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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어.”
나는 의수의 정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원래 같았으면 우르르 몰려왔을 아내들은 거실 소파며 의자에 앉아서 묵묵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시키지 않아도 나는 아내들이 비워둔 자리에 앉았다.
거기까지는 가족회의 시간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분위기가 적잖이 무겁단 것. 다나는 팔짱을 끼고 말없이 있다가 눈을 떴다.
“팔부터 고치자. 네가 장난칠 때마다 서늘한 손이 툭툭 닿는 것도 어지간해야지.”
알겠다는 뜻으로 끄덕거린 나는 오른팔 의수를 끌러내고 엘릭서를 테이블에 올렸다. 뜸 들일 것 없었기에 왼손으로 병마개를 따고 입에 부었다.
굳이 상처 부위에 뿌리지 않아도 됐다.
약사가 복용량과 적절한 용법을 아는 것처럼, 난 프리모르의 손가락을 고칠 때 이미 엘릭서의 힘을 환부에 이전시켜본 경험이 있었다.
츠즈즈즈…….
예전에 대충 붓고 땡이었던 때랑 달리 용암을 끼얹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거칠지는 않다. 어릴 적에 한약인지 소주인지를 먹고 위가 타는 듯 하던 느낌과 비슷했다. 환부를 빼면 다치지 않은 상태라서 약효가 남아도는 걸까.
엘릭서를 흘리며 몸 속 장기 등등을 거쳐서, 별 심각성은 없는 부진 등을 치료하고 오른팔의 접합부로 흘러들어갔다.
오래된 환부가 살짝 찢어지며 새살이 돋아났다.
쯔즈즈즉…!
비현실적이고, 또 보기에 따라선 수술 장면처럼 징그러울 수도 있는 광경!
빛이 환부를 뒤덮지 않았으면 눈 뜨고 못 봐줄 재생 과정이었는데, 아내들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열기에 찬 시선으로 그 과정을 목도했다.
“후…….”
약 냄새가 풍기는 숨을 뱉어내며, 나는 연결된 오른팔을 까딱거렸다.
‘쓰벌, 다 나았네.’
팔뚝을 연결하면서 돋아난 새살은 햇볕에 타지 않아서 하얬고, 또 애기 피부처럼 깨끗했다. 마치 이 부분에만 팔찌를 감고 선탠한 것 같다.
다른 피부의 색이랑 안 맞아서 눈에 띄려나.
알게 모르게 입을 삐쭉대던 라리루라는 삐진 척 구는 것도 잊고 환희하며 말했다.
“선배, 다 나은 거 맞죠? 그쵸?”
“어. 멀쩡해, 이제. 엘릭서도 약간 남았네.”
약효를 제대로 활용해서 그런가, 엘릭서가 조금 남았다. 내가 그걸 흔들거리고 있자 티르시가 툭 흘리듯 말했다.
“잘 챙겨두세요. 타타르니아에서 다칠지도 모르잖아요.”
멈칫하고 고개를 들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래도 이 지랄을 해 놓고 또 나가겠다고 구는 남편을 향한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도르카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아뇨. 앞으로는 안 다칠 겁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뿔을 뽑아버리자. 나는 나은 팔로 엘릭서를 굴리며 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었어. 다치는 건 나고, 너희는 몸 성하게 있길 바랐는데, 그건 가족을 생각하는 듯 굴면서도 결국 내 생각만 했던 거야.”
“……응.”
“나만 다쳤을 때 너희가 느낄 기분을…… 약간 쪽팔리는 표현을 쓰자면, 마음의 상처는 생각 안 했던 거지. 이렇게 보면 별 못난 남편도 다 있네.”
어떤 의미로, 아내들의 구속은 진짜 구속이랄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들은 내가 생각을 바꿔먹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해 봤자 눈치를 주는 게 다였고.’
내가 명계에서 돌아와서 지난 생활을 돌아봤을 때, 그녀들은 의견을 모아서 내게 제시했다.
이제 위험한 짓 말고, 우리 복수 같은 건 생각 말고 행복하게 살자고.
근데 그렇게 부탁하는 아내들이 어디 강권하는 기미라도 있었던가?
‘전혀 없었지.’
내 결정이 무슨 절대적인 거라도 되는 것처럼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제발 아무 데도 가지 말라며 울기만 했어도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돼갖고 평생 갇혀 살았을 텐데, 내 성격을 잘 알기에 오히려 그렇게 설득하는 걸 피한 것이었다.
진짜로 험악한 부부끼리는 가스라이팅으로 상대방의 생각이나 인생관 자체를 자기 입맛대로 고쳐쓰려고 들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에 비해, 우리 아내님들 순진한 것 좀 봐라.’
누가 다들 연애경험 전무한 전직 처녀 아니랄까 봐, 못난 남편을 욕하지는 못할 망정 한다는 짓이 ‘성심성의껏 봉사하고 헌신해서 서방님이 바깥에 눈길을 주지 않게 하기’라니?
