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네시스 영애와의 접견일이 잡혔다.
나랑 티르시는 적당한 신분으로 그녀와 만났다. 귀족 신분을 내세우자니 불안요소가 있어서였다.
“귀족이 되셨다고요?! 거기다가 겨, 결혼?!”
물론 그게 영애님한테까지 우리의 카스트 등급 랭크 업을 감췄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인 헨네시스 영애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할 심적인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대경실색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저런 모습을 보니까 내 출세가도가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는 실감이 들어서 약간 우쭐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야 나도 사람이니 돈이며 권력 같은 게 싫지는 않단 말이지.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도, 티르시도요.”
“풍요신 맙소사……! 정말 잘 된 일이잖아!”
처음에는 황망해하던 그녀도 티르시가 예전처럼 자신과 같은 귀족 신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두 눈에 눈물 방울을 맺었다.
예전에 나한테 수도를 겨누며 입단속을 요구한 영애는 오데로 간 것이지? 감수성 넘치는 모습에 티르시도 당황스러운 듯 낯을 붉혔다.
“우, 우시는 거에요, 지금?”
“이게 안 울고 배길 일이야?! 티르! 수녀원에서 네 가문에 큰일이 났다는 얘기를 듣고서 나는 눈 앞이 핑 돌았었는데!”
“으, 그런 옛날 얘기를 꺼내면 제가 미안하다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잖아요? 그리고 따로 영토도 없는 명예 귀족인걸요.”
티르시는 쓴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아마 아르마슈나스의 성을 다시 쓰지는 못하게 될 거에요. 출신이라도 기억하라는 뜻으로 성씨는 남겨준 거였지만, 귀족으로 돌아가면 그때 당시의 가문명을 써봤자 안 좋은 일만 생길 거구요.”
“그렇게 되더라도 나한테는 쭉 티르시야! 네가 아르마슈나스의 영애건,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건, 명예 귀족이건, 언제까지고!”
눈물 고인 눈으로 티르시의 손을 붙잡았다. 살짝 당황해 하는 티르시도 부끄러워 하면서도 기쁜 듯 눈망울에 물기가 고였다.
음. 감동적이군. 나는 안 오는 게 나을 뻔 했어.
“고마워요, 마리아.”
“그것도 이제 금지! 말 높일 필요 없잖아! 옛날 수녀원 때처럼 친구처럼 지내자! 마리라고 불러!”
티르시에게 들은 바로는, 수녀원 시절이란 건 저 옛날 그녀들이 로마니아에서 귀족 여식으로서 교육을 받던 무렵의 이야기라고 한다.
내 결혼식 주례를 서 줬던 것만 봐도 알듯, 이 영애님은 정식 수녀 자격증을 가진 귀족.
‘수녀원이라고 부르지만 기독교 학교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되겠지.’
그녀들의 인연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길 졸업해서 정식 수녀 자격을 딴 게 헨네시스 영애였고, 아르마슈나스 가문이 무너진 탓에 재학 중에 수녀원을 나오게 된 게 티르시의 과거사다.
“마, 마, 마……”
하지만 그것도 한참 예전의 일. 티르시는 조금 낯설어진 소꿉친구의 거침없는 우정 어필에 무척 곤란한 듯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으으, 역시 안 되겠어요.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 할게요.”
“안 돼! 지금 당장 불러! 부르지 않으면 이 손 안 놔 줄 거야!”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 이렇게 갑자기 말씀하셔도 곤란해요!”
“억지 부리는 건 티르, 너잖아! 수녀원 시절의 넌 좀 더 빛나고 있었어! 말해! ‘마리! 오늘도 셰릴 수녀님의 스프는 참으로 밍밍하여요!’ 라고 말해!”
“그, 그런 건 10년도 더 옛날 얘기잖아요! 부끄럽게 제 서방님 앞에서 그런 치기 어린 옛날 얘끼 꺼내지 마세요!!”
그녀들은 고귀한 신분이 무색하게 목청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며 떠들었다.
