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애님을 뵈러 왔습니다.”
건방지게도 나랑 내 아내들을 노린 씹새끼들을 인맥과 권력의 힘으로 끝장내고서, 나는 영애님을 만나러 이동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티르시가 날 따라왔다.
방을 지키던 경비병은 얘기를 들은 것처럼 바로 비켜줬다.
생각해 보면 헨네시스 영애는 호위를 동반하는 걸 거의 못 봤네. 첫 만남 때를 생각하면 본인이 꽤 강한 것 같은데, 어느 정도려나 몰라.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상담실로 들어갔다.
아버지인 죠테루 폰 헨네시스 영주를 설득해준 깐부 영애님은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상 부자들은 마실 게 없으면 대화를 못 하는 고질병을 가진 게 틀림없다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노르드 경.”
“아닙니다. 영애님께서 도와주셔서 살았습죠.”
“뭘 이 정도로요. 뻔한 결과에 시간 낭비하는 건 질색이라서. 와서 앉으세요. 티르, 너도.”
헨네시스 영애는 픽 웃고서 자리를 권했다.
나랑 티르시는 거리낌없이 가서 착석했다. 이야, 끕이 비슷해지고 나니까 이렇게 편하네. 여윽시 사람은 출세하고 볼라비아.
─달그락. 영애는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나저나 그 자들도 무척 한심하더군요. 꼴에 간첩이라면 저희들이 친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듯 했어요.”
“소문만 갖곤 저희가 이만큼 친하다는 건 알기 힘들걸요?”
물론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영애를 만난 횟수는 적지 않다.
적당히 부풀려지고, 왜곡된 소문도 거리에 돌고 있겠지. 하지만 우리랑 영애가 깐부라는 것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을걸?
그냥 내가 잘 나가는 모험가니까 의뢰를 맡기려 불렀겠거니~ 하는 소문 정도더라고. 동물 드론을 총괄하는 캐서린 발(發) 정보니까 확실하다.
‘내가 귀족이 될 거란 소식도 아직 안 퍼졌고.’
기존의 친분? 권력자가 토사구팽을 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빠른 손절 및 우디르급 태세 전환은 오히려 정치인의 덕목이란 견해도 있다. 무고한 사냥개만 병신 되는 일이지만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부잉썬과 친구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 뿐이지. 설마 헨네시스 영애가 내 아내의 뷰랄 친구라니. 지들이 상상이나 했겠어?
영애는 찻 향기가 섞인 단숨을 토해냈다.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인가요?”
“저희도 대응책을 강구해야죠. 아, 여기서 말한 ‘저희’에 영애님과 영주님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 재판 건을 도와준 것으로 충분합니다.”
괜히 헨네시스 영주 가문에 불똥이 튀도록 두고 싶진 않았다.
사르가디스 시민의 목숨이나 피해를 책임지기도 싫고.
이런 건 내 선에서 커트하는 게 제일이다.
“후우…… 사정을 묻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더 피를 흘리지 않고 풀어낼 방법은 없을까요?”
영애는 그 점을 걱정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곤, 그런 자신이 부끄럽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난 너스레를 떨며 내 모가지를 쳤다.
“대화로 쇼부를 보기엔 그 놈들이 저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던데요. 사람이 너무 잘난 것도 문제인가 봅니다.”
“같은 키타이…… 아, 동방의 사람인데도요?”
의아해 하는 그녀에게 나는 픽 웃어보였다.
“그러면 영애님께서는 그 자식들이 브리타니아 인이었으면 살려주셨을 겁니까?”
“……아하.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대체 왜 오리엔탈리즘 옐로 바나나끼리 죽이려 들 수가 있지~ 하는 의문은 얕은 생각이다. 인종 문제는 주판 알을 움직이지 못하걸랑.
칭챙총이란 단어는 인수분해하면 ‘칭’과 ‘챙’과 ‘총’으로 나뉜다.
내 고향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도 피부가 누렇다는 이유로 우리는 모두 칭구~ 마자용! 하며 사이 좋게 지내진 않잖은가.
