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23화 (622/1,009)

─쿠당탕! 핏줄기를 뿜어낸 엘프가 쓰러졌다.

나는 창을 털어내고 팔찌로 바꿨다. 워낙 빠른 격돌이었기에 애초에 묻은 피도 별로 없었다.

“크학, 커헉…….”

테케테케가 된 엘프의 칠공에서 피가 쏟아졌다.

나는 일대를 둘러보고 싸움이 끝난 걸 확인했다.

우리 아내들 쪽에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보는 엘프 무리도 숫자 차이 덕분인지 화살이 어깨에 꽂힌 놈이 있을 뿐이다.

‘귀찮은 새끼들.’

이제 영혼을 심문하고, 마나도 흡수해야 하는데 저 새끼 때문에 번거로워질 것 같았다.

어차피 뒤진 새끼들한테서 정보를 캐낼 건데, 걍 쫓아낼까?

“아아, 현존자시여…….”

그때 내 손에 토막난 엘프가 중얼거렸다. 놈은 이 잠깐 사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그 나는 끈질긴 모습에 인상을 썼다.

“뭐야. 아직도 안 뒤졌냐?”

생명력을 싸그리 싹삭 써 먹고서도 워낙에 가진 마나가 많아서 그런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미루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씹새야. 더는 안 아프게 해 줄 테니……?”

나는 마무리를 짓고자 몸을 돌렸다가 흠칫했다.

그 새끼의 눈깔에서 지네 다리 같은 게 우수수 돋아났던 것이다. 엘프는 입에서도 또다른 벌레의 다리 같은 것을 뱉어내며 고하믈 내질렀다.

“……당신의 아이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오로지 새로운 시대만을 바라나이다!!”

우지직……! 대머리 엘프의 몸이 늪처럼 역겨운 빛깔의 마나 덩어리로 변했다.

직감이 이성보다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쿠오오오오오─! 팔찌로 변한 창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베로니카 말이 맞다면, 이제 이 창은 나와 일심동체다.

그렇다면 마나가 신체를 강화하듯이, 창이 가진 항마력을 내 마나로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창을 앞세우며 룬 마법으로 사선으로 실드를 쳤다.

그리고 그때, 죽어가던 엘프의 육신이 멘토스를 넣은 콜라와 같이 부풀며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방금 막은 검보다 더 강한 위력이었다. 감소한 마나의 양을 보면, 자칫 방심한 상태로 맞았으면 엘릭서를 한 병 더 구해야 할 뻔 했다.

“……노르드!!”

“그대여!!”

“괜찮아, 멀쩡해.”

네페르티티와 아내들이 당황하면서 달려왔지만, 나는 예각으로 끼운 실드와 창의 항마력으로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단지, 자폭 때문에 대머리 엘프의 혼이 일말도 남지 않았다는 건 좀 문제였다.

“……인간 폭탄이라.”

매캐한 연기가 피어나는 폭심지를 걸어나오며 나는 혀를 찼다.

다른 엘프들보다 2~3배는 마나가 많았던 놈의 마나를 흡수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데, 이 새끼는 틀림없이 다른 놈들을 선동하던 새끼였다.

‘분명 다른 엘프보다 아는 게 많았을 텐데.’

반대로 생각하면, 저기 굴러다니는 다른 엘프의 혼을 심문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뻔할 뻔 자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야, 더 알 법한 녀석에게 묻는 수밖에.

슈와아아아아아─.

죽은 엘프들에게서 피어난 구신의 마나가 몸에 흡수되는 걸 확인하고서, 나는 말에서 내려와 혼자 다가오는 낯선 엘프를 마주했다.

다른 사람을 물리고 혼자 대표로 왔다.

가능한 온건한 분위기에서 대화할 생각이면서, 또 빡쳤을 게 뻔한 우리를 설득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저 새끼가 우릴 죽이려 든 놈들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엘프는 적절한 거리에서 멈추고 머리를 숙였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실례합니다. 타타르니아의 엘프, 마흐잔이라고 합니다.”

