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29화 (628/1,009)

현대 문물인 비행기도 그랬듯, 와이번을 타면서 즐거웠던 것도 꼴랑 반나절이었다.

첫째 날에 석판에서 꺼낸 야영 세트를 쫙 까는 내 머리를 지배한 것은 ‘이 지랄을 며칠 더 하면 지루해 뒤지겠군’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와이번을 타기로 한 건 좋은 생각이었다.

만약 말을 탔으면 황야의 몬스터나 도적들한테 시달렸을 것이었다. 조금 전에도 텐트를 설치할 때 몰려온 오랑캐 떼거리를 쫓아내고 온 참이다.

다행히 동방, 그러니까 키타이의 황야에 하늘을 나는 몬스터는 없었다.

마흐잔 왈, 우리의 보급능력도 있어서 말을 탈 때보다 2배는 빠를 거란 얘기였다.

석판에서 텐트를 꺼낼 때 입이 찢어지려 하던데, 이젠 이 새끼가 놀라면서 자지러져도 별로 감흥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타닥, 타닥.

일행이 잠든 밤, 모닥불을 배경으로 책을 읽던 나는 콧잔등의 안경을 밀어올렸다.

비서 코스프레를 하던 프랑을 따라하려는 건 아니고, 바이츠니아 살수가 드랍한 매직 아이템이다. 상인으로 위장하려고 구한 듯 글의 가독성을 높여주는 물건이었다.

나쁘지 않다. 독서에 있어 가독성은 중요하니까.

글을 읽는 데 있어서 가독성은 무시 못할 사항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학술지의 저자들은 글의 단락을 나누려는 시도가 부족한 나머지 읽는이의 가독성을 해치는 일이 잦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런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서책을 읽음에 있어서 독서의 편의성이라는 무시 못할 이점을 선사하는 이 안경은 객관적인 관점에서도 준수한──

“뭘 읽고 계십니까?”

“마법 책.”

나는 현대마법의 이론서를 넘기며 말했다.

룬 마법을 쓰면서 느낀 점이 좀 있어서 새로 산 책이었다.

‘읽기는 존나 좆 같지만.’

그래도 비싼 값은 했다.

룬 마법이 프로그래밍 툴이라면 현대의 마법은 매크로 쯤 될까.

룬을 알면 마법에도 박식해진다는 의미인데, 딱 보니까 이걸 정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 발상의 전환이다.

‘룬의 이해도를 높이면 사용 방식이 바뀐다.’

이해도와 조합 나름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화자에 따라서 뜻이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처럼, 같은 룬 문자도 여러 활용도로 사용할 수 있겠지.

룬 어에 기반한 현대 마법을 반대로 룬 마법에 응용하는 것이다.

‘마침 룬을 분석할 시간은 넘쳤고.’

나는 책에서 눈을 뗐다.

착륙 이후에 10분 정도 물통에다 고개를 박고 있던 투슬리스가 쿨쿨 잠들어 있었다. 그 녀석의 등딱지 비늘에는 룬 부적이 몇 개 붙어 있었다.

원래는 엘프들이 말에 붙이는 룬을 와이번 등에 붙인 것이었다.

“쟤 물을 존나 마시던데, 괜찮은 거 맞냐?”

“ᚱ(Raidō)와 ᚹ(Wunjo)의 부적은 체력과 속도를 올려주지만, 대신 탈수 증세가 조금 생기죠. 물을 충분히 마시고 쉬면 건강엔 문제 없습니다.”

마흐잔은 졸리지도 않는지 밤이 깊었는데도 두 눈을 말똥거리며 대답했다.

‘말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룬이랬던가.’

난 비행하며 남는 시간을 저 룬을 분석하는 데 투자했다. 어떻게? 뻔하지 뭐. 오딘의 눈으로 보며 이해도를 높인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깨달음이란 게 찾아오진 않겠지.

어차피 나도 모든 룬 문자를 다 깨우칠 생각은 없었다.

쓸모 있어 보이는 룬만 몇 개 더 골라서 파고들도록 하자. 나는 책을 넘기며 말했다.

“안 졸리냐?”

“노르드 님은 졸리지 않으십니까?”

“하룻밤 정도는 안 자도 돼. 불침번도 있고.”

나르메르-나일 때부터 우리 가족들의 불침번은 발퀴리에들이 맡았다. 피로를 모르고 충직한 살인 메이드 로봇들이라니, 최고의 경비병 아닌가.

“그렇군요. 하긴, 서방국가에 대해 잘 모르는 제 눈에도 노르드 님께서는 대단한 분으로 보입니다. 가지고 계신 보물이나 솜씨만 봐도요.”

“마음이 심란한가 보군.”

