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를 이어가던 노트에 햇빛이 들이닥쳤다.
고개를 들자 건물에 가려진 동쪽의 지평선에서 햇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기어코 해가 뜨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달인의 오감으로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밤새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아침 순찰을 나서는 경비대의 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찌푸렸다.
‘시부랄, 묻고 싶은 게 이것 말고도 많은데…… 내 일을 분담해줄 발퀴리에들은 영혼이랑 대화할 줄 모르고.’
영혼을 수확하는 기능은 있는데 대화는 못하는 사신이라니.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참 알 만 했다.
물론 지금 단계에서는 영혼 회수 능력도 의미가 없다.
레티티아처럼 어디 구름 위의 궁전에다가 저장할 수도 없잖은가. 또 영혼을 사역하는 짓거리는 좀 흑마법사 같고 말이다.
나는 밝아오는 하늘을 확인하며 욕심을 누르고 살인자의 망령, 하오취의 심문을 끝냈다.
절대 프랑의 눈초리가 무서워서 쫀 게 아니다. 꼴마초는 공포 따윈 모른다고. 알겠지?
“야, 너도 슬슬 일어나.”
나는 프랑의 미동도 없는 표정과 눈빛에서 슬쩍 도망치듯 영혼들을 성불시켜버리고, 다나가 묶어둔 부잉썬의 가슴을 걷어찼다.
─퍽!
“크억!”
적당한 위력의 킥에 부잉썬은 기침을 토해내며 일어났다.
나는 그 씹새끼의 눈이 몽롱한 기색에서 헤어나오기 전에 뿌연 눈깔 앞에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노트를 펼쳤다.
“이거 보이지? 내가 받아쓰기 시험을 친 게 20년도 더 되서 그런데, 혹시 채점 좀 해 줄래?”
부잉썬의 눈깔은 노트와 거기에 적힌 자기네의 정보를 찬찬히 훑었다.
거기에 적힌 건 그들의 인적사항과, 내가 들은 모든 내용이다. 일부러 암호화하지 않고 알아볼 수 있게 적었던 건 이걸 위해서였다.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부잉썬의 눈에는 경악과 불신이 서렸다.
“……내가 기절한지 얼마나 지났지?”
“1시간 조금 안 됐을 걸. 하늘 보면 알잖아?”
아직 따끈따근한 부하들의 시체를 둘러본 그는 내 말이 블러핑을 위한 구라가 아니라는 걸 확신한 듯 했다.
어떻게 아냐고? 이 새끼 낯짝에서 식은땀이 막 쏟아지던데?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그럴 만도 했다.
뻗대던 걸 보면 이 새끼의 부하들도 다 고문 훈련을 받았을 텐데, 고작 1시간만에 미주알 고주알 다 불어버린 것 아닌가.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상상도 안 가겠지.
눈을 질끈 감았던 부잉썬은 결국 같잖은 도발만 내뱉던 입에서 숨겨왔던 사실을 실토해냈다.
“……그 성물이라는 물건은 귀쟁이 놈들이 얼마 없는 기병을 물릴 만큼이나 중요시하는 물건이다. 우리 진련국의 북벌군보다 성물의 탐색에 집중할 정도로.”
염병. 그럼 엘프들도 여기 온다는 소리야?
나는 무협지를 찍던 엘프들이 우리 집을 향해서 말을 내달리는 끔찍한 광경을 상상하곤 몸서리를 쳤다. 상상만 해도 좆 같네 진짜.
“그래서 상층부는 일부 병력을 그 성물의 탐색 및 회수에 돌렸다.”
“그 탐색조가 바로 느그들이다?”
“……그렇다. 엘프들을 고문해서 얻어낸 정보와, 그 성물이 나르메르-나일에서 브리타니아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네놈이 성물의 보유자라는 걸 확신했지.”
아주 실시간으로 GPS 역할을 했나 본데. 나는 혀를 차며 품을 뒤졌다.
“적국의 군대보다 중시했댔지. 성물을 획득하면 군사적 이점이 크거나, 종교적인 신념이겠군. 뭐, 이 이파리라면 어느 쪽이어도 이상할 것 없어.”
─팔랑. 나는 석판에서 이파리를 한 장 꺼냈다.