짝사랑하는 시골 중학생들도 이렇게 순한맛 애정공세는 안 하겠다.
─이래도 집에 있기 싫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이래도?
─귀찮은 일들은 전부 우리한테 시켜도 되니까, 곁에만 있어 주면 안 돼?
딱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무슨 조선시대 열녀들도 아니고,’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옵고.
애절한 만류도 이쯤 되면 국어교과서에 실어도 되겠네.
기둥서방도 결국 서방님의 일종이다.
방식이 좀…… 19금 야설 같긴 했는데, 그래도 우리 아내들은 나를 향한 사랑과 존중을 한시조차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안 그랬으면 내가 이런 고민을 하지도 못했을 거고.’
눈치도 못 챈 상태로 향유하던 아내들의 애정을 새삼 자각한 나는, 못난 남편다운 씁쓸한 자책을 침과 함께 삼켜서 목울대로 넘겼다.
“나는 너희가 다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은데, 그렇다고 내가 다치면 너희가 마음 아프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어려운 것은 늘 실천일 뿐.
“아무도 안 다치면 돼. 나도, 너희도.”
─찰랑. 엘릭서를 흔들었다.
마시다 남긴 절세의 포션.
이게 곧 내 성공과 잘못의 심벌이었다.
능력 있는 남편이 손에 넣은 재산과 업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못난 남편이 착해빠진 아내들을 가슴 아프게 만들고 말았던 증거니까 말이다.
“ᛒ(Berkanan).”
나는 마나를 듬뿍 담아서 병에 룬을 새겼다.
엘릭서 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름다운 액체가 든 유리 공예가 되었다. 원체가 귀한 포션이라 병 자체도 튼튼하니까, 이걸로 진짜로 상징(Symbol) 삼아서 집에 장식할 수 있겠지.
나는 그 유리 공예를 프랑에게 건넸다.
“약속할게. 다시는 거기에 남겨둔 엘릭서를 쓸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엘릭서는 중상자를 치료하는 기적의 포션.
그러니까 이건 내 맹세였다.
앞으로는 절대로 크게 다치지 않겠다는 맹세.
“다시는 싸우다가 다치는 걸로 속을 썩이는 일은 없을 거야. 믿어 줄래?”
“……한 번도 안 믿었던 적 없었어, 바보야.”
프랑은 현대인 감수성을 듬뿍 담은 유리 공예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유리 공예는 살짝 기울이면 엘릭서가 매끄럽게 이동했다.
하지만 그렇게 천변만변 하면서도 절대 밖으로 넘치지는 않는다.
깨지지 않는 한은, 언제까지고.
“어허, 프랑. 또 또 울려 그런다. 뭐 대단한 거 했다고 울먹거려.”
“훌쩍…… 아니야아, 안 울어어…….”
“아니기는. 하여튼 옛날부터 눈물만 많아서는.”
나는 하렘충의 7가지 도구, 그 3번인 손수건을 꺼내서 프랑의 눈물을 닦아줬다.
에고, 그래. 울어라. 우리 프랑은 애기야. 애기는 펑펑 우는 게 건강한 거다.
“……하,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만. 우리 중에 누가 말빨로 널 당해내냐.”
다나는 기분이 다 풀렸는지 맥 빠진 것처럼 축 늘어지며 말했다.
턱을 괴며 고개를 돌리는 옆얼굴과 귀가 불에 덴 듯 새빨갰다.
“좆 같네, 진짜. 백날 투덜대고 꼽 주면 뭐하냐? 목소리 깔고 몇 마디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홀라당 넘어가갖고 칠랠래 팔랠래인데.”
“흐흐. 사랑은 표현이고, 표현은 연출이란다.”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다였던 새끼가 뭐라는 것? 하여튼 먼저 반한 게 죄지, 시발.”
“씨… 불… 아다한테도 순정이 잇따….”
다나야, 니가 그딴 말투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 알간?
“네, 다음 쥬직폭력배.”
“개또라이 언어유희왕 같은 년…….”
고향에서 봉이 김선달의 영혼 같은 게 씌였나. 고스트 섹드립왕이여, 아주.
“흐흥♡ 저는 오래간만에 선배의 멋있는 모습을 봤으니까 됐어요~. ……그런데 선배? 혹시 엘릭서 남는 거 또 없어요?”
“훌쩍…… 이건 거실에 두고 장식할게…….”
“그거 좋구나. 헌데, 다치는 것 외의 일로는 또 속을 썩이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부러워 죽겠단 듯 프랑을 쳐다보는 라리루라와, 기가 막힌 듯한 베로니카.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씨익 웃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생각해 봐. 얌전하게만 살면 그게 어디 너희가 반해버린 강북호냐? 이 업계에서 캐릭터성 변경은 중대 사항이라고.”
“그건 그래요. 저희 성격이 바뀌려면 세상이 한 번 멸망하기라도 해야죠.”
“도대체 무슨 업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제가 늦장 부리는 사이에 아내가 슉슉 늘어버렸는지는 알 것 같네요. 살짝 두근거렸어요.”