스시를 김치에 싸서 먹어봐라 해! 같은 소리는 조금 인종차별적이잖아? 반대로 이웃 국가끼리 잘 지내는 나라가 더 드물겠다.
‘당연히 키타이 인들도 지들끼리 사이가 나쁠 만 하지.’
게다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못 죽일 이유는 또 뭐겠는가.
“아무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원체 삭초제근할 은원이 많은 몸이라, 이깟 트러블 정도는 예행연습으로 쳐도 될 듯 하거든요.”
“어머. 제가 그만 무서운 분과 친분을 맺어버린 걸까요?”
그녀도 농담으로 돌려주는 걸 보면 걱정은 않는 모양이다. 대범하기도 하셔라. 역시 차기 영주로서 습득한 군주로서의 자질은 어디 안 가는 건가?
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맡겨만 주십쇼. 여름이 오기 전에 전부 해결해 두겠습니다.”
어디 올 테면 와 보라지. 아니지, 내가 먼저 가 주마.
인맥빨! 권력&재력! 미스릴 파워!
이걸로 그 누구든 나 강북호를 능가하는 키타이 인은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야만한 무림인들이여! 참교육 해 주마! 나의 『지혜』과 『힘』 앞에 엎드려라!
이젠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다, 이거에요!
***
“때려죽어도 안 돼요, 선배♡”
“뎃?”
집에 돌아온 나는 싱글벙글 웃음이 만개한 우리 아내님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역시나 우리 노르드 일가는 웃음이 그치질 않는 가정이다.
어쩐지 영애랑 얘기하는 동안 한 마디도 없었던 티르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 어깨를 꽉 잡으며 속삭였다.
“밤에 말도 없이 몰래 빠져나가다가 걸려놓고 또 어딜 가겠다고요?”
시발,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대로라면 황야를 휘어잡는 ‘대 칸’ 노르드가 엘프와 무림인들 사이에서 종횡무진하며 극한의 이윤 창출과 성과를 내 오는 거였는데?
그런데 이래서야 병신들의 뚝배기를 깨주는 둠 슬레이어가 아니라 어벤져스한테 아굴창을 처맞고 응아아앗 거리는 닥터 둠 같잖아. 끄악─! 리펄서 빔! 끄악─!
“저 놈들, 실패한 걸 알면 계속 올 텐데? 여기 사람들한테 피해가 오면 어쩌려고?”
“노르드가 감시망을 늘리면 해결될 문제네요.”
“조기에 발견해서 퇴치하자꾸나. 나도 도우마.”
그렇네! 오프툼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동방 쪽의 분위기를 살펴달라고 해도 되겠네!
나는 엘리트 대갈통을 풀 가동해서 반론했다.
“어, 음, 계속 기다리고만 있으려고? 걔네들이랑 어떻게 쇼부를 보든가 해야 이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지 않지 않을까?”
“기다리면 엘프들이 찾아올 거라구 생각해.”
“그 엘프들을 전령으로 써 버리면 되겠네요~!”
말빨 봐. 우리 아내님들이 연합해서 다굴해대면 달인 1~2명 정도는 가볍게 잡겠네.
한 마디 하면 2마디가 돌아오니까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논리에 기반한 반론 따위가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말씨름하다 누구 한 명이 울기라도 하면, 다 연기인 걸 뻔히 알면서도 게임 끝이잖은가.
아니 시발 그보다 베로니카야. 니 지금 등 뒤로 숨긴 거 안약이지? 그치? 가장의 세레브한 권위는 어디로 가버린데스?
“니 권위야 옛적에 명계 갔지.”
“이런 씨발, 왜 그걸 좀 더 일찍 말해주지 않은 것이지?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걸 떨구고 왔잖아. 세계수 이파리 같은 게 아니라 가오를 챙겨왔어야 했는데.”
“가오가 아니라 과오겠지. 이게 오른팔도 없는 게 까불어.”
“노르 팔, 아직도 창고에서 냉동보관하고 있는 거 알지?”