엄청난 시간이 흘렀을진대, 마치 방금 막 따낸 듯한 싱싱함.
내가 세헤테피브라의 피라미드에서 손에 넣었던 세계수의 새순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허접이긴 해도 실력이 나름 뛰어난 전사여서일까. 부잉썬은 어린 잎이 가진 마나의 풍요로움을 깨달은 듯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렇군. 그만한 성물이라면 북벌군의 존재보다 더 신경 쓰일 만 하겠어.”
“글쎄다. 너나 나나 사용법도 모르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겠지.”
나는 이파리에서 눈을 못 떼는 그의 리액션에 픽 웃었다.
“니들, 혹시 내가 엘프들 대신에 이걸 얻으려고 이 먼 서방대륙까지 날아온 그 놈들의 부랄 친구 쯤 되는 놈으로 여기는 건 아니지?”
“……………….”
씨발, 맞았군. 착각도 유분수지. 나는 오만상을 썼다.
“미안한데, 나는 엘프족한테 좋은 감정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건 니들 나라도 마찬가지야. 물론 내가 니 조국을 염병맞을 똥통 국가로 보고 있는 데에는 느그들의 스토커 짓의 지분이 크고.”
이파리를 챙겨넣으며 나는 혀를 찼다.
색안경을 벗고 봐도 그다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 엘프들.
국익을 위해서 애먼 사람을 죽이는 특수부대를 운용하는 나라.
‘극한의 이지선다네. 양쪽 다 좆 같은데?’
유니크 아이템 좀 챙겨왔을 뿐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파워 싸움에 엮이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하건 따라오는 이득 만큼이나 위험성도 동반하겠지.
존나 씨발, 이젠 내가 가만히 있어도 트러블이 먼저 찾아오고 지랄이네.
평화로운 인생을 살기가 이렇게 힘들다.
“……우리들은 상행으로서 정당하게 입국했다. 작전을 위해서 필요한 위장 신분이었지.”
그때 갑자기 부잉썬이 말했다. 우리가 지들한테 협력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아예 적으로 삼겠다는 듯 뇌까리는 말투였다.
“그러니 네놈은 타국에서 정당하게 운영하는 표국의 상인을 일방적으로 습격하고, 더욱이는 살해하기까지 한 것이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변발 하체부실남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미친 놈처럼 웃었다.
처음부터 그런 계책을 짜 왔던 모양이다. 혹시 자기네가 실패해도 다음 작전으로 이어질 발판을 쌓으려는 짓이겠지. 음험한 작전이로군.
“이 도시의 주인은 선택해야 할 거다! 이방인인 네놈의 안전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을 지언졍 내 조국 바이츠니아와의 은원! 어느 쪽을 더 중시할지 말이야!”
***
“이상으로, 간첩 부잉썬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땅땅. 사르가디스의 재판관은 망치를 두들겨 재판을 끝냈다.
새벽에 저 새끼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던져넣은 게 꼴랑 이틀 전.
타국의 간첩에 대한 재판이 고작 이틀만에 열렸는데, 증거가 완벽하다며 무기징역 땅땅 로나로나 땅땅이었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별 날치기 재판도 다 있군. 이건 나루호도도 항소 못 하겠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무기징역?!”
재판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정신이 혼미하던 부잉썬은 날치기 재판에 뺑소니를 당하자 게거품까지 물어가며 악을 썼다.
하지만 판사는 냉엄했다. 저 양반 눈빛 단호한 것 봐, 아주 반해버리겠어.
“타국의 첩자는 최소 사형이오. 징역으로 끝난 걸 감사히 여기시오.”
“내가 첩자라고?! 증거가 어디 있어서!”
“피고가 몰래 밀반입한 독극물이 여기 있잖소. 부하들도 자백하고서 수치심에 자결했고.”
그렇게 말하며 작은 병을 흔드는 판사.
저 독병이요? 티르시가 하룻밤만에 만들어주었습니다.
티르시 말로는 저 독은 마시면 혀가 좀 저리고 끝나는 미약한 마비약이라지만, 어차피 오늘 안에 폐기되고서 서류 상으로만 존나 쎈 맹독으로 남을 것이었다.
