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22화 (621/1,009)

“모, 모근의 사멸은 외면으로 보이는 부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대의를 위한 일이다! 머리털 정도는 필요한 희생이야!!”

대머리 엘프는 핏대를 세우며 일갈했다.

오죽 반론하고 싶었으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바꾸기까지 했다. 발음은 어색했지만 일단 브리타니아의 언어였다.

하지만 그 반박은 단호하기에 더욱 처량했다.

“그렇다고 수백 년을 대머리로 살겠다는 거냐? 그건 에고(Ego)야!”

나는 광기로 가득 찬 허세에 몸을 떨며 외쳤다

“수명도 긴 놈이 탈모어(Hair loss-person)로서의 삶을 택하다니, 미래의 네가 타타르니아의 황야보다 불모(不毛)인 민둥민둥 대가리를 보며 흘릴 눈물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냐!”

저 새끼는 엘프 아닌가. 만약 저놈의 바람대로 나를 죽이고 생환한다고 치면, 앞으로 최소 수백 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놈은 그 삶을 대머리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머리로 보내는 천 년의 삶.

그런 승리를 정말 이겼다고 볼 수 있을까? 그건 차라리 저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인 일로 저 씹새끼는 장수종족의 피를 타고 났음에도 저런 선택을 했단 말인가? 제정신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 모근에다 농약을 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머리 엘프는 귀를 뻘겋게 만들며 말했다.

“……도망칠 기회가 있었어도 싸웠을 것이다. 내 목숨이 세계를 바로잡기 위한 반석이 된다면 그 이상 가는 기쁨은 없다.”

나는 그 개소리가 귀를 파고든 순간, 말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했다.

이 새끼는 광신도였다. 머리털을 전부 잃어도 지 뜻을 굽히지 않는, 민간요법의 광신도!

목숨을 걸며 믿음을 간증해도 그러려니 했을 것 같은데, 수백 년의 대머리 라이프를 받아들인다는 실감 나는 고행이 반대로 그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이해시켰던 것이다.

수백 년을 맥반석 대가리로 살게 되는 것도 감수하는 신념!

그것은 조금만 방향이 엇나가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도 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가혹한 새끼가 남에게 유한 경우는 보기 힘들잖은가.

약물 치료법을 혐오하는 반지성주의자들이 자기 자식마저 홍역으로 죽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해했을 때, 내 심경은 그저 참담한 동정심과 갈 데 없는 분노로 가득 찼다.

나는 민간요법을 맹신한 끝에 머리털마저 잃은 안티 백서에게 물었다.

“……네놈은 그리도 인류가 쌓은 지혜와 문명이 미운가.”

자기 머리카락이 변발처럼 빠지는 중에도,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치료법을 고집할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황의 소란을 뚫고 꽂히자 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숨겨 왔던 비밀을 들켜 버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렇겠지. 엘프들 중에서도 의학마저 거절하는 극한의 반지성주의자는 드물 것이다. 어떤 의미로 안아키의 삶은 동물의 왕국과도 같을 테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저 따끈따끈한 대머리는 분명 타타르니아에서도 상당한 급진파일 듯 했다.

“증오로 벼려 낸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봐라. 그 추한 꼴이 되어서까지, 인류가 피와 눈물로 지은 지성의 성채를 부수고 싶은 것이냐?”

나는 수의대생이지만, 그래도 아는 사실이 있다.

의학의 역사란 사실상 미개함의 역사다.

과거의 인류가 독이 든 음식을 처먹고, 두뇌를 치료하겠다고 전두엽을 도려내거나 아이를 잠재우겠다며 모르핀 스프레이를 쓰던 야만의 기록!

사람의 피를 잉크로 삼아서 쓰인 역사가 곧 의학이었다.

그런데 저 씹새는 그 의학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 놈의 입맛에 맞춘 망상과 신념으로, 합리와 이성을 무시하는── 문과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의 멍청함으로 말이다.

“……크흐흐흐. 피와 눈물? 피와 눈물이라고?”

모근을 대가로도 병신같은 신념을 잃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낮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래, 충분한 피와 눈물을 흘렸지. 세계수마저 잃고 황야까지 헤매어 가야 했던 우리다! 여기서 타협한다면 고향도 아닌 땅에 쏟아진 일족의 피와 눈물은 구정물이 되고 말 것이야!”

