 눈 키타이 놈이라고 돌려 까는 건 아니겠지?
이미 아내들이랑도 한 얘기였기에 새삼 당황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지니스 파트너 겸 후원자한테까지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이야.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내 행보가 그렇게 이상한가?’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승진이랑 권력에 미친 출세성애자처럼 계급장을 보며 딸치는 놈이라고 볼래도 이상한 점이 많다.
그렇다고 적당한 권력에 만족하는 놈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적당한 장원이라도 사서 브리타니아의 백작으로서 주지육림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내가 그렇게 한들 뭐라고 할 사람도 없겠지.
게임 장비칸처럼 머리 가슴 배 팔 다리에 각각 아내들을 1명씩 장비하는 해피해피 라이프.
그렇게 살 기반이 됐으니 마음껏 놀면 그만인데,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이만큼 성공했는데 뭔가를 더 이루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명예도 권력도, 하물며 재력과 무예조차도 아니다.
이상할 만 하지. 차라리 화성에 가고 싶다면서 입을 터는 재벌 쪽이 더 납득이 가겠다. 언플이건 진심이건 행동에서 드러나야 추측이든 뭐든 할 것 아닌가.
어르신이 이 새끼 머임? 하며 대놓고 물어볼 만 했다.
‘운이 좋군.’
나는 눈을 빛냈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낼 것도 없이, 어르신이 먼저 말문을 틀어준 것이었다. 난 거기에 대답만 하면 그만이었다.
일부러 텀을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티르시를 불러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집사를 부르자 티르시는 금방 찾아왔다. 그녀는 문 앞에서 귀족다운 예의범절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췄다.
〈부르셨다고 들어서 왔습니다, 가주 어르신.〉
〈나 말고 자네의 신랑이 부른 걸세. 편히 앉게, 티르시 양.〉
티르시는 품위있게 웃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때까지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고 있었기에, 바로 얘기를 시작했다.
〈어르신께서는 강가에서 야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있지. 젊을 적엔 여행을 다녔거든. 방랑 기사처럼.〉
방랑? 초대 원로원 가문의 가주가?
이건 또 의외였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저도 어린 시절에는 강가에서 놀고는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에 평소에 앉던 바위를 슥 들춰보고 기절초풍했습니다.〉
〈허허. 벌레가 득시글거려서?〉
〈바로 맞추셨습니다.〉
다들 알 것이다. 벌레는 습하고 꿉꿉하며 어두컴컴한 곳에 환장한다.
강가의 바위를 들춰보면 그 밑에 벌레들이 붙어 있는 건 그래서였다. 자세한 설명은 제정신 수치를 깎고 토악질을 유발하므로 생각하겠다.
〈저는 사람 사는 곳도 그렇다고 봅니다. 겉이 아름다워도 벌레와 뱀이 들끓는 곳은 있죠. 그건 너무 당연하고 어디든 마찬가지라서, 굳이 질색할 것도 아닌 일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 완벽을 바랄 수는 없잖나.〉
〈예. 하지만 제가 머리를 뉘인 곳에 독충들이 돌아다니고, 과일을 따러 가는데 뱀이 발목을 물 것 같다면 대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노회한 정치인은 비유를 찰떡처럼 알아들었다.
어르신의 눈매가 좁아졌다. 오늘부터 저희 째진 눈 듀오에요!
〈다른 귀족들 얘기는 아닌 듯 하군.〉
〈그렇습니다. 긴 얘기가 되지만──〉
나는 운을 떼며 〈편찬대대〉에 대해 설명했다.
증거가 없기에 모든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닌데, 이번 나르메르-나일 출장에서 겪은 사실만 몇 개 엮어내도 충분한 무게감을 부여할 수 있더라.
〈허어…….〉
〈놀라시는 기분도, 믿기 힘드실 거라는 부분도 이해합니다. 제 인생이 좀 파란만장한 터라 증거를 챙길 여유가 적을 때가 더 많습니다.〉
증인이랑 증거 몇 개 정도는 있지만, 이 얘기를 전부 증명 가능한 사실은 아니었다.
긴 얘기를 마치고 입을 축인 나는 픽 웃었다.