핵심을 푹 찌르자, 마흐잔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다가 픽 웃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직 긴장을 풀긴 멀었을 텐데 뭐라도 해낸 듯한 기분도 드는군요. 잘못된 선택을 한, 이해 못할 동료들 생각도 나고요. 저를 죽이려 들기 전까지는 많이 친해졌다고 느꼈는데.”

“뭐 어때. 동물들은 콩 한 쪽 갖고도 싸우는데.”

“저희는 짐승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콩 대신 다른 걸 두고 싸우지.”

그건 좆간이나 좆프나 다를 게 없을 것이었다.

나는 책을 덮었다.

운치 좋은 밤이라기엔 자연 환경이 살짝 곱창난 곳에, 사내 새끼랑 대화하는 취미도 없는 나였다. 하지만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도 곤란한 건 사실이다.

“심심하네.”

그래서 책을 가방에 던져넣은 나는 친목이라도 다지고자 입을 열었다.

“야, 뭐 재밌는 얘기 없냐?”

“……예?”

뭐, 새꺄. 불침번 처음 서 봐?

마흐잔은 땀을 삐질대며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다 쥐어짜며 개꿀잼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다. 성격 그대로 재미없는 얘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그럭저럭 들어줄 만 했다.

그렇게 밤마다 가벼운 친목을 다지며 3일 내내 이동했다.

그리고 4일째가 되는 오전 3시 쯤, 우리는 바이츠니아의 국경지대를 발견했다.

“고도를 낮추십시오! 발견되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마흐잔이 말한대로 일단 착지했다.

높은 고도를 날아가는 검은 와이번.

잘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만약 발견되면 귀찮을 것 같기는 했다.

“거리 상으로는 내일 새벽부터 걸으면 아침 쯤 도착하겠군요.”

“쪽잠 좀 자고 이동하면 딱 맞겠네.”

그렇게 또 야영을 차리고, 마흐잔이 잠든 틈에 베로니카가 땅에 마법진을 그렸다. 투슬리스는 요 며칠 동안 지 능력보다 빠르게 날아서 만족한 듯 했다.

“니가 안 돌아가면 샤틀루카가 울 테니까, 어디 딴 곳으로 빠질 생각 말고 돌아가.”

똑똑한 와이번은 잠깐 날개로 기지개를 펴고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등에 발퀴리에를 태워 보냈으니까 축사에 도로 돌려보내놓을 것이었다. 진짜 온갖 심부름에 쓰기 좋은 메이드 로봇들 아니냐? 월급이라도 챙겨줘야겠네.

“밤새 돌아갔습니까? 그 녀석 아니면 이렇게나 쉽게 황야를 건너진 못했을 텐데, 인사도 제대로 못 해 줬군요.”

마흐잔은 투슬리스가 자기가 잠든 사이에 떠난 것을 아쉬워했지만, 애석한 기분을 떨치고 우리를 국경지대의 성까지 데려갔다.

조금 많은 뇌물, 약간의 인맥.

그걸로 잠깐 사이에 우리 신분증을 마련한 마흐잔은 우리를 띵호와 느낌 나는 성으로 초대하듯이 정문으로 입성했다.

“이곳이 안도성(眼都城)입니다. 국경을 감시하는 성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죠.”

자기 고향도 아니니만큼 간략한 설명이었다.

나는 시내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내가 온통 새빨갛군.”

“빨강을 좋아하는가 보네.”

건축물에 빨간색을 애용한 거리가 인상 깊었다.

다나는 잠깐 둘러보고서 낯선 냄새가 어색한 듯 인상을 썼다. 가끔 문화권이 다른 곳에서는 음식 냄새 차이가 강렬할 때가 있는데, 여기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설마 바로 떠날 건 아니지?”

“말을 구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 쯤 머물 테니, 일단 객잔으로 가시죠.”

마법으로 현지 풍토에 맞는 옷을 걸친 우리를─마흐잔도 자기 옷을 따로 갖고 있었다─ 데려가며 마흐잔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앞으로는 되도록 브리타니아 말은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알아. 눈에 띄니까.”

신분 상으로는 북방민족인데 언어는 브리타니아 말을 쓴다?

여기 사람들이 브리타니아 말을 못 알아들어도 정작 우리가 북방민족의 말을 모르면 트집을 잡힐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들과 네페르티티는 입을 꾹 닫고 되도록 현지에 익숙한 척 굴었다.

물론 그렇게 완벽한 연기는 아니었지만, 그게 또 ‘바이츠니아에 익숙한 척 하는 외지인’ 느낌이라서 이상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마흐잔은 목소리를 낮춘 채로 말했다.

“최고급 객잔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비는 제가 책임질 테니 개의치 마시고.”

“최고급은 안 돼. 그런 여관에는 그만큼 잘난 사람이 모이니까.”

출장 경험이 많은 다나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나도 거기에 동감이었다.