“와! 냉동-사람 앞다리살!”
그래 시발, 내 오른팔이 아직도 푸줏간에 매단 돼지 다리처럼 우리 집 창고에 쳐박혀 있었지.
내가 이마를 탁 지자 프랑은 다정하게 웃으며 내 겉옷을 벗겼다.
어느새 내 하체에 착 달라붙은 라리루라는 벨트부터 공략하고 있었다. 이 흐름은 심각하게 낯이 익다. 나한테 착정 봉사를 할 생각이지! 야겜 하렘 엔딩처럼!
나는 또 의지가 흐지부지될 것을 직감하고 눈을 감으며 기도했다. 도와줘! 오딘, 교수 슬레이어…!
“──계시나요, 노르드 님!!!”
그때였다. 한 줄기 광명이 비추듯, 낯익은 기차 화통 소리가 내 귀를 때린 것은 말이다.
기적은 있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희번뜩 떴다.
“손님이네! 미안, 얘들아! 잠깐 나가 봐야겠다!”
“발퀴리에, 부탁하마. 대신 데려와 주겠느냐?”
“앗, 그 앤 이름이 미호크래. 노르가 지어줬어.”
“손님 맞이는 나랑 티르시한테 맡겨. 3분 안에 쫓아내고 온다.”
“선배는 팔의 후유증으로 약 드시고 잠든 걸로 해 주세요~♡”
신은 뒤졌다.
오딘 야발련아!! 왜 발퀴리에가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 명령도 듣게 만들었냐고!! 죄없는 마초를 실수로 이세계에 보내버렸으면 A/S도 제대로 해 줬어야지!!
나는 그렇게 벨트를 촤르륵─! 하면서 페이탈리티하게 뽑아내는 라리루라의 모습에 모든 걸 포기하고 말았다.
“노르드 님의 팔이? 그렇다면 제 차례군요!!!”
하지만 위대하신 오딘은 지혜의 신이었다.
나의 기도가 오딘의 망령에게 닿기라도 한 걸까. 자기 손으로 얻어온 『심법』으로 내공을 호로록 빨리기만 기다리던 나에게 구원의 빛이 도달했다.
─덜컹!
아내들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일 여인은 화려하게 등장했다.
남의 집 현관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히는 왼손. 그 약지에는 반지가 반짝. 담대하게 뜬 눈은 돈 놓고 돈 먹는 일류 상인의 그것이었다.
“저, 셀레나 헤르마이온! 소중한 사업 파트너께 선물을 가져 왔답니다!”
그녀는 부채를 펼치며 자기 입매를 가렸다.
“의수도 좋지만 역시 진짜 팔이 제일이죠! 포션 연구가 드디어 결실을 맺어서, 간신히 엘릭서라고 할 만한 회복 포션이 완성된 참──”
─멈칫.
방실대며 보고하던 셀레나는 한 발 늦게 현관의 사태를 살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자마자 아내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겉옷과 바지를 벗겨지는 꼴마초. 쪼그리고 앉아서 내 바지 단추를 풀다가 멈칫한 라리루라.
이때다 하고 안약을 넣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베로니카. 되도 않는 변명으로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던 다나&티르시.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며, 나는 나대로 눈을 굴렸다.
문의 틈 밖으로 마당의 정경을 힐끔.
마당에 멀뚱하게 서 있는 낯선 남자와, 어쩐지 평소의 5배 정도 눈동자에 빛이 없는 네페르티티.
그리고 우리 꼬라지를 보며 쑥덕대는 셀레나의 호위들.
대충 알았다, 너희들의 사정.
네페르티티가 여기까지 안내해 줬군.
쪽팔려서 죽고 싶어졌다.
“이거 실례.”
─탁! 셀레나는 부채를 손바닥에 쳐서 접었다.
활짝 웃는 미소가 존나 일류 장사치의 귀감이다.
“내일 저녁에 다시 뵙죠.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냐 씨발, 가지 마. 너 가면 우리 장사 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