〈그러므로 저는 유유낙낙 살기 전에 그 놈들을 정리해둬야 합니다. 원한을 사고도 밤에 푹 잘 수 있는 게 귀족의 소양이라도, 저랑은 안 맞아서요.〉
전부 믿어주지 않아도 된다. 숨어 있는 위협이야 흔한 얘기다.
나를 좆 같아하고, 나도 좆 같게 여기는 새끼들.
이건 나랑 그 놈들의 승부였다.
누가 먼저 상대방을 조져놓는가 하는 승부.
〈그 놈들을 찾아내려고 벼르고 있던 걸 어르신께서 눈썰미 좋게 간파하신 듯 합니다.〉
〈새로 데려온 친구들도 그런 이유에서였나?〉
〈예. 현장의 조사 등을 부탁할 생각입니다.〉
조이드랑 오프툼에겐 탐정업을 맡길 생각이었다.
‘캐서린한테도 얘기는 건네 봐야지.’
위험할 수 있으니까 실력이 되는 인물은 꼭 필요하다. 오프툼을 축으로 노르드 백작 가문의 이세계FBI가 발족할 예정이었다.
단, 네페르티티는 안 된다.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복수에 불타오르는 그녀를 통제 못할 상황에서 탐문 등을 시켰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서다.
〈티르시 양은 그걸 도우려는 거고?〉
어르신은 티르시에게도 물었다. 그녀는 기품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이유만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저는 가문을 잃은 처지지만…… 어릴 적부터 그 숙청의 내막을 알고 싶어 했었거든요.〉
〈……복수라도 하려는 겐가?〉
〈설마요. 단순한 의문이에요. 자기 뿌리를 아는 건 무언가를 해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거죠.〉
그녀는 나와 브리타니아 왕가의 조력을 받아서 아르마슈나스 가문의 몰락과 〈편찬대대〉의 역사 따위를 동시에 찾아낼 예정이었다.
‘정보망이라는 건 일회용이 아니니까.’
루트만 뚫는다면 일사천리다.
문제가 있다면 그 과정이 절대 쉽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외부의 조력은 지금보다 많아져도 의미가 없다.
맨땅에 헤딩하는 고생이 호미랑 삽을 챙겨가는 정도로 나아질 뿐이다. 지나치면 눈에 띄기만 할 것이었고,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다.
안전하고 빠르게 로마니아 국내의 사정을 통달하려면 현지 권력자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원로원의 상원의원 같은 사람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는 건 오히려 없어 보이는 일이다. 어르신은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 듯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바위를 들춰서 해충을 찾겠다는 말이군…….〉
본인이 꺼낸 이야기니만큼 곰곰이 사려하는 듯 한 어르신.
존나 오랜 침묵이었기에 나는 일부러 어색함을 이용해서 우리가 먼저 물러나게 만들 생각인 줄로만 알았을 정도였다.
그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자네 할애비, 오르시우스는 괜찮은 놈이었지. 세상 부끄러운 애처가였어. 내가 반했었던 여자를 믿고 맡겨도 될 만큼 말일세.〉
굉장히 뚱딴지 같은 이야기였다. 티르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주가 될 가망이 없던 놈이 호위 몇 데리고 유유자적 세상을 놀러다니다가 웬 수녀 연수생을 만났지. 그녀에게 네 가문과 돌아갈 곳,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와 달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네만.〉
〈……………….〉
〈그래서 결혼식 날에 웃으며 축복을 보냈던 그 여인이 반백살도 못 채우고 떠날 때도, 웃으면서 갔으니 행복했거니 했네. 나는 자식이 딸 뿐이라 자네 아들이 부럽다며 병문안도 갔었던가.〉
노인의 옛날 이야기는 둘 중 하나다. 지루하게 매번 반복되는 자기 자랑이나, 남에게 얘기 않고 고이 간직하다가 간혹 풀어내는 이야기 말이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후자였다. 그가 픽 웃었다.