이세계에서 잘났다는 건 돈과 권력만이 아니라, 싸움이나 마법 실력도 의미했다. 현지의 권력자나 눈썰미 좋은 놈들은 피하는 게 나았다.

“드, 듣고 보면 그렇군요. 그러면 적당한 객잔에 안내하겠습니다.”

자기도 귀를 마법으로 가린 마흐잔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니까 이 새끼도 여기서 비싼 여관에 묵어보진 않은 듯 했다. 우리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해 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도착한 객잔은 옛날 홍콩 영화의 세트장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거기까지 가는 길에도 시선이 느껴졌다.

우릴 의심하거나 수상하게 본다기보단, 거리를 걷는 서양인들을 그냥 한 번 슥─ 쳐다보고 가는 그 느낌이랑 비슷했다.

나만 ‘쟤는 노랗네!’ 하는 눈깔로 쳐다보길래 좀 꼴받긴 했다.

객잔에서 꼬마가 손님맞이를 하러 나왔다.

『어서오세요! 식사신가요? 술이신가요? 아니면 숙박?』

세상에, 리얼 점소이잖아. 나는 감동마저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전부 다.』

『와! 제일 좋은 손님이시네요! 어서들 오세요!』

점소이는 살갑게 테이블을 내주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은 나는 메뉴를 찾으려다가 이 문화권에는 그런 게 없다는 걸 눈치챘다. 어쩌면 이 객잔만의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없는 건 없는 거였다.

『……저기 테이블에서 먹는 찐빵을 사람수만큼, 그리고 여기서 제일 비싼 고기 요리랑, 제일 많이 팔리는 요리를 하나씩 줘. 술도 1병 주고.』

『넵! 금방 내올게요!』

점소이한테 이것저것 물어볼까도 생각했는데, 꼭 지금일 필요는 없으니까 생략했다.

마흐잔은 현지인처럼 쓴 삿갓을 벗었다.

『하하. 점소이가 싹싹하니 참 보기 좋습니다』

─무장한 이들이 많군요. 무슨 일이 있나봅니다.

겉으로 말하는 것과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전혀 달랐다.

‘뭔데 시발. 전음이야?’

나는 눈을 반개했다가 그게 2개의 룬을 응용한 기술이라는 걸 눈치챘다.

ᚨ(Ansuz)의 룬으로 말을 지어내면서 ᚱ(Raidō)의 룬으로 바람에 태워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공중에 ᚨ(Ansuz)의 룬을 그렸다.

─북벌군은 아닐 테고, 아마 징집당한 병사들을 대신해서 부른 놈들이겠지.

…움찔!

텔레파시를 처음 듣는 마흐잔은 이젠 놀랍지도 않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약속대로 요리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위병의 빈자리를 메꾸려고요? 별로 질이 좋은 이들은 아닐 듯 한데요.

─흠.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알겠구나.

─……기분 나빠.

『……하하하! 피곤하니 술이 그립군요. 고향에 자주 찾아오는 행상인이 팔던 마유주가 그렇게 맛이 괜찮았는데 말입니다.』

베로니카랑 네페르티티도 룬 마법 전음(傳音)─텔레파시─에 끼어들었다. 마흐잔은 놀란 걸 숨기려는 듯 아무 말이나 주워섬가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을 마셨다.

새끼, 연기 존나 못하네.

『식사 나왔습니다!』

점소이는 능숙하게 여러 요리를 옮겨왔다. 우리 모두의 앞에 고기와 빵이 놓이고, 꽤 넓은 그릇에 담긴 고기 튀김이 나왔다.

『자, 이걸로 끝이에요! 술도 여기 있구요!』

점소이는 끝으로 튀김이 담긴 접시를 가져왔다.

‘탕수육인가? 그립네.’

아내들이 젓가락질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찐빵을 시키길 잘 했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 영롱한 자태를 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진짜 탕수육이랑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고기를 튀긴 거니까 맛이 없을 수가……

“……뎃?”

──아니, 이게 정말로 탕수육인가?

나는 튀김옷이 덜 발라져 있는 부분에서 있어선 안 되는 ‘동그란 눈’을 발견하고, 요리를 세팅하는 점소이에게 급하게 손짓했다.

『꼬맹아. 이거 뭐냐?』

『우리 객잔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음식이요! 술 안주죠!』

『……뭐로 만들었지?』

점소이는 아이답게 해맑은 미소를 띄웠다.

『굼벵이요! 튀김옷을 입혀서 살짝 튀겼어요!』

─쿵!

점소이가 내려놓은 그릇에서 굼벵이 튀김 1개가 쏟아졌다.

겉바속촉으로 익은 장수풍뎅이 유충 같은 놈은 탈출을 감행한 끝에 네페르티티 앞으로 굴러가선 멈추었다.

동그란 머리 부분과 짧은 손발이 귀염뽀짝하군.

“………………”

네페르티티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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