부잉썬의 부하들은 절대 자백하지 않으려는 듯, 경비병들이 살짝 건성으로 감시하니까 잽싸게 지들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수고와 찝찝함을 덜었구만.
나는 그저 부잉썬과 친구들의 간첩질을 사전에 못 막았다는 이유로 성문을 지키던 경비대원들이 쪼인트를 까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독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서……!”
판사의 답정너식 답변에 부잉썬의 눈깔이 나를 향했다.
뭘 봐, 응애. 북호는 아가 마초야. 아가 마초는 촉법소년 버프를 받아야 해. 내 눈물이야말로 가장 큰 증거야. 꼬우면 본국에서 변호사 부르던가.
일이 돌아가는 걸 알아차린 듯, 부잉썬은 인공 미스릴 수갑을 부술 기세로 마구 날뛰었다.
“너, 너! 내 짐에 독을 숨겨넣었구나! 판사 놈도 전부 한패였어!”
아아니, 이걸 맞추네.
이게 도전 골든벨이었으면 기립박수 나왔겠다. 우승, 부잉썬! 우승상품은 사르가디스 깜빵 호텔 영구 무료 이용권(해약 불가)겠는걸?
‘그치만…… 선동과 날조로 승부를 걸어온 건 님들이잖슴?’
물론 저 마비독이 나랑 깐부인 헨네시스 영애님께서 증거로 회수한 짐에 숨겨넣은 거긴 하지만,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바이츠니아가 지랄하면 어떡하냐고?
흐으음…… 혹시 거기 대빵 성함이 징으로 시작해서 칸으로 끝나나요? 그게 아니면 황야를 넘고 강과 바다까지 건너서 이 나라에 오지는 못할 것 같은데.
애초에 부잉썬과 친구들의 죄로 끝나버리면 더 지랄할 명분도 없고 말이다. 우리 중화사상 친구들, 외국에 내정간섭이라도 해 보싈?
“이럴 순 없어! 이건 사기야! 사법 살인이라고!”
응 니애미, 응애.
나는 통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만 깔깔댔다.
감히 좆도 아닌 미-개한 이세계 군바리 새끼가 눈 뜨고 코 베어가는 현대의 헬-사법 제도의 매콤함에 적응한 불맛의 민족 한국인에게 덤비다니. 제 분수를 알아야지. 깔깔깔.
“눈 뜨고 당할까 보냐! 놔! 본국에 사신을 보내 줘!!”
“가만히 있지 못해? 어디 감히 영애님도 계시는 앞에서!!”
“저 키타이까지 사람을 보내라고? 간첩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군!!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높이면 몽둥이 찜질을 해 주겠어!!”
“놔라!! 이거 놔!! 이, 이럴 수는 없── 끄엑!!”
“내가 경고했지!! 목소리 높이지 말라고!!”
“조용히 하세욧-!!”
“끄엑, 껙!!”
─퍽!! 퍽!!
어젯밤 나한테 처맞고 밤새 옥살이를 해서일까. 발광하던 부잉썬은 실력이 무색하게도 그보다 훨씬 실력이 후달리는 경비병들에게 제압당해 끌려갔다.
나는 그렇게 끌려가는 그들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왜, 장미는 빨간색이잖아? 그러니까 피에 흠뻑 젖는 미래도 일종의 장미빛 미래가 아닐까?
아무튼 잘 지내라고. 독이 해독되다가 만 몸으로 옥살이를 며칠이나 버틸지는 모르겠다만.
‘니들한테 심문할 건 충분히 다 들었으니까.’
저 병신은 어젯밤 지 심장이 심장이 10분 정도 멈춘 건 알라나 몰라.
나는 품 속의 노트를 쓰다듬으며 흐뭇해 했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필기한 『심법』의 요령을 떠올리며 흐뭇해 한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어젯밤 잠을 설친 의미는 있었다. 인맥의 가치도 재확인했고 말이다.
‘뭣하러 선동과 날조에 반격할 작전을 짜고, 별 염병을 다 떨어가며 머리를 쓰냐? 쫌팽이의 잔꾀 따위야 그냥 권력으로 밀어버리면 그만인데.’
권력의 맛은 참으로 달콤했다.
나도 빨리 귀족 취임하고 싶네, 진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