그렇게 꺅꺅 소란을 피우던 귀족 아가씨들께서 그나마 진정하게 된 건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헨네시스 영애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엣흠. 추태를 보였네요, 노르드 경.”
자각이 있으면 됐슴다. 나는 픽 웃었다.
“아직 이릅니다. 정식으로 귀족이 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죠.”
“그래도 시간 문제 아니겠어요? 하지만 확실히 좀 곤란하게 됐네요.”
“뭐가 말입니까?”
“일전에 저는 티르시를 구해달라는 의뢰를 드리면서, 노르드 경께 후원자가 돼 주겠다 호언장담을 드렸었죠. 그리고 최근에서야 캐서린 양을 통해서 협력 체제를 갖춰가고는 있었지만……”
─하아. 그녀는 적잖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이제 와서는 저보다 걸출한 후원자 분도 계시고, 아직 일개 영애일 뿐인 저보다 신분으론 더 높아지셨잖아요? 이제 와서 제가 도움이 되긴 할까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떻습니까. 꼭 일방적인 후원자가 아녀도 되겠죠.”
의미를 믿는 듯 눈을 끔뻑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의식해서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집밥 백선생께서도 늘상 강조하시는 비지니스 스마일이다.
“서로 돕고 도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같은 귀족끼리 친해져서 나쁠 이유는 하등 없죠.”
브리타니아에서 귀족 간의 신분은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백작이라고 자작의 부인에게 무조건 ‘꿇어라,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등등의 만행을 부릴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신분과 자존심이란 정말로 오묘한 것.
절대황권 아래에서 신분의 고하(高下)가 정해진 나라가 아니다 보니까, 남의 집의 잘난 양반이 내 집에서 뻗대는 꼴을 좋게 보는 귀족은 없었다.
‘순순히 따를 의무가 없으니까, 영지 간의 저력 차이에 못 이기는 척 따를 뿐이라던가.’
그마저도 영지끼리 내전 한 판 뜨는 게 더 나을 것 같으면 정색하고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구조의 나라에서 맘 놓고 악수할 수 있는 동급의 귀족이 어디 흔하겠는가.
헨네시스 영애는 내 말 뜻을 알아듣고 우스운 듯 입꼬리를 당겼다.
“저희 아버님은 정정하시고, 저도 당장 급하게 영지를 이을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긴밀한 벗이 생기는 건 언제든 환영할 만한 일이죠.”
“당분간만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성 밑 도시에 귀족이 두 명씩이나 살고 있다고 아시면 헨네시스 영주께서 기함하실지도 몰라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답니다.”
놀라기만 하면 다행이지, 계열사 임원이 자기네 회사 숙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데 기분이 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
그치만…… 일단 인맥이 생겼는데 썩혀두기만 할 수는 없잖아?
“흐흐, 마침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그렇게 되서, 나는 얼마 전까지는 무릎을 꿇고 올려다 봐야 했던 신분의 영애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악수를 나누었던 것이다.
캬, 인생 참 새옹지마야.
***
마법사 길드 사르가디스 지부장, 엘프 호툴루실.
그는 오늘도 영주의 농경지에 있었다.
“영애에게 들었다. 나를 찾았다고?”
“예. 제가 출장가기 전에 뵙고 또 뵙는군요.”
“왕자가 안부 전해 달라더군.”
밀짚모자를 써서 변발을 가린 엘프는 따분한 듯 얘기했다.
그 왕자님 누님 분이랑 얘기 했으니까, 내 소식이라면 엘리자베트가 대신 전해주든가 하겠지 뭐. 나는 아직 휑한 농경지를 일별했다.
아직 꽃샘 추위가 남아 있는 계절인데 왜 여기 있는 것이지? 일하기 싫음을 암시?
“봄 밀이라도 파종하십니까?”
“아직은 아니야. 내가 쓰는 밀은 추위에 약하니.”
그럼 집에 가서 서류랑 놀아.
크롬웰한테 다 짬처리했나? 양심 어디?
“마나량을 늘리는 법을 찾고 있다더군. 동방에서 온 내 얘기를 듣고 싶은 건가?”
“그렇죠. 모든 전사의 숙원 아니겠습니까.”
