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25화 (624/1,009)

불편하도록 조용한 마차를 타고 복귀하길 며칠.

사르가디스로 돌아온 나는 우리 아내님들을 설득할 각오를 다졌다.

세상이란 원래 그랬다.

마흐잔의 이실직고가 그랬듯, 믿음이란 행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우리 아내님들이 내 말 뿐인 다 믿어준 결과가 샹크스 엔딩에 명계 리스폰이었잖은가. 벌써 말로 설득할 단계는 지나버렸다.

그러니까 나도 아내들의 믿음을 사려면, 이제는 행동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이번이 정말 마지막 설득이다.’

믿음을 얻는 데에도 기회가 필요하다.

컨디션 난조로 시험을 망친 학생이 다시금 자기 실력을 보여주려면, 한 번 더 시험을 치뤄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지금은 ‘이번엔 진짜 진짜라니까? 믿어 봐’라며 회사 동료에게 우량주를 추천하듯 야부리를 털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딱 1번. 타타르니아행을 허락받기만 하면 돼.’

이번에 엘프들이랑 거래를 하고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면, 어느덧 바닥을 쳐버린 아내들의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회복한 신뢰를 기반으로 조금씩 믿음을 쌓아갈 수 있다.

반대로 이번에도 내가 싸우다 다쳐서 사지절단 오체불만족 딜도맨이 돼 버리면?

혹시 집에 있는 엘릭서랑 의수까지 내다 버리고 평생 날 침대에서 살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번 타타르니아 행에는, 남편의 권위와 자유가 걸려 있는 것이다!!

“……야, 강북호. 너 잠깐 여기 앉아 봐.”

“미안나잠깐팔부터좀고치고올게!!!!!”

무표정한 다나가 의자를 가리키자, 나는 인터넷 썰 등에서 보았던 유부남으로 살아남기 총집편을 떠올리고 적전도주를 택했다.

아내가 성을 붙여서 부른다는 건, 곧 남편에게 죽음의 표식이 박혔다는 것……!

신뢰를 되찾을 기회?

옘병, 그것도 아내들부터 설득할 수 있어야 뭐 얘기라도 되지.

아예 타타르니아 근처에도 얼씬 못 하게 됐다간 내가 믿음을 회복할 기회도 없다. 출장을 허락받을 각이 도무지 안 나오니 일단 튀는 수밖에.

아내들의 분노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도록 하자.

“그래서 말입니다, 크롬웰 씨.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게 일하던 사람을 불러서 하실 말씀입니까?”

크롬웰은 내 팔을 건네주며 어이없어 했다. 거 시발, 보관하던 팔 좀 달라고 했을 뿐인데 자기가 먼저 나왔으면서 뭘 바쁜 척을 하고 자빠지셨대.

“아니, 중대한 문제거든요? 화난 아내를 달래고 설득하는 법, 뭐 괜찮은 거 없을까요?”

나는 절단면에만 마법이 남은 팔을 빠게트처럼 끼며 말했다.

크롬웰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픽 웃었다.

“역시 선물이나 아부가 가장 낫지 않겠습니까? 사모님들이 원하시는 걸 알면 더 좋겠죠.”

“……제가 아무 데도 안 가는 걸 제일 좋아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뭐, 외통수군요. 다른 기혼자 분께도 여쭤보심이 어떠신지요?”

쓰벌, 도움 안 되긴.

하긴 멀리 나갈 일도 없는 직장인한테 물어볼 게 따로 있지. 나는 투덜대며 나만큼 출장이 잦은 기혼자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멀리 나가는 걸 아내들이 영 싫어하던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일 좀 하러 갈 뿐인데 뭐가 그렇게 꺼려지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후보 2, 유부녀 클라라는 내 얘기를 듣자마자 씹극혐하는 반 친구에게 뜬금포 고백을 받은 여학생처럼 길길이 날뛰며 공감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다 보면 외국에도 좀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요! 그래서 말인데요, 사장님! 저는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로마니아에 출장 갈 수 있나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진정 좀 해요, 시발.”

아무렴 물어봤던 내가 병신이지.

이 아주머니도 따지자면 기다리는 쪽이 아니라 기다리게 하는 쪽이었다. 애1미 씹, 내 교우관계가 이렇게 씹창이었다니. 어째 하나도 참고가 안 되냐.

“의수는 거의 해제해놨어요. 자택에 돌아가시면 끌러내리고 치료하시면 되겠죠.”

“고맙읍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그래서 로마니아 출장은요?”

“……일단 맡은 일부터 열심히 하세요. 조만간 듀나미스 공방 명의로 판매금이 들어오면 장비에 투자할까 생각 중이니까.”

“꺄아아아아앗♡!! 사장님 최고에요오오옷♡!!”

씨발, 오지 마. 나는 사장이고 댁은 직원이야.

나는 탭댄스를 추며 달려드는 클라라를 아련한 눈빛으로 피해냈다.

이 아줌마는 몸이 금속으로 된 사이보그가 고백하면 진짜 바람 피워버릴 것 같다. 이마에 마인드 스톤이 없어도 되겠지. 울트론 님, 그립읍니다….

‘그밖에 기혼자가 또 누구 있지?’