〈나중에야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게 됐지. 딸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네만, 그 아들 놈이라는 게 아주 고얀 놈이었거든. 자기 아들이 하던 짓들을 봤으면 자네의 할머니도 속 좀 썩혔을 테니.〉
티르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남의 마음 씀씀이를 어색해 할 때 사람들이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저는 아버님과의 추억이 거의 없으니 배려해 주실 것 없어요. 오히려 아버님과 긴밀할 만큼 제 나이가 많았다면 숙청 때 저도 성치 못했겠죠.〉
〈귀족 가문이란 게 다 그렇지.〉
〈정말이에요. 차라리 할아버님과의 추억이 더 많을 지경인걸요?〉
내츄럴 본 블루 블러드들은 껄껄 쿡쿡 웃었다. 어르신은 담배를 놓고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늙으면 뻔뻔해지지. 나이를 먹어서 잃어버리는 건 젊음만이 아니야. 수치심이란 건 정계에서 몇 년 구르면 젊을 적에 빨리도 닳아 없어지거든.〉
〈듣던 초보 백작이 정치 하기 싫어지는 말씀이십니다?〉
〈젊을 때는 그래도 돼. 그런데 늙으면 여태껏 모은 걸 잃어버리지 않기만도 급급해지지. 그 왜, 양손 가득 짐을 들어본 적 없나? 그거랑 똑같아. 뭔가를 새로 품으려 해도 가진 걸 쏟을까 봐 두려워지더군.〉
내가 너스레를 떨자 어르신도 똑같이 받아치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래서 티르시 양. 자네의 처지를 뻔히 알고 있는 주제에 돕지 않았네. 레티시아의 손녀가 저 먼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걸 알면서도.〉
레티시아?
순간 모 프레이야 짭이랑 헷갈렸는데, 문맥으로 추측하자면 티르시의 할머니 얘기일 것이었다. 뭐, 나도 뇨르드인가 하는 신이랑 이름이 비슷하니까. 동명이인이 아닌 게 어디야.
티르시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도우신다뇨? 저를요?〉
〈첫사랑의 손녀가 홀몸이 됐는데 그 뒷바라지 좀 챙겨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겠나. 그저 숙청의 여파가 내 가문과 갓 태어난 아들에게 번지는 걸 두려워한 노인네의 심약함이 원인이지.〉
그러니까 뭐야? 어르신이 티르시의 처지를 알면서도 돕지 않았으니까 미안하다는 얘기인가?
나는 물음표를 띄우며 티르시를 봤는데, 그녀도 마침 날 똑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서로 하는 생각은 같은 모양이었다.
〈그게 왜 문제인가요?〉
얘기를 듣던 티르시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야 누구든 남보다는 자기 가족이 소중하죠. 만약 그때 당시에 제안하셨어도 거절했을 거에요. 저 때문에 가주님 가문에 어떤 재액이 닥칠 줄 알고요?〉
숙청의 칼날은 10년 전의 로마니아 황제가 휘둘렀던 거겠지.
그런데 황제 발목 잡기가 주 업무인 원로원 의원께서 그 숙청의 피해자를 데려가서 기른다? 그거 문외한인 내가 봐도 트집 잡기 존나 쉽겠는데?
〈또, 만약 그랬다면 제가 노르드를 만날 수나 있었겠어요? 그런 옛날 일로 신경쓰지 마셔요.〉
〈허허. 노인네의 궁색한 변명을 참 듣기 좋게 흘러넘겨 주는군.〉
어르신은 가만히 담뱃대를 물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헌데 그런 말투라면, 우리 노르드 백작은 그 재액에 좀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 이거 생각보다 더 할머니를 닮았군. 우리 백작이 고생이 많겠어.〉
〈흐흐흐. 당시랑은 세대도 바뀌었고, 필요성도 있잖습니까? 그때랑 지금은 다르죠.〉
〈맞아요. 가주님께서는 염려 마세요.〉
티르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허허. 티르시 양. 자네도 자네 남편도 네게 뭘 명령할 자격은 없네. 뭐라고 말한들 나는 그 옛날 일을 물고 잡으며 염려하고 신경쓸 생각이야.〉
아니 늘그막에 피어난 똥고집 뭔데.
내가 말로는 못 하고 속으로만 어이없어 하는데, 어르신은 물고 계시던 담뱃대를 입에서 뗐다.
─툭툭. 재를 털어내는 소리가 이상하게 컸다.