“노르드다. 아내들 소개는 안 해도 되겠지.”

나는 야수회귀를 끄고 흙을 털어냈다.

“설명해.”

“……어디부터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흐잔은 명료한 요구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도입부를 고민하는 PPT 발표자의 그것이라기보단, 발주를 잘못 넣은 신입사원이 깨지기 전에 변명을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괜히 칼침을 맞은─피부에 닿지도 않았지만─ 내 머리를 만져보던 티르시는 그게 마음에 안 든 듯 인상을 썼다.

“저희가 습격을 당한 건 전부 여러분들 탓인데, 이유 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기 힘든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사과가 잦은 새끼네. 사회생활 좀 해 본 놈인가.

마흐잔은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짐작하고 계실까 모르겠으나, 저희는 세계수의 부산물을 얻고자 온 이들입니다. 물론 노르드님께 그만한 대가를 드리며 거래를 치르길 원합니다.”

“습격당한 것에 대한 사죄비까지 포함해서?”

“예. 썩어도 일국의 사절이니까요.”

싹싹해서 좋군. 나는 거의 편집증처럼 내 몸을 점검해대는 라리루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고서 엘프의 시체들을 가리켰다.

“저 새끼들은 뭐고, 왜 우릴 노렸는데?”

“……저희와 같은 타타르니아의 엘프들입니다. 바이츠니아에게 세계수의 부산물을 탈취해 오라는 사주라도 받은 것이겠죠.”

“꽤 단적이군. 증거라도 있나?”

“그런 게 아니고서야 같은 타타르니아의 엘프가 저희를 배반하고 독자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확신마저 가지고 말하는 마흐잔. 나는 픽 웃었다.

“저 놈들, 중간까지 너희랑 같이 온 일행이지? 의외로 너희끼리도 일치단결은 안 되는 모양인데.”

“……송구합니다.”

“자꾸 사과만 하지 말고.”

내가 건성으로 말하자 마흐잔은 머뭇거렸다.

“같은 타타르니아의 엘프들끼리도 이렇습니다. 거기다 다른 동족이 얼마나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지도 파악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고요.”

좀 맥락없는 서두였지만 나는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나보다 절박할 놈이 굳이 말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껄이는 걸 텐데, 쿠사리를 멕여가면서 맥을 끊을 것도 없었으니까.

“듣기로는 동쪽으로 이주하지 않고 서방대륙에 남은 엘프들과, 그들의 자손도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 많지는 않지만 있기는 하지.”

예르나 년도 타타르니아 출신은 아니었잖은가.

그년이야 알프헤임의 멸망 이전에 태어난 하이 엘프 겸 슈프림 할망구이긴 한데, 그런 건 지금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패스.

동방 출신이 아닌, 알프헤임 멸망 이후 서방에 남은 엘프.

그리고 그 후손들.

브리타니아 같은 나라에서 보이는 엘프는 거의 그런 경우였다.

숫자도 많은 편이 아니고, 호툴루실 같은 귀화 엘프는 더 적다.

그 희귀성 탓에 내 논문을 쌔벼간 예르나 년이 게르마니아의 대학에서 어떤 엘프족 학부생 하나를 구워삶기도 했던가.

그래도 그녀가 예르나 년의 실종소식을 알려준 덕분에 망령도시에서 그 천하의 좆프년을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존나 인생이란 새옹지마인 것이다.

마흐잔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저희들이 동방으로 이전한지도 천 년. 이미 1세대의 장로님들은 거의 귀천(歸天)하셨고, 황야에서 나고 자란 저희는…… 솔직히 산림보다 황야가 더 익숙합니다.”

식물보다 유목이 익숙한 엘프라.

살짝 웃기긴 했지만, 그럴 만도 했다.

지구에서만 해도 전쟁을 겪어본 세대와 후손은 같은 과거사를 두고도 인식이 차이가 갈리곤 하지 않았던가.