라리루라의 토스를 티르시가 받으며, 이 대화의 끝을 고했다.
나는 프랑의 머리를 손빗으로 빗으며 말했다.
“그럼 며칠 텀을 뒀다가 출발하자. 타타르니아 쪽에 내 편지도 가야 하겠다, 오기 전에 전서구도 1마리 공주님 앞으로 날려뒀거든.”
혹시 타타르니아에서 수틀리면 죽이고 묻어버릴 생각이면 귀찮잖아.
‘인맥은 이렇게 써야지.’
아무리 거리가 먼 나라 사이여도, 타국 왕족의 서한을 가진 사람이다.
부산물을 가지고 찾아온 놈을 보수가 아깝다고 죽여버리고, 그걸 규탄받아가며 세계수를 새롭게 기른다?
그랬다간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는 첫 걸음부터 오욕에 더럽혀진다. 그걸 알프헤임을 계승했다는 증거라고 내세우면 내가 엘프여도 타타르니아에는 학을 떼겠지.
보험으로는 들고 갈 만 하다.
다나는 얼굴을 쓸어내리고 싱긋 웃었다.
“야, 노르드. 우리도 따라갈 건데 괜찮지?”
“당연하지.”
예전처럼 무조건 감싸고 돌 필요는 없다. 나도 내 아내들도 몸 성하니 지키겠다고 마음 먹었고, 또 그럴 만한 자신감도 생겼으니까.
“대신 전원은 안 돼. 눈에 띄니까.”
“상관없다. 뭣 하면 내가 〈공간이동〉으로 데려오면 그만이니.”
“……저도 빨리 공간계 마법을 배운든가 해야 할 텐데요. 마나는 쭉쭉 느는데 〈강림〉 상태 때처럼 마법을 쓰는 건 요원하네요.”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상의하면서 얘기를 마쳤다.
키타이라고 불리우는 동방으로 향할 사람은 넷.
나, 베로니카, 다나, 네페르티티.
베로니카는 공간이동 담당에 다나는 혹시 모를 치료 담당이다.
내가 폼 잡으면 설득을 해내긴 했지만, 아직은 완벽하게 신뢰를 얻지 못한 거겠지. 트집을 잡을 일도 아니니만큼 그러려니 했다.
티르시는 내가 ‘명령’하면 거부 못할 것 같은지 자진 사퇴했고, 라리루라랑 프랑은 전투방식이나 체형 때문에 눈에 띄어서 동행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노르가 타타르니아까지 가면, 얼마 있다 올지는 아직 모르지?”
엘릭서 공예품을 인테리어에 맞춰서 장식해 둔 프랑이 문득 말했다.
“……확실히,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요~?”
마찬가지로 남겨진 처지인 라리루라가 그 말을 받았다.
몇 달 씩이나 걸리진 않아도, 일단 1달은 걸릴 것이다. 이동 시간만 해도 그랬다.
그리고, 그건 내 풍둔 아가리술에 당해서 큥큥 하고 있던 우리 아내들에게는 도저히 참기 힘든 일이었던 듯 싶었다.
─샤샥, 샤샥.
아내들은 암묵의 아이 컨택트를 딱 0.1초 정도 나눴다.
아마 그거면 충분했을 것이다.
“……노르. 괜찮지?”
프랑은 달뜬 기분을 주체 못한 것처럼 내 위에 달려들듯 올라탔다.
푸른 눈에 하트가 뿅뿅 넘쳐 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일까.
“노르가 너무 멋진 게 나쁜 거야.”
프랑은 내 턱을 붙잡고 애달픈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발정이라도 한 듯 뺨을 비비는 프랑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픽 하고 웃었다.
“물론 괜찮고 말고.”
오히려 싫을 도리가 있나.
일 나가기 전에 섹스 한 판.
반년 차 신혼 부부들에겐 평범한 일일 것이다.
***
아내들과 몇 시간 가량의 6P를 거치고, 나는 집 지하창고로 내려갔다.
‘먼 길 가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부터 챙겨야 할 것 아냐.’
손에 마나의 빛을 켜면서 창고의 문을 열었다. 성배를 탐색하던 갤러해드도 나처럼 숭고한 마음가짐은 아니었으리라.
청소가 잦아서 창고 안은 깨끗했다.
나는 그 안에서도 가장 엄중하게 보관된 상자의 봉인을 해제하고서, 안에 들어 있는 병들을 몰래 챙겼다. 작은 병으로 딱 2병밖에 없는 희소한 일품이었다.
1병은 냉장보관한 원액 그대로.
그리고 다른 1병은, 가이드였던 짐나르다 베임 씨에게 증류법을 배워서 술로 만든 물건.
그 병이란 다름 아닌 다나한테서 짜낸 모유와, 그 모유로 빚은 모유주(母乳酒)였다.
“오, 마이 프레셔스…….”
나는 기대감에 몸을 떨며 병을 석판에 넣었다.
나중에 몰래 마셔야지,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