“그 까칠한 영애를 구워삶다니 대단한데 그래. 아, 비아냥대는 건 아니다. 내 농경지의 일부분은 영주 것이라서 가끔 나한테도 떽떽대거든.”
호툴루실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일행을 지나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우리한테 가지 않도록 바람 방향에 맞춰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길빵충이기는 한데 역시 머가리에 개념이 박히긴 했어.
‘이 야매 중세랜드에는 길빵이 범죄도 아니고.’
그래도 울 아내님들한테 담배연기를 뿜어댔으면 내가 손수 담뱃대를 분질러줬을 건데, 그 정도의 양심은 있는가 보다.
크롬웰은 승진할 찬스를 받은 셈 치고 버텨주길 바라자. 요즘 들어서 묵념할 일이 많네.
“농경지인데 구획 정리가 잘 돼 있네요! 경관이 멋져요♡”
“응. 전에 노르랑 왔을 때는 의뢰 때문이었지만, 그때도 꽤 즐거웠어.”
오늘의 WBI(Wife Bureau of Investigation)는 프랑이랑 라리루라.
못난 남편 놈이 어디 못 가게 따라온 그녀들은 데이트라도 하듯 소풍 도시락과 꽃단장을 하고 온 참이었다. 바쁜 것도 아니고 잠깐 놀다 갈 예정이기도 했다.
호툴루실은 그 말에 표정변화 없이 연기를 훅─ 뱉었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군. 취미일 뿐인데.”
날 따라온 라리루라가 무슨 아가씨처럼 꾸미고 손에 든 양산을 돌리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농사가 취미로 하실 만큼 간단한 노동은 아닐 텐데요. 저도 그 수고를 아는 만큼 충분히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귀찮은 세파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속 편하지.”
“아, 어느 정도 공감이 가네요.”
우리 집의 텃밭을 열심히 정리하다가 온 프랑이 쓴웃음을 지었다.
프랑이 기르는 건 채소 정도였는데, 출장 중에 망가진 마당의 모습에 은근 상심한 듯 보이더라. 그래서 다음부터는 발퀴리에를 파출부로 1마리쭘 남겨두기로 내심 결심한 참이었다.
지금까지는 남들한테 보여주기 힘든 물건이 꽤 되서, 집을 청소하거나 해줄 파출부를 고용할 수가 없었거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너스레를 떨었다.
“엘프 하면 동식물을 사랑하는 종족 아닙니까. 누가 압니까? 피 속에 흐르는 본능이 위안이라도 받는 걸지도 모를 일이죠.”
“꽤 고리타분한 관점이군. 내 동족들이 풀쪼가리 한 잎 키우지 않게 된지도 수백 년이 넘었는데.”
뎃?
이런 쓰벌, 맞다. 여긴 내가 아는 양판소 이세계랑은 이상하게 매치가 안 되는 곳이었지. 내가 말문이 막히자 양산을 돌리던 라리루라도 납득했다.
“엘프족 하면 원예(園藝)보다는 기마술이죠.”
“기마는 좋지. 말들은 머리가 좋아서 의심이 깊지만, 그만큼 마음을 터놓고 친해지면 개나 고양이들 못지 않게 애교가 많거든. 충성심도 두껍고.”
“망아지는 웬만한 애완동물보다 귀엽긴 해요!”
“맞네. 뿔을 만져주면 흐이이이잇 하는 게 무지 귀엽지.”
“……뿔?”
동물을 좋아하는 우리가 공감하자 호툴루실은 ‘이 새낀 뭐라는겨’ 따위의 뜻이 드러나는 표정을 짓다가, 혼자 뭔가 착각한 것처럼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 동족들은 초목 우거진 숲에서 황야로 떠난지 천 년 가까이 지났어. 그러고도 예전 같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 과한 거겠지.”
“넹?”
“혼잣말이었다. 개의치 마라.”
호툴루실은 밀짚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서 말했다.
“내 고향의 엘프들은 식물을 기르기보단 태우는 걸 더 선호하지. 황야의 풀은 아주 잘 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