알프헤임이 불타오른지도 천 년.

오래 사는 엘프들이라도 3~4세대 정도는 바뀔 시간이다. 그야 세대 갈등 정도는 생겼을 거였다.

“바이츠니아에 매수될 배경은 있다는 얘기인가. 그쯤 되면 타타르니아가 아니라 유목연합이나 바이츠니아 태생의 엘프, 하프 엘프도 있겠는데.”

“……예. 모든 엘프가 알프헤임의 명맥 아래에 하나가 되지는 못했으니까요.”

마흐잔은 씁쓸하게 긍정했다.

매국행위만 아니라면 제 살 길을 가는 게 죄는 아니다.

타타르니아를 나와서 타국에 귀화한 엘프의 자손들이 자기 정체성을 ‘알프헤임의 후손’이 아니라 ‘유목연합 몽골리아인’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지.

내 고향 지구에서도 있던 교포들처럼 말이다.

마흐잔은 축 쳐졌던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대로는 엘프족이 사분오열하며 쇠퇴만 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노르드 님께서 얻으신 세계수의 부산물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긍심의 심볼로 삼기엔 좀 후달릴 텐데?”

“충분할 겁니다. 타타르니아에 새로운 세계수가 자라날 테니까요.”

뚱하니 듣던 나도 과연 저 얘기에는 좀 놀랐다.

‘세계수를 새로 기르겠다고?’

왜? 아니, 어떻게?

허황되게도 들리는 말이었기에 내 인상은 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아는 세계수가 그렇게 가볍게 심자 말자 결정할 만한 나무는 아닐 것 같은데.”

“예. 물론 진짜 세계수는 아닙니다. 알프헤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던, 세계수의 마나를 흡수하는 나무를 타타르니아에 세울 계획입니다.”

세계수의 마나를 흡수하는 나무.

‘세헤테피브라의 피라미드에서 봤던 그건가.’

같이 듣던 티르시의 눈빛에도 이채가 서렸다. 그 커다란 나무라면 확실히 상징으로 삼아도 될 만큼 위용이 있긴 했지.

“작금의 동족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며, 한 데 뭉치지 못하는 것. 저희는 그게 그들에게 마음의 지주가 되어줄 고향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마흐잔은 초원의 거름이 돼 버린 엘프들을 쓴 약초를 씹은 사람처럼 보며 말했다.

“그러니 알프헤임의 상징을 재현하려고 합니다. 부산물에 깃든 마나를 녹여서, 상징이 될 나무에 접목시키고, 진짜 세계수의 마나에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거죠.”

“가장 중요한 진짜 세계수의 뿌리는 찾았고?”

이 세상의 세계수란, 말 그대로 이세계 전체에 뻗은 나무다.

니플헤임에서도 봤던 그 세계수야 【중간 가지】에도 존재하긴 할 텐데, 찾을 순 있을까? 당연히 그걸 염려하는 나였지만 마흐잔은 자신만만했다.

“찾을 것까지도 없습니다. 저희 선조는 애초에 세계수가 뿌리가 있는 곳을 찾아 피난했으니까요. 그게 바로 현재의 타타르니아가 있는 곳이죠.”

아, 그러셔.

‘대충 앞뒤 맥락은 알겠군.’

세계수의 부산물─새순─을 얻으려고 하는 타타르니아.

그걸 눈치채고 빼앗으려는 바이츠니아.

그리고 중간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 완전히 다른 목적의 누군가.

나는 자기 몸속에 벌레를 기르던 대머리 자폭 엘프를 떠올리며 대략적인 추리를 끝냈다. 그리고 주판을 두들기다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예?”

“세계수의 부산물을 가진 게 우리란 걸 어떻게 알았냐고.”

마흐잔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고대보다 예전, 신들이 통치하던 시대. 일부의 엘프 신관들은 【중간가지】에 자라난 세계수의 뿌리를 관리하는 신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관의 혈맥은 당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혈족이죠.”