〈내 아들을 물어죽였던 개자식이 되살아났다고 했었지.〉
등골이 살짝 쭈뼛했다. 물리적인 강함이 없어도 대국의 정세를 쥐락펴락하는 원로의 카리스마였다.
어르신의 아들을 물어죽였던 개자식.
아마 코뤤투스 얘기일 것이었다. 얘기가 서전트 짬프 하듯 튀어서 따라가기가 좀 힘드네.
부활했다고도, 안 죽고 살아 있었다고도 말하기 힘들어서 언데드로 되살아났다는 식으로 연락을 해 뒀었다. 티르시는 바짝 굳은 상태로 끄덕거렸다.
〈그 개자식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해치운 게 티르시 양이며, 그 개자식을 풀어놓은 놈을 처죽인 것도 자네와 자네 신랑의 덕분이라더군.〉
〈……마무리를 지은 건 저희가 아니지만요.〉
〈그게 그거 아니겠나. 증인도 많으니 의심하는 게 더 어리석지. 또 자네들 덕을 봤군.〉
프리모르를 구해낸 뒤에 이어서, 그 복수의 핏값까지 이자를 쳐서 따따블로 받아낸 것 아닌가. 난 솔직히 어르신이 말하기 전까지 생각이 거기까지 못 미치긴 했는데.
그런 만큼 잠시만 아가리를 쌉치도록 하자.
〈나는 말일세, 오르시우스가 못난 아들을 잃고 눈이 돌아간 걸 딱하게 여겼다네. 고놈은 그러다 제 가문을 망하게 했으니까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지.〉
어르신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서 프리모르가 가문의 기사 몇몇만 데리고 복수행을 떠났던 걸 떠올렸다.
이 마초 끼 다분한 노인장께서 친아들의 복수에 힘을 쏟아붓지 않았던 건, 그만한 체험과 비슷한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한 어르신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나이를 먹고 젊을 적 혈기를 잊어버렸지만, 오르시우스 고놈은 그렇지 않았던 게야. 그건 옳고 그름 이전의 문제지.〉
〈……저희 가문이 몰락한 이유를 아시나요?〉
〈앞서 말한 이유로 알려고 들지 않았네. 헌데 이제부터는 아니야.〉
티르시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어르신은 고개를 젖히며 히죽거리셨다.
〈이 노친네는 뻔뻔해서 말일세. 며느리 배에서 크고 있는 손주 놈에게 영지랑 가문을 물려주려면 옛날 은혜 정도는 입 싹 닦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귀족의 귀감이라네.〉
〈어……〉
〈헌데, 내 지인들이 알음알음 신진귀족 아가씨에게 친분을 다지는 걸 누가 막겠나? 몰락 귀족이 일신의 능력으로 명예귀족위를 얻어서 대성하는 건 의외로 전례 있는 얘기라네.〉
나는 눈을 굴렸다. 해석하자, 해석.
대놓고 돕지는 못하겠지만, 사람 알선이나 소식 전달 등은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뜻이지?
흐으으음……? 로마니아 원로원 상원의원의 백업이면 정계에선 거의 맵핵 치트 급 아닌가? 금화로 사과박스를 사랑의 저금통처럼 빵빵하게 채워도 못 맺을 인맥이네.
장차 여기저기 덤불을 들쑤시고 다니게 될 티르시와 나였다.
온갖 잡벌레가 달려드는 걸 막아줄 아르마알스 모기망의 존재는 제법 크지 않을까?
아마 나보다 귀족 사회의 찐득찐득함을 더 잘 알 법한 티르시가 얼굴이 꽤 밝아진 걸 보면,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바위를 들춰서 벌레를 찾아내든, 독사를 때려잡든, 좋을대로 하게. 멀리서나마 응원하지.〉
〈……감사합니다!〉
티르시의 인사에 맞춰서 나도 머리를 숙였다.
이득과는 별개로 어르신의 조력을 받아낼 수가 있었다. 비지니스 마인드로는 손절 각이 서도, 이 어르신의 마초이즘이 허락하는 한까지는 달달하기 그지없는 인맥 기생충 노릇이 가능하겠지.
그니까 이제 집에 좀 가자, 진짜로.
이러다 우리집 고양이가 내 얼굴 잊어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