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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통 무기 코스프레를 그만두기 시작한 내 창을 찝찝한 기분으로 들고 다닌지 이틀째 되던 날.
“나의 그대여! 성지로 가자꾸나!”
내가 우리 여신님은 선언한대로 이틀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어서 와. 그리고 성지로 가자고? 지금?”
빵을 우물거리던 내가 묻자 베로니카는 허리에 손을 짚고 웃었다.
“그래, 가능하다면 지금 바로. 달리 준비하거나 할 것은 없다. 당장은 간단한 설명을 들으러 갈 뿐이니라. 가볍게 몸만 오면 된다.”
“알겠어. 그 정도라면야 늦장 부릴 것 없네.”
오늘 가서 바이콘 신족의 저주를 완전히 풀어야 하는 거라면 사태가 사태니이만큼 지금처럼 빵에 잼이나 처 바르다가 갈 수는 없었겠지만, 얘기를 들을 뿐이라면 괜찮겠지.
〈공간이동〉 마법의 장점은 거리가 무의미하단 점이다.
이동에 필요한 시간이나 노동을 생략하고, 나는 베로니카의 마법과 신마의 마법진을 병행하며 그 날 해가 지기도 전에 성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전에 실버 클래스 승급 시험을 치러 왔었던 그 마을 근처의 성지다.
아마 비유가 아니라 표현 그대로 천년만년 쭉 이 모습 그대로였을 바이콘들의 낙원은, 당연하게도 내가 저번에 들렀을 때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마법진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바이콘들이 없었다는 점 정도일까.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도자시여.
그 대신이라는 듯 나타난 것은 군마처럼 선명한 근육질의 사내였다.
나는 그의 등장에 잠시 놀라고 말았는데, 그도 그럴 게 그는 머리에 베로니카처럼 양이나 염소를 닮은 쌍뿔을 기른 남자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바이콘이겠지만, 내 앞에서 인간형으로 있을 수 있다니?
말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고 보면 꽤 간단한 트릭이었던 것이다.
“정령화의 술식으로 빚은 가짜 육신이군요.”
─예. 바람을 모아서 만든 모습에, 룬 마법으로 제 의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나름 정밀하게 만들어 본다고 한 건데, 계도자님의 눈은 못 속이겠군요.
그는 감탄 섞인 대답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다른 종족이 상대라면 룬 마법으로 텔레파시를 쏴 봤자 말이 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저주가 안 통하는 나였기에 가능한 대화법이었다.
‘필담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예언 때문에 그런 교류 자체를 지양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마 내가 대화하기 편하도록 일부러 만든 마법일 것이었다. 즉흥적인 것인지 꽤 허술해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그게 원인이겠지.
“오늘은 이 노인네가 일족의 대표다. 마법 지식 하나는 나보다 낫지.”
베로니카는 먼저 마법진에서 폴짝 뛰어내리면서 말했다.
“나이를 많이 먹은 만큼 아는 것도 많고.”
─탈리스만입니다. 부족한 신분이나마 계도자님 앞에 설 영광을 얻어서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탈리스만의 눈에는 존경심이랄 게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저번에 방문했을 때는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게 무섭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반신반의하던 바이콘들도 이제는 완전한 신뢰를 가지게 된 듯 했다.
‘사티스의 화살촉과 발퀴리에가 그만큼 커다란 증거였나.’
나는 대충 그렇게 짐작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저번의 무례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로 더 정중해진 거겠지만, 베로니카의 경우에도 그랬듯 내가 잘난 것도 아닌데 받는 존경의 시선은 꽤나 부담스러운 것이 있었다.
우리 여신님은 그런 내 안색을 잘도 읽어내고서 쿡쿡 거렸다.
“당초에는 다들 정렬해서는 그대에게 절이라도 해야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님이 싫어할 듯 해서 내가 만류했지.”
“잘 했어. 땡큐.”
베로니카가 중간에 컷 해 줘서 다행이다.
뿔 달린 말들이 수십 마리씩 모여서 고개를 숙인다니? 재밌을 것 같긴 해도 굳이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렇게 모여봤자 몇 시간도 안 가서 해산할 것이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를 환영하는 과정이 과례하지 않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더라.
나머지 바이콘들의 염원을 모조리 홀로 뒤집어 쓴 탈리스만은 중대에 떨어진 투스타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행보관처럼 굴었던 것이다.
─약소한 것입니다만, 다른 이들의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흐흐, 뭘 이런 걸 다. 그래도 마음이 담긴 선물이니만큼 잘 받아가겠습니다. 오고가는 선물 사이에 따땃한 정이 싹 트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물론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어휴, 저는 이게 편해서요. 크헤헤헤.”
덕분에 나는 별의별 산해진미나 선물 등을 챙기고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프가 쓰던 연금술 도구 같은 건 티르시 갖다 줘야겠다.