“천 년도 전의 얘기다. 안개에 덮인 알프헤임이 불타오르던 날, 너는 느그 애미 뱃속 수정란조차 아니었을 텐데.”

머리에서 김을 피우던 놈이 흠칫 놀랐다.

“……네놈이 어떻게 그날에 대해서 알지? 동족상잔과 배신으로 같잖은 기록의 명맥마저 끊긴 인간 놈이, 어떻게?”

“기록이 없어진들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지.”

“헛소리 집어치워라! 궤변이다! 그럼 네놈들이 우리 선조의 터전을 불태웠던 죄는 잊어도 된다는 것이냐!”

“그건 내가 한 짓 아닌데? 당연히 내 조상님이 한 짓도 아니고.”

깐프 특) 내로남불 연대책임 존나 좋아함.

내가 딱 잘라 말하자 그 새끼는 입을 벌렸다. 왜? 꼽냐? 그치만 나는 니들 마을에다 불 지르고 군고구마를 구워 먹은 기억은 없는걸?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어느 식인종의 왕을 떠올렸다.

“……잃어 버린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호르샤. 저주받은 얼스터의 후예의 왕.

그 새끼도 자기 선조의 땅과 문명을 되찾으려는 놈이었다.

그래도 어느 파라오의 꿈에서 본 엘프들은 그딴 씹트롤 새끼들에 비하면 그나마 사람다웠다. 일단 무고한 생사람을 처먹거나 죽이진 않았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저 타타르니아의 엘프들도 잘못 없이 고향을 잃은 피해자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수가 되었지.’

잘못된 일은 어떤 핑계가 있어도 규탄 받음에 마땅하다.

그러니까 내 결론과 분노도 그때 나눴던 문답과 같았다.

“너희가 인류의 문명을 거부하는 안아키스트건, 정당한 은원의 복수귀건, 자기 좆침반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조질 자격은 없다.”

사실 거창한 대의명분까지도 필요 없었다.

내가 예전의 개좆밥 석사 놈이었다면 어땠을까.

논문을 닌자당해도 분을 삭혀야 했던 그 시절의 나였다면, 나랑 우리 아내들은 저 새끼들의 손에 골백번도 더 뒤졌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적반하장으로 야부리를 털어? 씨팔럼이 뒤질라고.

“그러니,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는 않겠다.”

애초에 의학을 거부하는 원시회귀가 소원이라면 혼자서 산골짜기에 처박혀서 살면 되잖나.

대부분의 자연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놈들은 그러지 않지?

이유는 하나.

“안아키는 이상한 놈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

어느 유명 영화 감독의 말이다.

저들의 비이성적인 독선은 문명을 퇴보시킨다.

자기만 뒤지면 될걸, 혼자 못 죽는다는 듯 자폭해서 남들까지 휘말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감염된 테란과도 같았다.

아마 뇌에 좆 박은 게 원인으로 엘프 좀비 비슷한 게 되었겠지.

따라서 감히 엘리트를 자처하는 나 강북호는, 저 미친 안아키스트 새끼의 대갈텅텅 지랄염병을 눈 감아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역시 무의미한 대화였군.”

─까드득.

대머리 엘프는 뱀파이어처럼 창백해진 안면에서 눈만 쌍심지를 켰다.

“노르드. 네놈들 인간은……”

검을 잡은 그의 몸이 뱀처럼 웅크렸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물이다.”

─웅웅. 룬을 새긴 유목민족의 칼이 낮게 울었다.

수백 년 어치의 여생을 일순간에 불태운 대머리 엘프는 그 본질의 사악한 심성을 빼고 보면 언뜻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창의 리치를 활용하는 상단세를 잡았다.

“견해의 차이로군. 하늘 아래 존재 자체가 죄악인 생물은 교수와 모기밖에 없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살기에 분노를 섞었다.

분노로 좁아지려는 시야를 이성의 고삐를 씌워 조종한다.

거기까지는 서로 같았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

그 차이란, 나는 분노를 힘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슈와아아아아아아악……!!

창을 쥐는 손의 악력이 늘어난 것이 실감됐다.