그 얘기에 나는 피라미드에서 봤었던, 세계수의 뿌리를 감싼 마법진과 그것을 관리하던 엘프들을 떠올렸다. 완전히 구라는 아니라는 거군.

“그래서, 그 혈족의 힘으로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세계수의 위치를 기척으로 알 수 있죠.”

마흐잔은 먼 동쪽을 잠깐 바라보고서 말했다.

“그리고 얼마 쯤 전. 저희는 서방국가 방향에서 기존에 확인된 것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수의 기척을 감지했습니다.”

“새로 자라난 뿌리라기엔 너무 약하다. 그러니 아마 부산물일 테고, 너희 목표에 딱 맞는 소재가 될 듯 해서 일단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냈다. 뭐, 이런 얘긴가?”

“예.”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얘기였다. 구라도 아닐 듯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피식 웃었다.

“처음 설명을 요구받았을 때랑 비교하면 대답이 꽤 빠르군. 꼭 미리 생각해 놓은 대답처럼.”

“……예?”

“니가 일부러 말을 안 한 게 있잖아.”

팅─! 반지를 하나 꺼내서 손가락으로 튕겼다.

마흐잔은 당황하며 그것을 받아냈다가, 그 안에 음각된 특이한 문양을 발견하고서 화들짝 놀랐다.

그 반지는 바이츠니아의 살수들에게서 챙긴 물건이었다.

대놓고 가지고 다니는 문양은 없었지만, 그 새끼들도 명색이 공무원이니 신분증 정도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각자 다른 물품에 문양을 새겨뒀다던가.

첫 암습 때 영혼을 심문하며 알아낸 사실이었다.

“눈치를 보면 그게 뭔지 알아보는 모양이군.”

마흐잔은 대머리 엘프처럼 핏기를 잃었다.

“부산물의 위치만 알아낸 것 갖고는 모자라. 그 부산물을 가진 게 누군지 특정한 수단이 있겠지. 그게 아니면 이 넓은 대륙에서 우리를 콕 찝어서 이런 들판까지 쫓아올 수 있을 리가 없어.”

이 새끼가 수백~수천km의 거리를 씹고 우리의 위치를 특정했다?

그게 가능하면 드래곤볼 레이더 뺨치는 세계수 레이더라고 불러줘야겠지만, 뭐 어쩌면 진짜로다가 그랬을 수도 있겠지.

이세계 판타지의 초능력에 현실성을 따지기에는 나도 판타지 짬이 꽤 쌓인 몸이었다.

‘근데 얘네보다 바이츠니아 살수들이 먼저 우릴 찾아냈잖아?’

그 씹새들은 엘프 포로를 고문해서 캐낸 정보로 우리 집 앞을 얼쩡거렸다.

엘프들이 찾는 부산물이란 게 세계수의 잎이란 것까지는 몰랐어도, 그걸 가진 사람이 나라는 건 100% 확신한 상태였다.

그것도 황야를 넘어오기 전부터 말이다.

“너희는 주먹구구식으로 황야를 건넌 게 아냐. 처음부터 나를 특정하고 찾아온 거지.”

의식해서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생각해도 섬칫하게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와 분위기를 얼음장처럼 굳혔다.

“허튼수작은 작작 부리고, 허심탄회하게 가자.”

나는 소매를 매만지듯 팔찌를 쓰다듬었다.

눈이 장식이 아니라면, 이 팔찌가 자기랑 대충 엇비슷한 실력의 배신자들을 도륙내던 창이 변한 물건이라는 건 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흐잔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한 번만 더 구라 까다 걸리면 뒤진다.”

한 번 더 개수작을 부리려다 들키면, 세계수의 부산물이고 뭐고 바이츠니아 잡놈들에게 던져 주고 싶어질 것 같거든.

그 왜, 강 건너 불구경은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컬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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