─그 화살촉을 토대로 모든 일족의 바이콘들이 구전된 전승이며 가진 지식을 쥐어짰습니다.
탈리스만은 베로니카가 챙겨갔던 사티스의 붉은 화살촉을 가리켰다.
─그를 토대로 짐작컨대, 아마 일족을 괴롭히는 저주의 주체는 이 【중간 가지】의 차원의 틈새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차원의 틈새라……. 이계 말씀이십니까?”
“이계라고 칭할 만큼 넓은 차원은 아니다.”
베로니카는 내 질문에 대신 대답하면서 양피지 두 장을 겹쳤다.
“차원과 차원 사이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마법으로도 쉽게 개입하지 못할 은밀한 공간이지. 그 저주의 근원이란 것은 필시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계도자님께서 손에 넣으신 신물은 차원의 틈새를 열어젖히는 힘을 지녔습니다. 또 그 틈새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힘도 말입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겠군요.”
─예? 그걸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이 바닥 국룰이 다 그러니까 그렇지.
아무 문제도 없었으면 굳이 불려오지도 않았을 거고.
“그래, 어떤 문제인지 들어나 봅시다.”
─그것이…… 아주 많은 마나가 필요합니다.
탈리스만은 면목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마나가 필요하다? 간단한 듯 복잡하게 들리는 이유로군요. 베로니카가 협의 과정에 참여했다면 단순하게 많고 적은 문제는 아닐 듯 한데요.”
훌드폴크의 옥새랑, 그 옥새를 기반으로 만들어 둔 마나 저장고.
라리루라의 링링이 6호에도 적용된 기술을 끌어다가 쓰면 마나가 필요한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몇 달 정도 저축해서 한 번에 사용하면 그만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베로니카는 탄식을 흘렸다.
“도구로 마나를 늘려봤자 소용없느니라. 그것은 일신의 힘을 늘려주긴 해도, 한계 이상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지는 않아.”
“……무슨 얘기?”
“차원의 틈새를 찢어발기고, 화살을 쏴 저주의 근원을 부수는 것. 이 과정을 시행하려면 단 1명의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나는 그 결론에 왜? 라고 되묻지는 않았다.
나보다 훨씬 절박할 바이콘들이 내린 결론이다.
만약 ‘혹시 아닐지도 모르잖슴?’ 하고 반박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면, 일족의 명운을 건 해주법인데 꼴랑 이틀만에 논쟁이 끝났겠는가.
반론의 여지가 있다면 최소 몇 주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저 결론은 거의 확실한 팩트로 봐도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결론을 믿고 중얼거렸다.
“……도구를 써서 마나를 늘려봤자 한계가 있단 건가.”
옥새에 내 마나량의 10배를 모아둬도 한 번에 그 마나를 모조리 쓰는 건 불가능하다.
어디 보디빌더들이 밥을 든든하게 먹었다고 벤치 프레스 무게가 2배 늘어나던가?
존나 그런 논리라면 내 고향 지구에서 로켓을 쏘는 게 왜 대단한 업적이었겠어. 그냥 연료만 졸라 넣고 쏘면 달나라 찍고 올 텐데.
‘옛날 중국에서 의자에 폭죽을 잔뜩 달고 불을 붙여서 하늘을 날려고 했던 양반이 있었다던가.’
그 양반은 하인이 폭죽에 불을 붙인 순간 엄청난 폭발과 함께 사라져버렸다는데, 나는 그런 장렬한 폭발사산 엔딩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이 옥새가 굉장한 보물이라지만 예전보다 훨씬 성장한 내 마나통의 몇 배나 되는 양을 저장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골치 아픈 문제네. 마나량이 늘리고 싶다고 막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티스님은 내 힘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다소 보완하는 건 가능하다. 차원의 틈새에도 물리적인 거리가 무의미하지는 않으니, 최대한 그 저주의 근원에 가까이 간다면 되겠지.”
탈리스만은 베로니카의 설명에 첨언하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예컨대, 오르왈리아의 지저에 있을 몬스터를 퇴치하려면 이 성지에서부터 땅굴을 파는 것보다 오르왈리아까지 가서 파는 게 빠르겠지요. 그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바깥 세상이랑 교류하지 않는 바이콘 아니랄까 봐, 옛적에 멸망한 고대국가를 예시로 드는 것 보게. 나는 약간 웃으며 이해한 대로 읊었다.
“뚫는 게 공간의 벽이냐, 땅이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거군요.”
그 예체능 여신님이 계산을 잘못한 건 아닌 듯 했다. 사티스가 화살촉을 만드는 데 썼던 재료는 내가 구한 거고, 남아서 돌려주기까지 했으니까.