당장 만나볼 수 있는 지인 중에선 여관 주인인 도르카랑 베이냐 씨 정도인가.

프랑이 예전에 묵던 여관의 주인, 베이냐 씨는 여쭤보나 마나 프랑이 싫어하면 가지 말라고 하실 게 뻔하니까 기각.

‘그러면 도르카인가. 걔도 출장을 나가는 직업은 아닐 텐데……’

그래도 숙련된 유부남 선배에게 화난 아내를 달래는 테크닉을 전수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불확실한 기대를 품고, 예전에 묵던 여관 ‘샘의 쉼터’로 향했다.

“……아, 노르드.”

그런데 도르카를 부르기 전에, 점심을 다 먹고 쉬고 있던 듯한 네페르티티랑 마주쳤다.

날 보자마자 어딘지 기쁜 듯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데 그걸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일단 정지.

네페르티티는 나랑 1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딱 멈췄다. 말이 좋아서 1미터지, 한팔도 완전히 못 뻗을 거리다. 여전히 거리감이 너무 가까운 아가씨였다.

“엘프들한테 가? 준비하면 돼?”

네페르티티는 고개를 모로 꼬며 물었다.

아마 내가 자기를 보러 온 줄 알았나 보다. 난 그 수줍은 착각을 감히 정정하지도 못하고, 그런 그녀의 말에 조금 놀라며 되묻고 말았다.

“준비라니, 설마 같이 가시려구요?”

“……안 돼?”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네페르티티.

표정변화 없이 이렇게 감정이 솔직하게 전해지는 것도 진짜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니면 내가 그만큼 여자의 기분을 읽는 능력이 늘었던가.

그녀의 슬픔을 읽은 나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물론 같이 가 주시면 든든하긴 하겠죠! 하지만 위험하잖아요?”

“위험한 건 알아.”

“……그걸 잘 아시는 분이 굳이 왜?”

“걱정되니까.”

네페르티티는 얘기하다 말고 날 정면에서 빤히 바라봤다. 약간 오래간만에 보는 듯한 네페르티티 특유의 기행이었다.

저번에 박물관에서 은근슬쩍 호의를 어필한 뒤, 은근히 나랑 눈이 마주치는 것마저 피하려는 듯이 굴던 그녀였는데 말이다.

“네가 다치면 싫어. 그러니까, 데려가.”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녀.

속이 꽉 들어찬 돌직구가 묵직했다.

어……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없으면 네페르티티의 복수도 난항을 겪을 테니까.

물론 그런 헛소리는 인지부조화에 불과했다.

난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당혹스러울 만큼 예상 밖의 기습이었지만 내 입은 대갈통의 혼란이랑은 별개로 좔좔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냈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죠. 지금 출발하는 건 아니니까 또 뵈러 오겠습니다.”

“또 언제?”

“……크흠. 되도록 빨리요.”

“알았어.”

이거 진짜 어색하네. 네페르티티는 내 겸연쩍은 대답을 듣고서 부루퉁하게─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었다─ 말했다.

“저번 일로 조금 생각한 게 있어.”

“저번 일이요?”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당연히 셀레나 때문에 현관에서 생긴 오해다.

근데 그게 지금 나올 만한 화제는 아니지 않나? 내가 무심코 반문하자 네페르티티는 자기 왼손의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나 별로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

“예?”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나 별로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

“……옙. 분명 일행이 1명 정도 늘어도 문제는 없겠죠.”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다시 말하는 것 봐.

영어 교재냐고.

“그럼 기다릴게.”

─쪼르르. 네페르티티는 여관의 계단 쪽으로 쏙 올라가선 얼굴만 내놓고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다른 삶을 알려주겠다고 한 건 너니까.

그렇게 속삭인 네페르티티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생각도 못한 강적이었다. 중의적인 말이 쉼없이 이어지는 게, 우리 사차원 아가씨도 말수가 적을 뿐이지 말빨이 후달리지는 않는 모양.

“엉? 노르드 아냐. 뭐하러 왔냐? 술 사러?”

내가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자 그제서야 나타난 도르카.

설거지라도 하다 온 듯 손을 닦는 그 새끼에게 나는 목 위만 돌려서 물었다.

“……야. 아내한테 용서를 빌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뜬금없이 와선 무슨 개소리야?”

“뭐긴 뭐야, 씨발. 유부남 선배한테 한 수 배우러 온 거지.”

그는 그것만 들어도 대충 알겠다는 듯 낄낄대며 말했다.

“싹싹 빌어라. 어차피 10년, 20년씩 같이 살면 서로 잘못을 안 하고 살 순 없거든. 익숙해 지는 수밖에 더 있겠어?”

“쓰펄, 그게 다야? 존나 허접한 방법이네.”

“결혼도 연애랑 똑같다.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할 때는 존나 쉬워 보인다는 점에서는. 애초에 누가 용서받으려고 하는 사과를 좋게 보겠어? 니가 아내들한테 베풀어 온 사랑을 믿어 봐.”

도르카는 애도라도 표하듯 성호를 긋고 신실한 사제처럼 말했다.

“널 사랑하니까 화를 내는 거라면, 널 사랑하는 만큼 이해도 해 주겠지.”

업보를 감내하고 희망회로를 돌리라는 소리군.

과연, 노련한 유부남다운 조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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