야수회귀의 출력은 내 빡침을 연료로 더 높은 스테이지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이미 나와 저 대머리의 수준 차이가 명확했기에 그 성장은 더욱 의미가 컸다.

하지만 죽음도 불사하는 놈한테 그건 의미 있는 변수가 아니었다.

─파팟!

맹진하는 대머리 엘프의 칼날에 마나가 모였다.

화살보다 훨씬 빠른 속도 탓일까. 그건 마치 말 위에서 생명을 수확하는 사신의 낫질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저 독라멸진이란 점혈과 병행하는 걸 염두한 검술인 걸까. 그 새끼의 칼이 품은 마나는 주인의 실력을 한 단계 이상 웃돌았다.

내가 디아볼로 놈을 반쯤 죽여놨을 때랑 똑같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죽이기 위한 칼날!

필생즉사의 공력을 품은 쾌검은 내 방어를 뚫고 날 죽일 위력이 있었다.

『갈매기(Gull)의 시대에 멸망 있으라!!』

엘프가 외친 순간, 내 속도를 낮추는 룬의 디버프가 사라졌다.

그 찰나의 변화가 내 거리감과 간격을 망쳤다. 레이싱 중에 차량이 멋대로 가속한 것처럼, 속도가 붙은 상태였기에 내게도 적잖이 위협적인 수였다.

물론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나는 이 무식한 자살특공을 다양하게 파훼할 수 있었다.

발퀴리에와 연습한 【게르튀르】의 고등 초식을 써서 가뿐히 걷어내거나, 몸을 피하며 마법을 쏴제끼면 그만이었다. 저 놈들이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를 지배하는 번민은, 좀 전부터 이 놈들을 상대로 힘을 빼고 싸웠을 때부터 계속 이어지던 선문답이었다.

강함이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방식에 연연하지 않고 강함을 쌓았다.

마법이건 무술이건 개의치 않았다. 필연적으로 중구난방인 성장이 됐지만, 그래도 그렇게 얻은 힘은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는 것보다 빠르게 내 실력을 성장시켰다.

내가 추구하는 강함이란 ‘생존의 조건’이었다.

솔직히 평생 싸울 일이 없다고 확신했다면 동기 부여를 못 하고 골드 클래스조차 못 됐을 것 같다. 야생 동물에게서 도망치는 연습을 하지 않는 현대인들처럼.

내게 싸움은 수단의 일종이었지, 뛰어난 강함을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다치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이겨 내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직 아내들이 다치지 않는 게 지상목표였다.

하지만 아내들은 그런 나를 보며 마음을 다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사랑해 주는 여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었다!

통렬한 후회가 척추를 꿰뚫었다. 팔 한 짝 잘린 새끼가 ‘너희들은 다친 데 없지? 다행이다’라면서 껄껄 웃는다? 시발, 나라도 감금시켜 놓겠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아내들의 몸이다.

내 몸에 생긴 찰과상 1개마저 아내들의 것으로 여겨라.

그게 하렘충의 숙명이자, 꼴마초의 의무이니까.

─번뜩!

한 줄기 깨달음이 먹을 묻힌 붓처럼 내 심상을 수놓았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는 말이 맞다면, 정말 강한 자는 반 병신이 돼 가며 이기는 자가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살아나는 자일 터였다.

최대출력으로 오러권을 전개했다.

야수회귀의 마나와 전신에서 뿜어진 오러는 내 평소 전투태세의 4배 가까이 부피를 늘렸다. 나를 노리던 칼날이 머리에 꽂혔다.

─쿠콰아아아아앙!!

그리고 그때, 내 오러권이 반응장갑처럼 폭발해 공격을 튕겨냈다.

부딪힌 순간에 오러를 공격이 역방향으로 뿜은 것이었다. 엘프의 검은 내 머리카락 한 올 자르지 못하고 지 주인의 팔과 함께 꺾였다.

내 창끝이 멈췄다.

엘프도 나도 방어를 궁리하지 않았기에, 엘프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는 내 창도 한참 전에 공격을 마친 뒤였다.

야만과 야만의 부딪힘이었지만, 무기를 쥔 손이 펼치는 무학(武學)이 달랐다.

푸확─!!

창이 빛살을 펼쳐내자, 엘프의 허리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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