아무튼 방법은 있다고 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알아들었습니다. 마나량을 늘리고, 또 그 저주가 있는 곳을 알아내면 되는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되도록 힘을 써 보겠습니다만, 좀 걸릴지도 모른다는 건 양해 바랍니다.”
드디어 저주로부터 해방될 줄로만 알고 있었을 바이콘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탈리스만은 웃으며 대답했다.
─천년을 더 기다려도 기약이 없을 구원의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백년대계여도 감읍할 판국인데 그깟 몇 년 기다리는 게 어렵겠습니까?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겁니다. 여러분께서 절 도와주셔야 저도 차원이동 연구를 할 때 편할 것 같거든요.”
마나량이 지금의 몇 배가 되야 하는 것도 아닐 거고, 제대로 위치만 알아낸다면 어렵지 않겠지. 난 의욕을 불태우며 화살촉을 챙겼다.
“아, 맞다. 마침 찾아뵌 김에 묻고 싶은 게 조금 있는데요.”
─호, 어떤 것인지요? 저희가 감히 천공신님의 후계자 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사력 씩이나 다하실 건 없는데, 혹시 제 창의 상태를 좀 봐 주시겠습니까?”
나는 창을 팔찌에서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건 또 굉장한 무구로군요. 이크!
스릉─. 곧게 뻗은 창대를 공손하게 받아들려던 탈리스만은 내가 만류하기 전에 스스로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후! 항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창입니까? 자칫 이 정신체가 소멸할 뻔 했습니다.
“소멸하면 큰일이라도 납니까?”
─흠. 속된 말을 빌리자면, 턱이 돌아갑니다.
“예?”
─아흐레 정도는 기절하겠죠.
그딴 위험한 마법은 왜 쓰고 자빠졌어, 새끼야.
내가 얼빠져 있자 그는 빠르게 창을 관찰했다. 자기가 관찰하는 동안 내가 창을 들고 있게 하는 게 황공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몇 분 지나서 그는 확신에 찬 듯 말했다.
─크게 이상한 점은 없군요. 수많은 신비를 내포한 뛰어난 일품으로 보입니다만, 주인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뭐, 생명이 깃들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생명……? 죄송합니다만 알아보기 힘들군요. 만일 지금보다 더한 분석을 원하신다면 페어리의 성지에 가시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페어리?
나는 그 말에 베로니카의 스승인 아델라이데가 제자 바이콘 1마리만 데리고 지내는 성지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건 그 성지에서 만났던 어떤 페어리가 생각난 탓이었다.
이름이 뭐였지. 앤이었나?
내 창을 보고 창대가 불쌍하다며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빼액대던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페어리의 성지라니, 그건 또 어디입니까?”
─저희 바이콘 신족처럼 그들만의 작은 낙원을 꾸렸다고 전해들은 바가 있습니다. 아마 위치는 저 대황야 인근, 인간족의 국가로 말하는 키타이 주변일 테지요.
이런 씨팔, 황야라고?
그쪽이면 내 가짜 고향 키타이랑 유목-엘프들 천지인 땅이잖아? 내가 약간 황당함을 느끼는 걸 눈치 못 챈 듯 탈리스만은 말을 계속했다.
─예. 마침 키타이엔 마나량을 점진적으로 늘릴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 가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이런, 탈리스만!! 뺨에 벌이 붙어 있느니라!!”
그때였다. 베로니카는 별안간 동족의 노인장이 하는 말을 끊어버리면서 타오르는 가지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그녀의 눈은 지팡이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가만히 있거라! 쏘기 전에 잡아주마!!”
─버, 벌? 어차피 정신체인데 무슨 상관, 크엑!!
뻐억─!!
경망된 소리를 하던 탈리스만은 뚝배기를 맞고 기절했다. 홀로그램 영상통화가 꺼진 것처럼 정령화의 술식으로 만든 정신체도 소멸했다.
“후우, 후우…….”
동족상잔을 벌인 우리의 여신님은 넋을 빼놓고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챈 듯,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고혹적인 미소를 띄웠다.
“나의 그대여. 설마 키타이인지 뭔지 하는 곳에 갈 생각은 아니겠지?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다가 어떤 사건 사고에 휘말릴 줄 알고?”
“아니, 그, 굳이 키타이가 아니어도 평생 집에만 박혀서 살 수는──”
“남자가 자꾸 밖으로 나돌면 못 쓰느니라!! 주인님은 우리가 벌어온 돈으로 그냥 놀고 먹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느냐!!”
“웨 우리 아내님들이 남녀역전 세계의 꼴마초가 되어버린 것?”
나는 울상이 되어서 외치는 베로니카를 보면서 이마를 탁 짚었다.
쓰벌, 내 외출 금지령 아직도 안 풀린 거였냐고.
어쩐지 나 따라온 발퀴리에들이 존나 많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